|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5∙18 광주 민주화 운동(五·一八光州民主化運動) 또는 광주민중항쟁(光州民中抗爭)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 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되어, 조속한 민주주의정부 수립, 전두환(全斗煥) 보안사령관과 12·12 군사 반란를 주도한 신군부세력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민주화운동이다[1].
당시 공수부대 등을 계엄군으로 동원한 신군부의 유혈진압으로 피살자 191명, 부상자는 852명에 달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광주를 비롯한 호남 전역에서 전두환에 대한 반감이 극도로 높아졌으며, 전두환이 창당한 민주정의당은 물론이고, 현재까지 민주정의당과 연관성이 있는 한나라당에 대한 반감도 높은 편이다. 또, 이로 인해 대체로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영남지역과의 갈등이 격화되어 지역 감정이 크게 확산되기도 하였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1980년대 이후 반독재 운동의 뿌리가 되었다. 일부 극우 보수 세력 등에서는 북한군의 개입설을 주장하나 확실한 증거가 없다.
[편집] 명칭
‘5∙18 광주 자유 민주화 운동’에 대한 명칭은 사건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80년 5월 21일 계엄사령관 이희성이 "광주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나고 있다"고 군부 발표에서 언급한 것이 처음으로, 이후 언론에 의하여 ‘광주소요사태’, 또는 ‘광주사태’ 또는 ‘폭동’ 등으로 보도되면서 일반화되었다.[2][3][4] 이는 광주 자유 민주화항쟁을 "불순분자들이 체제 전복을 기도한 사태"로 왜곡한 신군부의 거짓 주장에 근거한 호칭으로, 제5공화국 기간 내내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당시 호칭에 익숙한 노년층이나 신군부를 지지하는 일부 우파 인사들이 사용하고 있다. 현재의 명칭인 ‘5∙18 광주 자유 민주화 운동’은 1988년 제6공화국이 등장하면서 민주화합추진위원회가 그렇게 불러 처음 나왔고, 이후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의 공식 언급에서도 이 명칭이 사용됨으로써 공식 명칭화 되었다. 한편, 신군부와의 투쟁을 기층 민중이 주도했다는 점을 강조한 ‘광주민중항쟁’ 또는 ‘광주 항쟁’이란 명칭도 지역 사회와 5월 단체 등을 중심으로 1980년대부터 사용되어 왔다.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딴 ‘5.18’도 널리 통용되는 명칭이다. 기타 ‘광주 의거’, ’광주 자유 민주 의거’, ’광주 민주 의거’, ’광주 자유 의거’, ‘광주 학살’, ‘5월 항쟁’ 등의 명칭도 존재한다.
[편집] 발생 배경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이후 유신 체제는 막을 내렸으나, 그해 12월 12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 본부장 전두환(국군 보안사령관)이 계엄사령관 정승화(육군 참모총장)를 체포해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국민들의 민주 정권 수립 요구는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편집] 전개
[편집] 전체 개요
1980년 5월 15일에는 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학생과 시민 10만여 명이 모여 서울역에서 시위를 벌였다.
5월 17일 전두환의 압력으로 개최된 비상국무회의는 비상계엄령을 내리도록 의결했다.
자정 이후 서울 이외의 주요 도시로 비상계엄령이 확대되었고 광주에 공수부대 병력이 도착한다.
비상계엄의 소식을 들은 대학생 100여 명이 전남대 교문 앞에 모여 시위를 했다. 조선대학교 및 전남대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7 공수여단의 33대대와 35대대는 ‘화려한 휴가’라는 암호명의 작전에 따라 주둔지 경비를 위해 일부 병력을 대학 구내에 남겨 놓고 금남로로 이동하여 계엄 반대를 정당하게 요구하는 시위대에게 무차별 폭력을 휘둘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이에 학생들은 반발하며 광주 도심으로 옮겨가 시위를 계속하였으나 계엄군이 곤봉과 대검으로 학생과 일반 시민을 가리지 않고 살상했다. 계엄군의 폭력에 분노한 광주의 일반 시민까지 학생의 자유 민주화 요구 시위에 합류하기 시작했고, 20일에는 택시 운전사들의 차량 시위가 이어지며 시위대의 규모가 20만 명 이상에 이르렀다.
수세에 몰린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20일 밤 광주역, 21일 낮 당시 전남도청 앞)를 시작했으나, 시위대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광주 시민들의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화 요구 시위를, 언론이 신군부의 거짓 주장에 영합해 ‘불순 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한 데 격분한 자유 민주화 시위대는 광주MBC 방송국에 불을 지르고, 광주 시청을 점거했다. 또한 21일에는 예비군 부대의 무기고를 열어 총을 들고 무장하면서 계엄군에 대항한 자유 민주화 시민군이 결성되었다. 자유 민주화 시민군은 전남도청 건물 안 계엄군 병력과 교전을 한 후 계엄군 병력이 광주시 외곽으로 퇴각한 후에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했다. 계엄군에 의해 외부와의 통신과 교통이 차단된 상황에서 이들은 계속해서 계엄의 해제와 자유 민주화 요구 인사 석방을 요구하면서 자유 민주화 시민군 대표를 조직하여 계엄군과 협상에 나서는 한편, 자유 민주화 시민군 자체적으로 도시의 치안을 담당했다. 무정부 상태였던 이 기간 동안 광주 시민은 자발적으로 질서를 지켜 나갔으며 대치 상태는 26일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일부 지식인은 광주 자유 민주화 항쟁 당시 광주를 시민의 자치가 실시된 파리 코뮌 당시의 파리에 비유하기도 한다.
27일 새벽 군인 25,000명을 투입한 계엄군의 진압 작전이 시작되었다. 광주 시내로 들어온 계엄군은 27일 새벽, 끝까지 남아 항전하던 시민군을 대부분 살해하고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하면서 진압 작전을 마무리했다.
[편집] 날짜별 상세 일지
- 5월 17일 토요일
-
- 21시 40분 - 비상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 의결
- 23시 00분 - 민주인사, 복적생, 학생운동 지도부 등 예비 검속 실시
- 24시 00분 -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광주 시내 각 대학에 계엄군 진주(7 공수여단 33대대, 35대대 등). 전주 전북대에 주둔한 계엄군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까지도 잡아들여 폭행. 이 과정에서 대학생 사망자가 1명 발생했다.
- 5월 18일 일요일
-
- 09시 40분 - 계엄군에 의해 전남대생 50여 명이 교문 앞에서 등교 저지 당함.
- 10시 00분 - 전남대학교 주둔 계엄군을 상대로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계엄 해제하라", "휴교령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 시위를 벌임
- 10시 15분 - 계엄군(공수부대원들)이 곤봉을 휘두르며 항위 시위 진압.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짐.(첫 번째 부상자 발생)
- 10시 20분 - 학생들이 금남로로 이동
- 15시 40분 - 금남로 유동3거리에서 계엄군이 시위대를 강경 진압. 광주 공용터미널에서 청각/언어 장애인인 김경철 씨 계엄군에게 전신 구타당함.
- 19시 02분 - 계엄사령부, 통금 시간을 저녁 9시로 당긴다고 발표.
- 5월 19일 월요일
-
- 03시 00분 - 11 공수여단이 증원군으로 광주 도착(김경철 씨 병원에서 사망 - 최초의 희생자).
- 09시 30분 - 시민들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임동, 누문동 파출소 방화
- 10시 00분 - 시민들 수가 점차 불어나면서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투석전 전개. 11공수여단 약 천여 명이 강경 진압을 강행하였고, 3~4명이 한 조가 되어 골목마다 누비며 상대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폭행.
- 14시 40분 - 조선대학교로 철수했던 공수부대가 다시 투입되어 무리한 진압 작전 전개
- 15시 00분 - 시내 기관장 및 유지들, 회의를 갖고 시위 진압을 완화해 달라고 계엄사령부에 건의
- 16시 30분 - 계림 파출소 근처에서 조대부고 고등학생 김영찬이 총격 부상을 당함(최초의 실탄 사격)
- 20시 00분 - 시민들이 시위대 합류. 수만 명이 "전두환 타도"를 외침.
- 5월 20일 화요일
-
- 08시 00분 - 광주 시내 고등학교 휴교 조치 발령.
- 10시 20분 - 가톨릭 센터 앞에서 남녀 30여 명이 속옷만 입은 채 마구잡이 구타 당함. 공수부대와 시민 사이에 공방전 계속.
- 18시 40분 - 택시 및 버스 200여대가 금남로에서 도청을 향해 차량 경적 시위.
- 20시 10분 - 시위대, 도청으로 이동. 금남로, 충장로 등에서 공수부대 및 경찰과 대치
- 21시 05분 - 노동청 쪽에서 시위대 버스가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하여 경찰 4명 사망
- 21시 50분 - 광주민주화운동을 왜곡 보도한 광주MBC 방화
- 23시 00분 -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 발포. 시민 2명 사망
- 5월 21일 수요일
-
- 00시 35분 : 노동청 방면에서 군중 2만여 명이 계엄군과 공방전 전개
- 02시 18분 : 시외전화 두절
- 04시 00분 : 시민들이 광주역 광장에서 사망한 시체 2구를 리어카에 싣고 금남로에 등장
- 04시 30분 : 광주KBS건물 방화
- 08시 00분 : 시위대, 광주공업단지 입구에서 20사단 병력과 충돌
- 10시 15분 : 도청 앞, 실탄을 지급받은 공수부대원을 맨 앞으로 배치함. 당시 광주 시내에 출동한 공수부대에는 실탄이 많지 않았음.
- 10시 19분 : 광주세무서건물 전소
- 11시 10분 : 대형 헬기가 도청광장에 도착.
- 12시 59분 :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몰고 온 장갑차 1대가 도청광장으로 기습 진출
- 13시 00분 :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가 시작됨.
- 13시 20분 : 청년들이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집중사격을 받고 계속 쓰러짐
- 14시 15분 : 도지사, 경찰 헬기에서 시위 해산 종용하는 설득 방송
- 14시 35분 : 시민들이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군용 트럭, 장갑차 수십대 획득
- 14시 40분 : 시민들이 지원동의 탄약고에서 TNT 입수
- 15시 48분 : 공수부대원들이 주요 빌딩 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
- 16시 00분 : 화순, 나주 지역에서 무기 획득한 시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시가전 전개
- 16시 43분 : 학생들, 전남대병원 옥상에 M2 중기관총 2대 설치
- 17시 30분 : 공수부대, 도청에서 조선대학교와 광주교도소로 철수
- 5월 22일 목요일
-
- 09시 00분 : 도청광장과 금남로에 시민들 집결
- 10시 30분 : 군용 헬기 공중 선회하며 "폭도들에게 알린다"는 내용의 전단 살포
- 11시 25분 : 적십자병원 헌혈차와 시위대 지프가 돌아다니며 헌혈 호소
- 12시 00분 : 도청 옥상의 태극기가 검은 리본과 함께 반기 게양
- 13시 30분 : 시민수습위원회 대표 8명이 상무대 계엄 분소 방문, 7개항의 수습안 전달
- 15시 58분 : 시체 18구를 도청광장에 안치한 채 시민 대회 개최
- 17시 18분 : 수습위 대표, 상무대 방문 결과 보고
- 17시 40분 : 도청광장에 시체 23구 도착
- 19시 00분 : 동양방송 라디오(현 KBS 제3라디오) 뉴스 프로그램인 뉴스 기상도에서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중간조사 결과 뉴스를 보도하였다.
- 21시 30분 : 박충훈 신임 국무총리, "광주는 치안 부재 상태"라고 방송
- 5월 23일 금요일
-
- 08시 00분 : 학생들, 시민들에게 청소 협조 호소
- 10시 00분 : 시민 5만여 명이 도청광장에서 집회
- 10시 15분 : 학생수습위 자체 특공대 조직하여 총기 회수 작업 시작
- 11시 45분 : 도청과 광장 주변에 사망자 명단과 인상착의 벽보 게시
- 13시 00분 : 지원동 주남 마을 앞에서 공수부대가 소형버스에 총격, 17명 사망
- 15시 00분 : 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계엄사의 '경고문' 전단이 시내 전역에 살포
- 19시 40분 : 최초 석방자 33명 도청광장에 도착
- 5월 24일 토요일
-
- 13시 20분 : 공수부대, 원제 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
- 14시 20분 : 송암동에서 공수부대와 전투교육사령부 부대 사이에 오인 총격전 발생
- 14시 50분 :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 5월 25일 일요일
- 5월 26일 월요일
-
- 05시 20분 : 계엄군, 화정동 쪽에서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
- 08시 00분 : 시민수습대책위원들, 계엄군의 시내 진입 저지를 위해 농성동에서 죽음의 행진 감행
- 10시 00분 :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 14시 00분 : 학생수습위원회, 광주시장에게 생필품 보급 등 8개항 요구
- 15시 00분 :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 17시 00분 : 학생수습위원회 대변인 외신기자들에게 광주 상황 브리핑
- 19시 10분 : 시민군, "계엄군이 오늘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공식 발표 어린 학생과 여성들을 귀가 조치
- 24시 00분 : 시내전화 일제히 두절
- 5월 27일 화요일
-
- 03시 00분 :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여성의 애절한 시내 가두방송
- 04시 00분 : 도청 주변 완전 포위, 금남로에서 시가전 전개
- 04시 10분 : 계엄군 특공대, 도청 안에 있던 시민군에게 사격
- 05시 10분 : 계엄군, 도청을 비롯한 시내 전역 장악하고 진압 작전 종료
- 06시 00분 : 계엄군,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무선 방송
- 07시 00분 : 공수부대, 20사단 병력에 도청 인계
- 08시 50분 : 시내전화 통화 재개
[편집] 광주 오적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당시 사건 발생에 중대한 책임이 있다고 거론되는 인물 5명은 광주 5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다음 2명을 포함하여 광주 7적이라는 명칭도 있다.
[편집] 피해
광주광역시가 최근 29주년을 맞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목숨을 잃거나 다친 사람을 집계한 결과 사망자가 155명, 행방불명자가 76명, 부상 뒤 숨진 사람이 101명, 부상자가 2277명, 아직 연고가 확인되지 않아 묘비명도 없이 묻혀 있는 희생자 5명 등 총 5189명으로 확인됬다 [5]
이 부분은 한국근현대사에 관한 부분 토막글입니다. 서로 지식을 모아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
[편집] 사건 이후의 영향과 평가
광주 민주화 운동은 끝내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당했지만, 1980년대 이후의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1987년 6월 민주항쟁 등). 미국이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광주 자유 민주화운동 탄압을 알면서도 묵인한 사실이 알려짐으로써 미국을 한국전쟁때 같이 싸운 혈맹관계로 이해하던 종래의 대미관과 한미관계에 대한 인식도 재고되었다.
전두환의 군사독재정권은 광주 자유 민주화항쟁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간첩과 폭도들의 반란으로 조작하였으나, 1988년 5공청문회를 거치고 제6공화국이 출범된 후인 1995년 12월 21일 국회에서 광주 자유 민주화항쟁을 광주 자유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하여, 계엄군의 광주 자유 민주화운동 진압 과정에서 죽거나 부상 당한 광주 자유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및 보상을 위한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1995.12.21)과 광주 자유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1997.12.17)이 제정[6]되면서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비(非)자유 민주성과 폭력에 맞서 싸운 자유 민주화운동으로 다시 평가받았다. 또한 계엄군들이 광주민중항쟁을 진압하면서, 광주시민들을 학살한 광주학살 책임자들은 서훈이 취소되었으며 그 자격도 박탈되었다. 또한 이 일의 핵심 관련자인 전두환, 노태우는 '반란수괴' 등의 혐의로 대법원으로부터 징역형과 2천억이 넘는 추징금을 선고받았다. [6]
2007년 8월 박근혜는 영화 화려한 휴가를 관람하였고 5.18은 민주화 운동이라고 평가하였다.[7]
[편집] 일부 우익 단체의 주장
- 북조선군 개입설
- 조선인민군(북조선군) 특수부대 출신자 출신인 자유북한군인연합 등은 이 일에 북한군 특수부대 1개 대대가 투입됐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2006년 12월 20일 오전 서울 정동 세실세스토랑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5.18광주사태는 (북한의)자유민주주의체제에 대한 백색테러이자 김정일 정권의 대남전략을 증명시켜 주는 현장”이라고 말했다. 자유북한군인연합 임천용 대표는 “광주사태의 발단과 시발점은 민주화봉기였다고 인정하지만 수많은 인명이 무참히 살상되고 끔찍하게 도륙당한 유혈적인 사건은 김정일 정권에 의해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테러행위”라고 밝히며 의혹을 제기하였다. [8] 이후 2008년에도 인민군 출신 탈북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당시 광주에 북조선 특수부대가 개입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9][10][11][12][13]
- 2008년 6월에는 뉴라이트 연합의 서양사 전공자인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교수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광주사태"로 부르며, 북조선군 개입설을 다시 언급했다.[14]
- 대한민국의 지만원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광주사태"로 부르는 한편, 북조선군 개입설을 또 한번 주장하였다.[15]
-
- 비판
- 보수단체 일각에서는 시민군의 무장 그 자체만을 근거로 5.18 민주화 운동을 북한군의 개입에 따른 폭동사태라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으나, 북한군이 개입했음을 명확하게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전무하기 때문에 신빙성은 없다. 특히, 당시 계엄군이 무고한 시민들까지 닥치는대로 사살하는 것을 똑똑히 목격하고 분노한 광주시민들이 경찰서 등의 무기고를 습격하는 것은 굳이 북한군이 개입하지 않고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점을 간과했기 때문에 보수단체의 주장에는 허점이 있다는 반론도 있다.
- 특히 광주에서 40여명의 북한군이 사상했으며, 이들을 '민주화투사'로 둔갑시켰다는 우파들의 주장은 거짓이라는 반박을 받기도 했다. 왜냐하면 당시 계엄군에 의해 사살된 민주화 열사들의 신분은 모두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기자회견 내용을 계기로 '전두환 군부의 명예'가 회복될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 것도 이 기자회견의 정치적 배경을 의심하는 입장도 있다.[13] 이러한 주장 자체가 상식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주장이라는 반박도 대두되었다. [16]
- 게다가 당시 광주는 전라남도 산하의 일개 시로서 서울에서 남쪽으로 무려 300km나 떨어진 소도시였을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그다지 큰 가치가 없는 지역이었다. 때문에 북한측에서 광주에 개입한다고 해서 별다른 이익을 얻거나 대한민국 정부에 커다란 타격을 줄만한 상황이 아니었으며, 이전 군사분계선 가까운 지역에 출몰한 무장공비나 청와대습격사건등 훨씬 적은 숫자의 병력도 주민신고에 의해 발각되거나 동선이 노출된 케이스를 생각할 때, 해안가도 아닌 후방 내륙도시에 상당한 수의 병력을 별 노출없이 침투시켰다는 사실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특히 광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전북 군산에 주한 미군 공군기지가 있는 상황에서 북한군이 정말 개입했다면 주한미군 사령부나 미국 정부가 이를 수수방관했을리가 없었다는 점에서 북한군 개입설은 더더욱 설득력이 떨어진다.(또한 군산에 비하여 훨씬 적은 규모이나 광주 소재의 공군기지에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 2008년 5월 5.18 관련단체들은 전사모, 지만원, 역사학도 등에 대한 법적 대응절차를 거쳐[17]고소한 바 있다.[18][19] 기타 시스템클럽의 논객도 이와 유사한 주장을 하고 있다.[20]
- 2009년 1월 5.18 왜곡사례로 전사모, 지만원, 역사학도 등의 주장이 지목되고 있다.[21]
- 비판
[편집] 관련 판례
- 전·노 두 전직 대통령 법적심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95년 말 12·12 군사 반란 및 5·18 내란혐의 등으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등이 처벌된 일이 있었다. 이는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역사바로세우기' 일환으로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검찰에 특별수사부가 설치되고, 국회에서 5·18특별법이 제정되어 이들의 처벌을 위한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당시 대법원은 두 전 대통령 및 다른 피의자들이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판결하였다. 이에 따라 전두환은 무기징역에 추징금 2205억원, 노태우는 징역 17년 추징금 2628억원을 선고 받았다. 이후 징역형은 사면되었으나, 추징금은 현재까지 납부하고 있다.[22]
또한 광주 민주화 운동의 관련자를 숨겨 준 천주교 신부에 대해 정당행위를 부정, 범인은닉죄로 처벌한 판례(1983년)가 있다. 이회창 대법관이 참여한 재판이며, 대한민국의 대표적 인권변호사인 황인철 변호사 등이 변호한 사건이 있다.[2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