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철 목사는 한국을 대표하는 순교자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는 1930년대 이후 한국을 대표하는 설교자이기도 했다. 또 그는 진해 웅천의 개통학교, 정주의 오산학교,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상과를 거쳐 평양신학교에서 수학한 엘리트 목사였다. 그는 학식과 인품과 예모(禮貌)를 겸비한 유망한 목회자로 존경을 받았다. 그런데 그가 세계의 평화를 말한 평화주의자, 혹은 평화주창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 실제로 그는 일제의 군사적 팽창을 경계했고,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전쟁 정책을 반대했다. 그는 평화의 왕국을 말하면서, 이 왕국 건설은 세계의 신자들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주장했다. 이 점을 보여주는 중요한 흔적이 1933년 12월 25일 마산 문창교회에서 행한 “聖誕節을 當하여 世界의 信者에게 격(檄)을 전하노라”라는 제목의 설교였다. 누가복음 2장 14절에 기초한 이 설교문은 1933년 12월에 발간된 <복음과 종교교육> 3권 12호(통권 31호)에 게재되었다. 한편의 설교에 근거하여 주기철 목사의 평화론을 말한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의 설교문을 보면 그것이 단회적인 평화에 대한 설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한편의 설교문에도 전쟁과 평화, 그리스도 왕국에 대한 내면의 깊은 성찰을 읽을 수 있고, 그는 이 확신 때문에 위험천만하게도 1933년 성탄절에 평화를 설교하고 이를 총독부가 감찰하는 정기간행물에 게재한 것이다. 그는 전쟁 정책의 이념적 근간이 되는 신사참배가 공식적으로 제기되기 이전인 1931년 경남노회에서 신사참배 거부 안을 앞질러 제기한 일이 있는데, 이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주기철 목사가 1933년에 평화를 말했다는 사실 자체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고, 이는 평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 없이는 불가능했다. 당시는 일제의 군국주의가 크게 고무되던 시기였고 평화를 말한다는 것은 일종의 반체제운동으로 간주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 일본의 정세는 급변했다. 일본은 1931년 9월 18일 남만주 봉천 인근의 류탸오후(柳條構) 철도를 폭파하고 이를 구실로 만주침략을 감행했다. 이른바 만주 사변이었다. 곧 전면적인 중일전쟁으로, 그리고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어 전시체제로 돌입했다. 이때로부터 15년 전쟁이 시작된다. 군국주의자들은 1932년 이른바 5.15 사건을 일으켜 아누카이 쓰요시(犬養毅, 1855-1932) 수상을 살해하고 군부가 권력을 장악했다. 이들은 천황 중심의 황도주의 이념으로 신사참배 정책을 전면에 등장시켰다. 신사참배 요구는 전쟁 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이념적 토대였다. 바로 이런 현실에서 평화를 말한다는 것은 불령선인(不逞鮮人)임을 자인하는 일이었다. 바로 이런 시기에 주기철 목사는 위 제목의 설교에서 평화를 설교한 것이다. 그 누구도 평화를 말하지 못할 그때에.
그렇다면 주기철의 평화론은 어떤 것인가?
우선, 주기철은 예수가 평화의 왕으로 임하셨다고 말하면서 예수가 가지고 온 평화의 왕국이 곧 ‘그리스도의 왕국’(regnum Christi)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왕국’은 본질적으로 평화의 왕국이며 그 중심에는 평화의 왕 그리스도가 계시며, 그 왕국의 성격을 이사야 11장 6-9절에서 찾고 있다. 즉, 그리스도가 궁극적으로 이 세상에 평화를 이루시는 분이며, 이 평화는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시작되어 재림으로 완성된다. 이 평화의 왕국이 세상의 왕국을 정복하고 합병하여 마침내 이사야 11:6-9절에 나오는 평화의 왕국을 성취하게 된다.
둘째, 주기철은 평화가 인류 보편적 가치이며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평화의 왕국은 개 국가의 이해를 초월한다고 하면서, 민족주의 혹은 국가 우선주의를 비판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국가와 국가 사이에는 아직도 나를 위하여 남을 죽이는 사탄의 법칙을 지키고 있습니다. 국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 어떠한 잔인하고 살벌한 부도덕한 일을 할지라도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고 있습니다. 국가를 위하여서는 예수도 뒤에 두고 성경도 뒤로 두자는 것이 현대 신자의 태도입니다.” 자기 민족이나 국가를 최고로 여기는 민족주의나 국가 우선주의를 그리스도왕국의 실현을 방해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지상의 제도적인 교회를 그리스도왕국과 동일시했던 교황제도를 비판했고, 17세기 청교도들은 왕권신수설과 국가의 교회 지배가 그리스도왕국의 실현을 방해한다고 보았다면, 주기철은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성전(聖戰)’이라는 이름으로 타국을 침략하는 대일본제국의 군국주의가 평화의 왕국 실현을 방해한다고 본 것이다.
셋째, 주기철 목사는 제국주의가 평화의 왕국을 방해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마저도 이런 이데올로기에 빠져 “하나님의 자녀 된 형제자매를 죽었다”고 하면서, 이것은 “국가라는 우상 앞에서 충성일지는 모르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얼마나 큰 반역인가”라고 묻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영국의 인도 지배와 미국의 군비 확장에 관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언급하지만 내면으로는 일제의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결국, 주기철 목사는 민족주의 혹은 제국주의 팽창이 전쟁의 원인임을 지적하고 있다.
네째, 주기철 목사는 민족과 국가를 초월한 그리스도인들의 결집을 주창한다. 그는 “예수의 피로 한 혈맥(血脈)을 이룬 세계의 형제자매는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여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라고 호소한다. 또, “세계의 기독교 신자들은 대동단결하여 예수의 기치(旗幟) 아래 모여 이 세상의 왕국 사탄의 왕국을 향하여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한다. 칸트는 인간의 이기적인 동기가 전쟁의 원인이라며 이를 억제할 수 있는 국제적인 기구를 제안했지만, 주기철 목사는 “공산주의자도 국경이 없는데 하물며 기독교 신자에게랴!”라고 하면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대동단결을 통해 평화를 이루자고 호소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평화의 주가 세상에 탄강(誕降)하신 날을 당하여 평화의 왕국을 대망하는 세계의 기독교 신자들에게 이 격(檄)을 전하노라.”라고 설교를 맺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