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롭게, 서로를 인정하며 살수만 있다면…몽골 여행기 2일 차
한 나라를 여행하면서 배울 수 있는 여러 유익 중 하나는 그 나라의 역사다. ‘몽골’은 ‘용감한’이라는 뜻을 가진 부족 이름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13세기 칭기스 칸이 제국을 세우면서부터 몽골은 세계사적인 큰 획을 그었다. 몽골 이전에는 흉노-선비-유연-돌궐-위구르-거란이 차례대로 이 지역을 지배했다.
몽골 인구는 현재 350만명 정도라고 한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는 서울보다 7.7배 큰데 160만 명 정도가 산다. 나머지 190만이 한반도에 7.4배 큰 몽골 전역에 흩어져 산다. 몽골 정부는 태어나는 몽골인에게 0.07헥타아르(가이드의 주장)의 땅을 무상으로 제공한다고 한다. 지하 자원도 세계 7위에 해당할 정도로, 석유를 제외하고 땅 어디를 파도 각종 광석이 쏟아져 나온다고 한다. 그런데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유는 부정부패 때문이고, 선거철이 되면 정부는 주류 판매를 금지하고 있는데 이는 국민들이 술을 마시고 정부를 향해 데모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하지만 주류 판매 금지 기간에 오히려 술이 더 많이 팔린다고 한다. ‘뒷 구멍’으로^^
부정부패도 문제지만 중국과 러시아의 압박도 큰 문제인데, 두 나라는 몽골이 자원을 채굴해 두 나라에 수출만 할 것을 압박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몽골의 자원을 헐값에 수입해 자국에서 가공한 후 비싼 값으로 되팔고 있는 현실이란다. 따라서 몽골 국민은 중국과 러시아를, 그중에도 중국을 너무 싫어한다고 한다. 중국에 몽골 땅의 절반을 내어주고, 러시아에도 상당 크기의 땅을 빼앗겼으니, 그 감정을 좋을리 만무하다.
16세기에 세워진 에르덴조 사원을 방문했다. 티벳 불교 사원으로, 몽골 제국의 옛 수도 카로코룸의 돌을 사용해 건축했다. 티벳 불교의 묵주를 상징하는 108개 사리탑들이 성벽 주변을 감싸고 있는데, 17세기 전란으로 황폐화되었다가 18세기에 재건, 20세기 공산당에 의해 다시 파괴되어 일부만 남아 있다. 2004년 이곳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하라호름 박물관은 에르덴조 사원 바로 옆에 있는데, 이곳은 몽골 귀족의 유물이 전시된 곳이다. 박물관 내부에 전시되어 있는 13세기 칭기스 칸의 셋째 아들이자 몽골 제국의 두 번째 칸이었던 오코타이 칸이 건설한 당시 하라호름의 모형을 보면서 당시 몽골 제국이 번성한 이유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모형도에 따르면 당시 하라호름 성내에는 티벳 불교 사원과 정교회, 모스크가 공존했다. 몽골 국기에도 형상화 되어 있듯, 몽골은 모든 민족과 종교가 평화로이 어우러지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고 한다. 국기 왼쪽에 태극 문양은 물고기 두마리를 형상화 한 것으로 물고기는 잘 때도 눈을 감지 않는데, 언제나 주변 나라의 침략을 대비해야 한다는 뜻인 동시에, 두 마리 물고기가 태극문양처럼 어우러져 살아야 한다는 뜻이라 한다.
몽골의 인구가 한 때는 100만 명 이하였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소수의 인구로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가이드는 몽골의 전성기 때에는 인구가 1000만 명 정도나 되었단다. 그런데 중국이 흉노에 대한 두려움이 워낙 커서 만리장성을 쌓았고, 칭기스 칸의 몽골제국의 탁월한 전술 - 기마술과 효율적 식량 조달 -으로 베이징까지 빼앗긴 트라우마 때문에 중국은 티벳 불교를 보급, 활성화 함으로 몽골 인구를 효과적으로 줄였다고 한다. 효율적 식량 조달’이란 소 한마리를 주머니 하나로 줄일 수 있는 기술이었다. 당시 대다수 남자들이 결혼을 하지 않고 수도승이 되어 평생 경전 읽기와 명상에 전념하는 것을 가장 큰 명예로 삼았다. 종교로 인구까지 통제할 수 있었다니…
하라호름에서 3시간 이상을 버스로 이동해 쳉헤르로 향했다. 쳉헤르 온천 도착 20여 km쯤부터는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겨울로 접어드는 시기라 산 전체가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산 곳곳에는 야크들이 여유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온천에 도착했을 무렵 비가 쏟아졌다. 비를 맞으며 온천수에서 피곤한 몸을 담그며 이틀 째 여행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