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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2일
말씀 : 신22:9-12
제목 : 십자가의 출발(구별된 삶)
저번주에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옥토로 바뀐 것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본질을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좀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난 후의 삶이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편하게 살고, 마음대로 살고,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사는데 우리는 세상과 타협하지 못하고. 쾌락적인 삶도 살지 못하고. 내 마음대로 살지 못하는 제한적인 삶, 묶여 있는 삶을 살아가는 고달픈 인생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이것만큼 큰 오해는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은 자들입니다. 저들에게 아무리 좋은 것을 갖다주어도, 아무리 세상 권세를 주어도, 아무리 큰 부자라 할지라도 그들의 세계는 죽음이 운명인 세계이기 때문에 무엇을 하든지 다 헛된 것이요, 거짓되고, 외면되고, 변명일 뿐입니다. 사망으로 끝납니다. 그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사망입니다. 헛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명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무엇으로도 생명을 만들어냅니다. 핍박으로도,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질병과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생명의 열매를 맺는 자들입니다. 다시 한번 우리의 신분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망할 자가 아니고, 이 땅에서 끝나는 인생이 아니기 때문에 끊임없이 세상의 문화, 철학, 정신, 사상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나라를 세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신명기22:9-12입니다.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을 다 빼앗길까 하노라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양털과 베 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 너희는 너희가 입는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순수한 상태’를 그대로 보존하는 것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영적 교훈을 주고자 한 규례인 동시에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상생활에서 가나안의 이교적 풍습과 타협하기 쉬운 인간의 본성을 경계하는 데 근본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게 섞어 뿌리면, 즉 이방인들의 문화, 풍속,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결과적으로 소산을 다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빼앗기다’는 히브리어로 ‘펜 카다 쉬’인데요, ‘성결하지 않다’, ‘깨끗하지 못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방인들과 혼합하면 영적으로 성결을 유지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세상의 문화, 전통, 정신, 철학, 질서, 원리 등을 따르며 그들과 타협 하며 살아가면 거룩을 절대로 유지할 수고, 그 나라를 준비하는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결국 구원, 신비, 감격, 은혜, 축복, 감사, 영광 등을 다 빼앗긴다는 말입니다.
10절에 보면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이렇게 소와 나귀를 함께 묶어서 일을 시키는 것은 고대 가나안의 풍속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도 두 짐승은 보폭이 다르고, 힘도 다르고, 성격도 다 다릅니다. 이 둘을 함께 겨리해서 일을 시키면 얼마나 힘들겠냐는 것입니다. 자연스럽지도 못할뿐더러 일을 시키는 사람도 힘듭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이 왜 기쁨이 없고 힘듭니까? 왜 주일을 지키기가 힘들고, 헌신하기가 힘듭니까? 결국 세상일과 같이 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이 늘 부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신자가 불신자와 함께 멍에를 메지 말도록 경고하고 있습니다(고전 7:14-16).
11절의 말씀 ‘양털과 베 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는 이런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서는 제사를 드리고 세상에 나가서는 바알 신을 섬긴다는 말입니다. 영적인 것을 육적인 것과 혼합시키지 말라는 말입니다. 말씀과 세상의 것을 섞으면 인본주의가 나옵니다. 진리가 사라집니다. 말씀과 세상 정신을 섞으니까 범신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세워나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입은 겉옷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날씨가 추울 때 겉에 걸쳐 입는 옷인데 네모라서 네 개의 모서리에 귀, 즉 술을 달라고 되어 있습니다. 패션의 관점에서 모양은 볼품이 없습니다. 오히려 술이 달려 있는 것이 이상합니다. 그런데 왜 달라고 하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구별하기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집 앞에 교패를 붙이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이 구절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8가닥의 실을 5개의 매듭으로 묶어 이 술을 만든 것은 곧 13이라는 숫자를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각 문자마다 고유 숫자를 갖고 있는 히브리어에 있어서, 이 술을 뜻하는 ‘치치트’는 그 합계 수치가 600입니다. 그러므로 술의 모양과 술의 문자가 지닌 상징적 숫자를 합한 수는 모세 율법의 총 조항수인 613과 일치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율법을 삶에서 날마다 기억하고 적용하라는 뜻입니다.
왜 우리에게 이렇게 구별된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함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13-17‘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외모를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알지 못할 때'에 해당하는 헬라어‘아그노이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를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들이 누구인가 하면 ‘아그노이아’는 십자가를 모르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즉 십자가의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떠나서는 생명의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5절에서 ‘거룩한 자라 되라’는 것은 헬라어 ‘기노마이’의 ‘되다’라는 과거 수동태명령형입니다. 그러니까 ‘되다’는 것보다 ‘이다’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즉 ‘거룩한 자가 되라’는 명령의 의미보다 ‘거룩한 존재이다’ 그러니까 거룩함을 나타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미 거룩한 자요, 그 거룩을 드러내는 삶을 요구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다니느냐 안 다니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살고 있느냐 살지 않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 가운데 나타나는 현상 중에 신령한 예배가 포함되어 나타나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제사장적 사명자의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제사장은 일반인과 구별된 삶을 요구받고 있다는 것 아십니까? 제사장의 삶은 예배자의 삶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널리 선전해야 할 자들이기 때문에 높은 도덕성과 구별된 삶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벧전 2:9-10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왕 같은 제사장의 구별된 삶은 첫째 거룩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아론은 거룩한 옷을 입었습니다(출28:4). 출애굽기28:3‘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 모든 자 곧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성령으로 충만한 자들을 통해 아론의 옷을 만들어 입혔습니다. 즉 성령의 사람으로 구별된 삶을 살라는 의미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는 의미입니다. 흉패 안에 우림과 둠밈이 있습니다. 이것은 둘 중 하나를 뽑으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뜻을 구별하는 구별된 삶을 살라는 의미입니다. 셋째 매일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출29:38-39). 제사장직을 맡은 우리는 매일 하나님과 교제와 사귐의 삶을 통해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셋째, 우리는 생명을 소생시키고 생명을 열매로 맺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구별된 존재인데 구별된 존재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지금 살아가고 있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에서부터 나의 정체성에 맞는 구별된 삶이 나오게 됩니다. 나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값을 치르고 구원하여 속량하신 하나님나라의 백성입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부르신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나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자답게 하나님의 영광과 성품과 능력을 세상에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하는 말이나 행동을 통하여 세상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나라의 시민이라면 나는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지만 이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에 속한 사람인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 땅에서 나그네로서 본향을 향하여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의 제자라면 나의 삶의 기준은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가는 것이 내 삶의 최고의 가치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일상생활에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 나라의 시민답게, 예수님의 제자답게 말하고 행동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구별된 삶의 이유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높임을 받고, 칭찬받고, 인정받는 것에서부터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진다는 것은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확인하지 못하면 절대로 하나님의 의도되고 목적된 삶을 살아갈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빌3: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여기서 바울의 육체적 자랑은 엄청납니다. 5절‘나는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세상적 관점에서 보면 뭐 하나 빠질 것이 없습니다. 가문, 종교심, 지식, 지위 등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은 자입니다. 그런데 7절을 보시면,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가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여기의‘그러나’는 역접관계접속사입니다. 여기서 육체를 완전히 부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울이 죽이는 과정을 통해 7절의 고백이 이어지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삶은 자기 육체를 자랑하는 삶이요, 예수님을 만난 후의 삶은 예수님을 자랑하는 삶입니다.
‘고상하다’는 헬라어로 ‘후테로스’입니다. 여기서 예수를 아는 지식은‘예수의 지식’이 고상하다는 것입니다. 원어가 그렇게 속격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지식이 측량할 수 없이 깊고, 높고, 넓어서 인간의 지식으로는 비교가 불가하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알기 전 ‘후테로스’를 내려놓고, 즉 세상에서 고상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제 예수를 알고 난 후에 이 ‘후테로스’의 삶을 말합니다.
예수 알기 전에 목숨 걸었던 것이 예수 알고 난 후 참 어리석은 세월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뒤돌아보면 부부싸움도 아무것도 아닌 것 가지고 막 싸웁니다. 별거 아닌데요.
우리가 한 번뿐인 인생이라고 생각하니까 집착하고, 남의 눈에 피눈물 흘리게 하고, 따지고, 원한을 품고, 불평하고 삽니다. 그런데 십자가 복음 안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간증을 전 세계적으로 다 모아도 채울 수 없는 이 신비함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요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여기에 두 가지가 나타납니다. 하나는 생명이요, 하나는 빛입니다. 요3:14~15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들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영생이 생명입니다. 여기서 생명은 이 땅의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요3:16의 영생도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계21:3-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곳이 생명이 거하는 곳으로의 초청 장소입니다.
딛1~2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의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대로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주님이 주시는 생명은 소망을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는 부모를 잃는 슬픔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자녀나 가까운 친척들이나 친구를 잃을 때도 있습니다.
저의 경험입니다마는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특히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 장례식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지만 아버지 방에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님은 준비가 안 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간암 말기의 진단을 받았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많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감사했습니다. 아버님이 천국 가셔서 평안과 기쁨과 영생 속에서 다시 만날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만날 소망이 있기에 장례식이 통곡의 장소가 아니라 소망의 장소가 되는 은혜를 영명교회 모든 성도들이 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땅에 영생을 심고 소망을 거두는 은혜가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시고 교회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제사장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성령을 부어주시고 하나님나라를 확장하는 일을 위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눅1:35‘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덮으시리니’ 머물러 계시면서 덮으신다는 뜻입니다. 왜 이렇게 덮으시는 것입니까? 고후10:4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사단의 견고한 진지’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사람들의 사고체계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 사고계로 인해서 저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도록 가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세상으로 자꾸 도망을 가느냐 하면 눈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의 삶 속에 머물러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 품고 덮으셔서 깨닫는 지혜를 주심으로 우리를 영적인 싸움으로 이끌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습니까?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마는 특히 우리가 사랑으로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사랑은 어떤 무쇠도 녹일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위하여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창세기에서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한 계명이 있으니 그것은 사랑입니다. 신명기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우리가 사랑으로 동심원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야 하는데, 주의할 점은 그들이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영적 전쟁입니다. 그런데 그 전쟁의 무기가 바로 사랑임을 알고 그 사랑의 오래 참음으로 우리가 세상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임을 다시 한번 깨닫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위해 부름받은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는 복된 심령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