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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간 겨울 맛을 보았습니다. 요 정도는 되어야 겨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성탄절을 맞는 기분도 들고요. 그런데 거리를 다녀도 크리스마스 캐럴은 듣기 힘듭니다. 저작권 문제가 있다나요. 거참! 거저 듣던 때가 그립습니다. 하기야 사회가 발전되면 각자의 권리도 제대로 찾아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 듣고 싶으면 알아서 찾아 들으면 되지요. 그런데 왠지 아쉽기는 합니다. 맘 놓고 함께 듣는 것과는 기분이 다르니까요. 그나저나 의미나 알고 듣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기야 정작 예수님보다는 루돌프 사슴이 더 유명하니까 말입니다. 다시 오신다 하더라도 그리 반가워할 신자가 얼마나 되려나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오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하고 사는 신자가 더 많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한 해가 기울고 있습니다. 한 주 정도 남았네요. 해가 바뀐다고 정작 해가 바뀌는 일은 없습니다. 바뀌면 큰일 나지요. 그냥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기우는 세상이 좋습니다. 다음 주간에는 큰 추위가 없다 하니 해 지기 전에 만나볼 사람도 만나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새해를 맞는 기분이 전혀 안 듭니다. 전에는 나이 하나 더 먹는 재미(?)라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럴 일이 없으니 기대할 것도 사실 없습니다. 하기야 이 나이 쯤 되면 재미가 아니라 한숨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달력 바꾸는 수고는 해야지요. 빳빳한 1월을 넘기는 맛, 점점 손때 묻으면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시작하면 어차피 가는 게 세월인데, 이제는 따라가기도 벅찰 때가 있습니다.
살아있으니 가야 하는 길입니다. 누워서 가는 것보다야 걸어서 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2023 마지막 한 주를 건강하게 마무리 짓기 바랍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2023년 12월 23일 김종우 목사 드림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역대하 20 :17)
<노량 - 죽음의 바다>
사람은 한 번 죽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의 빛은 각자 다 다릅니다. 사람이 서로 다르듯이. 어둠 자체로 끝날 수도 있고 빛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흔히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하듯이 호랑이 가죽보다 몇 백 배나 비싼 이름을 남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름도 없이 사라지는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역사 속에 일어났던 수많은 전쟁 속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이름을 잃었을까요? 하나같이 이름 없이 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름 없이 세상을 떠납니다. 길게 또는 짧게. 누구나 이 땅에서 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물론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닙니다.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 소망입니다.
살고 싶은가? 집에 가고 싶은가? 당연히 가고 싶지요.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하다. 저들과 싸워 이겨서 여기를 빠져 나가면 된다. 저들은 돌아가려고, 우리는 모두 못 돌아가게 죽이려고 한 판의 싸움이 벌어집니다. 맞습니다. 이미 끝난 전쟁이기도 합니다. 돌아가도록 내버려두어도 됩니다. 그러나 저들이 7년 동안 온 나라를 헤집으며 이 땅에 저지른 짓들을 기념으로 가져가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기회가 되면 또 다시 짓밟을 꿈을 꾸게 될 것입니다. 꿈도 꾸지 못하도록 확실한 승리를 거두어야 합니다. 개인적인 복수가 아닙니다. 이 나라의 장래를 기약해두는 보장입니다. 장래 있을 법한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 지금 희생하고자 합니다.
하기야 저들의 야욕은 꾸준히 키워져 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잘 아는 대로 더 철저히 당합니다. 그 때의 그 치욕이 교훈이 되지를 못하였습니다. 얼마나 마음 아프고 부끄러운 일입니까? 그 후 한 세기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좀 나아졌을까요? 얼마나 경계를 잘 하고 있습니까? 물론 지금은 과거처럼 총칼로 쳐들어오지는 않을지 모릅니다. 보다 새로운 방법을 가지고 그 탐욕을 채우려하는지 모릅니다. 가까운 이웃이지만 그래서 더욱 경계를 해야 합니다. 조상들이 피로써 지켜준 땅입니다. 수많은 백성이 이름 없이 자기를 버리며 지켜준 산천입니다. 곳곳마다 피로 얼룩지지 않은 곳이 없을 것입니다. 다시는 넘보지 못하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나라를 지킨 것은 정치인들이 아니라 백성이었습니다. 위기 때마다 나타나준 위대한 장군이 있었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복입니다. 이 조그만 땅덩이지만 그 어느 나라에도 먹혀서 동화되지 않고 반만년 역사를 유지하여 왔다는 것은 말 그대로 기적이고 복입니다. 어느 임금이 한 일도 아니고 뛰어난 정치인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이 땅을 떠나서는 있을 곳이 없다는 절박함을 안고 사는 백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자기 모은 돈을 싸들고 어디든지 도망가서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힘없는 백성은 다른 곳으로 도망갈 힘도 돈도 없습니다. 여기가 끝입니다. 살아도 여기, 죽어도 여기입니다. 그 때 그 백성의 힘을 모아줄 장수가 있었다는 것이 복입니다.
도와주겠다고 온 명나라 군사도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살 사람들이 아닙니다. 쫓겨 가는 자기네만 돌아갈 처지가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그렇습니다. 구태여 나서서 희생을 감내할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왜군 장수 ‘고니시’의 판단이 맞습니다. 그 약점을 알기에 화친을 제의한 것이지요. 명나라 도독 ‘진린’도 그런 처지에 있기는 합니다. 충분히 전과도 올렸고 구원군으로서 할 만큼도 하였습니다. 일부러 나서서 희생을 덧댈 일이 없습니다. 철군하는 왜군의 길을 열어주어서 이대로 전쟁을 끝내고 자기네 나라로 회군한들 누가 비난할 일은 없습니다. 더구나 자신의 자존심도 세워주었으니 더 이상 나설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의 생각은 전혀 다릅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이 전쟁을 확실하게 끝내려는 것입니다. 이들이 저지른 만행에 대한 확실한 대가를 지불하게 하려는 것이고 두 번 다시 발들일 생각조차 갖지 못하도록 만들려는 것입니다. 자신의 아들이 죽임을 당한 것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가 아닙니다. 그런 사정은 아마도 휘하 장병들 속에서도 얼마든지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당장의 편안함으로 미래를 불확실하게 만들 수는 없는 일입니다. 자신을 바쳐서라도 끝장을 내려 합니다. 명나라가 도와주지 않아도 혼자서라도 치르겠다는 결의를 보여줍니다. 진린이 일단 관망할 것을 택하여 멀찍이서 지켜봅니다. 그리고 고니시의 잔꾀에 놀아났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해상 전투 장면만 시간 반이나 됩니다. 그것도 야간전투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더 화려하게 나타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수많은 전함의 포진과 전진, 여기저기 포탄 터지는 장면은 더욱 뚜렷하게 그리고 짜릿하고 신나게 전개됩니다. 앞부분의 각 진영의 상황도 결코 지루하지 않습니다. 지휘하는 장군의 생각이나 전략들이 서로 엉키어 벌어질 전투를 예견하게 만들어줍니다. 이야기의 긴박성을 첨가해주는 것이지요. 이 해상전투 장면들을 육지에서 촬영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대단한 기술입니다. 물론 각 진영의 장수들의 통솔하는 장면들 그리고 그 나라 언어 그대로 구사하는 것이 너무 실제 같습니다.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영화 ‘노량 - 죽음의 바다’(Noryang: Deadly Sea)를 보았습니다.
먹고살기 힘드네요
유월절이 가까운 어느 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와서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시간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걱정을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사람들이 놀랬습니다. 그리고는 생각했습니다. 요 6 : 14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당시 유대인들이 얼마나 어렵게 살았습니까? 오랜 식민지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학정만이 문제가 아니었지요. 자기 백성의 권세자들이 더 미운 짓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어디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있지요.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요. 정작 원수보다도 더 미운 것은 거기에 빌붙어 동포를 우려먹는 권세자들입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독특하기에 그들의 권세자란 대부분 종교지도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빙자한 그들을 대적할 수는 없고 알면서도 당하는 것이지요. 그런 속에서 먹고살기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한 사람 분의 양식으로 수천 명, 수만 명을 먹이신 겁니다. 한 마디로 이 분만 있으면 양식 걱정은 없겠지요? 예수님은 그 군중의 생각을 이미 읽으셨습니다. 15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사람들이 매우 서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당연하지요. 당시 먹고사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는데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는 이런 분만 있다면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찾습니다. 그리고 25절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그 반가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 때 사람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26 - 27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 자니라” 사람들이 찾는 것은 육신의 양식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죽자 사자 아우성치며 사는 것도 그것 때문입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사는 것 모두가 어쩌면 좀 더 잘 먹고 잘 살자 하는 것입니다. 지금 시장 물건 값이 계속 치솟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또 하나 걱정되는 것이 생겼습니다. 무엇입니까? 양식입니다. 세계 여기저기 자연재해와 전쟁으로 곡물생산과 전달에 차질이 예상되고 있습니다. 기름 값도 언제 다시 치솟을지 모릅니다. 기름 전쟁에 이어 식량 전쟁까지 보태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더 무서운 전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름 없다고 사람이 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양식이 없으면 굶어 죽습니다. 당장 죽을 일이니 여기저기 이판사판 폭동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짐승이든 사람이든 일단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합니다. 이 땅에 존재하려면 양식은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양식을 확보하려고 서로 싸우고 국가 간에도 전쟁이 발생합니다. 인간사의 모든 것이 일단은 먹고 봐야 그 다음 일이 진행이 되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속담에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당신 백성의 그런 다급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다른 양식을 말씀하십니다. 방금 읽은 요 6 : 27절에는 두 가지 양식이 나오지요. 하나는 ‘썩는 양식’이고 또 하나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사람들은 지금 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까? 썩는 양식 즉 육의 양식을 얻으려고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것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먹고사는 일에는 관심이 없으신가? 그런 이야기가 아니지요. 그건 기본이고 그런 기본적인 이야기를 하자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성경의 목적이 뭐라고요? 영생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육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 이 땅에서의 삶은 잠깐입니다. 그 이야기하자고 기나긴 세월 당신의 종들을 목숨 걸게 하며 성경을 기록하고 지키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을 당신의 나라, 하나님 나라, 천국으로, 영생으로 인도하시려고 주셨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주님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마 6 : 31 - 33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방인 즉 세상 사람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수준에 머물지 말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교회 나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점심 먹고자 옵니까? 그게 아니지요. 물론 예배 후 점심 주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자고 교회 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 영의 양식을 먹고자 오는 줄 믿습니다. 자, 다시 한 번 정리합니다. 우리는 살기 위하여 양식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영이 살기 위해서도 영의 양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육의 양식에도 먹을 수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먹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독성이 있는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여름 철 산에 가서 사고당하는 사람들 가끔 있습니다. 식용 나물인 줄 알고 캐먹고 식용 버섯인 줄 알고 따서 요리해 먹습니다. 그러나 자칫 목숨까지 잃고 맙니다. 왜요? 독이 들어있기 때문이지요. 또 더운 여름에는 음식이 잘 변질됩니다. 그러면 먹고 식중독 걸립니다. 역시 위험하지요. 그러므로 양식이라고 덜컥덜컥 받아먹어서는 안 됩니다. 잘 분별해서 먹어야 합니다. 영의 양식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먹어서 생명이 되는 양식이 있는가 하면 먹으면 사망을 가져오는 양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먹어도 좋다. 그러나 동산 중앙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마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 : 16 - 17) 즉 영의 양식도 우리가 먹어서 생명이 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먹으면 오히려 죽음을 불러오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보겠습니다. 사 55 : 1 - 3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물로 나아오라’ 하시면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말씀하십니다. 포도주와 젖이 문자대로 포도주나 젖을 말씀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양식 아닌 것,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지 말고 하나님을 청종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말씀하지요. 영혼이 사는 양식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양식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 양식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청종하면, 다시 말해서 잘 듣고 순종하면 우리 영혼이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공기가 없으면 우리는 5분도 버티지 못하고 죽습니다. 우리 생명과 직결되어 있는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공기를 돈 주고 들이마시는 사람은 없습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습니다. 그 말씀이 없으면 우리 영혼은 죽습니다. 우리 생명과 직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육의 양식은 우리 입으로 먹습니다. 그러나 영의 양식은 귀로 먹습니다. 우리 세상에서도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라고 말합니다. 그 마음의 양식은 입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읽고 귀로 들어서 먹는 것입니다. 자 암 8 : 11절 말씀을 봅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날이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언이지요. 무슨 날입니까? 기근의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기근이 무엇인지 알죠? 양식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아프리카의 기근 사태나 우리 북한 주민들의 상태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전혀 딴판으로 보는 겁니다. 하나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증거라는 것이지요. 진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세상 끝 즉 말세의 징조를 가르쳐 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대답하십니다. 마 24 : 6 - 8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전쟁 기근 지진 등이 있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인간 역사가 시작된 이후 이런 일이 없었던 적이 과연 있기나 했습니까? 그러므로 이 말씀이 육적으로 보이는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근을 보낸다 말씀하셨습니다. 육적인 기근입니까? 뭐라 말씀하시지요?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근입니다. 그리고 암 8 : 12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말씀하듯 세상 여기저기 다녀 봐도 얻기 힘들다고 하십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구약 시대 기근이 있으리라 예언하셨습니다. 그 기근이 육적인 기근이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 한편 렘 3 : 14 - 1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니라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하나님이 마음에 합한 목자를 주겠다, 하십니다. 그리고 그 목자는 지식과 명철로 양육해준답니다. 즉 영의 양식으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누구이겠습니까? 이 구약의 예언을 누가 성취합니까? 바로 초림 예수님이십니다. 변화산에서 천국을 보았던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마 17 :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이지요. 왜요?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말씀이 진리요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백성들도 자기들이 전에 서기관들이나 종교지도자들에게서 듣던 말씀과 다른 것을 알았습니다. 마 7 : 28 - 29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이것은 참 양식과 거짓 양식의 차이와 같은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구약 시대 기근을 예언하셨듯이 신약 시대에도 기근이 있을 것을 예언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때를 이야기하면서 마 24 : 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을 아프리카나 북한 동포의 기근 사태로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전혀 상관없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전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거짓 선지자,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면 거짓 목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영을 말씀하시는데 그 목자는 육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입으로는 하나님을 이야기하지만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목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가 설령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여도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불법을 행하는 자’(마 7 : 22 - 23)라고 정죄하십니다. 과연 오늘날 양식이 없어서 문제입니까? 그렇다면 비만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무엇입니까? 지구 한 쪽에서는 굶어 죽어가고 또 다른 편에서는 배가 터져 죽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근이 문제가 아니라 욕심이 문제입니다. 지구 전체적으로는 식량이 남습니다. 그러나 있는 자들이 나누어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한 쪽에서는 남아서 썩고 다른 쪽에서는 없어서 죽습니다. 우리 죄악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런 기근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말했듯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암 8 : 11)입니다.
오병이어 기적 후에 예수님은 따라온 백성에게 말씀하십니다. 요 6 : 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예수님만이 주십니다. 그런데 또 말씀하시기를 35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당신이 곧 생명의 떡이라고 하십니다. 점점 어려워지지요. 결국 폭탄선언을 하십니다. 55 - 57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당시 유대인들의 반응을 봅니다. 52절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66절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그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뜻이 무엇이었습니까? 63절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렇지요. 주님은 영을 말씀하시는데 그것을 육으로 들으니 알 수가 없고 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떠났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말씀을 증거하면 거짓이 되고 맙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자기 생각, 인간의 생각을 전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진리가 아니라 거짓이 됩니다. 그것으로 끝나면 괜찮은데 그 말씀이 생명을 죽일 수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즉 진리가 아닌 거짓을 듣는 영혼은 죽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백성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전했습니까? 율법을 전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라고 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달랐습니다. 전에는 잘 몰랐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과연 달랐습니다. 성경에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 : 29) 예수님도 이사야 선지자 예언을 인용하면서 말씀하십니다. 마 15 : 7 - 9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사람의 계명을 전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 노릇을 하였지만 하나님께로 ‘불법을 행하는 자’라 정죄 받았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요 6 : 54 - 55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그 살, 그 피가 과연 피와 살인가? 이 비유를 깨닫지 못하면 예수님을 다 떠납니다. 영생을 얻지 못합니다. 그렇게 전하는 자 또한 거짓 목자가 됩니다. 하나님께 불법을 행하는 자가 됩니다. 예수님이 걱정스러워서 남은 열두 제자에게 묻습니다. 67절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그 때 68 - 69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열두 제자는 깨달았습니다. 똑같은 장소 똑같은 유대인들에게 전하였지만 비유를 깨닫는 사람들만이 참된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똑같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한 쪽은 양식을 먹고 다른 한 쪽은 굶습니다. 그리고 굶는 쪽이 훨씬 많습니다. 과연 기근이지요. 예수님 처음 오셨을 때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 다시 오실 때 그럴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미 여러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해주셨는데, 그 예언대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여 영접하지 않고 기근에 처했습니다.
오늘 우리 사정을 돌아봅니다. 우리는 예수님 재림을 기다리며 신앙하고 있습니다. 다녀가신지 이미 2천 년이나 지났습니다. 과연 다시 오실까요? 기다리다 지친 것은 아닙니까? 어쩌면 마음과 입이 다른 것 아닙니까? 입으로는 ‘오시옵소서,’해도 마음은 ‘안 오셔도 됩니다,’ 그런 거 아닙니까? 여기가 편하고 재미있고 좋은데 구태여 천국까지 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냥 여기 사는 게 낫다 싶다 그 말입니다. 하기야 정말 하루하루 먹고살기 힘든 사람들이라면 여기보다 더 나은 곳을 바랄 것입니다. 말 그대로 천국은 낫지 않겠는가, 꿈꾸겠지요. 그러니 옛날 오병이어의 기적을 만드신 주님이 다시 한 번 와주시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의 양식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차원과는 매우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물론 주님이 오시고 천국이 임하면 구태여 먹고살 걱정은 없으리라 믿습니다. 천국이 그런 곳은 아닐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일단 천국백성이 되어야 그런 혜택을 누리리라는 것입니다.
천국백성은 먹는 것이 다릅니다. 육신의 양식으로 걱정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영의 양식을 구해 먹을 줄 알아야 합니다. 눈앞에 계신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면 그 주시는 양식도 받아먹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이 그래서 다 예수님을 떠났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그러면 예를 들어 질문해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때 곧 재림 때를 말씀해주신 것이 있습니다. 마 24 : 19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그러니 아이도 낳지 말고 키우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그래서 요즘 결혼도 하지 않는가요? 설령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는 낳지 말자는 생각들을 하고 사는 겁니까? 어떻게 하지요? 이 하늘의 말씀을 배우려고 하지를 않는다면 천국과는 거리가 멀어질 것입니다. 오셔봤자 또 예수님을 떠나갈 것입니다. 초림 때처럼 소수의 제자만 남겠지요. 정신 차리고 이 천국어를 가르쳐주는 목자를 찾아가기 바랍니다.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전해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마다 성도가 어디 다른 데 가서 뭘 배운다고 하면 야단법석이 납니다. 초림 때나 재림 때나 똑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경고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 23 : 1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목자가 내 구원을 책임져주지는 않습니다. 결국 나의 구원은 내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겁니다. 먹고살기 힘든 것도 역시 나입니다. 누가 대신 해주겠습니까? 알아서 찾아가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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