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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05. 묵상글 ( 연중 제31주간 토요일. - 안분지족安分知足.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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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05. 연중 제31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안분지족安分知足
이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늘 독서의 바오로 사도처럼 배워서 아는 사람,
만족할 줄 알고 그래서 바오로 사도처럼 행복한 사람이 되면 정말 좋을 겁니다.
“나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안분지족安分知足이라는 말이 있지요.
안빈낙도安貧樂道라는 말도 있고요.
안분지족은 자기 분수에 맞게 편안히 머물면서 만족할 줄 아는 것입니다.
안빈낙도는 가난한 처지에도 편안히 머물 줄 알고 도를 즐기는 것입니다.
둘 다 오늘 바오로 사도가 말한 그런 경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만족할 줄 아는 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어디서 배우고 누구에게서 배웠을까요?
틀림없이 예수님의 행복 선언에서 배웠을 겁니다.
행복이란 만족의 상태이니 만족할 줄 아는 것(知足)이 행복인데
주님께서는 행복 선언에서 아무것 없이 가난해도 행복한 경지를 가르치셨지요.
그런데 여기서 아무것도 없는 가난이란
선 곧 좋은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이고
우리는 이것을 최악이라고도 합니다.
만족, 행복을 설명할 때 물 반 잔의 행불행을 예로 듭니다.
물이 잔에 반이 있습니다.
같은 물 반 잔을 보고 어떤 사람은 반밖에 없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반이나 남았다고 하는데 이렇게 행불행이 갈립니다.
잔이 가득하길 기대한 사람은 만족할 수 없고 행복할 수 없지만
선이 아무것도 없는 것을 각오한 사람,
최악을 각오한 사람은 반 잔이어도 너무도 만족하고 넘치도록 행복합니다.
그런데 누가 최악을 각오하겠습니까?
백이면 백, 최선을 기대하지, 최악을 각오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영으로 가난한 사람 또는 영 안에서 가난한 사람만이
최악을 각오하기에 최악이어도 만족하고 곧 행복하고,
최악이 아니면 더 만족하고 더 행복할 줄 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영으로 가난한 사람(the poor in Spirit)은 어떤 사람입니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하느님 나라를 소유한 사람일 것입니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의 만족은 우리의 모든 욕구를 가득 채우기에
아무것도 없어도 부족함이 없고,
다른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에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사람인데,
이런 사람이 되기를 감히 꿈꾸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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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05. 연중 제31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루카 16,13)
오늘날에는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교육을 비롯하여 삶의 온 국면이 시장화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마저도 시장화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는 ‘돈’이 종교화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돈’이 우상화 되고 신격화 된 것입니다. 이를 교종 프란치스코의 문헌 <복음의 기쁨>에서는 이렇게 갈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우상을 만들어 냈습니다. 고대의 금송아지에 대한 숭배가 돈에 대한 물신주의라는,
그리고 참다운 인간적 목적이 없는 비인간적인 경제 독재라는
새롭고도 무자비한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55항)
그래서 교종께서는 현대 자본주의의 물신숭배 풍토를 강도 높게 질책하고, 비인간적인 상황으로 모는, 소위 말하는 “돈의 제국”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돈은 악마의 배설물이다.”(바실리오)라고 말씀하시고, “돈을 신처럼 숭상하는 경제제도는 극도로 높은 소비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연을 착취하고 또 착취하려 한다.”(국제 민중운동 회의, 2014.10.28)고 지적하시며, “사람이 돈을 숭배하면 결국 돈의 노예가 될 것”(이탈리아 협동조합연합 회의)이라고 경고 하셨습니다. “돈에 대한 탐욕의 체계화가 단지 나쁜 것을 넘어 사람들을 노예로 만드는 교묘한 독재”(볼리비아 방문)라고 질타하시고, “인간의 생명을 돈과 이윤의 제단에 갖다 바치는 정책을 철폐하고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인간 얼굴을 한 새로운 경제 모델을 추구하라.”(파라과이 방문에서 세계지도자들에게)고 주문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루카 16,13)
그런데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루카 16,14). 혹 우리의 속마음도 그러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혹 돈에 지배당하고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사실, 돈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돈을 섬기고 있는 우리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돈을 추구하고 있다면, 우리는 주님이신 하느님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선물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진 꼴이 됩니다. 사실, 재물을 섬기는 자들은 재물의 노예로 자신을 스스로 옭아맬 뿐입니다. 결국, “주님을 섬길 것인지, 우상을 섬길 것인지”는 누구에게 속한 것인지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하느님과 재물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는 이유는 주님은 오직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돈에 매여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 매여 있는 존재이며, 소유하는 존재이기에 앞서 소유된 존재입니다. 곧 우리 자신을 관리할 뿐 소유할 수 없듯이, 재물도 관리할 뿐 소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도 재물도 모두 그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실 사람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루카 16,15)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루카 16,13)
주님!
당신보다, 제 자신과 재물을 앞세우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당신보다, 당신의 선물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소유하는 존재이기에 앞서, 소유된 존재임을 잊지 않게 하시고
재물도 자신도 관리할 뿐, 결코 소유할 수 없음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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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05. 연중 제31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잘 벌어서 절 써야 하겠습니다
몇몇 분에게 돈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하느님께 먼저 봉헌을 해야 하는데 특별히 물질을 그렇게 해 보십시오. 상점이나 식당, 사업장에 오시는 첫 손님을 예수님으로 생각하고 그 몫이 얼마가 되었든 하느님께 바치십시오! 그리하면 주님께서 어떠한 방법으로든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랬더니 기꺼이 하겠다는 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분이 한 달을 모은 것이라고 가져오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혹 손해를 보지 않았느냐?”고 여쭤봤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신부님이 하라 하니까 순명으로 계속하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아마도 지난달 매상이 좋지 않았나 봅니다. 그러나 곧 알게 될 것입니다. 돈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받았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16,13)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재물의 축복도 주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축복을 주시는 분을 섬겨야지 주어진 선물 덩어리를 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주시는 분은 외면한 채 주어진 선물을 가지고 더 많이 소유하려고 다툽니다. 재물의 용도는 하늘의 거처를 마련하는 도구일진대 그것을 알면서도 재물의 노예로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재물은 분명 이용해야 하는 도구이지 섬겨야 하는 주인은 아닙니다. 재물의 유혹에서 자유롭기를 기도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현세에서 부자로 사는 이들에게는 오만해지지 말라고 지시하십시오. 또 안전하지 못한 재물에 희망을 두지 말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시어 그것을 누리게 해 주시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고 지시하십시오. 좋은 일을 하고 선행으로 부유해지고, 아낌없이 베풀고 기꺼이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시오. 그들은 이렇게 자기 미래를 위하여 훌륭한 기초가 되는 보물을 쌓아, 참 생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1티모6,17-18).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에 내 영혼을 비추어 그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21). 고 했습니다. 혹여 물질이 우리의 보물, 주인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구약성경 집회서는 재물의 유혹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황금을 좋아하는 자는 의롭게 되지 못하고 돈을 밝히는 자는 돈 때문에 그릇된 길로 들어서리라. 많은 이들이 황금 때문에 파멸하였고 멸망이 그들 앞에 닥쳤다. 황금은 그것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 장애가 되고 어리석은 자는 모두 황금에 사로잡히리라. 아무 흠도 없고 황금을 밝히지도 않는 부자는 행복하다”(집회31,5-8).
이런 의미에서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는 말씀을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불의함조차도 거부하지 않고 만나 모두를 하느님의 충실성 안에 초대하라는 말입니다. 선과 악, 흑과 백의 이분법적 단죄와 판단으로 자꾸만 갈라놓고 제 선함과 의로움을 내세우는 세대 안에 서로가 서로의 부족함과 한계를 보듬고 살펴 여유와 자비를 갖추라고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가르칩니다"(함께야). 물질은 함부로 사용할 것이 아니라 선을 만들어 내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아무리 잘못이 크더라도, 허물을 안고 사는 죄인이라도 친구로 만들 수 있는 삶의 자세가 신앙인의 기쁨입니다. 제 입맛에 맞는 이들만 찾는다면 신앙인과는 거리가 멉니다. 잘 벌어서 잘 쓰는 것이 얼마나 힘이든지요. 재화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고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데 도움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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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05. 연중 제31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뉴욕에는 미네와스카 주립공원이 있습니다. 가을 단풍이 참 아름다운 공원입니다. 가는 길도 아름답지만 공원 정상에 있는 호수는 상상 이상의 아름다움입니다. 파란 하늘, 하얀 구름, 맑고 푸른 호수, 색색의 단풍은 도시의 맨하턴 뉴욕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색다른 멋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단풍을 3번이나 볼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엠이에서 소풍으로 갔었고, 부르클린 한인 성당에서 가을 나들이로 갔었고, 답사로 갔었습니다. 날씨도 달랐고, 단풍의 색깔도 달랐고, 같이 한 사람들도 달랐지만 제게는 다르면 다른 만큼의 기쁨을 주었습니다. 답사에서는 처음 접하는 설렘이 있었습니다. 엠이 소풍에서는 잘 준비된 식탁에서 음식을 먹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부르클린 성당의 가을 나들이에서는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대접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샌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은 집에서도, 직장에서는 만족하는 법이 없습니다. 감사와 기쁨이 가득한 사람은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감사와 기쁨을 나누기 마련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날씨를 바꾸는 것도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친구들의 마음을 바꾸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본당 신부님이 엄하다고 힘들어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너무 편하다고 아쉬워하기도 했습니다. 혼자서 사목을 하니 힘들다고 했었습니다. 보좌 신부님과 지내는 것이 버겁다고도 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주어진 환경에 자신을 맡기려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에 주어진 환경이 변하기를 바라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몸도 마음도 지쳐갔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일을 많이 시키면 배울 것이 많다고 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일이 적으면 책 읽을 시간이 많다고 좋아했습니다. 주임 신부가 되어서 성당을 신축하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어간다고 즐거워했습니다. 보좌 신부님과 같이 있으니 힘이 난다고 하였습니다. 교구청에서는 주교님의 운동 상대가 되어 주었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기쁘게 나누었습니다. 높은 산은 깎아 내리고, 깊은 골짜기는 매우면서 마음의 평정을 찾아가는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가 있는 곳은 어디든지 활력이 넘쳤습니다. 북극에서도 냉장고를 팔 수 있고, 사막에서도 온풍기를 팔 수 있을 거라고 하였습니다. 4년 전입니다. 저도 한국에서 뉴욕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은 저를 위로하는 말인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는 어디에서든지 잘 할 거야’ 아마도 저의 낙천적인 성격을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친구들의 말처럼 코로나가 왔어도 아직까지는 즐겁게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나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박해와 시련이 없어지도록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고 하였습니다. 물은 그릇에 따라서 모양이 변하기 마련입니다. 물이 원하는 대로 그릇이 바뀌는 경우는 없습니다. 물은 막히면 기다렸다가 넘어가기 마련입니다. 바위가 있으면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더우면 수증기가 되어서 바다로 갑니다. 그렇습니다. 물은 바다보고 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어찌되었건 순응하면서 바다로 가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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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05. 연중 제31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고등학교 때 그녀는 키 160cm에 몸무게 90kg였습니다. 또 지저분하고 꾸미는데 전혀 관심이 없었지요. 잘 씻지 않았으며 늘 편한 체육복만 입고 다녔습니다. 사교적이지 않아서 말주변이 부족했고 말을 더듬기까지 했습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재주나 능력도 없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 맘에 드는 남자를 만났습니다. 무려 1년을 쫓아다녀서 사귀자고 했지요. 남자는 “네가 너무 뚱뚱해서 같이 다니기 쪽팔려.”라고 말하면서 철벽을 쳤습니다. 첫사랑의 실패로 방에 틀어박혀 가슴을 치며 울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다이어트를 결심합니다.
1년 뒤, 실연당했을 때의 절반 몸무게가 되었습니다. 과체중에서 벗어나자 건강이 좋아지면서 피부에 생기가 돌았습니다. 그러면서 두 번째 남자를 만났습니다. 하지만 얼마나 이별을 통보받습니다.
“너 말투가 이상해. 우리 서로 말도 잘 통하지 않고….”
또 엄청나게 울었습니다. 그리고 아나운서 학원에 등록해서 말투를 고치면서 사교적으로 변했습니다. 스피치 지도사가 되었고, 얼마 뒤에 다시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이별을 통보받습니다. 그녀의 옷차림이 여자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 엄청나게 울었습니다. 그리고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피부관리와 화장, 멋진 옷까지 그녀는 점점 아름다워졌습니다. 얼마 뒤에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살림을 못 한다고 결혼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말을 들으며 헤어졌습니다.
이제 울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두문불출하며 살림에 몰두했습니다. 다음은 영어를 못한다고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웃습니다. 영어 공부를 할 것이니까요.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남자친구들에게 고맙다고 말합니다.
울기만 했다면 ‘패잔병’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면서 ‘승전고’를 울릴 수 있는 변화의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재물에 온 마음을 두는 열성과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빛의 자녀는 영성 세계를 위하여 배우고 그에 합당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재물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재물은 자기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수단이 아니라 육신 생활과 이웃 사랑의 방편으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물을 통해 생활을 향상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위하여 재물을 사용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변화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자기 변화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면서, 무조건 재물만을 요구하는 열성만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런 우리의 모습에 주님께서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루카 16,15)라고 하실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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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사랑으로 시작해, 사랑으로 유지되며, 사랑으로 끝난다(촉니 린포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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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05. 연중 제31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중용의 지혜, 분별의 지혜-
“주님, 저에게 생명의 길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리이다.”(시편16,11)
새삼 베네딕도 성인의 위대함에 감탄하게 됩니다. 불멸의 영적 고전, 마르지 않는 영성의 샘같은 성 베네딕도의 수도규칙입니다. “기도하고 일하라”, 모토의 베네딕도회 영성을 저는 '목운동의 영성'이라 부르곤 합니다. 기도하고 일하고, 하늘보고 땅보고, 하느님보고 사람보고, 관상하고 활동하고, 결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우선순위의, 주종관계의 문제요 균형과 조화의 문제입니다.
베네딕도 수도영성은 극단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가난을 정결을 크게 강조하지 않으며 수도서원도 가난, 정결, 순종이 아니라, 정주, 수도자다운 생활, 순명의 세서원을 말하며 가난, 정결을 포함한 모든 수행들은 수도자다운 생활의 서원에 종속시킵니다.
중용의 대가, 분별의 대가, 참 지혜로운 분이 베네딕도 성인입니다. 지극히 영적이며 현실적인 분이셨으며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라 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삶보다는 지혜로운 삶에 역점을 둔 성인입니다. 하느님이 이상이라면 민생에 직결된 돈, 빵, 집, 일은 현실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이지만 늘 현실에도 민감했던 성인입니다.
그래서 베네딕도회 수도원에서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이는 원장과 재무수사 둘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성도 챙겨야 하지만 동시에 돈도 챙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물, 생명의 돈입니다. 돈의 흐름은 물의 흐름과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이 흘러야, 물이 있어야 식물이 살 수 있듯이, 돈이 흘러야, 돈이 있어야 사람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땅속의 물이 보이지 않듯이 수도원 역시 보이지는 않지만 날마다 나가고 들어오는 돈의 흐름은 계속됩니다.
결코 단순한 삶이 아닙니다. 삶도 몸도 안으로는 얼마나 복잡한지요! 그래서 죄도 많고 병도 많습니다. 돈의 흐름이 원활치 못하면 공동체의 평화도 위협받습니다. 그래서 원장과 재무는 돈의 현실에도 민감하며 그럴수록 더욱 하느님 중심의 삶, 기도의 삶에 힘쓰게 됩니다. 아빠스에 버금가는 재무의 자질이며, 베네딕도 규칙중 수도원의 ‘당가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31장은 사랑과 지혜의 결정체같은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우선 앞부분 일부만 인용합니다.
“수도원의 당가로 선정될 사람은 공동체에서 지혜롭고, 성품이 완숙하고, 절제있고, 많이 먹지 않고, 자만하지 않고, 부산떨지 않으며, 욕을 하지 않고, 느리지 않으며, 낭비벽이 없고, 오히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전체 공동체를 위하여 아버지처럼 해야 한다. 그는 형제들을 슬프게 하지 말 것이다. 만일 어떤 형제가 무엇을 부당하게 청하더라도, 무시함으로써 그를 슬프게 하지 말고, 부당하게 청하는 사람에게 겸손되이 이치에 맞게 거절할 것이다.”
바로 좋은 인성의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재무의 우선적 자질입니다. 화답송 후렴도 이와 일치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
잘되리라, 후하게 꾸어주고, 자기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이!
그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으리니. 영원히 의인으로 기억되리라.”
(시편112,1ㄴ.5-6)
얼마나 섬세하고 디테일에 강한 베네딕도 성인인지요! 성인은 결코 세상 재물을 경시하거나 무시하지 않았고 최대한 하느님 중심의 삶안에서 이들을 지혜롭게 선용했습니다. 재물의 주인 역할에 충실한 중용의 지혜를 지닌 성 베네딕도 였고, 이런 성인의 영성을 고스란히 전수받은 재무의 영성입니다.
바로 이런 성 베네딕도의 영성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치합니다. 예수님 역시 재물을 경시하지 않았지만 재물의 마성魔性 때문에 늘 재물의 위험성을 경계했습니다. 그래서 불의한 재물이라 말합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불의한 재물이라 무시할 것이 아니라 하늘에 보물을 쌓는 자선활동에 잘 선용함으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라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먼저고 돈은 다음입니다. 인색하지 말고 종부리듯 재물을, 돈을 잘 활용하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아주 작은 일같은 재물 활용에 성실을 다하라는 충고입니다.
참으로 재물의 선용에 능숙한,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하느님을 섬기는 참된 일에도 성실하다 하십니다. 작은 일에나 큰 일에나 한결같이 성실한 마음, 진실한 마음, 절실한 마음으로 지혜롭게 책임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하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영적일수록 현실적인 삶이요, 이게 참된 영성입니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불의하다. 그러니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또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
지혜롭고 충실한 주님의 일꾼이 되어 영성관리는 물론 재물 관리에도 철저하라는 말씀입니다. 형이상학도 중요하지만 형이하학도 무시해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어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하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수 없다.”
하느님과 재물의 우선순위를, 주종관계를 분명히 하라는 말씀이요, 재물 중심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섬겨야 할’ 분은 주님이고 ‘부려야 할’ 대상은 재물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강조하는 바, 노년의 품위유지를 위한 우선순위는 하느님 믿음, 건강, 돈입니다. 가장 먼저 오는 게 하느님이요 그 다음 건강과 돈입니다. 하느님이 빠지면 건강과 돈은 곧장 우상으로 돌변합니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은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습니다만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경계를 늦춰서는 안될 바 돈의 유혹, 돈맛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돈맛은 얼마나 사람을 오염시키고 변질시키는 지요! 돈맛에 중독되면 약이 없습니다. 돈맛에 살것이 아니라 하느님맛에 살 때 비로소 영적 건강의 삶입니다.
다음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그의 무욕의 초연한 삶, 이탈의 자유로운 삶, 매사 감사하는 삶의 비결은 순전히 하느님 중심의 삶에 기인함을 깨닫습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합니다. 나는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가 답입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 중심의 삶에 한결같이 충실할 때, 날로 주님맛을 맛들일 때, 참으로 지혜로운 삶, 자유로운 삶, 평화로운 삶, 행복한 삶입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하루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잡아 주며 이렇게 주님맛으로 살도록 해줍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복되다,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시편34,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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