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A형 남편
혈액형에 따라 사람의 성격을 음식으로 묘사한 우스운 이야기를 들어 본 적 있으신지요? A형은 ‘소세지’, B형은 ‘오이지’, O형은 ‘단무지’, AB형은 ‘지지지’라고요. 풀이해 보면 A형 소세지는 소심하 고 세심한 성격, B형 오이지는 오만하고 이기적인 성격, O형 단무지는 단순하고 무식한 성격이랍니 다. (AB형 지지지도 속뜻이 있지만 이곳에서는 생 략하겠습니다.) 저는 사람을 카테고리 안에 집어 넣어 평가하는 것을 그리 신뢰하지 않습니다만, 혈 액형을두고성격을묘사한이유머는아주틀린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적어도 A형에 관해서 는 맞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이지요. 왜 냐하면 저희 부부 혈액형이 A형이기 때문입니다. 예에! 소심하고 세심한 성격의 특성을 모두 지니
고 있답니다.
며칠 전, 저녁을 먹고 있는데, 남편이 뜬금없이
“오래전 일인데...”하고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저 는 무슨 이야기인가 궁금해서 남편을 바라보았습 니다.
10년전쯤,저희부부는처음으로종합건강검 진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대장 내시경 검 사도 하게 되었지요. 검사 결과 저는 모두 깨끗하고 정상이라고 했지만, 남편은 대장에 작은 용종이 서 너 개 발견되어 검사 중 레이저로 제거하였습니다. 그리고 의사는 조직 검사 결과 용정이 악성이어서 암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있지만, 일단 제거했으니 괜찮다며 6개월 뒤 다시 검사해 보자고 했습니다. 남편은 그 뒤로 몇 번 더 정기검진을 받았습니다.
벌써 10년이나 지난 그날 이야기를 꺼내는 남편 의 눈에는 어느새 섭섭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습니 다.
“그때 왜요? 무슨 일로 그러는데요?”
저는 남편의 다음 이야기를 전혀 짐작할 수가 없 어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남편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때 나 당신한테 많이 실망했다! 야... 사람은 믿을 게 못 되는구나 생각했지.”
저는남편의말에정말이남자가왜이러나하 고 다음 말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의사가 나는 용종이 있어 제거했다고 하 고 당신은 깨끗하다고 하니까, 당신 표정이 순간 반짝하고 안심하더라고.... 그런데 그게 그렇게 서 운하더라. 나는 암으로 발전될 수 있는 용종이어서 조심하라고 하는데 자기는 정상이라고 하니 표정 이밝아진걸보고‘정말저여자나를사랑하긴하 는 거야?’했지.”
“예? 정말이오? 나는 전혀 기억에 없는데요? 내 가 그랬다고요? 아, 그럼 그때 이야기를 하시지. 서 운했다고.... 그게 사실이었다 해도 그렇게 위험한 건 아니었잖아요. 사람들이 검사 중에 용종이 발 견되어 제거했다는 소리를 하도 많이 들어서....”
“용종도 용종 나름이지, 그냥 놔두면 암이 된다 잖아. 암!”
“에이, 암은 아니었잖아요. 미리 발견해서 제거 했는데, 뭘. 그렇지만 당신이 서운했다면 미안해 요. 그러게... 생각해 보니 섭섭했겠네요. 그런데 그 걸 이제 얘기해요? 10년 동안 꽁하고 있다가?”
“뭐... 항상 생각한 건 아니니까.... 알잖아, 나 A 형이라고!”
“하하, A형 맞네, 맞아! 하하하.”
“그래 나 A형이다! A형!”
제가 손가락으로 남편을 가리키며 웃음을 터뜨 리자 남편은 아직도 서운한지 설거지를 돕다가 저 를 향해 한마디 더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식 대신 죽겠다는부모말은믿을수있는데,배우자를위 해대신죽겠다는말은어쩐지믿을말이못되는 것 같아.” 남편의 말을 들으면서 정말 남편이 그때 많이 서운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편이 그런 작고 사소한 일에 (제가 생각하기에 그렇다 는말이지요.)그토록서운한감정을10년동안이 나 마음속에 담아 두고 있었다니 조금 의아하고 놀 랍기도 했습니다. 남편은 자존심 때문에 속 좁다고 할까봐제게말하지않았다고합니다.10년동안 이나 아내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접어놓고 살아온, 그런 남편의 뒷모습을 보면서, 정말 인간은 나약한 존재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더군요.
남자들은 아내와 자식들 앞에서 대범한 척, 아무 렇지도않은척,강한척하지만그마음속에는여 자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약함과 두려움과 걱정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나약하고 세심한 모 습을 ‘남자’, ‘남편’, ‘아버지’,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덮어 놓은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아내를 표현할 때 “더 연약한 그릇 (벧전 3:7)”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 말에 는남편역시연약한존재라는의미가담겨있는 것 아닐까요? 남편
은약한그릇,아내 는더약한그릇!
남편의 솔직한 고 백을 통해 ‘남편도 작은 것에 상처받을 수있는연약한 인간이구나. 10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아내에게 서운 한 감정을 숨기고 대범한 척하는 깨어지기 쉬운 약 한 그릇이구나’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편도 아내의 사랑을 원하는 외로운 한 남자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지요.
저는그날남편이툭던진독백과도같은질문, “배우자를위해목숨을줄수있는사람이얼마나 있겠어?” 하는 말을 그냥 흘려보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곰곰이남편의말을곱씹어보게되었습니 다. ‘정말 남편이 죽을 병에 걸린다면 그 고통을 대 신해 죽을 수 있을까?’ 솔직히 남편을 대신해서 죽 고 싶다는 마음이 절로 우러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 다. 급박한 상황에서는 모르겠지만 준비된 마음으 로 대신 죽기란 쉽지 않으리란 것이 저의 솔직한 마 음입니다. 저를 보면서 인간의 정이란 것이, 부부의 사랑이란 것이 얼마나 의지할 것이 못 되고 한계가 있는가를 느끼게 됩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인생의 동반자로살아왔건만내목숨은대신줄수없는 것이 나라는 인간이구나 생각하니, ‘세상에서 우리 가 온전히 의지할 대상은 누구인가?’하고 묻게 됩 니다. 아내에게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제 남편. 저를 아끼고 사랑해 주는 남편의 사랑을 믿지만, 남편 역 시 저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무조건 줄 것이라고 확 신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나를 자기 목숨보다 사랑하고, 언제든 아낌없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 줄 존재가 있을까요? (아, ‘페닐아틸아민’이라는 신경 전달 물질이 급격 히 상승하는 연애 초기의 커플들은 제외하고 말입 니다.) 생명까지 내어 주는 사랑을 받는 사람. 그런 사람은 정말 행복하겠지요? 그리고 그런 사랑을 하 는사람역시세상에두려울것도,부러울것도없 을것같습니다. 그런사랑...!그런데가만히생각
해보니우리가바로그런사랑을받고사는사람 들이었습니다! 나를 너무나 사랑해서 기꺼이 자신 의생명을내어준사랑.그놀라운사랑을지금우 리가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우리를 세상 끝 날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죽음보다 강한 사랑. 십 자가 그 사랑, 예수님 사랑!!
우리는 배우자조차 제대로 사랑할 수 없는 존재 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참사랑 안에 거할 때, 그 때는형제를위해목숨을내어줄수있는담대한 사랑의 소유자가 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닫고 경험하며, 가족과 이웃을 동 일한사랑으로보듬어줄수있는우리가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 라(요일 4:10)”.
<choi.choonghee@gmail.com>
글 | 최충희
미국 세인트루이스 한인장로교회에서 사모로 섬 기다가 2000년 미주 교양지 <광야>에서 신인문학 상을 수상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동지에 <너, 하나님의사람아!>와<일분묵상>을연재했으며해 외기독문학 회원으로 다수의 시와 수필을 발표했 다. 하트앤 서울 미주 복음방송에서 <최충희 칼럼> 과 <성경 속 인물 산책>을 진행했다. 저서로 <희망 온 에어>가 있다.
* 홍성사 「희망 온 에어」와 함께합니다.
07
JULY·2019
ISSN 2234-3865
통권 229호
기독교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매거진
첫댓글 좋은 글 고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