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도마 신부 전기(六)
『경향잡지』 1949년 9월호 제43권 제9호(132〜134쪽)
2. 귀국도상에(속)
一八四六년 월하순경이다.
입국하신 「페레올」주교와 「다블류」신부께서 겨우 언어를 통하여 성무집행을 시작하고 김안드레아신부께서는 성무에 더욱 분망하신일방 앞으로 괴국과의 연락을 취하여 한국교회의 앞으로의 바전을 꾀하고 준비하셨다.
이때에 아직 입국을 못하고 국경근처에서 기회만 엿보고있던「매스뜨르」신부와 최도마부제는 과거 김안드레아와 같은 길을 시험하여 두만강변까지 모험을하여보았다. 여기에 관한 문헌을 참고하면 다음과 같다.(1)
「(페레올주교와 다블류신부)두위가 한국교우들에게 청므으로 성사주기에 열중하는때 만주에서 매스뜨르신부는 주교의 지시를따라 김안드레아 다니던 길을 밟어 一八四六년 一월하순에 한국북편에로 들어오려하여 부제 최도마와 중국교우 둘을 데리고 만주광야를 지나 훈춘(琿春)을 향하여 十七일간 여행을 계속하였다. 그들은 높은산과 깊은골을 지나고 결빙된 두만강 상유를 발섭하여 한국지경유 십리쯤 격한곳에 와서 두나라백성의 개시되기를 기다렸다. 때는 개시(開市)십여일전이였다. 유하는 동리도 적고 타국사람이 남모르게 오래 머무르기가 위험한일이었다. 개시되기전날이다.(최도마일행이) 경계망을 뚫고 지나려할그때 포졸을 많이 거느린 수장교(首將校) 넷이 (최도마의) 주인정한집을 에워싸고 신부를 잡아 포교와 관인이 많은곳에 다려다가 각각 허다한 말로 힐문하였으나, 신부는 관장에게만 대답하리라 하는 말로 그들을 대하였다. 세시동안 그 예모없는 무리들은 혹 갓을 벗기는자도 있고, 혹은 수염을 잡어단기는자도 있으며, 모두 호기심에 끌려 가까이와 구경하고 있었다. 여기에 매스뜨르신부의 편지일절을 보면 아래와 같다.
「그지경을 당하여 그 무리가 하는 것을 금치아니하고 나는 마음을 안정하여 생각하였다. 우리 구세주 수난 전날 악당에게 능욕을 받으섰으니 제자도 스승과 같이 능욕을 받는 것이 기쁘다. 밤중이 되매 구경군이 다 물러갔다. 포졸들은 나와 최도마를 옥에 가두고, 데리고간 중국사람 둘은 따루 가두었으니, 옥벽이 흙이라 토끼같은 즘생도 그런 옥에 오래 가치지아닐것이로되, 우리는 낮에 그 능욕을 본후에 피할생각이나기는 고사하고 처음으로 옥중에서 편이 쉬여보려고 하였다.」
그 이튼날 아침에는 그곳 모든 사람들이, 타국인이 잡혔다는 말을 듣고 옥에로 와서 서양사람이 어떠한가 보고서 문바른 종이를 찢으므로, 신부가 자기를 구경시키려고 잠깐동안 마당에 나아가다니니, 구경꾼생각에 본국백성들이 심히 무서워하는 강도와 히광이같은 포졸들 가운데에서 타국인은 기탄없이 엄연이 다니는 것이 이상타고 보았다. 그날 열시경에 포졸들이 신부를 관장앞에로 잡어가니, 관장이 예모를 극진히 차려 문초한다
뉘시며 어데 살으시며 무엇하러 오섯나이까?
나는 성교인으로 천주를 알아 사랑하는 도리를 가르치려고 블란서에서 왔나이다.
여기는 적은 읍이라 이러한 선생의 가르치심을 묻기가 과연 마땅치못하니 대도시로 가는 것이 옳소이다
진주(眞主)를 섬기는 곳은 대소의 분별이 없어, 보천하 모든사람이 섬기지않을 수 없는 일이외다.
교인이라하나 아무 빙거가 없으니 진실함을 어떻게 알리오?
어렵지 않소이다 (성호를 그으며) 이것이 교인의 보람이외다. (또 묵주와 십자고상을 내여보이며) 귀국 천자 조서(詔書)에 교인은 십자고상을 공경하느니라 하신 말슴을 관장이 보섰는지 모르거니와, 우리가 천한 죄를 공경함이 아니라 우리만민의 죄를 구속하사 십자가에 못밖혀 죽으신 구세주를 공경하는바로소이다. 관장과 아전들이 그제야 고상을 놀라 바라보고 신부의 시계까지 보려한후에, 다시 일주야를 옥에 가두어두고 최도마와 중국교우들을 또 문초하니 대답이 여전하였다.
그 이튼날 만주장교들이 와서 신부와 함께가친 교우들을 다리고 옥에서 나와 하루한나절거리까지 인도하여 주고 갔다… 매스뜨르신부의 일행은 그전 처소인 요동에로 향하였다
여기에 매스뜨르신부의 서간일절을 다시 소개한다
「그전같으면 교우라 하고 서양사람이라 한 것이 환을당할 이유이겠으나, 이번에는 교우요 서양인인고로 놓였으니, 치명의 영광을 얻기위하여는 내가 너무 늦게 왔다…」
요동에 돌아온 매스뜨르신부와 최도마부제는 一八四六년 一년간 신학생들을 지도하였고 그 성과는 매우커서 그들의 지도하에 있다가 승품된 신부들은 열심히 전교하여 좋은 과실을 맺었다. 이는 당시 만주지방에 포교하시던 베르뇌주교님이 쓰신 편지내용이다.」
一八四六년-이는 한국천주교회사의 페이지를 두 번째 피로 크게 물드린 병오년이다.
당시 유일한 우리 본방인 신부로서 귀국활약하시던 김대건 신부께서 포교상 편의의 길을 열으시려고, 四월경 황해도 연평(延平) 바다에 가섰다가 불의에 이변을 당하여, 그해 六월 五일 한국관졸들의 손에 피착되신후 옹진(甕津) 해주(海州)감영을 거처 서울감옥에 수용되섰고, 정부는 그 탁월한 지식과 인격을 아까워하였으나, 교인과의 사감(私感)이 있던 고관몇몇이 불란서군함의 충남외연도(忠南外烟島) 내방을 호기로삼어, 신부의 사형집행시간을 촉진시켰으므로 당녀 九월 十六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를 당케되고야 말었다.
「의를 위하야 군난을 받는자는 진복자로다」(마두 五. 一0) 정의의 원수들은 의인의 생명을 빼앗었으나 그 정신을 앗을길 없었고, 희생자 가젔던 진리의 빛은 더욱더욱 광채찬란하여, 희생시킨자들의 후손의 눈을 크게 열어주었으며, 교인의 흘린 피는 땅에 묻힌 밀날인양 몇백배의 결실을 보아 교인의 수는 삼천리강산 방방곡곡에 산재 하도다!
一九二五년 七월 五일 가톨릭대본영 로마대성전에는 세계 각국에서 수만대중이 운집하였고 과거 극동반도일우에서 일개 사학(邪學) 죄인으로 굴욕치명한 김대건신부님은 그동지 七十八명과함께 영예극치의 복자선언을 받으셨다. 우리는 앞으로그들의 덕화가 더욱 빛나 성인명녹에 오르시기를 믿고바라 마지안는바이다.
박해의 돌밭도 국내의 공기가 대단 험악하였으나 통신의 연락이 체류하던 최도마부제가 동창신부님의 순교사실을 알리 만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