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환안(以眼環眼)
고대 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이 있다. ‘복수의 앙갚음’을 이르는 말이다. 세계의 역사는 나라와 나라가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에는 힘의 논리로 나라를 침략하여 빼앗거나 속국으로 만들어 조공을 바쳤다. 오로지 국력이 나라를 지키는 버팀목이었다.
중국의 영화를 보면 무술 영화로 ‘복수’를 주제로 하고 있다. 무림파 간의 갈등, 나라의 원수, 부모 형제의 원수를 갚기 위해 보복을 일삼았다. 원수는 원수를 낳고 피는 피를 부르며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 무림의 고수들은 칼은 의(義)를 위해서 써야 한다고 하지만 또 다른 피를 부르게 했다.
그런데 성경에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마태 5, 38)라는 구절이 있다. 이 말씀은 함무라비 법전에서 인용한 것으로 복수를 부추기는 말이 아니라 받은 만큼의 그 이상은 앙갚음을 하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이다. 그러면서 역설적으로 원수도 사랑하라고 한다.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떻게 원수를 사랑한단 말인가?
오늘날 피의 보복은 사라지고 있다. 범죄를 저지르면 피해자가 보복하는 것이 아니라 사법 기관에서 그 죄를 물어 처벌하고 있다. 중죄인이라도 일정한 기간에 반성의 기회를 주어 감금했다가 풀어주고 있다. 이는 원수를 원수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속죄와 죗값을 치르고 나면 함께할 수 있다는 사랑의 발로이다. 그 길이 평화를 이루는 길이며 피의 보복을 없애는 길이다.
우리 속담에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도 부정적으로 쓰이는 말이다. 장난으로 시작하여 싸움이 벌어져 한 대 건드렸는데 돌아오는 것은 몇 배로 돌아온다. 어릴 때 기억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운동회가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가을에 있다. 시골 학교라 마을 대항 릴레이가 이어진다. 그 대항이 끝나고 청군 백군이 하늘 높이 솟은 바구니를 터뜨리는 시합이 끝나면 점심시간이다. 가족끼리 모여 맛있게 식사하는데 행사인 것처럼 일이 벌어지곤 한다.
마을마다 애향심이 대단하며 특히 동네 청년들의 대동단결은 끊기 어려운 밧줄과 같다. 점심시간의 틈에 이웃 동네 간 청년들의 패싸움이 벌어지곤 한다. 밥 먹다가 구경이나 벌어진 듯 군중이 몰려든다. 싸움꾼들은 떼를 지어 교문 밖 들로 나가 논으로 뛰어들기도 하면서 몽둥이와 무기로 쫓고 쫓기며 한참을 싸운 뒤 승패가 갈리며 다음의 복수를 기다리며 흩어진다.
오늘날 세상은 하나의 지구촌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서로 공존을 위하여 돕고 있다. 불의에 대항하여 서로 연대를 맺으며 맞서고 있다. 복수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돌려서 함께하려는 것이다. 한 마리 나비의 날갯짓이 태평양을 넘을 때는 폭풍을 일으키듯 우리 삶을 따뜻하게 해 주는 ‘사랑’이라는 말 한마디가 ‘나비효과’를 일으켜 평화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