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단상 34/농심農心]종과득과種瓜得瓜 종두득두種豆得豆
우리집 대문 바로 앞에 3m 폭의 군도郡道(교행交行이 안된다)가 지나간다. 하루 세 번씩 군내郡內버스가 지나가고, 트럭 승용차 등 하루 교통량이 제법 된다. 우리집만 그런 게 아니고 동네 바로 앞이라 길 옆 집집마다 사고 위험성까지 있다. 『조화로운 삶』의 자연주의자 헬렌 니어링이 남편 스콧 니어링과 달리 어이없이 말년에 집 앞 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숨졌다고 했듯, 그런 사고가 일어날 여지가 얼마든지 있기에, 그 길을 동네 앞 5m정도 떨어지게 옮기고 교행이 됐으면 하는 게 우리 동네의 숙원이었다.
동네 지도자(이장)가 바뀌면서 그 소원이 졸지에 풀렸다. 같은 군 출신 도의원이 신경을 썼다던가. 500여m 군도가 새로 생기는데 7억여원의 예산이 든다던가. 주민들은 이장님 송덕비라도 세워줘야 할 판이라며 쌍수를 들어 반겼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동네에 살며서 그 도로를 가장 많이 이용하는 주민 1명과 출향出鄕인사 2명이 보상이 적다며 죽기살기로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아니, 동네를 위한 군도이니 백 번 이해해도 부족할 일이건만, 몽니도 그런 몽니가 없다며 할머니들이 입을 삐죽거렸다. 석 달이면 끝날 공사가 두 해를 넘기게 생겼다. 미친 짓이다.
귀향한 지 2년 반, 살면서 우리 동네와 농촌을 들여다볼 수 밖에 없는데, 알고 싶거나 듣고 싶지 않은 일들이 너무 많다. 새로운 발견이었다. 한마디로 ‘뒤틀린 농심農心’이라고 표현하자. 농심이 무엇인가. 자연과 더불어 농사 지으며 사는 그 마음이 바로 인정人情과 인심人心의 바로미터가 아니던가. 그런데 오랜 가뭄에 ‘거북등’이 된 저수지처럼 인정과 인심이 바짝 마른 인간들이, 어쩌면 그렇게 약속이나 한 듯, 한 동네에 최소 한 명씩 있단 말인가. 놀랐다. 이들은 상식과 논리가 무슨 개뼈다귀냐며 귀를 막는다. 알량한 기득권을 한껏 내세울 뿐만 아니라, 이웃들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도무지 쥐뿔도 없으며, 나이도 상관없다는 게 이들의 공통점이었다. 완전 불통, 대화가 되지 않으니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들의 실례를 몇 가지 들어보자.
80여년 전, 여섯 마을이 힘을 모아 들판 한 가운데 초등학교를 세웠다. 폐교된 지 이미 오래이지만. 그때의 평화로운 여섯 동네, 순박한 농부들은 자식들의 책 읽는 소리를 얼마나 뿌듯해하며 배가 불렀을 것인가. 그런데 지금은 사사건건 몇몇의 몽니로 인해 마을마다 몸살들을 앓고 있다.
A동네의 70대 후반 남성은 걸핏하면 주민들의 일에 대해 고발을 일삼는다고 한다. 오랜 세월 관행처럼 굳어진 ‘충분히 이해되는 불법’도 가차없이 고발, 그가 제기한 민원民願은 주민은 물론 군청 직원들에게도 민원民怨이 된 지 오래이기에, 그가 빨리 죽기만을 빈다고 하는데, 부전자전이라고 그의 아들 역시 애비의 행태를 빼박고 산다고 한다. 그렇다고 잘 살면 모르겠다. 암에 걸렸다는 소식이다.
B동네의 60대 후반 남성은 산자락 신작로 옆에 30여년전 동네어른들의 허락을 얻어 돼지와 소를 키웠다. 좁은 축사에 점점 소 마릿수를 불리기 시작했는데, 퇴비사 등을 제대로 갖추지 못해 30여m 아래에 있는 동네가 온통 수질과 냄새공해의 수렁에 빠진지 한 세대에 이르고 있다. 오죽했으면 동네이름의 유래가 된 '냉천冷泉'(찬샘)을 파묻었을까. 그런데도 오불관언, 자기네는 냄새가 '1도 안난다'며 뻣대고 있다. 미안하다는 눈치커녕 하다못해 명절 때 돼지 한 마리 내놓은 적도 없었다는 말을 듣고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이번 군도를 개설하는데, 자기 논이 조금 들어갔다며 보상을 거부하고 떼를 쓰다가 안되니까 대토代土를 요구하여 관철시킨 인물이다. 그런가하면 출향인사 2명은 결사반대를 한다며 게거품을 물었다. 결사決死라니? 죽음을 결심했다는 게 아닌가? 몇 평, 몇 푼 된다고 군에서 동네를 위해 길을 내준다는데, 목숨을 건다는 말인가? 들어보니 1평 3만원 받을 걸 3만5천원 달라는 식이고 100평도 안된다는데. 그저 끌끌끌 혀를 찰 따름이다. 아, 지랄같은 천민자본주의여!
C동네의 70대 후반 할머니. 동네나 한 집안에서 일어나는 궂은 일들을 동네방네 소문을 내거나, 자신은 좋은 일 한다며 뚜쟁이(중신에미) 노릇을 주로 하는데 결과적으로 모두에게 해꼬지(해로움)만 하는 일을 밥 먹듯이 한다. 오죽하면 이웃마을에서 출입금지를 시켰을까. 왜 그렇게 살까? 도대체 어떤 태생胎生이기에 그런 심뽀일까? 남이 잘 되는 일에 박수는 못쳐줄망정, 한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숱한 밀대(고자질)의 행실이 될 말인가. 그분이 지나가는 길마다 '쉬쉬쉬' 하는 무언의 소리가 들린다. 다 된 논 매매계약을 하룻밤에 무산시키는 등 놀부의 심뽀가 따로 없기에 '막장드라마의 악녀'라 불린다. 비극도 한참 비극이다.
D동네는 그 잘난 이장里長선거로 두 동강이 났다고 한다. 전라선 철도가 지나가는 소음공해로 철도청이 동네 앞으로 1억을 보상했는데, 혼자 먹고 튀어 나중에 감옥을 갔다왔다던가. 50대 초반의 이장은 그 직을 내놓지 않으려다 60대 후반의 친척 형님에게 떨어지자 인수인계를 거부하고 회관에 몰래 들어가 똥을 쌌다던가, 마이크를 부셨다던가. 그런데도 전이장 편을 드는 사람들이 있어 여론이 늘 반반이라니, 오늘날 정치판의 진보와 보수, 진영의 논리로 대립하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인가. 이 또한 모를 일이다.
E동네의 주민들은 요즘 분기탱천해 있다. 비닐하우스로 가축을 키우던 주민 한 명이 그것을 외지 사람에게 처분했는데, 구입한 사람이 양계장을 할 계획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플래카드 10여개를 여기저기 달았다. 그럴 때 등장하는 것이 ‘결사반대’이다. 여기에서도 죽음이다. 생명이 얼마나 귀한 것인데, 걸핏하면 죽음을 들먹거리는 지 모르겠으나, 공해의 으뜸이 닭똥냄새이므로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결사’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씁쓸하다. 첨예한 대립, 그 한계가 궁금하다. 또한 이제껏 한 동네에서 산 그 주민을 보는 시선이 어찌 곱겠는가.
여섯 마을 중 한 동네만 그런저런 말이 나오지 않고 있으나, 그 속은 또 어찌 알겠는가. 한심한 일이다. 오 마이 갓!이 절로 나온다. 언제부터 어쩌다가 이렇게 농심들이 피폐하고 그악해졌을까. 아, 40여년전 내 고향은 이러지 않았는데. 수습 난망, 개선기대 난망. 어찌 인간의 마음들이 갈수록 이렇게 삭막하고 사악해지는 걸까. 왜 남을, 이웃을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 걸까. 자기 혼자 잘 살면 정말 재밌는 걸까. 전우익 선생이 도시도 아니고 농촌에서 이런 말도 안되는 사건들이 횡행하는 것을 보시면 지하에서 통곡할 일이다. 아지 못게라.
‘뒤틀린 농심들’이라는 이 졸문의 단상을 보는 여섯 마을의 주민이 있다면 ‘허 참’소리가 절로 나올 것이다. 이런 농심을 도시의 삶과 빗댄다면,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히는 ‘성냥갑 집(아파트)’에 사는 주민들의 ‘층간 갈등’이 이에 해당될까. 어제 뉴스에도 윗층에 사는 30대 남성이 아래층에 사는 일가족 3명에게 흉기를 휘둘러 부상을 입혔다던가. 부상이니망정이지 그동안 살인사건은 또 무릇 기하였던가. 다들 왜 이러는 걸까? 틀림없이 두고두고 죄 받을 일이다. 종과득과種瓜得瓜 종두득두種豆得豆(오이를 심으면 오이를 얻고, 콩을 심으면 콩을 얻는다). 예부터 적선지가積善之家 필유여경必有餘慶이라 했거늘. 그들이 어찌 업보業報나 선과善果라는 말을 알 것인가. 이제 대문을 365일 열어놓고 살아도 도둑이 없는 세상인데. 그러거나 말거나 자연自然만은 말이 없다. 자연이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