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7장은 그리스도론입니다.
요즘 들어와서 예수만 알고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로
인해 숨이 넘어갈 듯 속이 상해 부글부글할 때가 더 많아 졌습니다.
믿음의 시작은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그 안에
계심을 믿는 순간부터입니다(고후13:5) 그런 의미에서 고린도교회는
겉만 요란할 뿐 믿음의 본 괘도에 진입하지 못한 기형적 교회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아 성령을 선물로
받는 순간부터 사도행전의 역사가 시작이 되는 것임을 성경은 밝힙니다.
사도행전의 사도들의 메시지는 유대인들이 죽인 예수가 그리스도이시이며
지금 당신들 속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구원의 주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언제 예수가 믿는 자 안에 그리스도가 되시느냐가 관건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어떤 때하고 연결이 됩니다. 요7장은 그 때를 말씀합니다.
주님의 살과 피가 양식과 음료가 되고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또 주님이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주로 말미암아 사는 그 때가
언제냐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유대인의 명절에 올라가십니다.
그 명절은 그리스도의 예표인 유대인의 초막절입니다.
바로 주님이 아버지 안에 계시고 우리는 주님 안에,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시는 새 계명 곧 새 언약의 예표절기입니다.
요7:6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발효가 되듯 요14장과 16장에 조금 있으면
하는 말씀이 여러 번 나오는데 이는 어떤 때, 곧 어느 시점이 있다는 말입니다.
마24장에서는 '그날과 그때는 아버지만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마24:36)
그런데 아버지만 아시는데, 그 때가 도적같이 임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다들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궁금하실 텐데, 성경에는
주님이 도적같이 임하신다고도 했고, 구름타고 오신다고 했습니다.
도적같이 오신다는 것은 우리 가운데 진리의 성령으로 오신다는 뜻이며(마24:43)
구름타고 오신다는 것은 마지막 흰 보좌 심판을 위하여 오신다는 말입니다.(마24:30)
이를 두고 안토니 후크마 교수는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으로 규명을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도적같이 임하는 주님의 때 이때를 예비하라는 것입니다.
구름타고 오시는 주님은 생명책에 녹명되었느냐, 안되었느냐 최종 개표하러 오시기
때문에 살전5장처럼 빛의 자녀들은 주님이 언제 오셔도 두렵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계시록을 가지고 장난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계시록은 개표와 같은
상황이기 때문에 요한복음 교회서신 히브리서 등에서 내가 구원에 당선이 되면
설령 144,000이 아니라 단 1이라 할지라도 그게 바로 나라고 믿게 되는 겁니다.
도적같이 오시는 주님이 우리 속에 임하여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명이 됩니다.
만약 그 분의 생명이 없으면 사망으로 인해 진노아래에 놓이고 정죄가 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여 생명이 되시기 위해 오시는 그 때를 예비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여태 예수만 믿고 그의 부활만 알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담 안에서 죽었던 자신이 다시 살아난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을 보고
만약 당신이 지금 죽으면 바로 불 못이라 말해 주는 겁니다. 경각심을 깨우는 거죠.
보좌 우편에 계시는 주님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구름타고 오시는데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하고 죽은 채로 있으면 그 사망을 따라 불 못 행입니다.
눅12장은 그 때를 더 확실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때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어떤 징조를 보고 알 수 있습니다. 그게 어떤 징조냐 이겁니다.
요7:16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이게 바로 징조입니다.
언제나 자기 말을 교훈으로 하는 그 사람은 하나님이 보내신 징조가 아닙니다.
세상의 말을 하고, 땅의 말을 하는 사람 곧 교훈에 교훈을 거듭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은 믿음으로 땅에 것을 얻는 곳입니다.
요7: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이게 바로 하나님의 징조입니다.
또 요7:18을 보면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역하는 종인지, 아니면 사람의 뜻으로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는 종인지 알 수
있는 징조 곧 바로미터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사람은 결코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을 보는 법을 여러분이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이고,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높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이용해서 자기 이름을 높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은혜를 통해 자기 이름을 높인다는 말입니다.
천국재산을 은익하는 죄도 되지만 이런 경우는 공무원이 법인카드를
사적으로 사용하면 불법이 되듯 천국재산횡령죄가 되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보내신 종이 아닙니다. 스스로 된 자로 자기 일을 하는 사역자입니다.
교훈이나 하나님의 뜻을 행함은 하나님의 가르침이어야 됩니다.
성령 안에서 속에서는 주께서 말씀하시고 밖에서는 자신이 발표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사역의 결과는 반드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본을 받아야 주의 종입니다.
사도바울을 한번 보세요. 로마서와 같은 그 엄청난 말씀을 기록해 놓고도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롬11:33)하고 자신을 감춥니다.
깨끗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래서 그 속에 불의가 없다는 말입니다.
자기 것으로 챙기려고 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의 징조입니다. 성령이 역사하는 주의 종의 징조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는 관점은 간단합니다.
능력이 있다 없다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말이 재미가 있다, 재미가 없다 그것도 중요한 게 아닙니다.
다만 그 영광이 자기에게 돌아가느냐, 하나님께 돌아가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종의 징조입니다.
그 사람이 사도행전의 사도들과 같이 성령의 사람인가 아닌가의 잣대입니다.
예수만 아는 사람은 십자가 앞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의
그 능력과 지혜를 차용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날마다 죽노라 하면서
자신과 그리스도를 맞바꾸는 거래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겁니다(고전15:19)
그래서 만일 성령의 기름부음 안에서 아들 안과 아버지 안에 있는 영생을 모르고
복음을 전한다거나 선교를 한다거나 교수를 하는 건 그 자체가 부끄러움입니다(고전15: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