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악사중주 제9번(라주모프스키 제3번)은 3곡의 라주모프스키 가운데 가장 밝고 힘찬 곡이다. 제1악장은 서주가 붙어 있으며, 제2악장은 매우 서정적이면서 약간 어두운 느낌이고, 제3악장에는 스케르초 대신 그라치오소(우아하게)란 지시어가 붙어 있는 미뉴엣을 두고 있다. 그리고 끊임없이 연주하는 4악장은 푸가가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이 악장을 두고, 당시 베토벤의 넘치는 에너지가 들어 있다 하여, 이른바 <영웅 4중주곡>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기도 하다. 라주모프스키 현악사중주의 세 곡을 일별해 보면, 제1곡은 거대하면서도 넓은 구성이 돋보이고, 제2번은 내성적이고 신중한 곡이며, 제3번은 제1번과 제2번의 장점을 두루 취한 곡으로 평가된다.
베토벤은 처음에는 그리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점차 음악적 재질을 인정받은 베토벤은 본 시대 동안 친구이자 재정적인 후원자였던 발트슈타인의 도움으로 1792년에 빈으로 진출하여 하이든으로부터 사사받았다. 귀족들의 후원을 본격적으로 받게 된 것도 이 무렵의 일로서 리히놉스키, 롭코비츠 등 숱한 귀족들로부터 후원을 받았다. 라주몹스키 백작은 대단한 음악 애호가로, 자신의 현악 사중주단을 거느리고 있었을 뿐더러, 그 자신이 제2바이올린 주자로 활약했다. 빈 주재 러시아 대사였던 라주몹스키 백작은 자신의 악단이 연주할 현악 사중주 작품을 의뢰했고, 이에 베토벤은 그의 현악 사중주에서 7번에서 9번까지 해당되는, 러시아적 정서의 세 개의 사중주, 라주몹스키 세트를 작곡했다. 이 세트의 세 개의 작품은 모두 긴 작품이며, 연주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이러한 사실은 이것들이 빈의 많은 아마추어 앙상블을 염두에 두고 간단한 양식으로 쓰인 베토벤의 초기 실내악으로부터 급격히 이탈하는 것을 나타내는데, 파트의 복잡한 레이어링과 주제의 야심찬 개발로 더욱 풍부하고 다양해 지지만, 연주자들에게는 기술적인 요구 사항이 많이 부과되며, 러시아 컨트리 댄스의 활기에 대한 지적인 푸가 주제의 균형과 같은, 급진적인 양식의 병치와 종종 일치하는 요동치는 감정 변화가 있다. 사중주단의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베토벤의 실내악을 많이 연주한 바이올리니스트 이그나츠 슈판치히는 자신들이 너무 이례적이고 도전적이라고 주장했고, 이를 연주할 수 있는 바이올리니스트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것들이 모두 1806년 4월부터 6개월 동안 작곡되었다는 것은 베토벤이 소유한 속도와 숙달을 드러낸다. 이 세트의 모든 작품은 1807년 2월에 처음 공연되었다. 베토벤 연구가인 폰 렌츠는 이 라주몹스키 세트를 “하늘에서 내려온 세 개의 기적”이란 말로 표현했다. 이 세트는 1808년 1월에 빈의 음악과 산업 상점 사를 통해 출판되었다. 헌정은 역시 라주몹스키 백작에게 이루어졌다. 라주몹스키 세트의 세 개의 작품 중에서, 이 악곡은 가장 밝고 명랑한 분위기를 갖고 있다. 대위법 기술도 뛰어나고, 그 끝 악장은 푸가와 소나타 형식의 혼합의 양식을 띠고 있어서, 중기의 베토벤의 진면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때로는 사중주라는 장르를 뛰어넘은 표현까지도 자아내고 있는데, 이러한 점에서 이 곡은 교향곡풍의 현악 사중주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한때 오스트리아 음악가들은, 베토벤의 교햐곡 제3번과 닮아 있는 성격, 특히 양쪽 끝 악장에서 닮아 있는 당당한 영웅적 분위기 때문에, 이 악곡에 "영웅" 사중주라는 별칭을 붙였었다.[3] 세트 중 앞에 있는 두 개의 사중주와는 달리 이 사중주에는 악보에 명시적으로 이름이 붙여진 "러시아 주제"가 없지만, 많은 학자들은 제2악장의 제1주제를 러시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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