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에 관한 충격적인 사실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에 관한 충격적인 사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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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폭격은 제2차 세계대전의
가장 파괴적인 만행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8월 6일과 9일에 각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그 결과는 재앙이었고 그 충격은 거의 8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느낄 수 있다.
사진을 통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에 관한
충격적인 사실들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두 번의 생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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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후 생존자 다수가 나가사키로
여행을 떠나 또 한 번의 파괴적인 폭격을 경험했다.
두 공격에서 165명 정도가 생존한 것으로 추정된다.
도시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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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죽도는 폭발 후 가장 먼저 자란 식물로
히로시마의 도시 꽃으로 꼽힌다.
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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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는 약 26만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현재, 나가사키에는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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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희생자 중 10%는 한국인으로 추정되며,
이들 중 일부는 일본 공장에서 강제로 일하며 일본군의 무기 생산을 도왔다.
피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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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일본이 함께 설립한 '방사선 효과 연구재단'은
9만 4천여 명의 피폭자들을 광범위하게 조사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연구된 집단 중 하나다.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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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폭발 지점으로부터 1마일 바로 아래에 위치한
6그루의 은행나무들은 피해를 견뎌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았고 계속해서 번성했다.
오늘날, 이 나무들은 일본에서 희망을 상징한다.
첫 미국 대통령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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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는 2016년 5월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재임 중 히로시마를 방문하여 역사를 만들었다.
그는 방문의 하나로 히로시마 평화 기념 공원과 박물관을
둘러보았는데, 이곳은 희생자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곳이다.
원폭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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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 피해자들을 가리키는 일본어는 히바쿠샤로,
말 그대로 '폭발로 피해를 본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평화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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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평화 공원은 원자폭탄이 떨어진 곳에 1955년 문을 열었다.
공원 내에는 기타무라 세이보가 만든 30톤짜리 동상이 있다.
동상은 오른손이 하늘을 가리키며 핵무기의 위험을 상징하고
왼손은 평화를 상징하기 위해 수평으로 뻗어 있다.
묵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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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평화 기념 공원에서는 매년 8월 6일
희생자를 추모하는 시간을 가진다.
일본 총리와 히로시마 시장은
오전 8시 16분(폭발 당시)에 연설을 하고, 1분간 묵념한다.
방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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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연구에 따르면 생존자들은
평균 210밀리시버트의 방사선에 노출되었다.
이에 비해 병원의 MRI는
단지 2밀리시버트의 방사선을 방출한다.
차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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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폭발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서 태어난 아이와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서 태어난 아이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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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에는 고야지 시, 노무자키 시, 산와 시, 소토메 시, 로지마 시,
다카시마 시 등이 시의 일부가 되면서 나가사키 시가 크게 확장했다.
기대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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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자생물학자 버트랜드 조던이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서 발생한 폭발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기대수명은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불과 몇 달 정도밖에 단축되지 않았다고 한다.
핵무기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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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는 여전히 핵무기 사용을 가장 강력하게
비난하는 도시 중 하나이다.
히로시마 시장은 핵무기 사용을 폐지하고 비난하는
평화를 위한 세계적인 조직의 회장이기도 하다.
인구의 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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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말까지 히로시마의 인구는 41만 명으로 늘어나
공격 이전의 인구를 넘어섰다.
현재 이 도시에는 1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교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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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L. 스팀슨 미국 전쟁장관은 교토를 원자폭탄에서 구해냈다고 한다.
스팀슨 장관은 트루먼이 옛 수도를 폭격하는 것을 만류했다고 하는데,
문화적인 중요성 때문이기도 하고, 신혼여행지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설 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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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 테러 이후, 일본에서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존 여부를 알아내기 위해
사설 탐정을 고용하는 것이 매우 일반적이 되었다.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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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의 충격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고,
그 결과 희생자들의 그림자가 도로에 각인되었다.
이 그림자들은 폭발로 인해 방출된 엄청난 열로 인해
형성되었으며 건물의 색상을 변경시켰다.
히로시마 평화 기념박물관에는 이러한 흔적들이 다수 남아 있다.
편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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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는 원폭 피해 생존자와 가족들을 따라다니는
편견이 끊이지 않는다.
방사능에 의한 돌연변이가 유전적이어서
전염성이 있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이런 사람들은 일자리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레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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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 레이더가 일본 영공에서
미국 비행기 일부를 탐지해 경고음이 울렸다.
그러나 기상 비행기에 폭격기가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미국 비행기가 히로시마에 도착하자 다시
대피하라는 경고가 나왔지만 대부분 무시됐다.
기밀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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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폭탄을 배치한 항공기인 에놀라 게이에 탑승한 12명 중
히로시마 임무의 진정한 목적을 알고 있는 사람은 3명뿐이었다.
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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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는 히로시마가 폭격을 당한 지
3시간이 지나서야 이것을 알게되었다.
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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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이 내뿜는 열은
태양의 온도와 비슷했다.
비극적인 타이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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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핵 공격을 당한 유일한 국가이다.
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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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완전히 재로 변해 있었기 때문에
희생자들의 시신이 모두 확인된 것은 아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