宋代의 程朱 中心의 철학 사상을 理學이라 한다. 北宋 諸儒들의 이론을 토대로 도가와 불가의 사상을 批判하면서 融合하여, 이를 중심으로 理氣철학을 체계화했다고 해서 이러한 규정을 한다. 이 시대의 철학은 道德的 修養의 문제, 다시 말해 道德的 主體性의 自覺과 그를 확립하고자 함이 중심 내용이었다.
宋代에는 중국 철학 사상 중요한 학술 논쟁이 있었는데, 朱熹와 陸九淵 그리고 朱熹와 陳亮의 논쟁이 그것이다. 주희와 육구연의 논쟁은 1175년 아호사의 모임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몇 년 후 주희는 진량과 왕패 의리에 대한 논쟁(1182-1192)을 벌이게 되었고, 이어서 육구연과 [무극이태극]에 대한 일대 역사적인 논쟁(1187-1189)을 하게 된다.
진량의 철학 사상은 그가 남긴 논저가 거의 없는 관계로 체계적인 연구도 이루어져 있지 않는 형편이다. 다만 그의 [상소문]과 [왕패의리지변]을 통해 철학사상과 관련된 내용을 파악해 볼 뿐이다.
[왕패의리지변]에 있어서 왕도와 패도, 의리와 욕망의 문제는 이미 孔荀과 二程에 의해서도 논의되었던 바인데, 주희와 진량은 이에 대해 經典을 놓고 논변한다. 육구연이 모든 것의 근본은 마음이라는 근본적인 입장에서 그의 철학을 전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량도 근본적인 철학적 입장이 분명하였던 것 같다. 진량은 당시 정주학파들이 주장하는 마음을 밝히고 본성의 자각을 중시하며, 개인적인 도덕적 수양의 면을 중시하는 도학자들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현실적인 사회 문제에 주목한다. 어떻게 하면 현실의 사회 문제를 바로 보고 그것을 극복해 나갈 것인가가 문제였던 것이다. 따라서 경전이나 제도의 연구에 매달리는 태도에 대해 비판하고 事功(현실적인 결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러므로 도덕적 수양과 행위의 정당성(의리에 맞는가 맞지 않는가)을 따지는 주희와는 근본적으로 같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논변은 사회 정치 윤리 군사 등 모든 문제에 관한 근본적인 입장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희와 진량의 논쟁은 주로 간략하게 다루어지고 있지만 그 내부의 충돌은 치열하다. 주희와 육구연의 논쟁은 같은 관념론적 입장에서 일어난 상이한 의견의 대립이었지만, 주희와 진량의 논쟁은 관념론이라는 범주 내에서가 아니라 근본적인 입장 차이에서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보편화된 철학적 개념으로 이들을 굳이 분류해 본다면 주희는 관념론적 입장에서도 객관적인 관념론이고, 진량은 유물론적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주희와 진량의 논쟁은 근본적인 문제에서 대립되는 두 노선간에 벌어진 다툼이기 때문에, 이들은 도저히 화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주희와 육구연은 1175년 여조겸의 주선으로 육구령(복제)과 함께 강서성 신주에서 강의와 토론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저 유명한 아호에서의 만남이다. 여기서 육구연과 육구령은 각각 詩로서 그들의 생각을 표현한다. 육구령은 마음을 옛 성현이 전한 것이라고 하여 주희의 주장에 상당히 부드러운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육구연은 마음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것으로 보고, 이론적인 공부를 통해서, 갈고 닦아서 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육구연의 이러한 강경한 입장이 주희와 정면으로 맞서게 된다. 주희는 육구연에게 그의 주장을 '지나치게 간략하다'라고 하고, 육구연은 주희의 주장을 '지리하다'라고 비판하게 된다. 이때부터 주희와 육구연은 철학적 관심의 근본 문제에 대해 견해 차이를 보였지만, 여기서는 그래도 상호 절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 뒤 1811년 육구연이 백록동 서원으로 주희를 방문해서 『論語』의 [里仁]편을 강의하게 되었을 때, 주희는 그 강의를 듣고 크게 칭찬하게 되었다. 그런 나머지 그들 둘은 서로의 학문적인 실력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관계가 되었으나, 철학적인 문제의 근본적인 입장 차이는 여전히 좁히지 못했다. 그 다음으로 墓誌에 대한 시비가 있었고, 이어서 無極과 太極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게 된다. [無極而太極]은 주돈이가 『周易』의 태극과 음양, 오행설을 종합하여 지은 『太極圖說』의 첫 문장이다. 육구연은 태극 위에다가 무극 두 글자를 덧붙인 것은 필요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주희는 [太極本無極也]에 대한 해석상의 문제 때문에 무극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것은 [由無而生有] 혹은 [自無極而爲太極]으로의 해석이 불가함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태극에 대한 이러한 해석의 차이로 신유학의 방향이 각기 결정되게 된다. 태극을 理로 보는 理學, 태극을 心으로 보는 心學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각기 다른 주장은 세계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근본적인 입장의 차이 때문이다. 다 같이 관념론적인 견해를 견지하면서도 대립된 주장을 하는 학설에 대해 우리는 이들을 객관적인 관념론과 주관적인 관념론으로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본고에서는 주희와 육구연의 논쟁의 배경과, 논쟁의 중심 문제인 무극 태극 논쟁에 대해 알아보고 두 사람의 학문적 차이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Ⅱ. 朱·陸 論爭의 思想的 背景
주희와 육구연 사이에 학술 논쟁은 세 번 있었다.
첫째는 주희와 육구연이 鵝湖에서 만났을 때였는데, 각자가 宗旨(가르침의 근본 취지)를 거론하였을 때, 서로 달라 충돌이 생기게 되었고,
둘째는 曹立之에 대한 墓誌의 글 때문이었는데, 曹立之가 원래는 육구연의 문하에 있다가 張南軒의 글을 읽고, 주희의 문하로 개변한 관계로 주희가 쓴 조입지의 묘지의 글로 인해 사이가 악화되었다. 그리고 셋째는 1187년에 [태극도설]에 관해 논변하게 되었을 때, 글머리의 [無極而太極]에 대한 두 사람의 철학적 입장이 합치될 수 없음을 인정하였고 그에 따라 논쟁이 심화되었다.
이 글은 철학적 의의를 가지면서 동시에 두 사람 사이에 가장 치열하였던 세 번째의 논변에 대해 알아 보고자 한다. 앞에서도 언급이 되었지만, 이들이 종신토록 의견을 좁히지 못한 이유는 세계관의 차이에서 온 것이라고 하겠다.
주희와 육구연이 사상적인 견해차를 드러 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마음(심)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 때문이다. 주희는 心을 未發(드러나기 이전)심과 已發(드러난 이후의)심으로 나누어서, 미발심을 性, 이발심을 情이라 한다. 여기서 심을 드러나기 이전과 드러난 이후로 구분 하는 것은 體用의 관계와 같다. 조리의 조리, 이유의 이유로 소급한다면 유일한 원리가 있을 것이므로, 그것을 理一이라고 하고, 이러한 이가 개별화(주관화)될 때 性이되는 까닭에 性卽理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성즉리는 곧 天卽理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주희는 心統性情이라 하여 마음(심)이 미발심과 이발심을 통괄하여 거느리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육구연의 마음(심)에 대한 입장을 다르다. 그가 주장하는 심은 本心이며, 도덕적인 이이며 우주의 근원으로써 道이다. '四端은 곧 이 心이요, 천이 나에게 부여한 것은 곧 이 心이다. 사람은 누구든지 이 心을 가졌으며 心은 이 理를 구비하였으므로 心卽理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육구연은 미발심을 제외한 이발심만을 인정한다. 이것은 두 사람이 벌인 논쟁의 실마리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단서라고 하겠다. 바로 미발심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 그들의 근본적인 차이인 것이다. 미발심의 인정과 불인정 문제는 바로 '무극이태극'에서 無極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주희는 무극과 태극을 다 인정하지만 육구연은 무극을 인정하지 않고 태극만을 인정하는 데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주희는 이 세계를 形而上과 形而下로 이분해 본다. '형이상이 理요, 형이하가 氣'라는 것이다. 그리고 '형이상자는 모습도 없고 그림자도 없다. 이것이 理다. 형이하자는 실상도 있고 모양도 있다. 이것이 氣이다' 이때의 기는 현상의 구체적인 사물을 의미한다. 그러나 만일 이 理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氣 즉 사물도 존재할 수 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형이상자로서의 理를 형이하자인 氣의 원인으로 간주하여, '본원에서 따져 본다면 먼저 이 理가 있었다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천지에 先在한 것은 필경 理이므로 이 理가 있고서 천지가 있게 되었으며, 理가 있고서야 氣가 流形하고 만물이 발육한다.'고 본다. 이렇게 해서 생성된 사물은 현상계에 '존재하자마자 곧 理가 그 속에 내재해 있다' 현상의 사물속에 내재해 있는 理를 우리는 조리로서의 理라고 한다. 주희에 의한다면 모든 범주의 대상이 心을 가지지는 않더라도 자기의 독특한 본성인 이 理는 가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말미암아 사물은 그 자신이 존재하기 이전에도 사물의 理는 존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주희의 이러한 입장은 태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태극은 형이상의 도다' '태극은 方所도 없고 形體도 없다'라고 하여 理의 세계와 동일하게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사물마다 다 하나의 극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궁극적인 理이다. 천지 만물의 理를 총괄하는 것은 바로 太極'이라는 것이다. 태극은 전체로서 우주 만물의 총화인바, 이것은 태극의 초월성과 존재의 근거 원리를 의미한다. 동시에 태극은 개개의 각 사물가운데 내재해 있는 사물의 條理이기도 하다.
이처럼 주희는 세계 해석에 있어서 아주 독특한 이원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다. 형체(모양)도 없고 방소(위치)도 없고 동정(운동)도 없는 理와 태극이 형체와 방소와 동정을 갖는 氣와 음양의 주재자가 되고, 만물의 근원자가 된다는 주장은 이해하기에 그리 용이한 문제는 아니다. 만일 이와 기, 태극과 음양사이에 어떤 간격을 설정해 두고, 이들 각각의 존재 방식을 가지고서 따진다면, 주희의 주장에 대한 의문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육구연의 理도 주희와 마찬가지로 자연의 현상계를 초월하여 있으면서 우주 만물을 주재하는 실체로 이해된다. 그런데 주희와 다른 점은 육구연은 이 실체를 곧 우리의 마음(心)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理를 道라고 하기도 한다. 육구연의 理에 대한 견해를 좀더 파악하기 위해 侯外廬의 『중국사상통사』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육구연의 理 혹은 道는 천지인의 三極을 창조한다. 모든 자연 현상은 도의 파생물이다. 모든 자연 법칙은 吾心에 근본한다. 그러므로 [心卽理]이다. 이에 의하면 우주에 가득찬 것은 이 理요, 이 心인 것이다. 심ㅑ도ㅑ이는 곧 神의 대명사이다.
② 인간과 천지는 병립하는 삼극이며 이에 순종하는 것이다. 천에 있는 태극은 神權이요, 지에 있는 황극은 황권이며, 자기의 인극은 此心이다.
③ [形而上者 謂之道 形而下者 謂之氣]에 근거하여 태극과 도를 혼연한 범주로 보고, 태극은 모든 존재와 현상 변화의 근본이며 우주에 가득한 이요, 천지 만물의 모든 운동과 변화는 태극에서 파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태극과 道ㅑ理ㅑ本心은 완전한 것이요, 신이다.
④ 그의 道와 理는 우리가 선천적으로 具有한 것이므로 우리를 떠날 수 없다.
이상에서 육구연의 심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드러났다고 하겠다. 그의 심은 곧 본심을 말하며, 이 본심이라는 것은 맹자의 四端說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육구연의 理는 도덕적인 理이며, 우주 만물의 근원으로서 道인 것이다.
그러므로 육구연이 [心卽理」라고 할 때의 理자는 규범적인 의미가 더 강조되어 있다. 이치 법칙이라고 풀이 하더라도 마음의 이치이고 마음의 법칙이라는 점이 더 강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계 해석에 대한 주희와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주희는 형이상자와 형이하자로 엄격히 구분해서 理와 氣를 각각 설명한다.
특히 그의 理는 형이상자로서 초경험적인 존재의 근원이며, 동시에 생성된 만물에 내재하는 조리로서의 理이다. 초월적이면서 내재자라는 독특한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육구연은 이러한 구분이 없다. 그의 理는 우리 마음을 떠날 수 없는 것이고, 마음이라는 것의 현상이므로, 현상 그 자체가 理인 것이다. 그러면서 이 理가 또한 초월적이면서 만물을 주재하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현상의 氣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않은 초월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理를 所以然之故와 所當然之則으로 분석해 본다면, 육구연의 理는 소당연지칙만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주희는 두 세계, 즉 理와 氣이라는 이원적 구조로 파악하는데 반해, 육구연은 실재란 오직 한 세계 즉 心의 세계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입장차이는 [無極而太極]이란 명제에 대해서도 견해가 일치 할 수 없음을 미리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Ⅲ. 朱·陸 論爭
주희와 육구연의 논쟁은 무극 태극 논쟁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의 내용을 알기 전에 태극에 대해 처음 언급한 태극도설에 대해 알아보고 무극 태극 논쟁에 대해 알아 보기로 한다.
1. 太極圖說
가. 太極
태극이란 말은 『周易』[繫辭傳]의 [역에는 태극이 있는데, 이것은 양의를 낳고, 양의는 사상을 낳으며, 사상은 팔괘를 낳는다.]라는 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서의 양의란 물론 음과 양을 가리키고, 사상은 양의 곧 음과 양에서 갈라져 나온 태양, 소음, 소양, 태음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네 계절을 말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팔괘는 건 태 이 진 손 감 수 곤을 가리킨다. 팔괘는 삼효로 이루어진 소성괘이고 이것은 다시 서로 겹쳐져서 대성괘인 64괘로 확대되어 나간다. 이 체계가 주역에서 말하고 있는 우주의 발생과정과 세계의 모습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 모든 과정의 최초 근원, 최고의 정점에다 올려 놓은 太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極字는 본래 건물 지붕의 맨 꼭대기에 있는 마룻대의 이름으로 쓰였는데, 송대 신유학에서 이를 우주 만물의 최고의 이상적 모범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극자의 의미는 그 위에 무엇을 더 할 수 없는 가장 끝(至極)이라는 뜻도 있고, 한가운데라는 中자의 뜻도 있다. 극자 하나에 存在와 當爲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다 太字를 앞에 덧붙여 더욱 지극하고 근원적 이라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앞서 살펴본 우주 발생 순서를 역으로 생각해 보면 팔괘 사상 음양이 모두 태극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陰陽이라는 상호 모순 반발하면서도 밀접한 관계하에서 서로 보완적이지 않으면 않되는 두 개념이 태극에서 통일이 이루어 진다. 그러므로 태극은 우주 만물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周易의 이러한 우주관을 이어받아 거기에 五行說을 더하여 새로운 우주관을 정립한 것이 주돈이의 [태극도설]이다. 이러한 사상은 그후 주희에 이르러 태극이 理로 해석되게 되었다.
나. 太極圖說
주돈이는 주역의 태극과 음양에다 오행을 융합시켜서 [태극도설]을 지었다. 그런데 도설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태극도]의 유래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주희는 이것도 주돈이가 지은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노사광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다만 [태극도설]에서 주륙논쟁의 실마리가 된 부분만을 검토하고자 한다.
태극도는 다섯층으로 나뉘어져 있고, 이에 대한 설명(태극도설) 또한 크게 다섯 문단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림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도설이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그림을 세 단계로 구분해서 보는 견해와 다섯 단계로 보는 견해가 있다.
세 단계로 보는 입장은 그림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림의 첫째 단계는 무극이태극이다. 둘째 단계는 무극이태극에서 음양 오행이 성립되는 과정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셋째 단계는 만물 중에서 빼어난 기운을 얻어 영특한 것은 인간이 되고, 그 외에 만물이 생성되어 나옴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다섯 단계로 구분해서 보는 견해는 다음과 같이 각각 설명한다.
그림의 첫째 층은 無極이고, 둘째 층은 음양을 품고 있는 太極이며, 그 중에서 검은 색은 陰을 나타내고 흰색은 陽을 나타낸다. 그리고 셋째 층은 다섯 개의 작은 원으로 오행을 나타낸 것이고, 그 아래에 별도로 있는 하나의 작은 원은 오행의 묘합을 뜻한다. 넷째 층에 있는 원은 하늘과 땅의 理氣를 나타낸 것이며, 다섯 층의 원은 만물이 변화되어 생겨나는 것(化生)을 나타낸다.
세 단계로 구분하는 것은 주희의 견해에 가깝고, 다섯 단계로 구분하는 것은 육구연과 같은 해석을 가능케 해 준다고 하겠다.
『太極圖說』의 주요 부분을 주희의 입장에서 풀이 하면 다음과 같다.
『무극(지극하여서 아무런 한계가 없음)이면서 태극이다. 태극이 움직여서 양을 낳고 움직임이 끝에 가서는 고요해지고, 고요해져서 태극은 음을 낳는다. 고요함이 끝에 가서는 다시 움직인다. 한번 움직이고, 한번 고요해지는 것은 서로 뿌리가 되어 음으로 갈라지고 양으로 갈리니, 거기서 양의가 세워진다. 양이 변화하고 음이 이에 결합하여 물, 불, 나무, 쇠, 흙을 낳는다. 이러한 다섯 기운이 순조롭게 퍼져서 사 계절이 운행된다. 오행은 하나의 음양이요, 음양은 하나의 태극이다. 태극은 본래 무극이다. 오행이 생김으로써 그것은 제각기 자기 본성을 가지게 된다.무극의 참됨과 음양, 오행의 정수가 묘하게 엉기게 된다. 그리하여, 하늘의 도는 남성이 되고, 땅의 도는 여성이 된다. 두 기운이 서로 감동하여 만물을 변화시키고 생겨나게 한다. 그리하여 만물은 생겨나고 또 생겨나고 해서 변화가 무궁하게 된다.』
다. [無極而太極]에 대한 해석상의 문제점
태극도설에 대한 주희의 해석이 주돈이의 『태극도설』의 본래 뜻과 합치하느냐 하는 점이다. 이러한 논의는 육구연의 주장에 대한 간접적인 근거를 검토해 보는 의미도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논의는 주희 해석의 부당성을 지적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위 도설의 글 중에서 중심이 되는 중요한 개념의 배열 순서를 보면 無極 太極 陰陽 五行 순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다시 음양 오행 태극 무극 순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선후 관계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주희는 '太極本無極也'를 '태극은 본디 무극이다'라고 풀이를 하고 있는데, 本字에 좀더 주의를 해보자는 것이다. '태극은 무극에 근본을 두고 있다.'고 풀이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 아닌가. 따라서 無極을 근거로 해서 太極이 생겨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태극도』가 道家에서 유래하고 있다는 것과 주돈이가 무관념을 중시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며, 이것은 또한 修養의 주정공부와도 관련이 있다고 보여진다.
2. 無極 太極 論爭
가. 朱熹의 해석
『태극도설』에서 첫머리에 '무극'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고, 또 '태극본무극야'에 대해서도 분명한 해석이 없다. 이로 인해서 '무극'과 '태극'의 관계에 대해 문제점이 야기된다.
[無極而太極]에 대한 논란은 육구연과의 논쟁에 앞서 이미 있었다.
육준산이 『태극도설』은 주돈이의 작이 아니므로 『통서』와 다른점이 있다고 한데서 논변이 발생한다. 대개 '太極이라는 것은 그 자체의 뜻이 이미 도의 본원이다. 무극 두字의 더함을 기다려 초월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無極이란 말을 쓰는 것은 머리위에 머리를 얹는 것이다'라는 것이 육준산의 주장이다. 이에 대해 주희는 '無極 두 글자를 붙인 것이 바로 허무하고 높은 것을 좋아하는 폐단이 있다고 하였는데, 알지는 못하겠으나, 존형이 말하는 太極은 形態를 가진 것입니까?'라고 되묻는다. 이것은 태극이 형태가 없으면서도 이치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한편으로는 無極이라는 표현을 덧붙임으로 태극이 형태가 없음을 드러내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서 하나의 논점으로 '太極의 밖에 또 다시 無極이 있는 것이 아니다.'를 드러낼 수 있다. 주자에게 있어 太極은 초월적이면서 창조적인 실재로서 만물의 근원이다. 그러한 태극은 無聲無臭 無方所 無形狀이다. 태극의 이러한 性을 강조하기 위해서 無極이라는 표현을 앞에다 두었다는 것이다. 만일 무극을 말하지 아니하면 태극이 一物과 같이 생각되어 만물의 근본이 될 수 없으며, 태극을 말하지 아니하면 무극은 空寂에 떨어지므로 萬化의 근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하다면 주희도 太極의 바깥에 또 다시 無極이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太極은 『周易』[繫辭]에 있는 말이고, 無極은 노자의 『도덕경』28장에 나온다. [무극이태극]이라는 궁극적인 실재를 완전한 원으로 표시하고 태극의 動靜에 의하여 陰陽理氣가 생하게 되며 그 理氣의 變合에 의하여 수화목금토의 오행의 氣가 각각 성립하게 된다. 무극의 眞과 오행의 精이 妙合而擬하여 사람과 만물이 化生한다고 보는 것이 태극도설에서 보여주고 있는 우주 발생관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五氣에 의하여 만물의 형체가 형성되었으나, 太極은 이미 그들 내부에 內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 해석 방식을 육구연은 인정할 수 없었다.
2) 육구연의 해석
형이상과 형이하, 이와 기, 태극과 음양의 명확한 구분없이 心이 곧 本心이고, 본심이 理이며, 理가 곧 道라고 생각하는 육구연의 이론 체계에서는 무극과 태극의 관계에 대해서도 주희가 펴고 있는 論旨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육구연은 육준산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주희를 논박한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태극의 이치는 사람들이 말하고 말하지 아니함으로 인하여 바뀌지 않는다. 종래 아무도 太極을 따로 하나의 물건이 된다고 인식하지는 않았다. 주희가 말한 대로라면, 주염계가 사람들이 이같이 잘못 인식할까봐 '無極' 두 글자를 덧붙혔다는 설은 역시 이치에 닿지 않는다.]... [만일 周?溪가 과연 배우는 자가 형기에 빠질까 두려워서 그렇게 했다면 따로 형용사를 덧붙혀서 태극이 형기가 아님을 표시하였을 것이다. 예컨대 『시경』의 無聲無臭와 같은 형용어를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태극 위에다가 무극을 덧붙혀서는 안되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주희는 줄곧 이론을 짜맞추는데 맛들여, 진실한 체험과 깨달음을 갖지 못하였다고 비꼬기 시작한다. 그리고
[태극이 究竟至極을 가리킨다면 위에 다시 '무극' 두 글자를 덧붙일 필요가 없다. 주염계설은 노자의 학이며, '무'자가 위에 탑으로 쌓인 것이다. 노자가 언제나 먼저 無자를 말하고 나서 그 뒤에 有자를 말했기 때문이다]...[무극이 만일 단지 방위나 장소가 없음과 형상이 없음을 가리킨다면 인간은 감히 말할 수 있는 곳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주희는 아마 禪宗을 배운 탓으로 이와같은 논변을 펴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태극의 밖에 또 다시 무극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쟁점으로 설정한다면, 위에서 알 수 있듯이 둘다 太極의 바깥에 無極을 따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므로 태극이 무극으로부터 나왔다(自無極而爲太極)는 주장도 불가능하다. 이점에서는 논쟁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太極 자체에 대한 해석상의 문제이다. 주희와 육구연은 다같이 초월성과 창조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주희가 태극을 초월적인 동시에 내재자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육구연은 초월적인 태극의 내부에서 현상 만물(내재적인 것)을 설명하려고 한다. 논리적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주희의 논리체계로 본다면 개별적인 이에서 所當然之則만을 주장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無極' 두 글자에 대해서 육구연은 필요 없다는 주장이고 주희는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Ⅳ. 朱·陸의 學問的 差異
주자의 사유 방법은, 처음에 二를 설하며 그 후에 一을 설한다는 식으로, 모두가 對立의 통일, 矛盾의 통일이라는 틀로 행해졌다.이에 대하여 육상산의 방법은 단순히 一을 설하며 통일면만을 주장하고 있다. 이를테면, 주자는 居敬과 窮理를 병요하여, 주체적 경험 인식과 주지적 궁리의 교호 매개에 의하여 활연 관통을 구하는 것이지만, 상산은 주체적 인식 뿐이며 주자의 주지적 궁리를 지리라하여 엄격히 배척한다. 그것은 반성지에 의하여 아무리 일사 일물의 理를 궁구하더라도, 그것은 그저 주체적 경험 인식의 순일성을 깨트릴 뿐이며, 이것으로써 활연관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자는 尊德性과 道問學을 함께 존중했지만, 육상산은 尊德性만을 존중했다는 것이 된다. 또 주자는 마음이 성정을 통괄한다고 보고, 성정의 모순, 인심 도심의 대립을 인정하는 까닭에, 마음이 그대로 이라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性卽理를 주장한다. 그러나 상산은 마음 속의 모순 대립을 논리적으로 표출하지 않고, 마음의 진실인 본심은 매우 쉽사리 포착할 수 있다고 보는바, 이러한 본심은 누구나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이 마음은 모두 이를 갖추고 있고, 또한 마음과 이에 둘이 있을 리가 없으므로, 心卽理라고 주장했다. 주자에게는 그렇게 되어져야 할 것으로서 예정되어 있는 것이, 상산에게 있어서는 이미 그렇게 된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Ⅴ. 結論
육준산과 육구연은 『太極圖說』이 주돈이의 作이 아니라고 본다. 이말을 뒤바꾸어서 만일 『태극도설』을 주돈이가 지었다면 그가 '無極' 두 글자를 太極 위에다가 썼을리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태극도설』은 노자적 학풍의 그 누가 썼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無極이라는 말은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주희는 만일 無極을 말하지 않는다면 太極이 하나의 사물과 같이 생각되어 만물의 근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얼핏보아 두 주장의 본질적인 내용은 다른 점이 없는 것으로 파악되기 쉽다. 太極의 밖에 無極이 있느냐 없느냐하는 논점에서 본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이것은 '無極' 두 글자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세계 해석에 대한 근본적인 입장 차이에서 기인 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육구연은 이를 이중구조로 파악하고 있지 않다. 氣 그대로가 道인 것이다. 주희는 음양의 所以를 道 혹은 理라고 보는 반면, 육구연은 음양이 곧 道이고 理라고 본다.
주희의 기본 취지는 형이상학 및 우주론을 포함하는 종합적인 체계로 세계를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육구연은 초경험적인 주체로서 心을 최고의 실재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곧 세계의 근원인 것이다. 그러므로 心이 곧 理이고, 太極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太極이 우주 만물의 근원이며 생성과 변화의 실체라는 주장은 쌍방이 승인할 수 있다. 그러나 無極까지 그렇다고 하면 받아들일수 없다는 것이 육구연의 입장이다. 주체적인 의미의 心까지를 無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육구연은 주희가 무극의 이러한 성격을 인정하는 것으로 은연중에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주희도 무극의 실체성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勞思光은 그의 『중국철학사』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 짓고 있다.
주희와 육구연의 논쟁은 두 종류의 철학 이론의 충돌이다. 더욱 자세히 말하여 '객체적 실재'[客體實有]를 내세우는 것과 '주체적 실체'[主體實有]를 세우는 것의 두 가지 다른 철학 형태의 충돌이다. 중국 유학사 내부에서 말하면, 孔孟을 계승한 것과 『역전』, 『中庸』을 계승한 두 방향의 충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공부의 다름으로 말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