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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 구라타 하쿠조(倉田百三)의 『스님과 그 제자(出家とその弟子)』
한국불교융합학과 석사1학기 김태훈
출가자(出家者)-여기서 정의하면, 출가 이전의 일체의 세속적 관계를 떠난 종교적 수행자-도 인간의 몸을 지니고 삶을 살고 있는 한 보통의 사람들이 겪고 느껴야만 하는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고뇌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전제에 이견(異見)을 가지고 그들에게 평범한 사람들 이상의 타고난 경건함 내지 일부 신격화에까지 도달한 비세속성을 선제적으로 부여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각 종교에서 다다르기를 희망하는 이른바 최상의 경지에 다다르기 전까지는 앞의 전제를 완전히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종교관련 문학 및 예술은 나름의 매력이 있다. 출세간에 나타나는 인간적 갈등 및 종교적 법열과 상징성 그리고 에로티시즘은 언제나 관심 가는 소재이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문학작품 및 현대의 영상작품들이 이러한 출가자 또는 수행자의 인간적 고뇌 및 극복을 주제로 묘사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구라타 하쿠조(倉田百三, 1891~1943)의 희곡 『스님과 그 제자(出家とその弟子)』 는 저자 나이 만26세 때인 1917년에 출판된 것으로서 현재까지도 일본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본 희곡을 통해 작중 인물인 정토진종의 개조인 신란(親鸞)의 인간적 이미지를 정착하고, 그 제자 이자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유이엔(唯円)의 저술인 『탄니쇼(歎異抄)에 대한 일반의 관심도 높아졌다고 한다.
먼저 본 희곡의 극적 구조 및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본 희곡은 서곡과 6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곡은 상징적인 캐릭터를 통한 인간의 회심(回心)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제1막은 신란과 어린 유이엔의 만남 및 현실과 선악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에몽-유이엔의 아버지-의 악인정기설(惡人正機說)에 기초한 회심을 다루고 있다. 제2막은 14년이 지난 후에 크게 번성한 교단과 출가하여 신란의 신실한 수좌가 된 유이엔과 정토종의 타력(他力)에 대한 교리를 묘사하고 있다. 제3막은 아버지와 의절한 젠란-신란의 친아들-의 인간적 고뇌와 방황 및 용서에 대한 갈구, 유이엔을 통한 부자간의 화해 중재에 대한 신란의 태도가 담겨 있다. 후속 장에서 유이엔의 연인이 되는 가에데도 등장하는데 본 희곡의 여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가에데의 활약(?)에 대한 암시가 없는 것이 연극의 드라마적인 관점에서는 아쉬움이 있다. 제4막은 유이엔과 가에데의 애절하면서도 순수한 사랑이야기와 젠란의 연인이자 앞선 두 주인공의 사랑의 후원자라고 할 수 있는 아사카의 방황하는 젠란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나고 있다. 제5막은 본 희곡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데, 기생인 가에데와의 교제에 대한 교단 내부의 비난과 이에 격렬히 저항하는 젊은 유이엔의 모습, 그리고 이에 대한 스승으로서 신란의 자성어린 조언과 종단 내부의 반성 및 화해가 그려지고 있다. 최종 제6막은 제5막으로부터 15년 후로써 90세의 고령이 된 신란의 임종 및 젠란과의 화해를 추진하는 유이엔 부부의 모습이 그려진다. 제4막과 제5막의 갈등은 종교적인 제약과 현실적인 장애도 함께 묘사되어 있는데 현실적인 장애극복과정은 생략되어 있어서 재미를 배가할만한 드라마적으로 중요한 스토리 하나가 중간에 떠버리는 아쉬움이 있다.
본 희곡의 주제를 들면, 전편에 걸쳐 드러나는 신란계 정토불교의 종교적 견지인 악인정기설을 배경으로 주인공 유이엔이 출가자로서 겪는 청춘의 애정문제를 중심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본 희곡의 한글역자는 이 점에 주목해서 ‘청춘의 글’이라고 서문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 외에도 권력화 세속화된 대형교단의 보수성과 교단의 태동기에 지향한 순수성과의 충돌, 출가자에겐 장애라고도 할 수 있는 인간적 관계, 즉 부자관계, 남녀관계에서 드러나는 갈등과 해결 등도 들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악인정기설은 ‘탄니쇼’ 제3장에 서술된 법언으로서 정토진종의 핵심적인 교리이자 외부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이기도 하다. 본 희곡에서는 신란의 인간적 겸허함과 절대적 타력신앙에 기초하여 이를 묘사하고 있다. 유이엔이 겪는 종단 내부와의 갈등에서 대해서는 교단 내의 탈권력/탈정치의 관점에서 접근한 견해가 있다. 출가를 교단 밖의 일반정치와는 일정하게 선을 긋는 탈권력/탈정치라고 전제하고, 교단 밖에서의 세속정치에서만이 아니라 교단 안에서도 그 정신이 구현되어야 한다고 논한다. 본 희곡 제5막 제2장에서 신란이 유이엔을 비난하는 대중들에게 교단의 초발심을 상기시키며 용서를 권하고 있는 모습을 이런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승려결혼을 허용하는 비승비속인 신란 교단의 특징을 감안할 때 유이엔의 애정문제에 대한 교단의 비난은, 여성과의 교제 자체에 대한 비난이라기보다는 연애에 몰입한 유이엔의 예불불참 등 수행자로서의 의무에 태만한 모습과 사회하류층이자 심지어 도덕적 경멸의 대상인 기생과의 연애에 대한 사회적 시선을 감안한 비난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현실과 잠시 비교해 보면, 교단 내의 권력화는 불교뿐만 아니라 타 종교에서도 심각한 행태를 보여 개신교 내 보수파의 권위주의적 색채를 가리켜 교회 안의 ‘파시즘’이라고 까지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현실 교단에서 교회의 대형화 추구 및 세습 등의 문제로 더욱 확대되고 있다. 본 희곡에서 나타난 일본불교의 특징 중의 하나가 사찰의 세습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한번쯤 되새겨 볼 가치가 있다고 본다. 또한 현재 한국불교 내의 문중이라는 파벌도 같은 관점에서 고려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편 유이엔의 내적 갈등은 매우 치열하다. 제5막 제1장에서 기생과의 애정을 비난하는 교단의 원로들에게 반발하며 마치 이성을 잃은 듯이 퍼붓는 연애의 기쁨과 아름다움에 대한 열렬한 호소는 애정문제가 법열의 경지로까지 승화하는 것 같은 모습마저 보인다. 실제로 희곡 집필 당시 원작자의 나이와 비슷해서인지 치기어린 듯 스스로 감성의 극에 달하는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애정의 환희에 대한 젊은 수도자의 이러한 모습은 이탈리아의 기호학자이자 소설가인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1932~)의 데뷔작인 『장미의 이름(Il Nome della Rosa, 1980)』에서 작중 화자인 수도승 아드소가 노년에 이르러 수련수사 시절 저질렀던 죄-하층민 소녀와의 우발적인 성관계-를 고백하는 장면에서 비슷하게 나타난다. 그는 소녀와의 육체적인 만남은 수도승인 그의 입장을 고려할 때 어느 모로 보나 사악함에도 불구하고, 그 후 소녀에 대한 그의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은 지고하고 순수한 종교적 법열과 다름없음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스승인 신란과 그 아들인 젠란과의 갈등은 도덕적 문제와 종교적 관점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역사적 사실에서는 문하생들에게 염불을 버리도록 권유한 젠란의 신앙적 일탈에 대한 신란의 분노가 부자관계의 의절로 이어졌지만, 희곡에서는 신란과 젠란의 갈등을 종교적 이라기보다는 젠란의 파행적 애정문제에 따른 도덕적 갈등으로 나타내고 있다. 유이엔의 애정문제와 대응시키려는 저자의 의도로 보인다. 화해를 바라면서도 주변과의 관계 및 사회적 시선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젠란의 모습은, 주변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외곬으로 내달리는 치기어린 유이엔과 비교했을 때, 장년의 나이에 따른 성숙함이 어쩔 수 없이 고려하게 되는 사회적 장애에 대한 인식과 맞물려 오히려 해결을 더 어렵게 만든다. 제4막 제2장에서 아사카가 독백으로 내비치는 정열이 식은 인생에 대한 자조로 이러한 점을 에둘러 묘사하고 있다. 신란의 임종에 즈음하여 신란의 용서에 이은 부처님을 믿느냐는 질문에 대한 젠란의 주저와 부정에 가까운 대답은 갈등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인생의 막이 내림을 의미한다. 염불만으로 정토에 이른다는 정토종의 타력신앙에도 불구하고 고령에 맞이하는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토로하는 신란의 최후까지 인간적인 면모와 육친의 죽음 앞에서도 한편으로는 신앙적 불확실성을 어찌할 수 없이 드러내는 젠란의 당혹스러움은 인간으로서 서로 다른 모습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
임종의 순간까지 육친과 완벽한 화해를 이루지 못하는 젠란과 비교할 때, 신란을 최후까지 봉양하고, 유언으로 교단을 맡게 되는 유이엔과 신란의 관계는 사제관계를 넘어선 신앙적 부자관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이엔에게 자신이 서자임을 고백하는 젠란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인 열등감은 신란의 신앙적 적자인 유이엔에게 밀려 임종에 이르러서까지 방외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한걸음 더 나아가보면 소위 모태신앙(母胎信仰)에 대한 수용과 갈등의 모습으로까지 확대하여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출가자가 남녀 간의 애정문제로 겪는 젊은 시절의 갈등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에서도 예로부터 문학 및 기타 표현예술로 여러 차례 구현되어 왔다. 대표적인 문학 및 영상작품으로는 삼국유사 권3에 나오는 “조신(調信)설화”와 그것을 소재로 한 김동인과 이광수의 현대소설, 그리고 이광수의 현대소설 “꿈”을 영상화한 신상옥 감독과 배창호 감독의 동명 영화가 있다. 김기덕 감독의 종교영화인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도 넓게 볼 때 같은 범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가톨릭의 신부를 주인공으로 한 박찬욱 감독의 “박쥐”도 영화주제의 일부로서 차용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조신설화는 먼저 김동인이 1936년에 “조신의 꿈”이라는 설화의 국역 수준인 단편소설로 발표하였고, 그 후 이광수가 1947년에 중편소설 “꿈”으로 개작하여 발표하였다. 신상옥은 이광수의 중편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1955년에 직접 시나리오를 써서 영화를 만들었고, 1967년 오영진의 시나리오로 동명의 영화를 리메이크하였다. 그 후 1990년에 배창호가 삼국유사를 원전으로 하고 이광수의 중편소설 “꿈”을 원작으로 함을 명시하면서, 이명세와 시나리오를 공동집필하고 영화화 하였다.
본 희곡이 현실세계에서의 애정과 갈등을 다룬다면, 조신설화는 꿈을 통하여 인생을 두 번 살아보는 환몽구조(還夢構造)를 보이고 있다. 깨어났더니 꿈이었다는 환몽구조는 그 원천이 불경 “잡보장경(雜寶藏經)”의 바라나 비구 설화이고, 당나라의 전기소설(傳奇小說)인 “침중기(枕中記)”, “남가태수전(南柯太守傳)”과 우리나라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九雲夢)”에서도 보인다. 전작들에서 꿈속의 내용이 매우 낭만적이고 귀족적인 삶을 그리고 있는데 반하여, 조신설화의 꿈속은 아주 비참한 빈민의 삶을 그리고 있어 더욱 현실감을 주고 있다.
조신설화에서는 꿈을 깨고 나서 머리털과 수염이 하얗게 세고 삶의 의욕을 잃었다는 것이 중요한 메시지이다. 조신설화의 감동은 사랑의 집착은 세속의 삶에서 아주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고, 이것이 없으면 그저 불경 속의 허다한 교훈적 설화에 불과한 것이다. 조신설화를 차용한 후대의 창작물에 인생은 한바탕 꿈이니 사랑의 집착에서 깨어나라는 불교적 지혜는 표현되었지만, 사랑의 욕망을 버리는 것은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인간적 고뇌가 표현되지 못하여 문학성을 살리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 꿈에서 겪었던 치열한 현실을 그저 백일몽으로 치환함으로써 문학적 승화를 이루지 못하고 허무함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김기덕의 “봄 여름...”(2003년)과 박찬욱의 “박쥐”(2009년)는 각각 불교의 승려와 가톨릭의 신부를 주인공으로 하여 그들이 세속화되는 과정과 구원의 탐구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는 두 수행자가 인간의 존재와 구원을 탐문하는 과정은 공통점이 있지만, 구원에 대해서는 상이함을 보인다. “봄 여름...”이 자기성찰에 의한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면 “박쥐”는 초월적 신을 소거한 인간적 구원이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본 희곡의 기저에 흐르는 타력신앙과 비교할 때, “봄 여름...”에서 나타나는 자력신앙적인 극복의 과정이 다르다. 또한 “박쥐”에서 가톨릭 신부인 주인공이 신에 의한 구원에서 일탈하여 과학과 스스로를 구원자로 탈바꿈하고자 하는 모습은 가톨릭의 신앙과 앞선 정토종의 타력신앙과의 유사점에서 비교해 볼 때 더욱 흥미롭다.
앞서 구라타 하쿠조(倉田百三)의 희곡 『스님과 그 제자』를 몇몇 문학작품 및 영상작품에 나타난 출가자의 인간적인 고뇌와 구원을 모습들과 비교해 가면서 되짚어 보았다. 종교적 구원의 문제를 예술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 주제를 만족스럽게 담는 것도 어렵지만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더욱 어려워 보인다. 미술품이나 불상 같은 조형물에서 느낄 수 있는 찰나적인 감성에 기반을 둔 예술이 아닌, 사유의 시간을 허용하는 시간예술의 특성이 그 어려움을 배가시킨 게 아닐까.
만약 종교가 완전한 경지, 완벽한 세상을 추구할지라도 출가자 혹은 수행자에게 인간적인 완벽함을 기대하는 것은 오히려 지나치거나 기만적인 요구가 아닐까. ‘완벽함’이라는 말 자체가 ‘인간’이라는 말과 반대말일지도 모른다. 인간이라면 스스로의 안에서 방황하고, 사람과 부대끼고, 조직과 충돌하고, 사회 속에서 혼란을 겪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고, 그것이 어쩌면 절대가치를 추구하는 노상(路上)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 같은 것은 아닐까. 여기서 드러나는 수행자의 인간적 갈등과 충돌이 그래서인지 낯설지가 않다.
개인적인 소감을 얘기하자면, 본 희곡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솔직히 그다지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살면서 접해온 이러저러한 일들로 심신이 무뎌진 탓인지 종교적 신심과 감수성이 따르지 못한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다가 예전에 겪은 작은 경험이 떠올랐다. 10대 때 서머싯 몸(William Somerset Maugham)의 소설 “인간의 굴레(Of human bondage)를 처음 접했을 때 주인공 필립의 밀드렛에 대한 비이성적인 집착과 몰입 그로 인해 스스로를 궁지로 몰아넣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그 후 20여년이 지나서 다시 펼쳤을 때는 세월이 주는 경험으로 너무도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이게 함을 느꼈다. 사람이란 가끔 무엇에 쓰인 것처럼 본인도 어찌할 수 없는 행동을 할 때가 있는 것이고, 청춘의 치기와 어리석음은 청춘이 지나봐야 비로소 이해가 되는 것 같다. 유이엔의 청춘이 드러내는 격렬함과 젠란의 최후까지의 망설임이 없었더라면 정말 재미없는 밋밋한 종교문학으로 남을 뻔 했다. 사람의 평생을 따라가는 청춘의 기억과 종교적 질문에 대한 아직 계속되고 있는 망설임으로 이 작품은 여전히 미완이자 진행형으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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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입니다. 원고료 송금하였습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