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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인가 일본에 대한 글을 시작하고
이제서야 2편을 올립니다...^^
날씨는 추워지고 이제서야 철거가 끝나가고 토목공사를 들어가려고...
이런 저런 회사행사로 많이 바빴습니다...
일본에 욕심을 내다보니 시간도...^^
이해해 주시고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일본여행 - 나라의 동대사 1
내가 답사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
시대가 선택한 사상의 생명력은 어디에서 출발했고
사상이 선도한 역사는 무엇으로 남았는가를
몸으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시대는 사상을 선택했고, 사상은 역사를 선도했다...
1. 들어가는 말
2. 동대사에 대한 몇가지 생각들...
2-1. 크다... 그리고 높다...
2-2. 불국사와 자매결연을 맺은...
2-3. 4성 건립의 가람
3. 일본의 화엄종찰 동대사...
4. 동대사 건립을 전후한 일본의 고대사(나라시대 후반기)
4-1. 동대사를 역사적으로 바라보는 이유...
4-2. 동대사 건립이전 100여년...
4-3. 동대사와 시대의 흐름, 그리고 도래인...
5. 일본에 대한 생각 1
1. 들어가는 말...
1-1. 늦은밤...
재떨이를 뒤져 꽁초를 찾는다...
노고산동 하숙집에서 생긴 못된 버릇이다.
잠깐 나가면 점빵(?)이 있는데 꽁초들을 모아 궐련을 만들었다.
하숙비 받은지 대략 보름내외의 시간이면 남는 것은 빈주머니에
바빠진 것은 꽁초를 다듬는 숙련된 손놀림이었다.
오늘 그렇게 한두모금의 담배가 아쉬워 재떨이를 뒤적거리고 있다...
일본여행에 대한 시작을 어디에서부터 할지 고민한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
친우가 한마디 한다.
시간이 지난 다음의 답사 여행에 대한 감상은
현장감이나 당시의 감흥을 놓치기 쉽지 않느냐고...
사실 부석사를 손대면서 고민 고민했었다.
처음 부석사에 대해 답사기 형식으로 메모를 정리한 것이 10여 년 전...
그 글을 다시 올리려니 부족한 게 많고
보강을 하자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고...
결국 감상과 감흥은 인용으로 대체하고
건축을 빙자하여 엉뚱하고 무겁게 접근이 되어 버렸다...
지금 일본이 그렇다.
나는 동대사를 빙자하여
일본의 고대사와 불교를 건들일지 모른다...
1-2. 동대사로...
나라, 교토지방 여행이 기획되면서 내가 여행사에 요청한 곳들이 있다.
법륭사, 광륭사, 동대사, 청수사, 금각사, 은각사 등이다.
법륭사에서는 오중탑과 백제관음을, 광륭사에서는 반가사유상을
동대사에서는 대불을, 청수사에서는 단청이 살아있다는 3중탑,
금각사의 금빛전각과 은각사의 모래정원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라를 흐르는 작은 천... 유리창 너머의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았다... 회색의 도시에...>
일본의 고대사를 머리로 읽기 위해서
눈으로 담고, 마음으로 봐야할 몇 가지를 추수렸던 것...
하지만 일정에 쫓기고 많은 분들의 반발로 몇 곳이 취소되었다.
절집 순례하러 일본에 왔느냐는 이유다...
사슴들이 뛰어놀며 구걸행각(?)을 벌이는 나라공원을 거쳐
화엄사 각황전보다 훨씬 규모가 있으면서도
낯설지 않은 건축양식의 남대문을 지나
긴 회랑으로 둘러쳐져 있는 곳...
동대사 대웅전을 바라본다.
<동대사 대불전...>
동대사(토오다이사 東大寺)는 일본 최대의 사원이다.
단일 건물로는 세계최대의 목조건물인
대불전(다이부쯔덴 大佛殿, 대웅전 大仏殿)이 있고
대불전에는 세계 최대의 실내불, 청동 비로자나불이 안치되어 있으며
1천여년간 일본 불교의 구심점으로
국민통합에 중요한 역할을 한곳으로
710년부터 784년까지 교토로 이전하기 전까지
일본의 수도였던 나라에 위치하고 있다.
동대사는 성무천황(쇼무텐노)의 주도로 세워진
금종산사(긴쇼산지)를 시원으로 두고 있으며
741년 동대사로 이름을 바꾸고,
743년 금광명사에서 노사나대불을 조성하기 시작하여
749년 완성하고, 752년 대불전을 건립하고 개안 공양회를 열었다.
40여점이 넘는 국보를 간직하고 있는 법륭사(호오류사 法隆寺)와 마찬가지로
대웅전과 비로자나불을 비롯하여 남대문, 남대문의 금강역사상,
팔각등룡, 종루, 법화당, 개산당, 계단원 사천왕상, 전해문 등
수많은 유적과 유물들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일본문화의 최대 유적지중 하나로서
<동대사의 모형... 대불전 양쪽에 7층목탑 모형이 보인다... 불국사의 1금당 2탑과는 다른 해석이...>
호오류사가 아스까 문화의 보고라면
토오다이사와 쇼소인(정창원 正倉院)의 보물들은
템뾰오(天平)문화(729~48)문화의 보고이다.
2. 동대사에 대한 몇가지 생각들...
2-1. 크다, 그리고 높다...
야~ 우리가 뭘 잘못 배웠나봐...
너무 크다~~~
동대사를 둘러본 동료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반응이다.
우리네 절집의 이미지와 분위기에 익숙한 나로서도
다이브쯔덴의 규모는 우리들의 공간감을 뛰어넘어
그 크기를 담기 어려웠다.
<법주사 팔상전... 몇번을 봐도 상륜부가 너무 작다... 너무 안정적이어서 긴장감이 떨어지는...>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보물 중 가장 높은 것은 법주사의 팔상전...
물론 법주사의 팔상전은 기단과 탑신에 비해 상륜부가 작다고 하지만
목조건축물 중 가장 높은 24m이다.
최근에 신축된 3층 전각으로는 구인사의 대조사가 있지만 27m,
현존하는 가장 높은 목조건축물이 보탑사 대웅보전으로 42.7m의 높이이지만
탑파형식으로서 역시 규모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복원된 미륵사지의 탑도 26m 정도이고...
다이브쯔덴의 높이는 약 45m...
장중함과 위풍당당함을 갖춘 금산사의 미륵전이 20m이니까 높이가 두배가 넘는다.
게다가 세계최대의 목조건축물이라는 수식어가 달릴만하게
1987년 유네스코가
철거를 막아준 저우언라이(주은래)에게 감사하다고 코멘트를 붙인
중국 최대의 목조건축물 자금성 태화전의 높이가 35m이고
천단공원 원구단의 기년전이 32m이며
정면의 넓이에서도 태화전이 62m 가량이고,
다이브쯔덴이 57m이니
동대사의 대불전은 명실상부하게 세계 최고, 최대의 목조건축물임이 분명하다.
18세기 초입에 현재의 모습을 갖춘 동대사 대불전은 애초부터 이렇게 컸을까?
752년 동대사의 다이브쯔덴이 처음 낙성된 규모는
동서로 11칸, 남북으로 7칸이었다고 한다.
855년 대지진이 있었고,
1180년 시게하라 난으로 소실된후 1195년 다시 낙성식을 갖고
1567년 미요시, 마쯔나가 난의 와중에 재차 소실되어
1692년과 1709년 사방 7칸으로
원래 규모의 1/3으로 축소되어 조성되었다고 한다.
<노사나불(비로자나불)을 청소하는 모습... 청소하는 사람들을 보면 크기를 가늠해볼 수 있다...>
야~~~ 이렇게 높고 큰 건물을 그 당시에 지을 수 있었을까?
1400여년경 명대, 중국의 자금성은 연인원 100만명씩 14년에 걸쳐 축성되었다.
평균 벽두께가 7.5m인 성벽을 가진 황궁이며, 1600년대에 재건되었다.
동대사는 750년경에 자재를 기부한 사람이 42만명,
목재와 금을 기증하지 않고 부역한 사람이 총218만명이 동원되어 지은 절이다...
절을 짓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무슨 이유에서 동원되었을까?
동대사를 돌아다니는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질문이다...
2-2. 불국사와 자매결연...
또 한가지, 동대사는 수년전 불국사와 자매결연을 맺었다.
자매결연을 맺은 이유는 불국사의 설계도면이 동대사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불국사는 김대성에 의해 751년 조성되기 시작하여 774년에 완공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동대사가 먼저 낙성되고 불국사가 조성되기 시작했다는 말인데...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우리나라와 일본을 대표하는 불사가 자매결연을 맺었다.
하나 더 넘어가면 동대사 정창원에서 보관중인 1만 2천여점의 보물은
매년, 전시물을 바꾸어가며 전시회를 가지고 있는데
얼마 전에는 백제에서 넘어온 바둑알이 전시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었다.
게다가 이 유물들이 기록되어있는 보물목록은
신라의 장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지금의 청주지방인 신라의 서원경지방의 장적(호적)을 뒤집어서
반대편에 동대사의 보물목록을 기록했다는 점...
<투구모형의 추입구 처마를 당파풍(唐破風)이라 부른다... 송대 이후에 유입되어 일본 고유의 문양으로>
도대체 어떤 연유들이 얽혀있어 불국사의 설계도면이 보관되고
신라시대의 장적으로 보물목록이 기록되고
이렇게 커다란 규모의 절을 지을 수 있었을까?
사실 그 점이 나의 관심사이고 또 숙제일지도 모른다...
텅빈 동대사의 대불전 앞에 회랑을 보고 향로를 보면서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2-3. 4성 건립의 가람
동대사는 네 성인이 건립한 절이란 의미로 4성 건립의 가람으로 불린다.
발원자인 쇼오무천황,
민중들에게 불사를 권해서 협력하도록 한 행기,
금종사 이래로 기초를 닦고 책임자가 된 양변,
대불개안회를 주관한 보다이 센나가 네 명의 성인이다.
사실 이들의 면면을 보면서 우리는 무수한 해석과 사변들을 늘어놓게 된다.
먼저 양변승정은 속성이 백제씨로서, 금취 또는 금종이라 불린다.
양변은 독수리에 차여서 지금 토오다이사 니가쯔도오(이월당)앞의
스기나무에 떨어져 있었는데, 백제계 승정 의연이 데려다가 입문시켰다고 한다.
양변이 카스가산에 지은 암자를 금종사라 하고
이 일대가 지금의 법화당이며, 동대사의 기초가 된다.
<740년에 지어진 호케도(법화당)... 전면부는 1199년 중축되었다고...>
745년 승정이 된 행기는 왕인의 자손으로 서문씨의 지족으로
백제왕씨의 시조인 선광(의자왕의 아들)의 증손 백제왕 경복이
영내에서 황금 900량을 바쳐 동대사 대불에 도금이 가능케한 사람이다.
이런 연유로 쇼오무천황은 당시의 연호였던 天平을
캄뽀오(感寶)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리고 보다이 센나는 천축국(인도)의 승려로 나라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가
백제사(百濟寺 쿠다라사)에 머물러 있다가
그의 학식으로 대불개안회를 주도했다하며
대불설계의 총책임자였던 쿠니나까노끼미마로(國中公麻呂)는
백제에서 건너간 국골부의 손자로 알려져 있다.
<가이산도(개산당)에 모셔진 로벤(양변)승정의 모습... 국보다...>
백제계가 강조된 사료들이 상당하게 인용되었지만
분명 동대사는 도래인들과 관련이 깊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가지 문제는 남아있는 유적들과 흐름은 신라와 연관이 많은데
사적을 통해 확인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은 백제계가 많다는 사실이다...
또한 우리들이 예전에 들었던 백제계 장인들과 기능공들이 동원되었다가 아니라
창건을 주도하고 기획한 사람들이 백제인 혹은 도래인이었다는 점이다...
3. 일본 화엄종찰 동대사.
3-1. 동북아시아에서의 불교의 정착과정
또 한가지 눈여겨 볼 점은 동대사가 일본 화엄종의 종찰이라는 점...
불국사가 화엄종의 사원으로 비로자나불이 주불로 안치되어 있듯이
동대사도 절의 중심이라 할 대불전은 비로자나불이 중심에 서있다.
왜 이 시기에 화엄종을 대표하는 불사가 이루어졌을까?
우리나라 불교정착 과정을 봐도 알 수 있지만
국가의 지원을 받아 국가의 위계질서를 세울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화엄종이다.
물론 화엄종도 개인적인 기복의 성격이 강한 관음사상을 보조적으로 선택하며
지식인과 중앙권력의 중심에서 벗어나면 정토종과 선종의 파급력이 강하다.
때문에 대승불교가 정착된 한중일 삼국에서는
제일먼저 화엄종을 위주로 국가적 지원을 받는 귀족불교가 성행하고
개인적 부의 축적과 지방호족의 권력이 강화되고,
유교적 율령이 완비되는 과정이 되면
한편으로는 대중화되고, 또 한편으로는 부패와 부조리의 문제로 공격받는데
대중화된 불교는 불전과 격식이 필요 없는
선종계열과 정토종 계열이 주류를 이루며 정착되기 쉽다.
그리고 토착신앙이나 민간신앙,
혹은 도교적 정서와 결부되면서 침잠하게 된다.
<남대문의 금강역사상... 높이 8m... 석굴암이나 장항리탑의 부조와 비교하면? 너무 작나?ㅎㅎㅎ 국보>
한중일 삼국에서 이 흐름은 크게 다르지 않는데
차이가 있다면, 사회적 흐름에 불교가 어떻게 적응하고
국가는 어떻게 수습되는가에 따라 달랐다.
불교문화가 각 나라에서 꽃을 피운 시기는 당나라, 통일신라, 나라,헤이안 시대이며
모두가 화엄종으로 시작하지만 선종이 대중화 되면서 국가는 분열되고,
결국 불교가 배척되거나 유교에게 국가체계 형성의 근간과
정치 사상사적 측면에서 권력의 중심을 내어주게 된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말기 선종의 유행과 함께 5호16국으로 나라가 분열되고
송대에 유교에 의해 쇠락하면서 도교의 영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고,
일본에서는, 선종계열의 흐름이 확산되면서
지방무사 세력과 연결되어 막부시대를 열었지만
일본열도를 통일한 에도막부 이후에는
불교가 억압받다가 통제되어 오늘에 이르고
<간진쇼... 10월 5일에만 특별 공개를 한다고... 하찌만신상 국보가 있다... 이렇게 가끔씩만 보여준다>
한국에서는 신라말기에 역시 선종이 유행하면서 국가는 후삼국으로 분열하지만
다시 고려시대에 귀족문화와 함께 또다른 전성기를 맞아 번성하다가
(삼국 중 가장 오랫동안 귀족불교문화가...),
일본에서처럼 고려 말에는 무인시대를 거치고,
중국에서처럼 조선시대에는 유교에 의해 배척되기에 이른다.
3-2. 화엄종과 동대사
삼국이 통일된 신라의 정신적 지주역할은 역시 화엄종이 이루었지만
처음부터 화엄종이 신라불교의 중심이 된 것은 아니었다.
신라 화엄종의 개조인 의상대사의 행적을 추적해보면 확인이 되는데,
처음 불사를 일으킬 때에는 관음사상과 타협하여
낙산사를 관음도량으로 만들었고
우리나라 화엄종찰인 부석사에서는 원효가 개창한 정토종과 타협을 한다.
<부석사의 무량수전... 한중일 삼국의 목조건물은 지붕의 양식이 다르다... 합각마루와 내림처마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엄사상의 근간을 훼손하지는 않았는데
부석사 무량수전에는 정토종의 아미타불이 안치되어 있으나
안양루 밑 전각에 비로자나불이 안치되었었다는 기록이 있고
무량수전 동편 삼층석탑에서 무량수불을 바라보는 방향이
소백산 비로봉(관음불이 물과 인연이 깊다면, 비로자나불은 산과 인연이 깊다)을
바라본다는 점 등을 근거로
부석사는 화엄경에 근거하여 가람을 배치했다는 설이 우세한 만큼
화엄종 교리를 가람배치에 구현하려고 노력했다.
의상대사의 화엄종은 부석사가 대대적으로 중창되어 오늘날의 가람배치를 이룬
8세기 이후(불국사 조성), 9세기에 안동지방을 근거로 완전히 중심에 서게 되며,
그후 선종, 의천의 천태종을 거쳐, 지눌의 선종계 조계종으로 중심을 내준다.
일본도 이 흐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신라보다 훨씬 빨리 화엄종이 정착되었다는 점에 차이가 있고,
고려의 멸망이후 조선에서는 후기에 이르러서야 미륵사상이 크게 성행했지만,
일본은 에도막부 후반기에 정토종 계열이 대세를 이룬다는 점이 차이가 있다.
(여기서 내가 정토종 계열이라고 지칭하는 종파는 특정 종파라기보다
아미타불을 염하며 극락세계를 기원한다는 점을 지칭한다)
<슌죠도에 모셔져 있는 아미타여래상... 중요문화재이며 신라불상과 비교해 볼만하다...>
741년 쇼오무천황은 국가의 재해와 국난의 소제를 설파하는
금광명최승왕경을 구현하기 위해 각 국부의 소재지에 국분사를 설립하기 시작한다.
진호국가(鎭護國家) 진재치복(鎭災致福)을 설파하는 불교를
중앙집권과 민중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정신적 지주로 삼기 위해
국분사(國分寺)로서 평화롭고 질서 있는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대방광불화엄경의 교리를 실현하기 위해
카스가(春日)산에 토오다이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4. 동대사를 전후한 일본의 고대사(나라시대 후반기를 중심으로...)
4-1. 동대사를 역사적으로 바라보는 이유...
조금 길고 사족들을 첨언하여 동대사의 발원과 기원을 찾아보고
동대사의 당시의 규모와 동원된 인력,
그리고 한중일 삼국의 불교정착 과정과 불교의 각 종파에 대한 흐름을
분석해 본 이유는 간단하다.
그 당시 일본 정세의 역동적 흐름과 긴밀히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동대사의 너른 마당을 빙빙 돌면서
크다는 것 외에 머리와 가슴에 담을게 없다는
허전함을 채워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동대사 대불전 앞의 회랑... 종묘와 잠깐 비교해 보다가... 일본식은 문앞에서 회랑이 치켜세워진다...>
처음 나라와 교토지방을 여행하면서 나의 문답도 단순했다.
혹시 잃어버린 백제의 흔적과 향기를 찾을 수 있지는 않는지...
고대 한반도의 우월성을 일본내부에서 찾아보고 안도하고자 했던 것은 아닌지...
수없이 반복되는 자문자답의 한계는 늘 짧은 식견에 묻혀 공허하게만 울렸었다.
그리고 이번의 정리는 오랜 물음에 대한 스스로의 답변이다.
일본 답사의 정리는 당연히 법륭사에서부터 시작해야함을 모르는 바 아니나,
야마토 시대에서 아스카 문화로 넘어 오면서
일본은 일본이라는 국호와, 천황이라는 권위,
그리고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불교가 정착되면서 통일 사상의 기틀을 마련했고,
유교적 율령을 받아들여 중앙집권적 정치체계를 확립한다.
이러한 일본의 근간을 만드는 과정의 정점에 만들어진 유적이 동대사라 생각한다.
<동대사 중문... 내림처마가 활기차게 살아있으면 우리눈에 친숙하게 보인다... 2중에 장식까지...>
최소한 동대사에 대한 객관적 시야의 방향을 잡는다면
일본의 고대사는 무조건 한반도에서 유입되었으며
특히 백제의 영향으로, 혹은 백제인들에 의해 직접 문화가 형성되었다는
편견과 오해에서부터 나는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나의 생각이 공인되지 못하고,
짜깁기된 상식들의 조합으로 그칠 수도 있지만
나의 시야를 동북아시아로 확대해야만
정형화된 나와 우리들의 원형을 찾을 수 있고,
열린 시각을 가지고, 흔들리지 않는 뿌리와
디테일한 감상의 포인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법화당 내부의 불공견색관음상... 호케도의 본존이며 양쪽의 일광,월광보살도 국보다... 8세기>
동대사에 대한 나의 학습은
백제에 얽매이지 않고,
한반도로부터 자유롭게,
그리고 일본역사를 외부인의 시각에서 바라보지 않고
일본인들의 문화를 저급하다는 전제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자율성과 주체성이 없이 주는 대로 받아들인다는
우월감과 지배의식이 노골적이면서 가장 극명하게 들어났던 때가 2번 있었는데
한번은 에도막부 후기의 조선통신사들이 일본에서 했던 행태였고,
또한번은 몇십년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펼쳤던 식민통치가 그것이다.
그들이 보여준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엘리티주의는 천박함의 극단이었다...
아무튼 일본고대사의 전반기에 대해서는
법륭사편에서 더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하고
일단 동대사와 관련해서 정리해보고자 한다.
4-2. 동대사 건립이전 100여년...
<법륭사 서원 전경... 오중탑과 중문이 보인다... 동대사와는 전혀 다른 아름다운 절...>
백제계 소가가문의 지원과 타협 속에서 쇼토쿠태자는 아스카 문화를 연다.
천황의 권위보다 높았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소가가문에 대항하여
통일된 정치체계와 중앙집권을 주창하던 쇼토쿠태자의 꿈은
645년 다이카 개신으로 일단 이론적 기틀과 정치적 방향을 잡게 된다.
이 근간에는 일본의 진로를 백제와 연합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신라, 당나라와 연합할 것인가의 외교노선이 연결된 권력투쟁이었다.
신라계의 지원을 받아 당(수나라 포함), 신라와 연합을 주장하며
소가가문과의 권력투쟁에서 승기를 잡은 후지와라 가문은 다이카 개신을 통해
당의 율령을 도입하고, 토지의 국가소유를 주장하며 통일국가의 기틀을 만든다.
다이카 개신은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지향하였고, 일본의 역사에서는
근대일본의 기틀을 만든 메이지 유신과 비교될만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다.
그러나 쿠테타는 실패하는 법...
강력한 중앙집권을 형성하기에는 경제력과 군사력이 뒷받침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한반도 삼국의 정세는 일본 국내를 또 다른 방향으로 이끄는데
당나라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일본은 백제, 고구려와의 연합을 선택하고
663년 일본국의 모든 역량을 동원했던 백촌강 전투에서 백제, 왜 연합군은 패배한다.
그리고 이 전쟁은 고대 한중일 삼국 최초의 국제 전쟁이었다.
(그후 두 번의 삼국간 전쟁이 더 있었는데 한번은 조일전쟁, 또한번은 청일전쟁이다)
<데가이몽(전해문)... 동대사 창립시기에 건립되어 남아있는 유일한 건축물이다... 8세기... 국보...>
백제,왜 연합군의 패배와 동시에 671년 덴지천황이 죽고
일본고대사 중 최대의 내전이 벌어지는데 이것이 덴무천황이 주도한 진신의 난이다.
많은 백제계 귀족과 유민들이 정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신라와의 화해를 추구한다.
다이카 개신에서 후지와라 성을 부여받은 신라계는 다시 정치의 중심에 나서게 되는데
덴무천황은 701년 다이호 율령을 완성하며 강력한 독재정권을 수립하게 된다.
다이카 개신때부터 등장하는 후지와라(籐原) 가문은 600년대 중반부터
11세기 셋간정치의 전성기를 이룰 때까지 400여년이 넘게 일본정치의 중심에 서고
길게는 1000년간 가문을 번영을 이루었던 성씨로서
신라의 김씨가 고려중후반기에 부활하고 조선조까지 권세에 중심에 선 것과 비슷하다.
또한 후지와라씨는 694년 당나라 장안의 1/2규모의 후지와라京를 직접 조성하였는데
710년 나라시대가 시작하는 헤이죠쿄(平城京)로 수도가 천도될 때까지
아스카 시대의 마지막 수도를 만들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그리고 743년 간전영년사재법을 만들어 토지의 사유화를 인정하는데
이 과정은 도래인 집단과 천황계, 그리고 지방 호족의 권력투쟁 과정이었으며
이는 일본의 정치적 통일적 질서가 확립되는 과정이면서
장원제의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호케도 내부... 관음불상을 중심으로 16구의 불상이 안치되어있고 이중 12구가 국보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는, 도래인 집단 중 백제계와 신라계가 주도권 다툼을 벌이며
당나라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선진문물과 기술을 어떻게 일본에 정착시키고,
또한 자신들은 어떻게 동화 되어 가는가를 보여주는 과정이기도 하다.
4-3. 동대사와 시대의 흐름...
이러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탄생한 것이 동대사 대불전이며, 대불이다.
일본의 정치적 영역이 아직 현재의 동경중심의 관동지방까지 미치지 않은 상황에서
전국 70여개의 소국이 근기(近畿, 畿內, 현재의 관서)지방을 중심으로 통폐합되고
종교적 사상적 통일을 꾀하며, 일본국가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확립해가는 과정...
멸망한 백제계와 고구려계를 탈피하여 당나라와 직접교역을 도모하고
신라와 정략적으로 화해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절이 바로 동대사이다.
690년부터 덴노(天皇, 이전까지는 오키미(大王)란 칭호사용)란 호칭을 사용하고
고사기(712년) 일본서기(720년) 속일본기(797년)를 편찬하면서 정통성을 확립하고
정식으로 일본을 국명으로 확정하던 시기...
일본은 국민들의 사상적 통합을 위하여 화엄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진호국가(鎭護國家) 진재치복(鎭災致福)를 내걸고
대대적인 국책사업으로 건립한 절이 동대사이다.
<호케도 내부의 아형 금강역사상...>
백제와의 교류로 문화적, 정치적, 사상적 체계를 갖추어가다가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과 당나라와 신라의 침공에 대비하여
국가로서의 존립근거를 명백히 대내외 과시하고
시급히 국가의 체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많은 무리를 낳았다.
사실 일본의 입장에서 한반도의 고구려, 백제, 신라는
자립을 위한 선진문물과 기술을 수입하기 위한 교역통로였거나
혹은 통일된 중국의 국가를 상대하기 위한 자위를 위한 선택적 파트너였을 수 있다.
또한 당나라나 신라가 일본과의 화해를 추진하고 교류를 확대한 이유는
백제의 후원군인 일본을 적으로만 놔둘 수 없다는 현실적 이유도 컸다.
즉 당시의 동북아 정세의 케스팅보드는 일본이 쥐고 있었고
일본은 그 역할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자율적으로 적절히 행사했다.
<가이단인(계단원) 내부에 모셔진 사천왕상... 국보... 증장천 발밑에 깔린 아귀다...저팔계가?^^>
결국 신라와의 정략적인 화해도 오래가지는 못했는데,
동대사가 건립되어 대불 개안식을 가진 직후인 754년
대당, 대신라의 관계는 악화되고,
친고구려계인 발해와 우호적 외교관계를 확립, 외교라인이 편중되고
759년 안녹산의 난을 계기로 후지와라가문의 나카마로는
3년 동안 수송선단을 준비하고,
4만여명의 병사를 동원하여 대대적인 신라정벌계획을 세운다.
(이것이 어쩌면 최초의 한반도 침략 계획일지도 모른다)
주도세력의 죽음과 내부의 반발로 이 계획은 무산되지만
100여년이 지난 894년 일본은 견당사까지 폐지하고
신라와의 긴밀한 관계도 완전히 청산하게 된다.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와 기회도 마감되고
내부의 생산력과 정치력으로 일본은 자신들만의 길을 걷게되는게 막부시대가 아닐까?)
아무튼, 794년 동대사 건립의 후유증과 신라와의 관계 악화이후
불교의 정치적 영향력을 견제하고,
후지와라 등 귀족세력으로부터 천황의 친정을 도모하며,
동북부지방의 정벌을 위한 군사적 편의와
덴지천황계로부터 황권의 정통성을 수립하기 위해 덴무천황계로 복원하면서
간무천황 주도로 헤이안쿄로 천도를 한다.
간무(칸무)천황은 현 일본천황 아끼히또가
" 백제 무령왕의 자손... " 운운으로 유명해졌는데
실제로 그는 헤이안쿄로 천도하면서 전각들의 건축은 물론
중앙의 요직과 심지어 여관(女官)의 여자들까지 백제계로 채워나갔던 천황이다.
그리고 간무천황의 즉위로 조금은 복잡하던 천황계도 백제계로 완전히 정착하고
도쿄로 천도한 메이지천황이 메이지신궁에 모셔진 것처럼
교토로 천도한 간무천황은 헤이안신궁에 신으로 모셔져 있다.
<역시 가이단인 내부의 사천왕상중 증장천의 모습...>
참 묘한 점은 백제계와 신라계의 선택과 결과의 문제다.
흔히 아스카와 교토의 지리적 조건과 유적들의 흐름을 비교하면서
아스카 지방을 공주나 부여에, 교토지방은 경주에 비교한다.
그래서 나라지방에서는 백제의 숨결이 남아있다고 말하며,
교토지방에서는 신라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아스카 시대 초기는 선진기술과 문물을 전래해준 도래인들은 백제계가 주류를 이루지만
고구려, 신라계도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정치와 사상의 중심에 서있었고
백제의 멸망이후 100여년은 신라계가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러나 백제계의 간무천황은 신라계 하따씨의 지원으로 헤이안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이 시기 일본에서의 고구려, 백제, 신라계는 이미 토착화 되었다.
복잡하게 꼬여있는 백제계와 신라계가 만든 권력투쟁과 정치사의 아이러니는
일본화된, 일본국에 토착화된 후손들의 영역이지
한반도 도래인들만의 독점적 점유물이 아니며
더욱이 현대의 한반도에 남아있는 우리들이 가부를 제시할 영역이 아니다.
<가이단인 내부의 사천왕상중 다문천의 모습...>
그후 한반도에서는 고려조 대각국사 의천에 의하여 천태종이 불교의 중심을 이루지만
일본에서는 이미 헤이안 시대에 화엄종을 대신하여
천태종 위주로, 정토종이 이를 보완하며 불교가 마지막 꽃을 피운다.
5. 일본에 대한 생각 1...
우리들은 일본에 대하여 근대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또 역으로 일본인들의 공론과 주장을
우리는 우리에 대한 고대 콤플렉스라 여기고 있다.
그리고 짜깁기된 많은 주장들은 뿌리 없이 파편화되어 우리 주변을 떠돌고
경거망동의 언행과 침소봉대의 근거를 들먹이며 일희일비하고 있다.(나만 그런가?)
또한 우리들의 감정적인 주장은 집단적 방어논리가 되어 우리를 공격하는지도 모른다.
역사와 실체를 부인하는 잘못된 혹은 의도된 왜곡들이 만든 편견은
오늘날에도 우리들의 시야를 좁히고, 발전적이며 생산적 관계를 부정한다.
목적 없는 혹은 호기심 차원의 접근에도 문제가 많지만
우리들이 공유하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의 부재와
문화적, 사상적, 정치적 비평과 해석의 천박함에 기인한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가이단인 내부의 사천왕상중 광목천의 모습...>
단편적 역사의 사실들을 나열하는 방식의 낡은 끈들은 풀어 버릴 필요가 있다.
방향성이 배제된 우월감과 피해보상 심리에 기인한 열등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내가 일본의 유적답사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일본인들이 왜곡하거나 감춘 역사의 실체를 뒤집기 위함이 아니다.
또한 근대의 콤플렉스를 고대의 우월감으로 대체하기 위함도 아니다.
단지, 그들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들과 수천년간 이어진 우리들의 인연을
입체적으로 조망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들의 잘잘못과 과거의 시비, 혹은 선악의 문제를 이해할
서로간에 공유된 카테고리와 비평의 잣대를 갖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자율적인 일본인들의 선택을 타율로 강제(해석)하고
대상화 시킬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는 점이다.
<가이단인 내부의 센쥬도(천수당)에 모셔진 천수관음과 사천왕상... 1605년 에도시대 작품으로 비공개>
내가 나라와 교토의 여행을 선택한 이유는
일본속의 우리를 찾자는 것이 아니라
일본과 우리를 비교해보고
일본에 대해서 충분히 알고, 느끼고, 배우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답사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
시대가 선택한 사상의 생명력은 어디에서 출발했고
사상이 선도한 역사는 무엇으로 남았는가를 몸으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시대는 사상을 선택했고, 사상은 역사를 선도했다...
<동대사 대불전을 바라보던 그 허전함과 생소함이 많이 채워졌을지...>
2편에서 다시...
여기 사진들은 일부 직접 찍은 사진들과
동대사에서 간한 2002. 9 <동대사 한글판>을 참고했습니다...(이해하시고...^^)
첫댓글 긴 듯 싶지만 호흡을 참게 하며 끝까지 읽게 하는 긴장감에 단숨에 읽습니다..^^*.. 전체적인 크기에 비해 상륜부가 작은 것은 늘 흔들리는? 땅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싶은 생각도 듭니다..섬나라의 콤플렉스도 만만치는 않지요..늘 정성을 다 하는 모습,..하시는 일 또한 그러할 것 같습니다..^^*..감기조심하시고,. 새 아기 많이 컸지요?..^^*
문화유산 답사기를 쓴 교수님 보다 더 세밀한 일본 여행 .... 조금은 직업을 잘못 택했나 하는 생각이 드는건 나의 無知의 소치인가....
간만에 올린 글이라...^^ 산여울님... 사실 이글은 동대사를 빗댄 제 개인적인 정리물이라는게 옳겠지요...^^ 2편은 건축과 관련된 내용으로 준비했습니다... 제 버릇중 장점이자 단점이, 하나를 열로 튀기는 거랍니다... 잠깐 본것을 가지고 한참 고민한양...^^ 그래도 그렇게 해야 경험이 소중해 질거라 생각해서...^^ 뎀님도 건강하시고, 산여울님께는 감사드리고... 우리 우주(똘똘이라 부릅니다..) 사진 올려야 하는데 다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