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유행가로 평가받는 '희망가' 를 부른 가수인 채규엽은
함경남도 함흥 출신이며
1907년생으로 추측된다.
중학생 때 독일인 모이기르크 로부터
음악을 배웠다
도쿄의 중앙 음악학교 성악과를 졸업한 뒤
1928년 에는 서울에서 바리톤 독창회를 가졌다
1930년 콜럼비아 레코드 3월 신보에서
자신이 작사.작곡한 [유랑인의 노래] 와
김서정 작사.작곡의 [봄노래 부르자]로 가요계에 데뷔하였다
채규엽이 콜럼비아에 입사한 동기는
1930년 서울에 왔을때 우연히
콜럼비아 회사의 파티에 얼굴을 내민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그때 그가 여흥 시간에 일본어로 "나니와부시"를 불렀더니
코럼비아의 경성 지사장인 핸드 포드가
그 목소리에 매혹되어
조선어 유행가를
녹음하도록 권유하였다고한다
1931년 10월 신보에서 [군인 행진곡]
[사랑의 째즈]
11월 특별 신보에서 [에로와 구로] 를 내었고
1932년 정월 신보에서 강석연과 듀엣으로 홍노작 역시의 [댄스 오케]와
민요[흥타령] [개성 난봉가]를 부르고
김동환 작사 정순철 작곡의
[종로네거리]와 채규엽 작사의 [북으로]를 발표하였다
그해 2월 특별 신보에서는
일본의 고가마사오, 후지야마 이치로 콤비의
히트곡[술은 눈물일까 한숨이랄까][희망의 고개로]의 번안가요를
내었다
이어 [님 자최를 찾어서][가을밤]을 내었다
그해 8월에는 도쿄에서
일본보로 아와야 노리꼬 와의 듀엣곡
[아리랑의 노래]와[방랑의 노래]가 하세가와 이치로 이름으로 발매되었다
이듬해인 1933년에는 [사랑의 마음]을 내는등 일본 가요계에서도
스타가 되었다
그가 일본보에 나오게 된 것은 일본어가 유창했으므로
녹음한 도쿄 본사로부터 꼭 필요하다는 요청이 들어와서 였다
그는 "하세가와 이치로" 라는 이름으로 전속 가수가 되었는데
이 예명은 당시 콜럼비아 레코드 경성 지사가 하세가와 정(町)에
있었기 때문이며
조선의 남성 가수로서 최초로 일본어 유행가를
부르게 되었기 때문에 "이치로"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또 그 배경에는 이무렵 후지야마가 레코드 녹음을 못하게 되었다는
사정도 있었다
당시 채규엽은 모교인 중앙음악학교 조교수로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거주했는데
1933년 가을 3년만에
조선의 땅을 밟아서 각지에서 "귀향 환영 음악회"를 가졌다
10월20일 서울의 공회당에서 음악회가 열렸을 때는 게스트로서
콜럼비아 조선 레코드의
김선초.임헌익.김복순.안일파.김선영등을 맞이하여
[홍등 야곡][봄노래][술은 눈물일까 한숨이랄까][님 자최 찾아서]
[비의 항구][슬픈 밤]을 노래하였다
채규엽은 콜럼비아 조선 반에서도
[떠도는 신세][봉자의 노래][홍원루] [순풍에 돛][녹쓰런 비녀]
[한많은 신세][희망의 종이 울린다][포구의 회포][명사 십리]등
게속 히트를 내었다
1936년 오케 레코드 2월 신보에서 [울며 새우네]
[한많은 몸]
3월 신보에서 [무지개 설움][서글픈 마음]을 내었는데
콜럼비아와 이중계약이 되어
콜럼비아는 오케를 상대로 소송을 하여
결국 채규엽은 콜럼비아로 돌아왔다
채규엽에게는 스캔들이 많았으며,
고소를 당하거나 경찰에 체포된
일도 잦았다
1938년 가을 태평 레코드로 옮겨가 [북국 오천키로]
[파이프 애상][상선 뽀이][국경의 등불]등을 히트시켰다
또 그 해 태평 일본반 10월 신보에서
"사에끼 슈지"라는 이름으로
재 데뷔하여 [현해 야곡]등을 발표하였다
해방후 과거의 명성으로 무대로 돌아와 한 때 흥행사가 되었으나
실패하고, 부도를내어
유치장에 들어간 일도 있었다
최남용의 도움으로 일단 재기하여
군부대 출입 위문단을 조직하였으나
1949년 늦가을에 38선을 넘어 북으로 갔다
작곡가 이면상을 따라서 였다고 한다
6.25동란 때 이남으로 피난 온
연예인들의 입을 통하여 알려진
그의 소식에 의하면
그는 남쪽에서와 같은 사고 방식으로 살아가려 하다가
함경북도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간 뒤 죽었다고 한다
첫댓글 채규엽 - 북국 오천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