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말씀의 향기♣ No3783
3월1일[사순 제2주간 금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YlkY7BK_2Gg
[서울대교구 황중호 베드로(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 방송주간)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는 잠시 하느님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소작농입니다!>
소작(小作)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지주로부터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수확의 일정량을 바치며 생계를 이어가는 형태의 농사입니다. 일 년 내내 죽을 고생만 하고 손에 쥐는 것은 쥐꼬리만큼인 소작농들의 애환은 오랜 역사 소설의 주된 테마였습니다.
돈보스코를 연구하다 보니 그분의 부모님 역시 소작농이었습니다. 구호대상인 극빈자 계급은 아니었지만, 아버지 프란치스코 보스코와 맘마 마르가리타는 남의 땅을 빌려 하루 온종일 뙤약볕에서 죽기살기로 일만 하던 소작농이었습니다.
부양해야 할 식구는 많은데, 농업이 기계화가 되기 훨씬 전이지, 돈보스코의 부모님들은 그야말로 하루 온종일 뼈빠지게 일만 하셨습니다.
돈보스코께서 유명인사가 된 이후, 알베르 뒤 보이라는 전기 작가가 근사하게 돈보스코 전기를 집필했는데, 최종적으로 돈보스코에게 교열을 부탁했습니다. 돈보스코가 제일 먼저 수정한 대목이 있습니다.
“돈보스코의 가족은 꽤 넉넉한 농부였다.”라는 구절을 확인한 돈보스코는 빨간 펜으로 찍찍 긋고, 이렇게 고쳤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농부였다.”
그만큼 소작농들의 삶은 고달팠고 힘겨웠습니다. 사실 소작인들 입장에서 지주들이 땅을 빌려준 것,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소작인들 가운데서 악한 소작인들이 있습니다.
대풍년, 다시 말해서 엄청난 소출을 거두었으면서도, 주인에게는 올해 농사가 흉년이라며 쥐꼬리만큼의 소출만을 보내는 악덕 소작인도 있습니다. 빨리 소출을 보내주라고 몇 번을 이야기해도, 알았다 해놓고는, 죽어도 안 보내는 진상 소작인도 있습니다.
더 지독한 소작인이 있습니다. 도저히 기다릴 수 없어서 지주는 자신의 종을 보내기도 하고, 나중에는 아들까지 소출을 받아오라고 보냈습니다. 그런데 악한 소작인들은 그 아들마저 매질하고 죽인 후 포도밭 밖으로 던져버린 것입니다. 그 악한 소작인들은 바로 유다인들이요, 동시에 우리들이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우리 모두 소작인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단 한번뿐인 인생을 잘 좀 가꾸어보라고, 풍성한 결실을 거두어 보라고 임대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임대 기간이 결코 영속적이지 않고, 길어야 90년 100년입니다.
악한 소작인들처럼 분수 넘치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주인 행세를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언제나 나는 잠시 하느님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라는 사실을 잊지 알아야겠습니다.
종이면서 주인인 양 큰 소리 뻥뻥 치고 행세하다가 큰코 다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악한 소작농처럼 처신하다가는 하느님의 강력한 진노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늘 겸손하게, 늘 신중하게, 늘 종이나 소작농의 마음으로 그렇게 하루 하루 살아갈 일입니다.
나를 내 삶의 주인이요 주인공으로 여기고, 가슴을 딱 펴고 당당하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태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주인은 하느님이심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HZ-C0ViM4Ak
++++++++++++++++++
<십일조를 전혀 힘들이지 않고 바치는 법>
오늘 복음은 ‘못된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아담과 하와가 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는지 설명해줍니다. 바로 선악과를 바치지 않아서입니다. 바로 소출의 일부를 주인에게 바치지 않아서입니다. 그것을 바치게 되지 않은 이유는 자신들이 주님의 덕분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바로 자신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으신 주인님을 살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소작인들은 이렇게 결의합니다.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자신들이 주인님이 되려고 하니 주인님이 죽게 됩니다. 내가 옳다고 조금이라도 믿는다면 진리로 오시는 분을 죽이는 것이 됩니다. 내 안에 능력이 있었다고 믿는다면 전능하신 분을 죽이는 게 됩니다.
내 안에 생명력이 존재한다고 믿으면 성체로 오시는 참 생명이신 분을 죽게 만듭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스스로 존재할 수도 없고 스스로 살아갈 수도 없고 스스로 옳은 길을 선택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내가 무언가 할 수 있다고 말할 때 모든 것을 해 주시는 분을 죽여 버리는 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 앞에서 못된 소작인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겸손함을 키우고 감사함을 키워 모든 게 주님 덕분임을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정말 부모가 되어보기 전에는 절대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없다고 하듯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인님의 마음을 알려면 주인님이 되어보는 수밖에 없고 하느님의 마음을 알려면 하느님이 되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이 된다는 말이 교만처럼 여겨지지만, 이 길이 겸손해지는 유일한 길입니다.
김희아 씨는 모반을 가지고 태어나서 부모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자기를 버린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어떻게 보지도 못한, 그리고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녀가 자기 딸에게서 자신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딸을 키우며 그렇게 태어나서 키울 수 없는 어머니의 마음을 느낀 것입니다. 어머니가 되어보지 않고서는 어머니의 마음을 절대 알 수 없습니다.
요즘 사순이라 구역 판공을 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부족하여 두세 구역씩 묶어서 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한 구역에 두세 분씩이라도 냉담하시던 분들이 고해성사를 보러 오십니다. 냉담을 풀기에 성당까지는 너무 멀었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소공동체 봉사자들, 특별히 반장님들의 역할이 큽니다. 그분들의 설득이 아니면 냉담하시던 분들은 사제에게 고해성사하고 면담까지 하는 용기를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소공 봉사자분들도 다 느끼시겠지만, 저는 특별히 ‘강생의 신비’를 느낍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재래식 화장실에 떨어진 채변봉투를 주워주시기 위해 그 냄새나고 더러운 곳까지 손을 뻗쳐 그것을 건져주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죽음이었습니다. 그 덕분으로 저는 학교에서 혼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가지 않아도 되는 곳까지 굳이 가게 되는 것도 하나의 강생의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 속으로 내려오시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겠지만, 어쨌거나 신자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하나의 낮춤이고 아버지가 되어감입니다. 그러며 저를 위해 낮아지신 아버지와 하느님께 대한 감사가 더 크게 다가옵니다.
아버지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함으로써 그분들에게 고마움을 갖게 되는 게 교만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못된 소작인들이 정말 못된 것은 그들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것을 맡기며 살게 한 일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받았으면 베풀어야 합니다.
베풀다 보면 그렇게 베풀었는데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주인을 외면하는 잘못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선교합시다. 선교는 하느님이 되는 길입니다. 새로운 하느님 자녀를 탄생시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하며 고생을 할 때만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고통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앞에서 십일조를 바치는데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게 될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김동인의 ‘발가락이 닮았다.’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노총각이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임신을 했습니다. 아이가 태어났고, 노총각은 의사인 친구에게 찾아가서 아이와 자신이 닮은 곳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의사인 친구는 아이와 아빠의 발가락이 닮았다고 이야기 해 줍니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얼굴도 닮았다고 이야기해 줍니다. 노총각은 자신에게 허물이 있음을 알면서도 아내가 자신의 아이를 출산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요즘이야 유전자 검사라는 간단한 방법이 있지만 예전에는 닮은 곳을 찾으면서 나의 자식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부모님의 체질과 성격을 닮았습니다. 아버님은 일찍 머리가 하얗게 되었고, 치아가 좋지 않았고, 혈압이 높았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닮아서 40이 되면서 머리카락이 하얗게 되었습니다. 치아가 좋지 않아서 질긴 음식을 잘 먹지 못합니다. 혈압이 있어서 늘 조심하고 있습니다. 어머님은 유순한 성격입니다. 싫은 소리를 잘 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남을 이끄는 편도 아닙니다. 저는 그런 어머니의 성격을 닮았습니다. 유전자 검사를 하지 않아도 저는 부모님의 자식이 확실합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야곱의 아들 요셉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요셉은 예수님과 닮은 점이 있습니다. 어떤 부분들이 있을까요? 첫째,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야곱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때문에 형들이 요셉을 질투하고, 시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았습니다. 둘째, 은전에 팔렸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은전 스무 닢을 받고 요셉을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유다는 은전 서른 닢을 받고 예수님을 대사제와 율법학자들에게 팔았습니다. 셋째, 요셉은 이집트 관리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유혹을 물리쳤지만 감옥에 갇혀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탄으로부터 유혹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이겨내셨습니다. 넷째, 요셉은 파라오의 꿈을 풀이하였고, 이집트의 재상이 되었습니다. 요셉의 가족들은 이집트로 와서 편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십니다. 다섯째, 요셉은 자신을 팔아넘긴 형들을 용서하였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나의 어떤 모습이 예수님을 닮았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나의 어떤 모습이 예수님을 닮지 않았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있다면 분명 예수님을 닮은 것이 아닙니다. 욕심과 탐욕으로 이웃을 괴롭힌다면 분명 예수님을 닮은 것이 아닙니다. 근심과 걱정으로 삶이 우울하다면 분명 예수님을 닮은 것이 아닙니다. 욕심과 탐욕 때문에 주인이 보낸 소작인을 죽이고, 주인의 외아들까지 죽인 소작인들은 분명 예수님을 닮지 않았습니다. 겸손과 인내로 시련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면 예수님을 닮은 것입니다. 나눔과 희생으로 이웃에게 봉사한다면 예수님을 닮은 것입니다. 긍정의 마인드와 희망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다면 예수님을 닮은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우리들의 구원자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보다 앞서서 예수님을 닮은 길을 걸어갔던 요셉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아 은혜로운 회개의 때인 사순시기를 지내면 좋겠습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1,33-43.45-46: 저자는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이자!
오늘 복음의 밭 임자는 포도밭을 일구고 울타리를 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소작인들이 해야 했을 일들을 직접 하였다. 소작인들은 그렇게 많은 일을 해야 했던 것이 아니다. 주어진 것을 잘 지키기만 했어도 되었다. 모든 것이 다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왔을 때, 율법을 주셨고 도시를 세워주셨으며 성전을 마련해 주셨고 제단을 준비해 주셨다. 그러고는 “멀리 떠나셨다.”(33절) 밭 주인은 “소출을 받아 오라고”(34절) 자기 종들을 보냈다. 소출은 행실로 드러나는 순종을 뜻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토록 세심한 보살핌을 받고 나서도 게으름을 피워 소출을 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종들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히기까지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인은 아들을 보낸다.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37절) 이 말은 글자 그대로 소작인들이 그렇게 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주님은 소작인들이 아들을 죽일 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당신의 종들과는 달리 아들의 존귀함에는 경의를 표했어야 마땅하다는 의미다.
소작인들은 그러나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38-39절)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소리치며 주님을 도성 밖에서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40절)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41절)하고 대답한다. 그 대답으로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인정하였다. 주님께서도 당신의 말씀으로 이것을 암시하셨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동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42-43절)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에게 하는 이야기인 줄 알고 예수님을 죽이자고 마음먹었지만,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46절) 그 군중들에게 변을 당할까 두려워한 것이지만 그 군중들도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외칠 사람들이었다. 나는 지금 어떤 소작인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오늘 복음은 포도밭 주인의 행동을 나열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공들여 포도밭을 일구었는지 잘 드러내 주는 표현들입니다. 동시에 이러한 묘사가 확인하여 주는 것은 이 밭의 소유자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주인’ 자신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에게서 저항과 반역의 움직임이 생겨납니다. 주인이 자기 몫의 소출을 받으려고 종들을 보내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을 죽여 버립니다. 주인은 인내심을 가지고 다시 종들을 보내지만, 같은 소행이 되풀이됩니다. 주인은 끝까지 사랑과 신뢰로 자기 아들을 보내지만, 소작인들은 아들이야말로 소유권자이기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며 죽여 버립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도 야곱의 아들들은 요셉을 죽이려 하는데, 그가 자신들을 제치고 아버지의 상속자가 될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받는 사람에게 학대받거나 조롱당하는 일이 일어나니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세상을 만드셨고 살기 좋은 곳, 포도 열매가 잘 맺히는 곳으로 일구시어 우리에게 내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진심을 조롱하고 그분의 사랑을 회피하여 온 것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랑이 중심을 잃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러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우리 포도밭의 주인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반역과 저항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질서를 되찾는 것이 사순 시기에 우리가 다시 세워야 할 삶의 질서입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2ㄴ-43)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는 하느님을 모독한 죄인이다.”라고 판단해서 마치 집 짓는 이들이 쓸모없는 돌을 내버리듯이 예수님을 처형했습니다.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모독한 죄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인류를 구원하는 구세주이신 분입니다. 부활은 바로 그것을 증명하는 특별하고 최종적인 사건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오순절 설교 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36)
이 말은, “여러분은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생각해서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여러분은 하느님의 메시아이시며 주님이신 분을 못 박은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역한 반역죄입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사도 2,32)
부활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자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베드로 사도의 증언은 예수님 부활에 대한 증언이기도 하고, 동시에 살인자들의 죄에 대한 증언이기도 합니다. 이 증언은,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라는 43절의 예수님 말씀에 연결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는 것’은 메시아 예수님을 거부하고 죽인 죄에 대한 처벌입니다. 그렇지만 확정된 일을 예언하신 말씀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않으면’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믿으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여기서 ‘빼앗다.’라는 말은,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는다는 뜻이 아니라, 차지할 권한을 박탈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데, 그렇게 살지 않아서 ‘들어갈 수 있었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것, 그것은 그 나라를 빼앗기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실제로는 유대인들이 빼앗긴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잃은 것입니다.>
여기서 “그 소출을 내는 민족”은 그리스도교를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경고 말씀을 무시했고, 결국 그들이 누리고 있었던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특별한 은총은 그리스도교에게로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 속해 있다고 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하느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면, 아마 그대도 아까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함께 준엄하심도 생각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떨어져 나간 자들에게는 준엄하시지만 그대에게는 인자하십니다. 오직 그분의 인자하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도 잘릴 것입니다."(로마 11,21-22) 우리는 유대인들이 은총을 잃은 일을 교훈으로 삼아서, 자만심을 버리고 끝까지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서 ‘소작인들’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의 신앙생활 태도를 꾸짖기 위해서 사용된 말입니다. 모든 신앙인은 하느님의 소작인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로마 8,14.16-17ㄷ)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소작인처럼 사랑 없이,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살았습니다. 남의 밭에서 일하는 소작인처럼 사는 것은, 또는 자유가 없는 종처럼 사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것, 즉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일은 곧 나의 일이고, 아버지의 재산은 내가 물려받을 것이기 때문에 나의 것이기도 합니다. <충실한 신앙인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상속자로서 상속 재산을 차지하는 일입니다.>
혹시라도 사랑과 기쁨 없이 억지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소작인처럼 사는 것입니다. 미사 참례도 사랑과 기쁨 없이 의무적으로 하고, 기도나 어떤 봉사도 마지못해서 억지로 하고......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강제노동을 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강제노동을 하려고 동원된 사람이 아닙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 때문에, 그것을 얻기를 원하니까, ‘스스로 원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
[살레시오회 남상근 라파엘 신부님]
<처음부터 하느님의 것>
포도밭 주인이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잘 가꾸어 놓으라는 임무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소출을 낼 때가 되자 소작인들은 딴 생각이 들었습니다. 포도밭을 맡을 때와는 달리, 막상 돌려주려니 아깝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래서 전부 차지할 궁리를 하고 주인이 보낸 종들에게 행패를 부리며 급기야 죽이기까지 합니다.
주인의 아들에게마저도 못할 짓을 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애초부터 다 주인 것이었습니다. 본디 제 것이 아니었지요. 그런데 제 몫도 아닌 것을 제 것인 양 할 때, 주인은 맡겨두었던 포도밭을 되돌려 받을 수밖에 없더라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라고 엄중하게 경고하셨습니다. 애초에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통해 알려주시고 내어주신 하느님의 나라이지만 항구적인 것은 아닐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구원을 영원히 독점할 수 있다고 확신했으나, 주님께서는 언제든 다시 구원을 회수할 수 있노라고 질책하십니다.
신약의 백성들은 새로운 구원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께 받은 사명에서 어긋난 삶을 살아간다면, 주님은 가꾸라고 맡기신 포도밭을 빼앗아가실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없으리란 보장은 없는 것이지요.
=====================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는 21-23장에서 수난 전 예수님의 예루살렘 활동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21,1-11 참조) 뒤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과의 논쟁이 다시 시작됩니다.(21,23-27 참조)
이 논쟁은 22장까지 이어지는데, 예수님과 반대자 사이에 점차 높아 가는 갈등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포도밭은 이스라엘, 소작인은 이스라엘의 지도자, 아들은 예수님, 주인은 하느님 아버지를 가리킵니다. 포도밭 소작인에 관한 비유에 담긴 상징적 의미를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의미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시기하고 모함하였으며, 정치적 상황으로 빌미를 만들어 예수님을 돌아가시게 하였습니다.
둘째 의미는, 하느님의 초월적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적대자들의 시기와 모함을 받아 누명을 쓰시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셔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시편 118(117)편 22-23절을 인용하여 예고하였듯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죽음에서 일으키셨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비유 이야기를 통하여 거부와 회복, 죽음과 부활이라는 그리스도론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서는 ‘일상적 현실’을 파괴합니다. 소작인들은 주인에게 주어야 할 소출이 있었으나 그것을 주지 않았고, 오히려 주인이 보낸 종과 주인의 아들을 죽였습니다. 파괴된 현실은 지금 우리의 상황을 반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날카롭게 경고하셨듯이, 오늘날 누군가 ‘일상적 현실’을 부정하고 거부하려고 한다면 그도 그 경고에서 예외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일상적 현실’을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아닐까요?
=====================
[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21,38)
푸시킨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라고 읊었습니다. 지금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꿈을 잃지 않고 살라고 노래한 것이겠죠.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간직하고 꿋꿋이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존재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물론 그 꿈이 이루어지기까지 때론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시기와 함께 그로 인해 많은 삶의 시련과 고난을 겪게 되겠지만,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21,42)라고 노래할 날이 기어이 오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이루신 기적을 기억하여라.”(시105,5) 하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로부터 배척과 거부를 당하시자,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서 그들의 속내를 들추어 내보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예수님을 붙잡으려 합니다. 그런데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처럼 모든 일은 일어났으며 다만 그들의 악행을 통해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 또한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루신 일의 결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들은 하느님 나라를 빼앗겠지만, 그 나라는 죽음으로 새롭게 태어날 하느님 백성의 몫이 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 말씀을 보충합니다. “그들의 잘못으로 다른 민족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고, 그들의 잘못으로 세상이 풍요로워졌습니다.”(로11,12) 우리 역시도 삶의 시련 속에서도 하느님의 꿈을 마음에 간직하며 신뢰를 주님께 두고 살아갑시다.
예수님은 제자들 곧 우리 모두와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요15,15) 그러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요15,20) 하시며 분수 넘는 행동을 자제하도록 다짐하셨습니다. 일은 종이 하지만 종은 단지 주인의 뜻에 따라 충실히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실행하기만 하면 됩니다. 자칫 주인의 뜻이나 의도보다 자신의 의도나 뜻이 우선할 때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인이 잘한다, 참 잘한다, 했다고 해서 요강 씻어서 찬장에다 엎어놓으면 되겠어요? 행주 빨아서 부엌 바닥 훔치면 되겠습니까? 살다 보면 모자라는 것도 지나치게 넘치는 것도 사실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더욱 남의 집 일을 맡아서 할 때는 그러해야겠지만, 하느님의 집일을 할 때는 특히 일의 결과보다 더 중요한 점은 얼마만큼이나 하느님의 뜻에 충실했느냐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본래 종이란 남을 위해서, 남 밑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종은 주인의 명령을 듣고 그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순종하면 되는데, 이처럼 순종은 종에게 필요한 덕목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종의 축복은 그냥 주인이 시키는 일을 잘하면 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주인이 질 것이기에 근심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인의 명령 곧 자신에게 맡겨진 일만 충실히 하면 되지 책임은 주인의 몫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의 축복이라고 느껴집니다. 주인이 자신에게 맡긴 일을 충실히 할 때 그 종에게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친구처럼 신뢰하고 더 큰 일을 맡기겠지만, 반대로 주어진 일을 충실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하려고 하는 종을 향해서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요13,16) 라고 일침을 놓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 성사를 통해서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곧 주인으로 섬기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이며 실제적으로도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주인님의 종인데, ‘불충한 종이기보다는 충성스런 종이 되어야 주인이신 주님의 사랑과 총애를 받지 않겠느냐?’ 이게 오늘 복음의 요지입니다.
주님은 소작인들을 당신 친구이며 종으로, 당신 자녀이며 일꾼으로 그들을 선택하시어, 포도원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나라의 포도밭을 그들에게 맡겼습니다. 콩 심어라, 팥 심어라, 하고 일절 관여하지 않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다 맡겼습니다. 주인은 소작인들을 믿고 맡겼는데, 그들은 그 주인의 신뢰와 믿음을 저버리고 배반했습니다. 자기 몫의 소출을 받으러 주인이 보낸 종들을 때려주고 심지어는 죽였습니다. 주인은 소작인들의 불충한 행동에도 마지막까지 그들의 신뢰를 기대하면서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21,37)하며 자기 아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인의 기대를 저버리고 상속자인 아들마저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21,38) 버리고 상속 재산인 포도밭을 차지하려고 그리하였습니다. 이 포도밭과 소작인의 비유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너무도 명백해서 해설이고 뭐고 할 필요가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예수님께서 하신 이 비유의 이야기를 들은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이 비유를 듣고서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고,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고 그들이 두려워서 손을 대지 못했다고 오늘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21,45~46참조) 오늘 복음을 함께 묵상하면서, 하느님께서 믿고 맡긴 일에 열심히 일했을지는 모르지만, 종이란 신분을 망각하고 도를 넘어서 자신들에게 주어질 몫에 욕심을 부리거나, 심지어는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 장사하는 악한 교회 안의 사제와 수도자 그리고 교회 봉사자들의 처신과 행동을 반성하게 합니다. 물론 교회 안의 일꾼으로 불린 어떤 분들은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세상 사람들이 다 압니다. 만일 그런 지탄받고 있다면 마음으로부터 깊이 반성하고 뉘우쳐야 하리라 봅니다. 저는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나라의 포도밭을 가꾸는 일을 부족한 저에게 맡기셨고, 그 일을 하면서 헤아릴 수 없는 은총과 사랑을 베푸셨으며 지금 누리는 이것도 제게 과분한 특은입니다. 주님께서는 저에게 부당하게 많은 소출을 내라고 강요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당신의 뜻대로 최선을 다해서 충실히 일하도록 바라실 뿐 사실 소출은 결코 염두에 두시지 않았다고 느낍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사순 3주일의 복음인 성전 정화를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한다면 더 깊이 이해되리라 생각됩니다.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전락시키고 그에 따른 이득을 취하는 장사꾼들과 종교 지도자들에게 향한 예수님의 통렬한 꾸짖음의 반향으로 들려옵니다. “주님, 저를 당신 포도밭에 일꾼으로 불러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제게 맡겨진 일을 충실히 최선을 다하여 수행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일에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다만 당신 뜻만을 마음에 새기며 성실하고 충실하게 일하겠나이다. 아멘.”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국 서부 개척 시대에 낮에는 식당, 밤에는 술집을 운영하는 가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손님이 줄어 운영이 어려워진 것입니다. 주인은 며칠 간의 고심 끝에, 저녁에 자기 집에서 술을 마시면 다음 날 점심을 공짜로 주겠다는 광고를 냈습니다.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요? 손님이 점점 몰려들어 장사는 나날이 잘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이 가게의 비밀이 밝혀졌습니다. 글쎄 저녁 술값에 다음 날 점심값이 이미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공짜를 좋아하면 도둑놈 심보다 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해서 공짜만을 좋아하고 또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주님께 어떠합니까?
우리 교회의 발전이 공짜로 이루어진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봉헌이 있었고, 많은 순교자의 피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도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많은 신앙인 덕분에 우리 교회가 계속 발전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을 사는 우리는 계속 공짜 인생만을 원하고 있습니다. 본인의 그 어떤 노력 없이 세속적인 자기 욕심이 채워지길 바라는 기도의 연속은 아니었습니까?
공짜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대로 더 사랑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하늘나라에서 모두 갚아주시겠다고 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포도밭을 일군 다음 소작인들에게 맡기지요. 그리고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소출을 받아 오라고 종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매질하고 또 죽이기까지 합니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역시 마찬가지의 악행을 저지릅니다. 마지막으로 아들은 존중할 거라는 마음으로 보냈지만, ‘상속자인 아들을 죽여 버리면, 이 포도밭을 차지할 수 있다’라는 생각으로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립니다.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많은 예언자를 죽이고, 심지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까지 십자가에 못 박았던 이스라엘 사람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 지금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당연히 많은 것을 누려야 한다는 욕심과 이기심이 과거의 이스라엘 사람과 무엇이 다를까요?
그 어떤 노력도 없이 세속적인 자기 욕심이 채워지길 바라는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을 묵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못된 소작인의 모습이 아닌, 겸손한 삶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착한 소작인의 모습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으로 인정을 받고, 주님 안에서 참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 사랑해요>
마태오 21,33-43.45-46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이 비유들을 듣고서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아차리고,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우리 사랑해요>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3)
우리 사랑해요
우리
처음부터
사랑이었으니
우리 사랑해요
우리
처음부터
사랑할 수 있었으니
우리 사랑해요
우리
사랑해야
사랑할 수 있으리니
우리 사랑해요
우리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못하리니
우리 사랑해요
우리
사랑해야
늘 사랑할 수 있으리니
우리 사랑해요
우리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게 되리니
우리 사랑해요
우리
사랑해야
사랑일 수 있으리니
우리 사랑해요
우리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마저 빼앗기리니
우리 사랑해요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언제나 당당하게>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서 주신 포도밭이고, 우리는 그 밭의 일꾼입니다. 일꾼은 열성으로 일을 해야 합니다. 일꾼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고 주인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열매를 맺어 그 열매를 주인께 바쳐드려야 합니다.
만약 일꾼이 주인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일을 한다면 아무리 많은 일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는 이미 일꾼으로서 자격을 잃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이미 하느님의 일꾼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느님께서 주신 포도밭에서 마음껏 일할 수 있는 하느님의 훌륭한 일꾼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여도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한 것처럼 보여도 사랑이 담기면 많은 일을 한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여도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면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한 것처럼 보여도 해야 할 일을 했으면 많은 일을 한 것입니다. 일꾼은 일꾼입니다. 주인을 꿈꿀 수 있을지언정 주인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고 싶은 일에 앞서 해야 하는 일을 우선해야 합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서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롭지 못한 삶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중이 두려워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왜 군중이 두려웠을까요? 자기들이 의롭게 살았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의인은 아무도 겁내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나 “도둑이 제 발 저린다.” 는 옛말이 있듯이 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 한 것은 곧 자기들이 하는 일이 옳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당당하셨습니다. 바리사이나 수석 사제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하시는 일이 하늘 아버지의 뜻에 의합하고 당신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한 5,1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보내주신 아버지의 뜻만을 추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아버지 안에 머무는 만큼 당당히 가실 길을 가야만 하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걸으신 그 길을 당당히 걷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신상옥씨의 ‘내 발을 씻기신 예수님’을 묵상합니다.
그리스도 나의 구세주, 참된 삶을 보여주셨네.
가시밭길 걸어갔던 생애,
그분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네.
죽음 앞둔 그분은 나의 발을 씻으셨다네.
내 영원히 잊지 못할 사랑,
그 모습, 바로 내가 해야 할 소명.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이 아파하는 곳으로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 손길 필요한 곳에
먼 훗날 당신 앞에 나설 때
나를 안아주소서.
주님께서 걸으신 길, 기쁨으로 걸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꿈쟁이’자 ‘꿈나무’인 우리들>
-하느님 꿈의 실현-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주님이 이루신 기적을 기억하여라.”(시편105.4-5ㄱ)
오늘 3월1일은 제105주년을 맞이하는 3.1절로, 1919년 3월1일에 일어난 3.1운동을 기념하여 제정된 대한민국의 국경일입니다. 일제의 통치로부터 한민족의 독립의 꿈이 한반도 전체에 활짝 꽃처럼 피어났던 날입니다. 또 오늘은 사순시기로 3월 첫날이자 ‘성 요셉 성월’의 첫날이자 마지막 3월31은 부활대축일로 영적 황금기의 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난국에 처한 이 나라를 위해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와 회개로 정의와 평화의 꿈이 활짝 피어날 수 있도록 주님의 자비를 청해야 할 참으로 절박한 3월이라 하겠습니다. 여전히 독립운동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아직도 온전한 독립은 여전히 미완으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어느 일간신문 1면 톱기사, “0.65명...또 ‘최저’ ‘출구’없는 저출생”이란 커다란 활자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한민족도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대로 꿈이, 희망이 사라져가는 나라 현실을 상징하는 듯 했습니다. 개인이든 사회든 나라든 꿈이, 희망이 있어야 삽니다. 살아있는 자들만 꿈꿉니다. 죽어있는 자들은 꿈꾸지 못합니다. 2009년 15년 전 봄철에 써놨던 “살아있는 자들만 꿈꾼다”라는 시가 생각났습니다.
“살아있는 자들만 꿈꾼다
죽어있는 자들은 꿈꾸지 않는다
연초록 새싹으로
화사한 꽃들로 피어나는 꽃나무
봄꿈의 나무들
살아있는 자들만 꿈꾼다.”
숨쉰다하여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꿈이 있을 때 비로소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꿈꾸는 사람들만이 살아있는 영원한 청춘입니다. 예수님은 물론이고 모든 성인들은 하느님의 꿈이 꽃처럼 피어났던, 그대로 하느님의 꿈이 실현된 분들입니다. 역시 하느님은 우리를 통해 당신의 꿈이 실현되시길 바랍니다. 우리 프란치스코 교황님 역시 나이에 관계없이 오늘 제1독서 창세기의 요셉처럼 “하느님의 꿈쟁이”임을 깨닫습니다.
교황은 “모든 사제는 요셉처럼 꿈꾸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꿈꾸는 사람은 현실과 동떨어진 몽상가가 아니라 보이는 것 너머를 볼 줄 아는 사람이라 정의했습니다. 또 위대한 꿈을 꾸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십니다. 어제 독일에 있는 수녀님으로부터 받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순절 단식 권고 내용을 읽으면서 교황님의 기발한 상상력의 가르침에 명실공히 하느님의 꿈쟁이임을 확인했습니다.
1.걱정을 단식하고 하느님을 신뢰하세요.
2.불평을 단식하고 단순함을 묵상하세요.
3.스트레스를 단식하고 기도하세요.
4.슬픔을 단식하고 감사로 채우세요.
5.쓰라림을 단식하고 여러분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우세요.
6.남을 사냥하는 말을 단식하고 상냥한 말을 사용하세요.
7.비관주의를 단식하고 희망으로 채우세요.
8.화를 단식하고 인내로 채우세요.
9.이기심을 단식하고 다른 사람에게 연민의 마음을 가지세요.
얼마나 멋진 참된 단식인지요! 영적황금기 3월 이런 단식으로 하느님의 꿈이 활짝 피어나는 꿈나무로 사시길 바랍니다. 오늘 제1독서 창세기는 요셉을 통해 하느님의 꿈이 어떻게 실현되어가는 지 보여주는 시초입니다.
“저기 꿈쟁이가 오는구나. 자, 이제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
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하느님의 꿈을 좌절시킬 수는 없습니다. 창세기 37장에서 시작되어 50장으로 끝날 때 까지 요셉을 통해 하느님의 꿈이 실현되어가는 파란만장한 과정이 참으로 장관입니다. 요셉만이 아니라 성서의 예언자들은 물론 예수님 역시 하느님의 꿈쟁이였습니다. 예언자들이나 예수님을 정의하면 사랑의 시인, 신비가, 영성가, 관상가이자 활동가, 꿈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 역시 평생 꿈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으니 바로 “하느님 나라”가 그분의 평생 꿈이였고 이 하느님의 꿈은 우리를 통해 면면히 계승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평생 날마다 노래하는 시편 역시 하느님의 꿈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꿈이 가득 담긴 시편을 노래하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시인이 되고, 하느님의 꿈은 우리를 통해 꽃처럼 피어나고 실현되리라 믿습니다. 오늘 제1독서 창세기 요셉의 일화와 마태복음 21장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배치가 참 절묘합니다. 요셉은 그대로 예수님의 예표가 됩니다. 그대로 요셉의 수난은 그대로 복음의 비유에서 포도밭 주인의 아들이 상징하는 예수님의 수난을 보여줍니다.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그대로 창세기의 요셉 형제들의 말과 오버랩됩니다. 세상 악의 세력들은 예나 이제나 하느님의 꿈을 좌절시키려 음모와 온갖 획책을 시도하지만 결코 하느님의 꿈을 좌절시킬 수 없음을 봅니다. 마침내 부활을 통해 당신의 꿈을 실현시킨 하느님이요 초대교회 신자들은 바로 다음 시편의 꿈이 예수님의 부활 승리를 통해 성취되었음을 깨달았음이 분명합니다.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 21,42;시편 118,22-23)
예수님 제자들의 시편을 렉시오디비나 한 솜씨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대로 이들의 영성의 깊이를 보여줍니다. 하느님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를 통해 당신 꿈을 꾸시고 실현시켜 나가십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꿈쟁이이자 꿈나무입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를 통해 당신의 꿈이 실현되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 당신의 백성이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선행에 힘쓰고, 언제나 주님의 보호를 받게 하소서.” 아멘.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좋아하는 인간, 사랑하시는 하느님>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오늘의 주제는 ‘인간이 버린 사람을 하느님께서 귀하게 쓰시고, 인간이 죽인 사람을 하느님께서 살리신다.’로 해도 좋을 겁니다.
요즘 들어서 우리 인간은 참으로 많은 것을 쓰레기로 만듭니다. 실로 얼마나 많은 것을 우리 인간이 버립니까? 그것을 저는 저희 아나바다 장터에서 실감하는데 전국에서 여러분들이 물건을 보내 주시는 덕분에 저희 장터는 성업 중이고 의미 있는 사업이 되었지요.
그래서 그냥 쓰레기가 될 것을 재활용할 수 있도록 협력해주신 여러분에게 늘 감사를 드리고 있지만 마냥 좋게만 볼 수 없는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프란치스칸마저 신자유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신자유주의가 끊임없이 소유와 소비를 부추기는데 우리 프란치스칸들조차도 이 부추김에 넘어간 것입니다.
과거 우리 교회의 가르침이나 교회 밖의 건전한 가르침들은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을 욕심이라고 규정하고 우리 인간의 그 끝없는 욕망과 욕심을 억제하라고 가르쳤는데 신자유주의는 소유욕과 욕망들을 죄악시하지 말라고 부추기지 않습니까?
신자유주의는 그러면 왜 그렇게 합니까? 우리 인간의 행복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겁니까? 아니지요. 기업이 잘 돌아가고, 그래서 기업이 많은 이윤을 내게 하기 위해서지요.
부추김, 이것이 실은 창세기 뱀의 유혹입니다. 뱀은 아담과 하와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리킵니다. 너희가 다 가졌고 다 따먹는데 낙원 한가운데 저 나무 열매만은 못 따먹는 것 아니냐고 일깨우고 따먹으라고 부추기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나무가 뭐냐 하면 바로 선악과, 곧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입니다. 그 열매를 따서 먹는 순간 하느님만 아셔야 할 선과 악을 인간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뜻대로 생겨난 모든 것을 보시고 좋다고 하셨고, 그래서 선이란 하느님 좋으실 대로 된 것인데 그런데 인간이 자기 좋을 대로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 결과 바란 대로 된 것은 선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악이 된 것이며, 바란 대로 된 선 곧 좋아하는 것은 소유하고 바란 대로 되지 않은 악 곧 싫어하는 것들은 버려버리게 된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중심적으로 소유하고는 버립니다. 더 좋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덜 좋은 것을 버려 쓰레기로 만들고, 새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쓰던 것을 싫증 내고는 쓰레기로 버립니다.
그런데 너무도 놀라운 것은 이 자기중심적 소유와 소비가 물건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자기 욕망과 필요에 따라 인간마저 소유하고 버립니다. 욕망 때문에 애를 낳고는 성가시다고 애를 버립니다. 좋을 때는 사랑한다고 하고는 싫어지면 사랑을 버립니다.
하느님마저도 필요할 때는 소유하고 욕망의 순간이나 필요 없을 때는 버려버립니다.
그러나 사랑이신 하느님은 그렇게 버린 인간을 귀하게 여기시고, 우리 인간이 버린 주님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십니다.
좋아하고 소유하는 인간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 그 큰 차이를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마태21,38)
<두 모습!>
오늘 복음(마태 21,33-43.45-46)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마태오 복음에는 포도밭을 배경으로 한 비유가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마태 20,1-16)이고, 또 하나는 오늘 복음인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이 두 비유는 비교가 됩니다. 앞에 비유는 '포도밭 주인의 선한 마음'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뒤의 비유는 '포도밭 소작인의 악한 마음'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 비유에서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포도밭 소작인들은 주인이신 하느님의 일꾼들인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포도밭 주인의 아들은 예수님'을 가리키고, '포도밭 주인의 종들은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세상으로 파견된 많은 예언자들'을 가리킵니다.
포도밭 소작인들이 악한 마음을 품습니다. 주인의 상속자인 아들을 죽여 버리고, 주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고 외칩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인의 아들을 죽여 버립니다.
이 죽음이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소작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등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죽으셨습니다.
이 죽음의 행위,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죽음의 행위인 소작인의 악한 행위는 오늘날 지금 여기에서도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 위에 있으려고 하는 사람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위에 있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바로 악한 소작인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칠죄종(七罪宗)의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들, 곧 교만, 인색, 탐욕, 음욕, 시기, 분노, 나태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악한 소작인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악한 소작인이 되지 말고, 선한 포도밭 주인이 되려고 노력합시다!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마태 21, 38)
봄의 새순이 움트듯
새순과 새순
사이에는 생명의
질서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하느님의 땅에서
버젓이 살인이
자행됩니다.
우리의 욕심은
하느님까지도
겨낭하며 이 모든 것을
뒤집어놓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매순간
가장 좋은 것을
빼앗고 죽이는
우리들 욕심입니다.
사순시기는
비뚤어지고
병든 우리 마음을
바로잡는 시간입니다.
존중없는 관계는
살인으로 이어집니다.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참으로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경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참다운 기쁨입니다.
가장 먼저
부패되어가는
우리의 마음을
위해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욕망의 꺼풀을
벗겨내는 길은
생명의 질서가
되시는 하느님께
순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다시 생명의 힘을
얻는지를 다시
깨닫는 생명의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
(2)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마태오 21, 39)
포도밭은 욕망의 산물이 아니라 가장 좋으신 하느님 은총의 선물이다. 우리의 삶이란 결코 욕망을 채우기 위한 포도밭이 아니다.
사실은 삶의 어두운 욕망의 근원이 하느님과 우리를 분리시키는 데 있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는 은총의 사순이다. 삶의 포도밭에서 우리를 살게 하시는 생명의 하느님이시다. 모든 것을 부정해도 부정할 수 없는 단 하나 그것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존재이다.
세상은 그걸 참 모른다. 하느님을 죽이기에 우리의 관계도 함께 죽어가고 있다는 엄연한 이 사실이다. 그래서 신앙은 거래가 아니다.
나와 너 우리의 욕심이 너무 크다. 욕심에는 길이 없다. 욕심으로 참으로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포도밭에서 다시금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삶의 질서와 욕심의 절제를 다시 배운다. 하느님께서는 서로를 죽이고 또 죽이는 욕망의 포도밭이 아닌 함께 행복한 포도밭이길 간절히 원하신다.
이 사순시기 우리 삶의 포도밭을 다시 보게 된다. 하느님께서 잠시 맡기신 생명의 포도밭을 잘 가꾸어 하느님께 돌려드릴 일이다.
하느님께 지나친 우리의 욕심과 파괴하는 무질서를 봉헌한다. 관계가 새로워져야 포도밭도 새롭다. 모든 관계와 포도밭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가장 좋은 흠숭을 올린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