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年作(신년작)
<새해에 짓다>
劉長卿(유장경)
고향 그리는 마음 새해 되니 간절해져
하늘가에서 홀로 눈물 흘리네
늙도록 남의 밑에 있는데
봄은 객보다 먼저 돌아갔구나
고개의 원숭이와 아침저녁을 함께하고
강가의 버들과 풍경을 함께하노라
이미 장사부(長沙傅) 가의(賈誼)와 같아졌으니
지금부터 또 몇 해나 지내야하나
鄕心新歲切(향심신세절)
天畔獨潸然(천반독산연)
老至居人下(노지거인하)
春歸在客先(춘귀재객선)
嶺猿同旦暮(영원동단모)
江柳共風煙(강류공풍연)
已似長沙傅(이사장사부)
從今又幾年(종금우기년)
[通釋] 자신이 타향에 폄적(貶謫:벼슬자리에서 내치고 귀양을 보냄) 당한 것도 슬픈데, 새해 명절을 맞으니 더욱 처량해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향을 그리며 눈물을 흘린다. 게다가 늙어서까지도 남의 아래에서 낮은 벼슬살이를 하는데, 봄은 먼저 고향으로 갔건만 나는 아직 돌아가지 못한 채 슬픔만 더해진다. 낯선 고장에서 아침저녁으로 매일 고개 마루의 원숭이와 함께 지내는 것이 고작이고, 강가의 버들과 함께 풍경을 보면서 무정한 것들과 교유할 뿐이다. 한나라 때 참소 받아 먼 곳으로 좌천된 賈誼(가의)와 똑같은 신세가 되었으니 돌아갈 기약 없어 몇 해나 또 보내야 하는지.
[解題] 이 시는 유장경이 당 大曆(대력) 12년(777) 약 52세 전후에 목주사마(睦州司馬)로 폄적되어 있을 때 쓴 작품으로 추정된다.
45세 무렵 시인은 조용사(租庸使)란 직책을 맡게 된다. 안사의 난 이후 국가재정이 파탄난 상황에서 당나라의 재정은 실제 강남에서 떠맡고 있었으므로 중요한 자리였다. 이 자리에 있은 지 1년이 못 되어 당시 곽자의(郭子儀)의 사위인 악악관찰사(卾岳觀察使) 오중유(吳仲儒)와 불화하게 되고 결국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옥살이를 하게 된다. 이 사건은 오중유의 장인으로 당시 권세를 잡고 있던 곽자의와, 유장경의 후원자로 곽자의와 경쟁관계에 있었던 원재(元載) 사이의 알력에 원인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일은 시인의 삶에도 영향을 미쳐 이를 계기로 사회현실을 반영한 시 세계에서 개인적인 심사를 토로하는 방향으로 시를 쓰게 된다. 中唐 시기에 일어난 이런 변화가 이 시에도 드러난다. 강개한 기세는 점차 약해지는 반면 애처로운 기세는 더욱 더해지게 되는데, 자신의 불만스러운 감정이 담겨 있다.
가의(賈誼)에게 자신을 가탁하는 마음은 다른 시인 〈長沙過賈誼宅(장사과가의댁)〉을 통해 뚜렷이 알 수 있다.
역주
역주1> 新年作(신년작) : 이 작품은 ≪三體唐詩(삼체당시)≫, ≪瀛奎律髓(영규율수)≫ 등에는 송지문(宋之問)의 作으로 되어 있다. ≪劉長卿集編年校注(유장경집편년교주)≫에 “이 시는 ≪全唐詩(전당시)≫ 卷53에도 송지문의 시로 실려 있다. 송지문의 別集을 살펴봤지만 이 시는 보이지 않고, ≪劉長卿集(유장경집)≫ 각각의 판본에 고르게 실려 있어 지금 이에 유장경의 작품으로 판단한다.[此詩全唐詩卷五三 又收作宋之問詩 按宋別集 不見此詩 而劉集各本均收之 今仍斷爲劉作]”고 하였고, ≪劉長卿詩編年箋注≫에는 “송지문의 시라 하기도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一作宋之問詩 誤]”라고 하였다.
역주2> 切(절) :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절실하다는 뜻이다.
역주3> 天畔獨潸然(천반독산연) : 유장경은 52세경에 호남성(湖南省)의 목주사마(睦州司馬)로 좌천되었는데, 그곳이 長安에서 멀리 떨어진 남쪽 변방이기 때문에 ‘天畔(천반:하늘가)’이라 말한 것이다. ‘潸然(산연)’은 눈물이 줄줄 흐르는 모양이다.
역주4> 老至居人下(노지거인하) : 屈原(굴원)의 〈離騷(이소)〉에 “늙음이 점점 이르려 하니 훌륭한 명성 세우지 못할까 두렵네.[老冉冉其將至兮 恐修名之不立]”라는 글귀가 보인다. ‘居人下(거인하)’는 ≪舊唐書(구당서)≫ 〈孫儒傳(손유전)〉에 “대장부가 능히 만리 밖에서 괴롭게 싸우며 상벌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어째서 남의 아래에 있는가?[大丈夫 不能苦戰萬里 賞罰由己 奈何居人下]”라는 글에서 취한 것이다.
역주5> 春歸在客先(춘귀재객선) : 봄이 자신보다 먼저 고향 땅에 돌아갔다는 뜻이다.
역주6> 風煙(풍연) : 風光(풍광), 風景(풍경)과 같은 말이다.
역주7> 長沙傅(장사부) : 長沙王(장사왕)의 太傅(태부)인 賈誼(가의)를 가리킨다. 유장경이 자신의 신세를 漢나라 賈誼에게 비유한 것이다. 가의는 대신의 미움을 사서 참소를 당하고 長沙王의 太傅로 좌천되었다. ≪劉長卿詩編年箋注≫에는 “≪史記≫ 〈賈誼傳〉을 살펴보면, ‘賈誼가 장사왕 태부가 된 지 3년이 되었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이 말을 인용하여 자기가 睦州로 貶謫된 지 이미 3년이 지났음을 말하고 있다.[按史記賈誼傳云爲長沙王傅三年 此用其言 謂己貶睦州已歷三年]”라고 하였다.
역주8> 又幾年(우기년) : 폄적(貶謫)생활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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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장경 [劉長卿, 725?~791?] 자는 문방(文房)이다. 안후이성[安徽省] 선성(宣城) 출신이라는 설과 후베이성[河北省] 동남쪽에 위치했던 하간(河間)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 젊었을 때는 뤄양[洛陽] 남쪽의 숭양(嵩陽)에서 살면서 청경우독(晴耕雨讀)하는 생활을 하였다.
가의(賈誼, 기원전 201년 ~ 기원전 168년)는 중국 전한 초기의 사상가이다. 가생(賈生)으로도 불렸다. 낙양(洛陽) 출신으로서 18세에 이미 수재라는 평판이 높았고, 22세 때에 박사관(博士官)에 임영되었으며 다시 태중대부(太中大夫)에 발탁되었다. 그는 그때 한(漢)의 제도와 역법을 개정할 것을 문제에게 진언하였지만 주발(周勃) 등의 수구파 대신의 반대를 받아 25세 때에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전출되고 말았다. 장사(長沙)로 좌천되었을 때 지은 〈굴원을 조위(弔慰)하는 부(賦)〉나, 〈복조의 부(賦)〉에는 세상의 인사에 얽매이지 않고자 하는 도가적 심경이 보인다. <위키백과>
<가의 관련 참고>
고문진보후집 :
<과진론> <조굴원부
사마천 사기: 사기열전 24 <굴원가생열전>
한서(漢書) : 권48 <가의전>
신서(新書) : 한(漢) 문화의 토대를 구축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중국 전한 초기의 사상가 가의의 정치사상을 담은 저술이며 한(漢) 초의 학술과 사상을 전해주는 중요한 자료로 특히 진나라 패망의 원인이 인의(仁義)에 기초한 왕도정치를 버리고 폭력적이고 기만적인 법치주의를 선택했기 때문이라는 ‘과진론(過秦論)’은 후대 유학국가이론의 초석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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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당시삼백수]新年作(신년작: 새해에 짓다)-劉長卿(유장경)
[출처] [당시삼백수]新年作(신년작:새해에 짓다)-劉長卿(유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