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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46~150) 중앙SUNDAY 김명호(57세)교수는...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로 있다. 경상대·건국대 중문과에서도 가르쳤다. 1990년대 10년 동안 중국 전문서점인 싼롄(三聯)서점의 서울점인 ‘서울삼련’의 대표를 지냈다. 70년대부터 홍콩과 대만을 다니며 자료를 수집한 데다 ‘서울삼련’ 대표를 맡으며 중국인을 좀 더 깊이 알게 됐고 희귀 자료도 구했다 <146>취임식장의 장제스, 경쟁자 리쭝런을 바보로 만들다 |제147호| 2010년 1월 2일
▲1948년 5월 20일 난징의 국민대회당에서 거행된 정·부총통 취임식. 리쭝런(뒷줄 군복 입은 사람)은 후일 “이날 나는 장제스의 노리개였다”고 회고했다. 김명호 제공
1965년 7월 20일 오전 10시40분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를 태우고 상하이를 떠난 전용기가 베이징 서우두(首都)공항에 착륙했다. 전인대·전국정협·국방위원회·민주당파·전국공상연합 등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공항에 나와 있었다. 이들은 저우언라이보다 20분 늦게 상하이를 이륙한 비행기에서 내릴 사람을 기다렸다. 다음날 신화통신을 비롯한 전국의 언론매체는 “항일전쟁 초기 타이얼좡(台兒庄) 전역에서 일본군 2만여 명을 몰살시킨 민족영웅이며 국민정부 부총통과 총통대리였던 리쭝런(李宗仁)이 귀환했다”는 기사를 대문짝만 하게 보도했다. “전 총통대리라니, 이건 또 뭐야. 장제스가 타이완으로 내뺀 지가 언젠데…”라며 혼자 웅얼거리는 사람도 적지 않았지만 16년 전 중국을 떠났던 리쭝런이 돌아왔다는 소식은 핵실험 성공에 버금가는 대형사건이었다.
1948년 4월 헌법에 의해 처음 실시된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에서 장제스는 국민대회 대표 3045명 중 2430명의 지지를 받았다. 부총통은 국부 쑨원(孫文)의 장남인 국민정부 부주석 쑨커(孫科), 국민당 베이핑(北平)행원(行轅) 주임 리쭝런, 우한(武漢)행원 주임 청첸(程潛) 간의 3파전이었다. 당내 불만세력과 미국의 지지를 받던 리쭝런은 법정 득표수 미달로 탈락한 청첸과의 제휴에 성공했다. 결선 투표에서 장제스가 밀던 쑨커를 143표 차로 눌러버렸다.
리쭝런은 34세인 1925년 광시(廣西)성에 난립하던 잡군들을 일거에 제압한 신(新)광시군벌(桂派)의 영수로 별명이 ‘광시의 왕(廣西王)’이었다. 이듬해 5월 광저우에서 황포군관학교 교장이던 장제스를 만나면서 지겨운 인연이 시작됐다. 북벌과 항일전쟁을 함께 치르며 대립과 합작을 반복했다. 두 사람은 20여 년간 서로를 위협하는 가장 큰 경쟁자였다.
총통 장제스는 부총통 리쭝런을 고약하게 대했다. 못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5월 20일 리쭝런은 장제스와 함께 정식으로 취임선서를 했다. 리는 장의 시종실에 취임식 날 복장을 문의했지만 확실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 당일 새벽에서야 군복을 착용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군복에 훈장을 덕지덕지 달고 나온 리쭝런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부총통은커녕 시종무관이나 경호 책임자 같아 참석자들을 난감하게 했다. 장제스를 비롯한 고관과 초청받은 인사 거의가 중국식 정장 차림이었다. 장제스는 취임식이 끝나자마자 리쭝런의 최측근이었던 국방부장을 의논 한마디 없이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 버렸다.
두 사람은 매주 두세 차례 공식적인 단독 면담을 했다. 장제스는 정국에 관한 얘기를 단 한마디도 꺼내는 법이 없었다. 날씨와 음식에 관한 얘기만 해댔다. 리쭝런이 정책 건의를 위해 면담을 요청하면 거절했다. 당당하게 투표로 선출된 부총통이었지만 후일 “세상에 태어난 이래 가장 한가한 나날들이었다. 군국대사에 관한 회의가 열려도 내게 알리지 않았고 국빈이나 외교사절들에게 베푸는 연회에도 오라는 말이 없었다. 가끔 참석하라고 해서 가보면 국민당 원로들에게 베푸는 만찬자리였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장제스의 비행기 선물은 절정이었다. “부총통이니 전용기가 있어야 한다. 놀러 다닐 때 이용해라”면서 자신의 전용기 ‘미령호(美齡號)’를 선사했다. 바람 불고 천둥번개가 요란한 날이면 영락없이 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비행기 타고 항저우나 상하이에 놀러가지 왜 답답하게 공관에만 틀어박혀 있느냐”며 짜증을 냈다.
이듬해 1월 국공내전에서 패배가 확실시된 장제스를 리쭝런은 몰아붙였다. 장제스는 국민당 총재직을 유지한 채 총통직에서 하야했다. 헌법에 의해 대리총통에 취임한 리쭝런은 공산당 측에 회담을 제의했다. 베이핑에서 평화회담이 열렸다. 리쭝런은 장제스의 직계인 중앙군과 함께 국민당군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계파(桂派)’의 영수였지만 승기를 잡은 인민해방군이나 장제스의 적수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회담은 파열될 수밖에 없었다. 회담에 참석한 국민당 측 대표 중 일부는 아예 베이핑에서 공산당 측에 가담해 버리는 촌극을 연출했다.
두 사람은 제 갈 길을 갔다. 장제스가 타이완으로 가고, 리쭝런은 함께 가자는 장을 뿌리치고 미국행을 택했다. 타이베이에서 군복을 입고 총통에 복귀한 장제스는 부총통 리쭝런의 귀국을 종용했다. 거절당하자 절차를 거쳐 리를 파면시켰다.
리쭝런은 베이징 도착 성명에서 장제스를 비난하지 않았다. 소식을 접한 장도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남들이 “나이가 들더니 드디어 돌았다”고 하면 고개만 끄덕거리는 정도였다. <147> 조선의용군 정예 1500명, 조국에서 쫓겨나다 비운의 조선의용군 <上> |제148호| 2010년 1월 9일
▲일본군에게 격추 당한 미군 조종사(앞줄 가운데)를 구출한 뒤 환영연을 베푼 조선의용군 전사들. 1945년 3월 4일 산시(山西)성 신수이(沁水)현 궈좡춘(郭庄村). 김명호 제공
20세기 초 한국인들은 식민지 백성으로 전락했다. “아예 이 땅을 떠나자”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강 하나만 건너면 중국이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국경을 넘었다. 엉뚱한 행동으로 모두를 욕되게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당당하게 중국 현대사의 한 부분을 장식해 아직도 중국인들을 숙연케 하는 유명·무명의 한국인들이 있었다. 한 예가 조선의용군이다.
1945년 8월 16일과 18일, 이범석이 지휘하는 광복군 국내정진군은 국내 진입을 시도했다. 미군 군용기를 얻어 타고 시안(西安)을 출발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첫 번째는 중도에 회항했고 두 번째는 여의도에 착륙은 했지만 일본군의 저항이 완강했다.
북쪽에서도 좀 복잡하지만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소련의 대일본 선전포고 사흘 후인 8월 11일, 옌안(延安)의 조선의용군 사령부는 각 지역에서 활동 중인 조선의용군을 선양(瀋陽)에 집결토록 했다. 제일 먼저 도착한 조선의용군 선발대는 선양에 거주하던 한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한청(韓靑)이라는 인물이 창설한 조선의용군 독립단과 합류해 조선의용군 선견종대를 편성했다.
일본 관동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동북을 장악한 소련은 10월 초에 들어서자 중국 국민당과 소련군의 철수를 협의하기 시작했다. 국민당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선양의 소련군 사령부는 옌안에서 올 후속명령을 기다리던 조선의용군에 농촌 지역으로 이동해 줄 것을 요구했다. 소련군의 독촉이 심하자 의용군지휘부는 15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남만주 방면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조선인 밀집지역인 단둥(丹東)·환런(桓仁)·퉁화(通化)가 있었다. 지휘는 지역 사정에 밝은 한청이 했다. 10월 11일 오전 단둥에 도착하자 강 건너 신의주에 주둔하던 소련군 사령관이 연락병을 보냈다. “내일 아침 압록강 어귀에서 만나자.”
신의주 주둔 소련군 사령관은 조선의용군의 입국을 요구했다. 한청은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소련군 사령관의 첫마디는 한청의 귀를 의심케 했다. “귀하가 인솔하는 부대는 왜 강을 넘어 조선 경내로 들어오지 않는가” “진입이 가능한가”라며 되물었지만 “조선인 부대가 아니냐. 불가능할 이유가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래도 믿기지 않았던지 재차 확인했다. 대답은 한결 같았다. “허락만 한다면 12시 정각에 도강하겠다”며 즉석에서 결정을 내렸다.
조선의용군이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에 진입하자 소련군은 “포츠담 선언에 의해 소련군과 미군을 제외한 모든 무장부대는 한반도에서 무장을 해제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별꼴을 다 보겠다”며 버텼지만 소련군은 막무가내였다. 말끝마다 국제협약을 거론했다. 무장을 해제 당한 조선의용군은 울화통이 터질 노릇이었지만 맨손으로 훈련을 계속했다.
김일성은 한청을 만나기 위해 88여단 출신 안길을 신의주에 파견했다. 평양에서 국내의 민족지도자 조만식과 함께 한청을 만났다. 한청은 조선의용군 처리에 관한 의견을 제시했다. 해방된 조국에서 국방의 임무를 수행하게 해달라는 내용들이었다. “조선의용군 선견종대를 주축으로 군관학교를 설립해 군 간부를 양성하자. 국경 경비를 우리에게 맡겨라. 보안대도 가능하다. 실행이 불가능하다면 다시 동북으로 돌아가 따로 군대를 만들겠다.”
김일성은 동북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권했다. 조만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김일성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소련에서 갓 귀국한 김일성은 국내 기반이 공고하지 못했다. 완전 무장한 조선의용군 1500명은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었다. 국내에서 활동하던 민족세력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간 누렸던 자신들의 지위가 중국에서 밀어닥친 세력들에 의해 위협받기를 바라지 않았다.
한청은 김일성의 요청을 수락했지만 미국이나 국민당 정부와의 마찰을 우려한 소련은 허락하지 않았다. 중공을 통해 소련에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겠다는 한청의 강력한 항의가 있은 후에야 조선의용군의 무장 회복과 동북으로 돌아가는 것에 동의했다. 조선의용군 선견종대는 무기를 돌려받고 소련군이 일본군으로부터 취득한 장총 500자루와 따발총 20정까지 챙겨 들고 선양으로 돌아왔다. 중국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인 항일전쟁 시절 화북·화중·화남 일대를 누비며 온갖 전투로 단련된 조선의용군은 조국에서 쫓겨났다.(계속) <148> 조선의용군 정예 1500명, 조국에서 쫓겨나다 비운의 조선의용군 <下> |제149호| 2010년 1월 16일
▲일본군 점령 지역에 침투해 폐허가 된 사찰의 담장에 항일 표어를 쓰는 조선의용군 화북 지대 선전대원. 중조(中朝)아닌 중한(中韓)이라는 표현이 눈길을 끈다. 김명호 제공
1937년 7월 7일 오후 10시, 일본군은 베이징 교외 완핑(宛平)현 노구교(蘆溝橋)에 주둔한 중국군에 선공을 퍼부었다. 8월 13일에는 상하이를 공격해 본격적인 중국 침략전쟁에 나섰다. 중국인들에겐 8년에 걸친 항일전쟁의 서막이었다. 7개월 전 합작을 선언하고 내전을 종식했던 국공 양당은 항전 태세에 돌입했다.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화북(허베이·서난·산시성 일대) 지역의 도시들을 점령했다. ‘조선인 징병제’를 반포하고 베이징·톈진 등에 ‘조선징병특별훈련소’를 설치해 점령지구에 거주하던 한국인들을 강제로 징발했다. 화북 지역에는 20만 명이 넘는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조선민족통일전선연맹과 조선민족혁명당의 중심인물이었던 김원봉은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장 장제스에게 조선의용대 설립을 타진했다. 군사위원회 정치부 부부장 저우언라이와 문화선전공작을 담당하던 궈모뤄가 김원봉의 방안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조선민족혁명당·조선청년전위동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이 공동으로 조선의용대 창설에 합의했고 국민정부는 이를 비준했다.
전쟁 발발 1년여가 지난 1938년 쌍십절을 전후해 조선의용대가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에서 깃발을 올렸다. 직업혁명가·학자·군인·학생·부녀자·선원·상인 등으로 구성된 중국 관내 최초의 한국인 무장집단이었다. ‘항일전쟁 참전’과 ‘일본군벌 타도’를 기치로 내걸었다. 저우언라이는 ‘동방 피압박 민족과 해방 투쟁’이라는 연설을 했다. 조선의용대는 장제스가 직접 지휘하던 제5전구에 배속됐다. 우한 보위전을 치렀고 우한이 일본군에 함락된 뒤에는 중국군과 함께 13개 성, 6개 전구를 누볐다.
국민당 정보기관인 중앙조사통계국(중통)은 “조선의용대에 공산당 비밀 당원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이 있다”는 보고서를 계속 장제스에게 올렸다. 장은 조선의용대를 살아 나오기 힘든 작전에만 투입했다. 합작은 했지만 중공은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비적집단과 별 차이가 없었다. 실제로 1939년 중반부터 조선의용대에는 중공의 비밀 조직이 있었다.
초기의 치열했던 전투가 대치 국면으로 전환되자 조선의용대는 유격전과 대민 선전을 위해 화북 지역으로 전략적 이동을 단행했다. 1941년 10월 29일 중통이 작성한 ‘조선 각 당파 활동 근황 보고’에 “조선의용대 분대장 박효삼과 조선민족혁명당의 영혼 석정(본명 윤세주)이 화북으로 이동했다”는 대목이 있고, 중공 중앙기관지 ‘해방일보’도 1941년 10월 26일자에 조선의용대의 활동상을 큼지막하게 보도했다.
1941년 늦은 봄 태항산 항일 근거지에 도달한 의용대는 ‘조선의용군 화북 지대’로 명칭을 바꿨다. ‘화북 독립동맹’과 연명으로 “항일을 원하는 노동자·농민·각계 인사와 연합해 화북에 거주하는 20만 동포의 권익을 위해 분투한다”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무장선전대를 조직해 일제(日帝)가 시도 때도 없이 거론하던 내선일체와 대동아민족해방전쟁의 허구를 폭로해 저들의 치안 강화운동에 치명타를 안겼다. 1941년 7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한·중·일 3국의 문자로 작성한 230여 종의 전단 12만여 장과 만화 3만여 장을 일본군 점령 지역에 뿌려댔고 1400여 개의 구호를 담벼락에 써 붙였다. 얼마 전 조조(曹操)의 무덤이 발굴된 허난(河南)성 안양(安陽)만 하더라도 당시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노인들이 있다. “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적이 몇십 분 거리에 있어도 할 일을 다했다. 일본군 쪽을 향해 살포한 전단의 내용도 재미있었다.” 전사한 일본군들의 품 안에는 영락없이 조선의용군이 뿌린 전단이 있었다.
조선의용군의 활동이 소문을 타고 알려지자 계란 200개와 돼지고기 50근을 들고 의용군을 찾아갔던 한 촌장은 “우리가 위문품을 들고 가도 그들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조리사들 외에는 중국어와 일본어도 참 잘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중국 곳곳에 수많은 전설을 남겼지만 해방된 조국은 남과 북 어디에서도 그들을 찾지 않았다. 린뱌오의 동북야전군에 편입돼 국공전쟁에 참전했고 한국전쟁에서는 이들을 남침의 선봉에 내세웠다. 비극이었다. 휴전 후에는 연안파로 분류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것도 비극이었다. 여러 개의 정파가 연합해 만든 무장조직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조선의용군에 관한 기록은 들여다보면 볼수록 사람을 복잡하고 멍하게 만든다. <149> 중립 지키던 중국, 연합국 도왔지만 돌아온 건 배신 |제150호| 2010년 1월 24
▲프랑스 후방의 군수공장에서 프랑스인 부녀자들과 일하고 있는 중국인 노동자들. 김명호 제공
1914년 8월 1일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막이 올랐다. 제국주의의 고통을 맛보았던 중국인들은 “열강들끼리 죽고 죽이는 살육전이 벌어졌다며 재미있어 했다. 중국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전쟁 같았다.
위안스카이 정부는 하늘이 준 기회라며 쾌재를 불렀다. 서구 열강과 대등한 관계로 국제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량치차오는 신속한 전황 파악을 정부에 주문했다. 헌정신문사 통신원 자격으로 러시아와 독일을 둘러보고 온 장쥔리(張君勵)는 독일의 패망을 예언했다. “서구 열강과 체결했던 불평등조약을 수정하려면 참전을 서둘러야 한다. 국제사회에서는 힘이 정의라는 것을 중국 청년들은 알아야 한다. 용기와 실력을 갖추지 못한 국가는 존중받지 못한다”며 참전을 촉구했다.
연합국의 일원인 일본은 개전과 동시에 칭다오를 점령하고 있던 독일군을 몰아내고 산둥반도를 차지했다. 중국의 참전을 기를 쓰고 반대했다. 영국과 프랑스도 일본 편을 들었다. 북양 정부는 중립을 선포했다.
◀ ‘이공대병지책(以工代兵之策)’의 제창자 량스이.
량스이(梁士詒)는 대총통 위안스카이의 심복이었다. 북양 정부 최대의 파벌 ‘교통계(交通系)’의 영수로 정부 재정을 한 손에 움켜쥔 ‘재신(財神)’이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있었고 무슨 일이건 독특한 견해를 피력하곤 했다. 권모술수에도 능했던지 중국에 와 있던 서방세계의 외교관들은 ‘중국의 마키아벨리’라며 혀를 내둘렀다. 교활함과 총명함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민첩하고 배포도 컸다. 그가 부장으로 있던 교통1부는 외교에 관한 권한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상인과 정치가와 외교관을 합쳐놓은 인물이었다.
량스이는 전쟁 초기부터 적극적인 참전론자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청년들을 전쟁터에 내보내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배워 올 것이 아무것도 없다”며 정론가를 자처하던 책상물림들을 한 차례 훈계한 후 ‘이공대병지책(以工代兵之策)’을 제시했다. “연합국과 밀접한 외교관계를 맺어야 한다. 중립을 선포했지만 실제로는 국제질서를 존중하고 연합국에 가입하기를 갈망한다는 메시지가 필요하다. 군대를 대신해 노동자를 파견하면 성의와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 독일을 비롯한 동맹국들도 우리가 중립선언을 백지화했다고 비난할 이유가 없다. 참전은 여유가 있다.” 지인들에게도 “전쟁은 파티와 같다. 끝이 있게 마련이다. 이 전쟁에서 독일은 절대 이길 수 없다. 이길 가능성이 있는 곳에 붙어야 전후 국제사회에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말을 자주 했다.
2년이 지나자 참전국들의 손실은 엄청났다. 하루 평균 6046명이 전쟁터에서 죽어나갔다. 특히 프랑스는 16세에서 49세까지의 남성 중 13.3%가 목숨을 잃었다. 노동력 결핍에 시달렸다. 프랑스와 영국은 중국에 손을 내밀었다. 농민으로 구성된 14만 명의 노동자들이 프랑스로 건너갔다. 2만여 명이 현지에서 희생됐고 3000여 명은 중도에 독일 잠수함의 공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1918년 11월 4년을 끌던 전쟁이 끝났다. 이듬해 1월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렸다. 미국·영국·프랑스의 삼거두는 독일의 조차지였던 산둥반도를 일본에 할양하기로 합의했다.
대국의 지위를 회복하고 국제사회에서 사람 대접을 받으려 했던 중국인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완전한 사기’라며 중국인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5월 4일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갔고 중국은 혁명의 길로 들어섰다. 2년 후 중국공산당이 탄생했다. 노동자들의 유럽 파견이 없었더라면 중국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치욕을 당했을 일도 없고 5·4운동도 일어날 리가 없었다. <150>량스이(梁士詒), 최대 파벌 교통계 등에 업고 나라 좌지우지 |제151호| 2010년 1월 31일
▲1914년 량스이(앞줄 왼쪽에서 다섯째)와 함께한 교통계 중진들. 량스이는 용모가 평범하거나 키가 큰 사람들을 싫어했다. 김명호 제공
19세기 중반부터 중국을 강타한 외우(外憂)와 내환(內患)은 봉건왕조의 기반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중앙의 권위에 허점이 보이자 각양각색의 정치집단들이 출현했다. 정당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오랜 세월 존재했던 붕당(朋黨)과도 성격이 판이했다. 청(淸)황실은 이들에게 핵심 권력을 잠식당했다. 교통계(交通系)는 30여 년간 중국 최대의 파벌이었다. 청 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해 1927년 장제스의 국민정부가 수립되기까지 정치·경제·외교 등 모든 분야를 장악해 다른 계파들을 압도했다. 시작은 량스이였다.
1903년 6월 서태후는 숨은 인재를 발탁하기 위해 강희제와 건륭제가 했던 것처럼 경제특과(經濟特科)를 실시했다. 34세의 량스이가 최고 점수를 받았다. 량의 고향은 광둥(廣東)성 산수이(三水)였다. 서태후는 광둥 출신이라면 무조건 싫어했다. 신정(新政)을 펴려면 친정(親政)을 해야 한다며 황제를 부추기다 외국으로 도망간 캉여우웨이(康有爲)와 량치차오(梁啓超)의 고향이 광둥이었다.
베이징의 사대부 사회를 들었다 놓을 정도로 재미있는 사건이 발생했다. “량스이가 량치차오의 동생”이라는 소문이 파다하자 광둥인들에게 편견을 갖고 있던 서태후는 그대로 믿어 버렸다. 가만히 보니 이름도 수상했다. 두 글자가 눈에 거슬렸다. 梁에서 시작해 보낼 이('詒)로 끝났다. 캉여우웨이의 여러 이름 중 하나가 쭈이였다. 서태후는 시험관들의 보고서를 있는 힘을 다해 바닥에 내팽개쳤다. 소문의 진위 따위는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경제장원(經濟壯元)이 아니더라도 량스이는 9년 전 대과에 급제한 진사(進士)였다. 당시 정부는 진사들에게 ‘한림회향 진흥교육정책(翰林回鄕 振興敎育政策)’에 참여할 것을 권장했다. 최고의 지식인인 한림(翰林)들을 고향에 보내 교육에만 전념케 하는 제도였다. 관직은 맡기지 않았다. 엉터리 같은 선생들의 엄청난 파괴력을 일찌감치 체득한 민족다운 교육정책이었다. 량도 고향의 서원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었다. 량은 고전과 함께 재정·교량·농업 등 실학을 가르쳤다. 서원도 신식학교로 바꿔버렸다.
량스이는 비록 낙방했지만 ‘경제장원’으로 천하에 명성을 떨쳤다. 톈진에 있던 직례총독 위안스카이가 량에게 눈독을 들였다. 보물 다루듯이 모셔왔다. 오죽했으면 “량스이를 데려오기 위해 위안스카이가 서태후의 속을 긁어놨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작달막한 키에 생긴 것들도 비슷했다.
날개를 단 량스이는 거칠 것이 없었다. ‘위안스카이 병서(袁世凱兵書)’를 저술해 북양집단에 발을 들여놓은 후 인도로 향했다. 영국과 끈질긴 협의 끝에 ‘장인협약(藏印協約)’을 체결해 티베트가 중국의 영토임을 재확인시켰다. 능력을 인정한 정부는 량을 우전부 소속 철로총국 국장에 임명했다. 외교적인 능력이 필요한 자리였다.
신해혁명 덕에 정권을 장악한 위안스카이는 량스이를 총통부 비서장에 기용했다. 내정과 외교를 관장하며 교통은행 총재도 겸했다. 다들 ‘이총통(二總統)’이라고 불렀다. 중국혁명의 아버지 쑨원도 량의 눈치를 봤다. 쑨과 위안은 13번 만나 국가대사를 논의했다. 량도 항상 동석했다. 세 사람은 황당하고 치밀한 것 외에도 ‘실업(實業)이 곧 구국(救國)’이라는 공통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오래 가지는 않았지만 만나면 서로 말이 통했다. 쑨이 철도청장에 해당하는 자리를 요구하자 위안은 즉석에서 전국의 철도건설에 관한 전권을 쑨에게 위임했다.
중국 역사에서 차지하는 두 사람의 비중을 생각해 보면 엉뚱하기가 이를 데 없는 제안이고 수락이었지만 철도·은행·전보·항만을 장악한 교통계의 수령 량스이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량은 전국철도협회 회장 자격으로 쑨의 철도건설계획을 적극 지지했다. 량스이는 위안스카이 사후 몰락하는 듯했다. 량은 전국에 수배령이 내리자 홍콩으로 도피했지만 다음 정권에서 다시 기용됐다. 이러기를 네 차례 반복한 부도옹(不倒翁)이었다. 위안스카이·쉬스창·장줘린·돤치루이를 비롯해 장제스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국가원수 어느 누구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량스이는 평생 신문을 보지 않았다. 대신 마작판을 벌려놓고 세상 소식을 들었다. 교통계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유언비어 치고 사실 아닌 것이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 1933년 홍콩에서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 “평생 명예와 모욕을 지고 다녔다. 이 지구상에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지만 뭘 잘했고 못했는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나는 잘 모르겠다. 처자들의 비석을 내 무덤 옆에 세워라”는 유언을 남겼다. 7명의 부인 중 가장 어린 부인은 90년대 말에 세상을 떠났다. |
첫댓글 조선의용군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짠하네. 남의 땅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숭고한 뜻을 펼치던 그들의 행적과 비참한 말로.
반면 친일파의 행각과 그 후손들의 부귀영화. 이 둘이 오버랩되는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사필귀정이란 건...
짧은 세월 손익계산에서는 간혹 착오가 있을 수 있지만,
긴 역사를 두고는 제대로 가려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