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봉스님은 24세에 모친상을 당한 뒤 인생무상을 느끼고 통도사로 출가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해인사, 직지사의 선방을 돌며 수행정진을 거듭하면서
'통도사로 돌아오라'는 은사 성해스님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공부가 잘 되어가고 있다고 판단한 경봉스님은
그제서야 다시 통도사로 돌아왔다.
해담화상과 화엄산림 법회의 설주(說主)가 되어 법회를 주재하면서
경봉스님은 밤낮의 구분이 사라지고 시야가 확 트이는 불이(不二)의 경지를 맛본다.
'천지를 삼키니 큰 기틀이로다/
돌토끼 학을 타고 진흙거북 쫓아가네/
꽃 숲엔 새가 자고 강산은 고요한데/
칡덩굴 달과 솔바람 뉘라서 완상하리'라고 오도송을 읊었다.
1928 년 경봉스님은 통도사 본사에서 걸어서
1시간 가까이 걸리는 극락암에 극락호국선원을 개원하고
영축산 자락에 선풍을 크게 떨치기 시작했다.
경봉스님의 상좌 명정스님(61)은
"극락선원에서는 하안거와 동안거 도중에 일주일씩 한잠도 자지 않는 용맹정진을 하는데,
동안거 때는 섣달 초하루부터 일주일간 한다"면서
"용맹정진이 끝나고 나면 쉬지 않고 그 길로 등산을 하고 내려오는 것이
이곳의 전통"이라고 했다.
명필로 소문난 구하스님 못지 않게 필력을 갖추었던 경봉스님은
사형에 대한 예를 다하기 위해 구하스님 생전에는 글씨자랑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글씨뿐 아니라 글짓는 실력도 뛰어났던 스님은
여러 스님들과 소중한 벗에게 편지로 선문답을 주고받고 안부를 묻는 일을 즐겼는데,
스님이 열반한 후 모아놓은 편지와 일기가 몇가마니분이었다고 한다.
특히 1913년부터 8개월간 통도사에 머물며 화엄경을 강의했던 만해 한용운과
송광사의 효봉스님, 그리고 사형 구하스님을 평생의 벗으로 삼았다.
입적남녀노소, 유·무식을 불구하고 어느 누구와도 그에 맞게 법문을 들려주었던 스님은
양산에 장이 서는 날이면 직접 커다란 걸개 불화를 가지고 장터 한가운데서 법문을 했다고 한다.
어찌나 재미있고 구수하게 불법을 들려주었던지 지나가던 사람들과 물건팔던 상인들도
한바탕 그 법문을 듣지 않고는 못배길 정도였다.
"사바세계를 무대로 연극 한번 멋지게 해보라"고 호탕한 법문을 즐겨했던 스님은
입적 14년 전 자신의 수의를 짓던 날
'옛 부처도 이렇게 가고/
지금 부처도 이렇게 가니/
오는 것이냐 가는 것이냐/
청산은 우뚝 섰고 녹수는 흘러가네/
어떤 것이 그르며 어떤 것이 옳은가 쯧!/
야반 삼경에 춤을 볼지어다'라고 열반계를 남겼다.
세수 91세 되던 1982년 어느날 스님이 입적을 하게 되자
효상좌 명정이 "스님이 가신 뒤 스님을 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물음에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보거라"는 말을 남기고 이승과의 인연을 접었다.
상좌로는 돌아가신 벽안스님(전 동국대 이사장)을 비롯해 명정스님(극락선원 선원장),
경일스님(동국대 전강원장), 활성스님 등이 있다.
첫댓글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보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