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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보면
완벽주의의 원인 중 하나가 겁이 많고 고집센 성품이라는데
나는 천성적으로 겁이 많고 고집이 세다.
게다가 호기심까지 많으니 -_- 아주ㅡ
아이러니한 것은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동기가
내가 가진 나의 완벽주의를 다 이해하고 통제하고 싶어서였다는 것.
참으로 못말리는 완벽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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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머체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경증적인 완벽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노력이, 심지어 최선을 다한 것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자신에게는 전혀 탐탁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더 잘 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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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스트의 '다차원적 완벽주의 척도'는 다음의 여섯 가지 요소가 완벽주의에서 가장 핵심적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이 장 전체에서 계속 반복된 요소들이다.
(1) 실수에 대한 과도한 걱정(이는 '핵심적 차원'이다)
(2) 일에 대한 지나치게 높은 개인적인 기준
(3) 자신이 수행한 일에 대한 의심
(4) 부모의 높은 기대감 인식
(5) 부모의 비판에 대한 지나친 인식
(6) 정확성, 질서, 계획에 대한 지나친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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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반대로 높은 기준을 갖고 있으며 조직적이고 절제력이 있으며 자신의 모든 정체성이 성공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실패에 적응할 수 있는 완벽주의자들은, 분명히 운동과 음악, 연극, 춤 등 경쟁적인 세계에서 눈부시게 활약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완벽주의의 긍정적인 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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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는 수도원에서 보낸 초기 시절에 아주 조그마한 사소한 죄들에 대해서도 고백하느라 몇 시간이나 보내곤 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규칙을 지키려고 노력했고, 죄를 하나씩 불러 가면서 참회하고 고백하며, 종종 반복해서 죄를 고백하고 정성 들여 나에게 할당된 고백성사를 행했다. 그러나 내 양심은 내게 어떠한 확신도 주지 못했으며 오히려 나는 언제나 의심했고 "너는 제대로 회개하지 못했어. 너는 충분히 참회하지 않았어. 너는 죄를 고백할 때 그것을 빠뜨렸어"라는 말들을 되뇌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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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것들에 대해서 정죄감을 갖게 하려는 마귀에게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 가끔씩은 술을 좀 과하게 마시거나 놀기도 하고, 농담도 즐기고 또는 심지어 좀 죄를 짓기도 하면서 마귀에게 보란 듯이 도전하고 경멸을 표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어떤 죄에 빠지는 것을 지나치게 걱정하면 우리는 압도당할 것이다.내가 희석하지 않은 진한 포도주를 마시고, 자유롭게 수다를 떨고, 좀더 자주 음식을 즐기는 이유는 오로지 나를 성가시게 하고 고통을 주려고 작정한 마귀를 귀찮게 하고 괴롭히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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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의 심리학자 폴 투르니에는 '전부 아니면 전무'식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그들은 모든 일에 야망이 충전한 나머지 언제나 현실과 자기 자신에 대해 실망한다. 그들 가운데는 예술적 완벽에 대한 엄청난 꿈을 품고 있어서 악기를 손에 들자마자 자신의 야망에 터무니없이 미치지 못하는 것에 낙심하며 공부를 포기하는 음악가들이 있다. 이들 '전부 아니면 전무'유형들은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강한 욕구가 있어서 관계를 끊을 때는 이후 그 사람과 알고 지내는 일도 거의 없다. 왜냐하면 자신이 생각하는 진정한 우정을 그 사람 안에서 발견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매우 실망하기 때문이다.그들은 언제나 중요한 임무를 맡는 것을 꿈꾸면서 그 임무를 완성시키는 사소한 일들은 무시한다. 나는 그런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아마도 그런 삶을 영원히 잠정적인 인생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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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모호함
그러한 흑백논리는 모호한 것을 참지 못하고 서로 다른 두 관점 사이의 불확실성 속에서 사는 것을 힘들게 한다.그러나 인생에서 성숙이란 학습에서 오며 보통은 존재의 양극단 사이에서의 균형 또는 창조적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어렵고 힘든 경험을 통해서 온다.
예를 들어 어떤 완벽주의자들은 안전함을 느끼기 위해서 지배하고 통제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일을 주도하려고 한다. 극단적인 정반대 입장을 취하는 또 다른 완벽주의자들은 자신이 완전하게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매우 수동적이고 의존적이 되는 성향이 있다. 완벽주의자들은 어떤 일에 대해서 전적으로 책임감을 느끼거나 아니면 아예 철저히 책임을 거부한다. 이 두 양극단 사이에 살려는 노력은 많은 긴장을 초래하는데 그것은 완벽주의자가 양극단의 사고방식 사이에서 갈팡질팡할 때 모순되는 성향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완벽주의의 매우 혼란스러운 면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예가 있다. 확실한 것에 대한 갈망 그리고 모호함과 양면가치를 싫어하는 것은 어떠한 의견에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동반한다. 그러므로 완벽주의자들은 양면가치를 피하려고 하면서도 오히려 실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실제로는 그러한 성향을 갖게 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완벽주의자들은 절대적인 의견을 갖는 것과 모든 것에 대해 의심을 품는 것 사이의 양극단을 오락가락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에서 성공과 발전을 위한 단순한 공식을 선호한다. 부모들은 말 잘 듣고 모범적인 완벽한 자녀를 양육하는 비결을 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공적이고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한 공식을 원한다. 우리는 규칙과 비법에 매력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인생의 불확실성이나 모호함을 제거해 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완벽주의자들이 너무나 뼈저리게 느끼듯이 인생은 깔끔하지도 잘 정돈되어 있지도 않다. 정서적 안정과 자신감을 가진 아이를 기르는 일은 단지 일련의 규칙에 달려 있지 않다. 대신에 그것은 쉽게 정의할 수 없는 부모 자녀 관계와 아이들 각자의 다양한 개성에 따라 원칙들을 적용하는 것에 달려 있다. 이러한 칼로 자른 듯한 정확성의 결여는 완벽주의자의 마음 속에 불안정감을 조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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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완벽주의자들은 구조와 질서에 몰두한다. 그들에게는 종종 적당주의자의 '"느긋하게" 그리고 "물 흐르는 대로"의 태도가 매우 큰 불안감을 준다. 통제의 상실이 가져오는 이러한 두려움에 대한 극단적인 반응은 모든 것이 확실하게 '제대로'되었다고 생각할 때까지 계속 점검하고 씻는 의식을 반복하는 강박장애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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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행착오로부터 배우기를 거부하지만 사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혜를 가르치실 때 가장 선호하시는 방법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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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종류의 율법주의는 성경적인 원칙을 냉혹하고 매몰차게 적용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거기에는 연약함이나 실패 또는 은혜의 여지가 거의 없다. 이와 반대로 복음의 메시지는 부모나 목사들을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와 용서가 항상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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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의대생이었을 때 " 신경증 환자는 공중에 성을 짓고, 정신병자는 그 성 안에서 살고 있으며, 정신과 의사가 임대료를 받아 챙긴다"라는 말을 들었다. 즉 신경증 환자는 자신의 삶이 어떠했으면 좋겠다고 꿈을 꾸며, 정신병 환자는 그 꿈이 현실이라고 믿고 그 안에서 살고 있으며 정신과 의사는 그들을 치료하면서 돈을 받는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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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기의 완벽주의에 대한 일부 연구 자료에 따르면 "두려움의 정도가 크고 고집이 센 경우"는 기질적인 특성이 원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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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상관 없이 내 삶 가운데 성취감과 기쁨을 가져오도록 나의 세계를 조종함으로써 나 자신이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보자면, 내가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당연히 다른 사람도 자신에게 그렇게 할 수 있다(물론 내가 가르쳐 주는 올바른 지침만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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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매니큐어는 그 사람이 사는 지역에 대해서 운전면허증만큼이나 정확하게 알려 준다. 런던 여성은 거의 매니큐어를 하지 않고 뉴욕에서도 프렌치 매니큐어를 선호하는 반면,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색깔을 중시해서 진한 빨간색이 각광을 받는다. 그리고 발톱 매니큐어는 반드시 손톱 색깔과 일치해야 한다. 계절이 어느 때건 상관없다. 그렇지 않고는 아예 집 밖에 나올 생각을 하지 못한다.
영국의 시나리오 작가 루시 달(Lucy Dahl)은 이렇게 말했다 "로스엔젤레스 거리에는 3미터마다 매니큐어 살롱이, 6미터마다 성형 외가가, 9미터마다 정신병원이 있는데 이들은 각각 완벽한 발가락, 완벽한 몸, 완벽한 정신 건강을 가진 삶을 보증한다" "뉴욕타임즈"의 이 기사 밑에는 거의 전라의 두 아름다운 남녀가 해변에 앉아 있는 모습의 "베르사체"(Versace)광고가 있었다. 이러한 피할 수 없는 시각적 환경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우리들 대부분은 아름다움에 대한 문화적 기준 곧 우리가 분투하고 노력해야 하는 완벽의 기준에 이르지 못할 때 수치심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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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유한하고 제한된 존재라는 사실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일들에 대해서 불안이나 위험을 느낄 때 우리는 우리가 속한 세계를 통제하려고 한다. 때때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세계도 통제하려고 든다. 그 모든 것의 핵심에 있는 문제는 바로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데니스 깁슨이 말한 소위 "전능함에 대한 욕구", 즉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갈망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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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적인 문제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막기 위해서 가능한한 나의 세계를 통제하려고 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내가 속한 세계를 성취감과 기쁨을 주는 쪽으로 조종하면서 나 자신이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도고 믿었다. 그러나 사실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고통을 피하기 위해 나의 세계를 통제한다는 그 꿈은 한 번도 제대로 실현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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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통제하고 싶어하는 뿌리 기은 성향이 있으며 타락한 세상에서의 불안정감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다. 우리는 자신이 유한하며 제한을 받고 있다는 사실, 또는 우리 자신보다 더 크신 어떤 분을 신뢰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선과 악의 기원에 관한 문제들과 몇 시간 동안 씨름한 후에 "나는 내가 유한하다는 것이 싫어요"라고 말한 한 젊은이를 기억한다. 그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싶어했다. 그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다.
기독교 세계관으로 보면 여기에 바로 완벽주의의 가장 깊은 동기가 있다 우리 자신이 속한 세상의 통치자가 되고자 하는 갈망 그리고 우리가 반드시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갈망이다. 프로이트가 모든 인간 문제의 핵심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즉 자신의 삶 가운데 있는 권위의 상징인 아버지를 제거하려는 욕구라고 말했을 때, 그는 진리에 매우 가까이 접근한 셈이다. 물론 프로이트는 육신의 아버지를 의미했지만 성경은 근본 문제를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인간의 반항심과 완악함이라고 정의한다.(롬 1: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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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L Sayers)는 다음과 같이 교만의 핵심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교만은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는 죄다. 교만은 인간 자신의 지혜와 욕구와 상상력으로 자신이 살아갈 기준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선언하는 죄다. 즉 인간 자신이 스스로 심판자가 되기에 적합하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세상을 활보하고 있는 교만의 이름은 바로 인간이 완벽해질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리고 교만의 특기는 바로 유토피아에 대한 청사진을 만드는 것이며 이 땅에 인간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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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완벽주의에 대한 강의를 마친 후에 한 남자가 내게 오더니 자신이 직접 개작한 주기도문을 보여 주었다. 그는 그것을 "완벽주의자의 기도"라고 했다.
하늘에 계실지도 모르는 그들의 아버지
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나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일용할 양식을 내가 벌 것이며
(나는 당신이 주실 것을 믿지 못하겠나이다)
지은 죄들이 너무나 많기에
그리고 또 언젠가는 반드시 죄를 지을 것이 분명하기에
나는 도저히 내 죄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나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항상 나에게 상처만 주는데
내가 왜 그들을 용서해야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나이다.
게다가 그들은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나이다.
스스로 악에 빠질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있으니
정말 감사하옵나이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이 세상을 지으실 때 잘하셨더라면
제가 그 모든 유혹을 참아 내지 않아도 되지 않았겠습니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나의 것이니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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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작가인 필립 얀시(Philip yancy)는, 오래 전 영국에서 열린 비교종교학 회의에서 참가자들이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을 찾으려고 머리를 맞대고 토론한 이야기를 전한다.
그들은 여러 가지 답을 하나씩 지워 나갔다. 성육신?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현현한 이야기는 타종교에도 있다. 부활? 죽은 자의 환생 기사 역시 타 종교에 있는 것이다. 토론이 길어지고 있는데 c,s 루이스가 방을 잘못 찾아 들어왔다. "토론 주제가 뭡니까? 그의 질문에 동료들이 전 세계 종교 중 기독교만이 기여할 수 있는 바를 찾는 중이라고 말하자 C.S. 루이스가 답했다. "그거야 쉽죠. 은혜 아닙니까?"
얼마 동안 토론이 계속됐지만 참석자들도 같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값없이 조건 없이 우리를 찾아온다는 개념은 인간의 모든 본성과 상반되는 것 같다. 불교의 고행, 흰두교의 업보, 유대교의 언약, 이슬람교의 법전은 모두 노력으로 인정받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감히 하나님의 사랑을 무조건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기독교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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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우리에게 "온전하라"(마 5:48)고 명령하실 때 사용하신 단어가 바로이 '텔레이오스'라는 단어인데, 이 동사의 시제는 미래형으로서 이것이 우리의 목적이며 지금 당장 이룰 수 있는 어떤 것은 아님을 암시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좀더 넓은 배경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행동의 차이다. 불신자는 자신의 친구들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친구들을 사랑해야 하며 동시에 원수들도 사랑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단지 우리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또는 우리를 둘러싼 문화의 기준에 얼마만큼 부응하는가에 대해서만 만족하기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분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바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조금씩 닮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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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상담가들은 "평균치를 목표로 하는 것"을 제시하지만 대부분의 완벽주의자들에게 평균치란 악몽과도 같다.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사고방식에서 "평균"이란 경멸의 대상이다. 현실이란 당신이 높은 목표를 세운다 하더라도 완벽함에 미치지 못한 것에 만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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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이 상실된 현상은 비즈니스에는 큰 이득을 준다. 만일 내가 누구인지 안다면 무엇 때문에 새로 나온 면도 크림을 계속 사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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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인류가 태초의 물질에서 수백 만 년 진화를 거쳐 우연히 생겨났다면,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정의하거나 사회 또는 다른 전문가들이 우리를 정의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를 창조하신 인격적인 하나님이 계시다면, 문제의 핵심은 다른 사람들, 심지어 우리 자신이 우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스스로 만들어 낸 정체성이 아니라 주어진 정체성만이 있을 뿐이다. 사회가 나를 정의하는 것도 아니며 내가 스스로 자신을 정의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정의하신다. 나는 그저 몇몇 철학자들처럼"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또는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 심지어 "나의 행위가 바로 나다"."니의 외모가 바로 나다"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오직 정확하게 "나는 하나님이 만드신 바다"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핫는 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나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에 필수적이다 성경은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이 되어 가고 있는지, 우리의 정체성과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여러 근본적인 것들을 말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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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진실로 존귀와 타락, 아름다움과 상처, 영광과 슬픔이 낯설고 불가사의한 방식으로 끔찍하게 뒤섞여 있는 존재다. 존 스토트(John stott)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았기에 존귀함을, 타락했고 하나님께 반항하는 존재이기에 부패함을 동시에 지닌 지킬 박사와 하이드 같은 이중 인격자, 혼란스러운 존재다. 나는 고귀한 동시에 비천하고 아름다운 동시에 추하며, 선하면서도 악하고, 올바르면서도 왜곡된 하나님의 형상이자 마귀의 노예다. 우리는 두려움 없이 우리의 창조된 모든 모습을 인정해야 하며 동시에 가차 없이 타락으로 인한 우리의 모습을 버려야 한다.
그렇다면 바로 여기에 우리 인간성의 모순이 있다. 우리는 가장 숭고한 고결함과 가장 비열한 잔인함을 모두 발휘할 수 있는 존재다. 어떤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하나님처럼 행동하다가도 또 다른 때는 우리를 향한 계획과거리가 먼 짐승의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인간은 아픈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병원을 지혜를 습득하기 위해 대학을, 사람들을 다스리기 위해 의회를,하나남을 예배하기 위해 교회를 만들었지만, 그와 동시에 고문실, 집단 수용소, 원자력 무기 등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고상홤과 비천함, 합리성과 비합리성, 도덕성과 비돋덕성, 존엄성과 야만성이 뒤섞인 이상하고 당황스러운 모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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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의 가능성을 보시고ㅡ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를 이미 그 가능성을 성취한 존재로 보신다. 하나님은 우리 있는 그대로의 모습 그리고 앞으로 변화될 모습을 받아 주시는 분이며, 완벽주의자들이 생각하듯이 현재 우리의 행위나 모습으로 받아 주시는 분이 아니다. 언젠가 우리가 이 불완전하고 깨어진 세상의 결함에 제한받지 않게 될 때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은 온전히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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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진정으로 인간다워짐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가 육신으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반영한다거나 그분의 지적 능력 또는 삶의 방식에 필적한다는 것이 아니다.대신 우리는 자신의 태도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드러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완전하라"는 말씀은, 마침내 천국에서 완전해질 때까지 그것을 우리의 목표로 삼으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능력이 외모가 아니라 인격적인 성숙과 관련해서 완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이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가 점차 우리 안에서 자라도록 해야 하며(갈 5 :22-23) 동시에 '죄성'으로 인한 열매를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우리 모두 마찬가지이지만 특별히 완벽주의자들에게는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하고 잘 믿지 않으며, 두려워하고 질투하며 비판적인 성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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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완벽함이란 그리스도의 성품을 기르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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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분명한 모순에서 오는 긴장감을 느낄지 모른다. 나는 당신에게 좀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더 노력하라고 말하면서도, 당신 스스로 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 의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가 "완전"해져야 한다고 말하지만 또한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충분히 선해질 수 없다. 우리가 완전해지려고 아무리 "완벽하게"노력한다 하더라도 분명히 우리는 하나님이 기준은말할 것도 없고 우리 자신의 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패를 거듭한다. 이것이 마치 우리가 무엇을 하든 잘못이 이중구속처럼 느껴지는가?
당신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그리스도의 도덕적 완전함을 부여받는다. 하나님은 당신의 불완전함으로 인해 더 이상 당신을 거절하거나 벌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의 의와 완전이 그러한 불완전함을 덮어 주며 당신은 이제 영원히 하나님 나라의 가족인 것이다.(고후 5 : 21)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다.(엡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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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어떤 차원에서 하나님은 당신을 이미 완벽한 (의로운) 존재로 보신다. 그러나 또 다른 차원에서 하나님은 당신이 여전히 불완전하며 완전해져야(성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아신다. 마르틴 루터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러므로 이생은 의가 아니라 의의 성장, 건강이 아닌 치유와 회복, 완성된 존재가 아닌 되어 가는 존재, 휴식이 아닌 연습의 시기다. 우리는 아직 미래의 모습을 향해 자라가며 그 과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계속된다. 즉 이생은 목적지가 아니라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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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변화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변화되지 않을 것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하는 원치 않는 것들도 많다 또 다른 덕목인 자족은 완벽하지 않은 것과 더불어 살아갈 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울은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 6 :6)라고 기록했다 자족은 게으름이나 태만과는 다르지만 완벽주의자들은 언제나 불만족하고 더 나은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매우 경험하기 어려운 것이다. 하나님은 선하시며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신뢰는 우리가 모든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모든 상처 입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모든 목표들을 달성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자유롭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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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성품의 변화는 느리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인간은 고집스러운 피조물이며 완벽주의자는 특히 더 변화를 두려어하고 저항한다. 완벽주의자는 계속 자신의 삶을 주관하기를 원한다. 통제를 포기하고 하나님이 궁극적인 주관자이심을 신뢰하기를 배우는 일은 매우 무섭다. 그러나 관계라는 상황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날카로운 모서리를 깎으시고 우리가 좀더 하나님을 닮도록, 좀더 온전한 인간이 되고 좀더 신뢰하는 자가 되도록 역사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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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라는 건 도대체 어떤 건가요?" 어느날 토끼가 물었다..."안에 윙윙 소리 나는 장치가 들어 있고 밖으로 손잡익 달려 있는 그런 것을 말하는 건가요?"
" 진짜는 네가 어떻게 만들어졌느냐의 문제가 아냐." 빼빼 마른 말이 말했다. "진짜는 우리 몸과 마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를 말하는 거야. 한 꼬마가 너를 오랫동안 사랑하면, 아주 오랫동안 말이야..단순히 너하고 노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너를 사랑한다면, 너는 진짜가 되는 거야."
"진짜가 될 때 아프지는 않나요?" 토끼가 물었다
"때로는 아프기도 하지." 말이 대답했다. 이 늙은 말은 모든 일을 언제나 정직하게 말해 주었다. "하지만 진짜가 되면 아픈 것 따위에는 마음 쓰지 않아도 된단다."
"태엽을 감았을 때처럼 갑자기 확 변하는 건가요, 그렇지 않으면 조금씩 달라지는 건가요?" 토끼가 물었다.
"갑자기 확 변하지는 않아." 말이 대답했다. "조금씩 조금씩 변하는 거야. 아주 시간이 많이 걸리지. 그렇기 때문에 쉽게 부서지는 것이나 뾰족한 것, 조심해서 다루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결코 진짜가 될 수 없어. 장난감이 진짜가 될 때쯤에는, 대개 그 때까지 너무나 많이 사랑받았기 때문에 몸의 털은 빠지고 눈이 파이고, 몸의 마디마디가 느슨해져 아주 보기 싫은 모습이 되어 있기도 하지. 하지만 그런 일은 조금도 걱정할 게 못 된단다 왜냐하면 일단 진짜가 되고 나면 더이상 겉모습 같은 건 문제가 되지 않거든. 그런 마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보기 싫다고 생각하겠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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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 감사해요~!! 책의 내용을 간략이 적어주셔서 정말 이책이 읽고 싶어졌어요~!! 저도 완벽주의자.. 여서요 %%
^^
흠
완벽주의자는 아니지만 내용이 상당히 재미있네요 ^^ 사서 읽어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