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 전 상서 / 어떻게 그 아픔 참고 사셨습니까?
어머님 살아 계시다면 114세. 하늘 나라에 가신지도 벌써 20년.
그런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 보고 싶음을 견디지 못해 어머님 옛날이야기를 찾아 보면서 이 불효자가
지은 불효 용서를 빌러 이 글을 남깁니다.
어머님! 요새 정말 어머님이 보고 싶어서 하루를 사는 의미를 잃을 정도로 어머님이 그립습니다.
어머님 하면 생각 나는 것 중 가장 많이 생각나는 것이 “네 형제 4 남매 저 세상으로 보낼 때 내 정신이
다 나가서 그런다.” 하시던 말씀 떠올리며 그 시절 어머님 삶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어머님! 1928년 4월 20일. 어머님이 겨우 17세일 때 두 할아버지가 술잔 몇 잔 나누시고 정혼 아버님과
동갑 나이에 결혼하셨는데, 오직 위안부 안 끌려가려면 일찍 결혼해야 한다는 그 이유 하나였다니 어이
가 없습니다. 설사 그 이유로 결혼을 하셨다 해도 양가가 서로 엇비슷해야 하지 안 했나요?
어머님은 호남 평야가 시작되는 옥구 평야에서 태어나셔서 앞을 바라보면 20여 리가 앞이 확 트인 곳이
었고 시집 오셔 사셔야 하는 곳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앞이 꽉 막힌 험준한 산골이었습니다. 더구나
어머님은 부잣집 막내딸이었기에 일을 해보시지도 않으셨는데, 가난한 집에 시집을 오셨으니 그날부터
해 보지도 않은 일을 어떻게 참고 해내셨나 싶습니다. 그냥 숙명이라 여기고 꾹 참고 해내셨습니까?
또 앞에서 잠깐 드린 말씀 4 남매를 먼저 보낸 그 한은 어떻게 견디시며 살았나 싶은데, 살아 생전 그 한
을 어루만져 드리지 못한 불효가 저의 가장 큰 한으로 남았습니다.
어머님 ! 삶이 고달프면 마음이라도 편해야 하는데 17세의 어린 새 색시가 사나우신 할머니의 시집살이
에 완전히 묶여 무서움 속에서 사신 것은 또 하나의 아픔이었습니다.
저도 어느 정도 기억이 남는데 할머님은 할머님 뜻대로 되지 않으면 경련을 일으키시며 기절하시는 통에
온 가족을 무서움에 묻히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할머님 밑에서 신혼의 삶을 사셨으니 하루 하루
삶이 얼마나 두려웠고 고통이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고통 속에서 6 남매 중 딸로 셋째인 누나와 아들로
둘째였던 저만 남았으니 그 아픔은 얼마나 컷겠습니까? 더구나 큰 댁 형제들은 똑같이 한 집에 살면서도
5 남매가 그대로 살았는데 어찌 우리 형제들만 그랬으니, 어머님 상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머님! 까닭은 그랬습니다. 일에 지친 몸에 마음에 쌓인 한으로 사시던 어머님이 자식들에게 물린 젖은
한을 안고 울면서 물린 젖이었습니다. 이 불효자가 이 말씀을 꺼내는 이유는 정상적인 젖은 달고 짭짤하
다네요. 그러나 오장 육부를 태우면서 울면서 먹이는 젖은 쓰고 떫으며 산성의 피로 변한다 합니다. 또한
노여움과 증오 화를 이기지 못하고 내뱉는 숨 속에는 치명적인 화를 유발하는 속성이 있고요. 그런 때는
벽력같은 소리라도 질러야 한다는데 어머님이 어떻게 그러실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그 모든 나쁜 영향이 자식에게 간 것이지요, 셋째 누나가 유일하게 생존한 것은 어머님이 얼마큼
나이도 드셨고 고통을 이기는 방법도 익혀 그리 된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 첫아들은 이미 두 여식을 잃은 상태에서 얻은 사내였기에 행여 어찌 될까 노심초사 하셔서 그리
되었다 싶습니다. 그리고 저인데 저는 어머님이 큰 댁에서 독립 분가 하여 그간 참고 살았던 모든 아픔
에서 벗어나셨기에 마음의 평화를 얻어 살았다 싶습니다. 그리고 낳은 제 동생은 차마 옮기기도 부끄러운
아버님의 일생일대 잘못으로 생긴 일이라 생각합니다.
작은 어머님을 맞아 작은 어머님이 낳은 아들이 제 동생과 같은 나이였으니 어머님이 그때 얼마나 큰 아픔
을 겪으셨겠습니까? 어떻게 참고 살아오신 어머님인데, 가난을 벗어나지 못해 온갖 아픔을 참고 살아오신
어머님이셨는데, 그 때 부자 사람들이나 했던 일을 아버님이 하셨으니 어찌 그 보다 아픈 큰 상처가 있을까
싶습니다.그로 인한 화, 증오, 노여움이 결국 동생을 잃는 결과가 되었다 보입니다.
어머님인들 자식에게 자장가 불러주고 따뜻하게 안아주며 업어주고 맛있는 것 해 먹이고 싶었을 것을 못해
주고 어머님 혼자 한평생 한으로 가슴에 묻어두신 삶, 그 고통과 한을 어떻게 그렇게 꾹 참고 살아오셨나요?
어머님! 또 하나 원인으로 생각되는 것이 있다면 고향이었습니다.
어머님이 그 두메 산골로 시집 오신 곳은 30 여 호가 살던 곳으로 마을에 우물이 하나 밖에 없었지요.
우물 옆에는 미나리 꽝이라고 해서 미나리를 키우는 곳이었으니 위생 상 어떻겠나 싶어요. 외갓집은 집에
있던 샘이 산에 붙어 있어 깨끗한 물이었고 외갓집 혼자만 쓰시던 샘이었는데, 그런 곳에서 사시다가 동네
전체에 하나 밖에 없는 샘물을 이용했으니 말입니다.
수인 성 병이 원인이 되겠다 싶지만 오직 어머님께 만 그 많은 아픔이 있었으니 첫 번째 원인이 더 큰 원인
이라 여겨집니다.
,어머님! 어머님은 그렇게 이것 저것 천추의 한을 품고 사셨습니다.
그런 앞의 삶들이 결국 어머님의 눈을 감게 하셨고 귀를 막게 하셨고, 입을 다물게 하셨나 봅니다. 거기에
더하여 호롱 불 삶을 거쳐 사셨는데, 친정은 군산시 바로 옆이셨기 때문에 일찍 전기의 혜택을 보고 사셨
습니다. 저희 동네에 전기 불은 어머님이 시집 오셔 39년이 지난 1967년 1월 1 일에 들어왔지요.
그때까지는 접시 불이었는데 접시에 기름(무슨 기름이었던 지?)을 따라 놓고 목화 솜을 길게 말아 접시에
담고 켰던 불로, 불꽃의 크기가 조정이 안 되니 자고 일어나면 코가 까매졌지요. 또한 관솔 불이라 해서
소나무 줄기를 베어낸 자리에 맺힌 송진을 따다가 키웠던 불도 거쳤고, 그 후 가히 불의 혁명이라 할 만한
등잔 불이 생겼고 다음에 촛불이었고요. 그때까지 얼마나 어두운 세상인가 짐작도 못할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시절 우리나라 전력 양이 수풍 댐에서 발전한 60만 킬로와트였다고 기억됩니다.
그 전력으로 남북이 같이 사용하다가 38 선이 생기면서 끊겼으니 얼마나 전력이 부족했을까 짐작이 되지요?
그런 삶을 어머님은 자그마치 40 여 년을 겪었었지요.
두 번째로 어머님 세대는 뒷간 세대였습니다. 집집마다 집 대문 바로 앞에 화장실이 있었고 주위는 짚을
엮은 두루마리로 둘러친 화장실이었습니다. 뒷일 보는데 휴지가 없었으니 급하면 울타리 지푸라기를 뜯어
하다가 지푸라기에서 발전한 것이 시멘트 푸대였고, 그 뒤 신문지였는데 오늘 날로 말하면 고급 중에 고급
화장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생긴 말이 처갓집과 화장실은 멀리 있어야 한다는 말도 생겼나요?
그런 곳에서 한평생 살아오신 부모님이셨기에 제 대학 졸업식에도 오시지 못했던 부모님이 제가 제 집을
마련하고 모셨는데 오셔서 3일 만에 귀향하셨습니다. 며칠이라도 계시다가 가시기 바랬는데 부모님이 빨리
가신 이유가 수세식 화장실 때문이었다는 말씀을 먼 훗날 어머님에게서 듣고 속으로 웃음 지었습니다. 평생
푸세식 화장실을 이용하신 부모님은 익지 않으셨던 거지요.
세 번째로 우물물 세대를 사신 어머님이셨습니다. 30 여 가구가 이룬 마을에 달랑 샘 하나에 두레박 하나
두고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물을 기러 사용하셨으니 얼마나 불편하셨겠습니까? 더구나 미나리꽝이
옆에 있었으니 위생은 또 얼마나 불결했고요. 아마 그것이 수인 성 질환을 불러온 이유도 되었다 싶습니다.
한 여름이면 목욕하기조차 어려웠으니 마을 저 끝 논 옆에 하나 있는 작은 샘에서 더위를 견디는 목욕을
할 수 있었지요. 그러니 친정집에서 단독으로 샘을 쓰시다가 오신 어머님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을 겁니다.
네 번째로 겪으신 고통은 보리 고개였습니다. 친정은 부잣집이었던 어머니가 시집 오셔서 겪어야 했던 가장
큰 고통 중 하나였겠지요. 1928년 시집오셔서 큰 댁에서 해보시지도 안 하셨던 온갖 일을 다 하시고 12년 쯤
지나고 나서 분가 하신 집은 동네에서 만주로 나라를 떠나신 분이 버려두고 간 다 쓰러져 가는 집이었습니다.
그 집에서 벗어나 온갖 일 다하여 새집을 마련 나오기 까지 12년 후인 것 같습니다.
.그 집에서 저는 초등학교를 입학하게 되지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부모님의 노고가 눈에 보입니다. 자랑스럽고 존경스럽습니다.
그 후 부모님은 빈 땅이면 가꾸어 밭을 일구셨고 밭에 온갖 곡식을 심어 팔아 논을 장만하시고 차츰 논과 밭을
늘려갔습니다. 그 사이 아버님은 징용으로 가셨는데 다행히 군산 비행장 취사 병으로 가셨기 천만 다행이었고,
더러 귀가하시는 시간이면 가지고 나오시는 먹거리들이 당시로서는 맛도 보기 어려운 것들이라 자랑스럽기도
했습니다. 해방을 맞아 아버님은 귀가하셨는데 다른 사람들처럼 나쁜 곳으로 죽음의 기로에서 헤매는 곳으로
가시지 않은 것은 우리 가정에는 더 없는 행운이었습니다.
이렇게 살아오신 어머님! 고진감래였습니다. 거기까지가 어머님이 겪으신 고통의 삶이었으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어머님의 삶은 일생 원더우먼처럼 살아오신 삶이셨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또 올릴게요..
어머님! 어머님이 어렵게 살아오신 만큼 어머님께 불효한 이 자식이 할 이야기도 많아서요..
3편에 또 뵙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