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7 - 크라쿠프에서 중앙광장을 지나 구시가지를 걸어서 왕궁 바벨성에 오르다!
5월 10일 폴란드 바르샤바 에서 기차를 타고 12시 20분에 크라쿠프 Krakow Glowny 역에 도착
하는데, 1040년 부터 1596년 까지 폴란드의 수도 로 구 시가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이니
외성인 바르비칸 krakow-barbican- 을 지나 크라쿠프성의 북문인 플로리안 문을 들어섭니다.
유럽에서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광장에 이어 두 번째로 크다는 크라쿠프 중앙시장 광장
Rynek Gfowny 을 구경하고 걸어서 야기엘론스키 대학을 지나 프란체스카
성당 으로 들어가서 앉아서 잠시 쉬다가 폴란드 출신 교황 요한 바오르 2세 를 생각합니다.
그러고는 성당을 나와 걸어서 언덕에 자리한 바벨 성 Wawel castle 에 도착하는데.... 구시가지의 남쪽 끝,
비스와강의 바벨 언덕 위에 자리하니 바벨 성은 예로부터 크라쿠프와 폴란드의 중심 이기도 했습니다.
크라쿠프의 첫 마을이 바벨 언덕 에 생겼으며 11세기 초에는 왕궁 이 생기고 성벽이 둘러쳐져
바벨성의 원형이 되었다는데,,,, 1499년 화재후 16세기 초 지그문트 1세 는 성을
기존의 토대 위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했고 17세기에 바로크 양식의 궁전도 지어졌습니다.
이곳 바벨성 안에 자리한 성당에는 폴란드의 왕들의 영묘가 있고 성당 입구에는 '바벨의 용' 의
것이라고 믿어지는 뼈 세 점이 쇠사슬로 걸려 있으며 바벨성은 국립 박물관 으로 쓰입니다.
비벨성 내부에 폴란드 중~근세의 갑옷, 검, 초상화 등을 비롯한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으며
성에서 언덕 아래 동굴로 들어갈수 있는 통로도 있는데... 재미있게 생긴 용의 동상 이 있습니다.
중세에 폴란드는 대국 이었으니 그다니스크를 점령하고 이반 뇌제의 러시아 군대와 싸워 승리 했으며 1683년
에는 이슬람 오스만 터키군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 을 포위해 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폴란드 기병 윙드
후사르 는 오스만 터키군에 돌격해 대승리를 거두어 유럽을 구출했으니 “기독교 세계를 지킨 수호천사” 라?
1507년 왕으로 즉위한 지그문트 1세 는 1499년 화재로 파괴된 바벨 성을 기존의 토대 위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 했고, 피렌체의 건축가였던 바르톨로메오 베레치의 지휘
하에 30년에 걸쳐 성을 아름답게 다시 지었으니 성에는 17세기 중반 바로크 양식의
궁전도 들어섰는데..... 이 때문에 여러 건축 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모습으로 남아있습니다.
현재 크라쿠프에 남아 관광객들을 끌어모으는 랜드마크들의 원형은 대부분 14~16세기 에
건축되었으며.... 카지미에시의 유대인 공동체 도 폴란드 왕국의 관용 아래 번영했고,
이 시기 카지미에시에 지어진 시나고그 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시나고그로서 남아있습니다.
윙드 후사르 는 1503년 ~ 1775년에 폴란드의 기병으로 5 m 짜리 랜스(장창) 와 윙드 후사르의 상징인
날개 장식 을 달고 있는데.... 오스만 터키에 패망한 세르비아, 불가리아, 왈라키아, 헝가리 왕국의
후사르들은 용병으로 떠돌았으니 일부가 폴란드왕국에 고용되어 3개 부대의 폴란드식 후사르가 생깁니다.
윙드 후사르 는 1605년 키르홀름 전투에서 2,600명이 기마 돌격을 하여 칼 9세가
지휘하는 스웨덴군 기병 2,500명과 보병 8,300명 중에서 무려 7,800명을
전사 시켰으며.... 6만 러시아군을 상대로 돌격해서는 2만을 전사 시켰다고 합니다.
또 윙드 후사르 300명이 오스만 터키군 1만 5천명에 돌격해 오스만군 천여명을 전사시켰고
다른 전투에서는 윙드 후사르의 돌격으로 오스만터키군 3만 5천명이 붕괴 됐으며....
코사크 - 타타르군 14만 을 향해 돌격했는데 폴란드군의 손실은 불과 700명이었다고 합니다?
1683년에 이슬람 오스만 터키군의 제2차 빈 포위전에서 터키(투르크)군은 오스트리아 수도
빈을 20만으로 추정되는 대병력으로 포위하자, 윙드 후사르 1만 8천명 이 후대에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기병 돌격' 으로 불리는 전설적인 돌격으로 빈의 포위를 풀었습니다.
폴란드 지배를 받던 카자크 Cossack (러시아 남부 자유농민) 가 반란을 일으키자 1651년 베레스테츠코
에서 63,000명 폴란드군은 140,000명 카자크 - 타타르 연합군에 대승을 거두기는 했으나,
이 전투에서 폴란드군 피해도 엄청 심한데다가 국력이 소모되어 대홍수(Potop) 시기에 쇠퇴 하게 됩니다.
카자크는 코사크 라고도 하는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부 에서 준군사적인 자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동슬라브어를 사용하는 민족집단으로.... 드니프로강 하류와 돈강과 우랄강 유역에 흩어져 살았는데,
14세기에 드니프로강의 자포리자 카자크와 돈강의 돈 카자크가 생겼으니 자포리자 카자크는 폴란드-
리투아니아왕국의 봉신 이었는데 1962년 율부린너 주연 대장 부리바 Taras Bulba 란 영화가 만들어집니다.
동쪽 카자크는 러시아 지원을 받아 다시 공격해 왔고.... 이후 러시아군의 침공을 받아 폴란드는
국토의 절반이 점령 당하자, 북쪽의 스웨덴도 독일의 브란덴부르크군과 함께 침공해 와서
나머지 절반을 점령해 폴란드는 거의 패망 직전에 이르렀지만, 폴란드 농민들이 스웨덴의
폭압적인 지배에 민중봉기를 일으켰고, 타타르(몽골의 후예) 가 폴란드를 지원하기 시작합니다.
1569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이 결성되었을때, 크라쿠프는 남쪽에 치우쳐 있었으니 스웨덴왕 지그문트
3세가 침공해 폴란드는 1592년부터 1599년까지 스웨덴과 동군연합 을 이뤘는데, 폴란드 공주 출신
이었던 어머니 카타르치나 야기엘론카의 영향으로 가톨릭 신자로 자란 지그문트 3세는 루터파 국가
였던 스웨덴 통치에 어려움 을 겪었고 특히 숙부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에게서 스웨덴 왕위를 위협받습니다.
바르샤바는 크라쿠프와 빌뉴스 사이에 있었으니 연방내의 도시들과 연결성이 좋았고 지그문트 3세
가 스웨덴의 상황에도 재빨리 대처해야 되었기에..... 1595년 바벨 성에 불이 난 것을
계기로 1596년 지그문트 3세는 왕궁을 바르샤바로 옮겼고 1611년 부터 계속 바르샤바에 거주합니다.
정부 기관들도 왕궁을 따라 바르샤바로 이전 하면서 크라쿠프는 실질적인 수도로서는 더 이상
기능하지 않게 되었는데... 하지만 공식적인 수도는 폴란드 2차 분할 (1793년) 때까지
크라쿠프 였고 왕의 대관, 장례식 등 각종 왕사(王事) 는 크라쿠프 바벨 대성당 에서 시행되었습니다.
수도의 기능을 빼앗긴 뒤, 크라쿠프는 천천히 쇠락하기 시작했으니 1652년 도시에선 페스트가
번져 수천명이 사망 했고 같은 해 큰 홍수까지 발생해 도시를 파괴 했는데, '대홍수' 시기
폴란드 상당부분이 루스 차르국군과 스웨덴군에게 점령 당할 때, 크라쿠프도 1655년
스웨덴군에게 함락 되어 약탈당했고....... 문화유산들이 파괴되었으며, 바벨 성도 무느집니다.
18세기 초 대북방전쟁 때 크라쿠프는 1702년에 다시 스웨덴에 함락 되었고 1707~1710년까지
역병이 발생하여 수만명이 죽었으며 1768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때는 러시아군
에게 점령 당했는데, 17~18세기동안 크라쿠프 보더 더 많이 쟁탈의 장이 되었던
바르샤바는 수도로서 기능했기에 재건의 기회를 부여받았지만 크라쿠프는 재건되지 못했습니다.
1794년, 폴란드 민족에게 크라쿠프가 가지는 중요성을 다시 각인시키는 사건이 일어났으니 2차
폴란드 분할로 폴란드인들이 분노에 빠졌을 때, 미국 독립전쟁에서 돌아와 연방군의 중장
으로 재직 중이던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 (Tadeusz Kościuszko) 는 러시아군 이 잠시
크라쿠프를 빠져나가자 3월 23일 크라쿠프 중앙 광장의 직물회관 앞에서 봉기를 선언 합니다.
곧 6,000여명의 봉기군을 모집한 그는 바르샤바로 진격 을 개시했고 4월 4일 크라쿠프 근방 라크와비체
에서 4,000명의 러시아군을 상대로 승리 를 거두었으니, 봉기는 연방 전역으로 퍼져나갔지만
러시아군이 빠르게 대처에 나서고 프로이센(독일)의 지원 까지 이어지면서 봉기는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코시치우슈코 본인도 마치에요비체 전투 (Battle of Maciejowice) 에서 패해 러시아군에 사로잡혔고
봉기가 진압된 뒤 1794년 6월 15일 프로이센군이 도시로 들어왔으니 이들은 곧 바벨성의 왕실
보물고도 점령했고 보물들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지시하에 비밀리에 베를린 성으로 옮겨집니다.
1809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폴란드 왕들의 리갈리아 를 모두 녹여 금화로 만들어 폴란드의 보물을 훼손
했으니 현재 남아있는 폴란드의 리갈리아는 모두 복원품이며, 봉기에 놀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및
러시아 3국은 3차 폴란드 분할 을 통해 왕국을 지도에서 지워버렸고 크라쿠프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귀속됩니다.
오스트리아의 지배 (1795 ~ 1918) 시기 나폴레옹 전쟁 이 전 유럽을 휩쓸때, 구 연방 영토
의 폴란드인 다수 거주지역에 바르샤바 공국 이 세워졌고, 공국이 오스트리아에 속한
폴란드 영토를 일부 회복함에 따라 1809년 크라쿠프도 공국에 속한 도시 가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이 패배한 후에, 빈 회의에 따라 바르샤바 공국 대부분이 러시아와 강제로
동군연합 으로 묶인 폴란드 입헌왕국 으로 넘어갔지만, 크라쿠프는 부분적인
독립국으로서 1815년 근교 지역과 함께 크라쿠프 자유시 라는 이름으로 독립합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보호령 인 가운데 크라쿠프 자유시 는 상당한 자치를 누렸지만,
수차례 폴란드 독립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으니, 폴란드 전역을 휩쓴 1830년
11월 봉기 때 크라쿠프는 러시아의 영향에 있지 않아 봉기 현장이 되진 않았습니다.
그래도 폴란드 입헌왕국으로 무기를 밀반입하는 창구 로서 입헌왕국을 도왔으며 이 때문에
크라쿠프의 행위에 분노한 러시아의 요구로 도시 또한 자치가 제한되었으며, 경찰은
오스트리아의 통제 를 받게 되었고 시민들이 뽑은 시장은 주변 3국의 승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당연히 시민들의 분노는 커져갔고, 1846년 2월 20일 자유시의 주권을 넘어 공화국의 형태
로 나라를 되찾고자 공화주의자 귀족, 지주, 중산층을 중심으로 크라쿠프 봉기 가
일어났는데, 도시의 봉기가 성공하면 또다시 폴란드 전역에 봉기가 퍼질 것으로
생각한 봉기군은 도시의 정치가였던 얀 티소프스키의 지휘 하에 오스트리아 와 맞섭니다.
하지만 초급 장교들이 이끌던 11월 봉기와 달리, 크라쿠프 봉기군의 지원자들은 훈련되지 않았고 무기도
형편 없었으니 결국 크라쿠프 근교에서 벌어진 그도프 전투(Battle of Gdów) 에서 참패 했고, 봉기의
지도층이던 귀족, 지주들에 불만이 많던 근교의 농노들도 오스트리아를 도우면서 봉기는 실패로 끝납니다.
봉기 진압후 1846년 11월 16일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 협약을 맺어 자유시를 없애버리기로 했고 결국 자유시
는 오스트리아의 구성국인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Kingdom of Galicia and Lodomeria) 의 일부
로서 크라쿠프 대공국 이라는 이름으로 제국에 편입되었으며 1850년 대규모 화재로 10%의 시가지가 불탑니다.
크라쿠프는 외세의 지배 를 받고 있었음에도 제 2의 전성기라 할 만큼 번영하기 시작했으니 1866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패한 뒤, 오스트리아 제국은 국내에서 점점 끓어오르던 민족주의의 위협 에
시달렸고, 이때 해결책으로 1867년 헝가리와 동군 연합을 결성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으로 재탄생합니다.
제국은 헝가리를 독립 시킨것 뿐아니라 보헤미아, 갈리치아 등 시스라이타니아로 설정된 영토에
향상된 자치권을 부여했으니, 갈리치아의 크라쿠프 도 예전만큼은 못하지만 광범위한
자치를 부여받게 되었고 시 정부와 의회, 학교에선 다시 폴란드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러시아령 폴란드나 독일령 폴란드 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특혜 였습니다.
크라쿠프는 나라 잃은 폴란드 민족의 문화적, 예술적 상징으로 기능하게 되었으니 많은 폴란드인들이 모여
들어 크라쿠프 황금기 시절의 유산들을 도시에 모았고 예술가와 학자가 활동했으며 폴란드 민족주의
운동도 다시 전개되기 시작했으니, 후에 폴란드 군단을 이끌며 독일과 오스트리아 편에서 러시아와
맞서 싸운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오스트리아의 묵인 하에 크라쿠프에 군사학교 를 두고 세력을 불립니다.
자치의 기간 동안 도시는 새롭게 단장했으니.... 쇠퇴와 1850년의 화재 로 말미암아 시가지 상당부분은
노후하고 낡은 건물들, 폐허로 채워져 았었으니 시 정부는 새롭게 개축 했고 칠을 하거나 당시의
건축 양식으로 건물을 올리기도 했으며 너무 낡거나 도시의 기능 향상을 가로막는 건물은 헐어버립니다.
직물회관도 이때 깔끔하게 재건축 되었고 도시는 다시 아름다워졌으니 현재 크라쿠프의 구시가는
이때 새단장한 거리가 원형 이며, 1901년 상수도 시스템이 도입되었고 전차가 개통되며
현대적인 도시기능이 추가되었으며 근교에는 크라쿠프 요새가 건설되어 도시의 방어력을
증대시켰는데....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황제였던 프란츠 요제프 1세는 크라쿠프 를
여러번 방문했으니, 자치를 부여해 준 것에 감사하는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고 합니다.
제1차 세계 대전때 크라쿠프는 1914년 겨울에 러시아의 공격 을 받았는데 시 정부는 시민들을 모라비아
변경백국으로 대피시켰지만.... 전투는 대부분 새로 지은 크라쿠프 요새 주변에서 치러졌고 다행히
도시에 포탄이 쏟아지는 일은 없었다는데, 1918년 11월 3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항복 하면서
주둔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떠났고 크라쿠프는 다시 신생 폴란드 제2공화국의 영토 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