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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의 소멸과 부활
지난 수천년 동안 실크로드를 종횡으로 누비고 다니던 대상들은 19세기 초 부터 20세기 초 사이에 약 100년간의 시간을 두고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였다. 그 첫번재 원인은 산업혁명 이후 말과 낙타 등 구시대의 운반수단이 자동차나 기차 등 동력을 사용하는 신운반수단의 경쟁력에 밀렸기 때문이었다. 두번째로는 국제정치의 환경이 급격하게 변화하기 시작하면서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이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즉, 19세기에 중앙아시아를 훕수하면서 남진하는 제정 러시아와 인도-페르시아 지역에서 이를 저지하려는 대영제국 간의 대립(일명 The Great Game)이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정정 불안의 요소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20세기 들어서는 제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의 공산혁명이 일어나고 중국에서는 청나라의 쇄망과 국공간의 내전 등 정치적 불안요소가 끊임없이 발생하면서 실크로드를 이용하는 대상들의 수는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부분적으로 또한 간헐적으로 이어져 오던 실크로드 교역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으로 나뉘어 대립하는 냉전기간 동안에 완전히 단절되었다. 그러나 실크로드 교역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시 휴식을 가진 후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과거의 실크로드는 사람과 동물이 다니는 길이었지만 현재와 미래의 실크로드는 현대화된 각종 운반수단에 더해 눈으로 보이지 않는 정보통신이 오고가는 실크로드로 바뀌고 있다.
낙타를 몰던 대상의 역할은 서울, 북경, 뉴욕, 런던 같은 먼 곳에서 현대적 정보통신 장비를 통해 물자의 이동을 지휘하는 상사원들이 대신하고 있다. 카라반세라이(caravanserai)에서 현물로 이루어지던 고전적 실크로드 상품시장은 이제 선물시장이나 증권시장에서 가치를 구매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지거나 아마존이나 알리바바와 같은 전자상거래 업체를 통해 대상이라는 중간상인을 거치지 않고 직접 구매를 하는 형식으로 바뀌고 있다. 머지않은 장래에는 무인항공기 드론의 실크로드도 생겨날지도 모른다. 실크로드는 이렇게 진화하고 있는 중이다.
중국인의 실크로드
그런 실크로드가 이 시대에 부활되면서 어느 특정국가의 전유물인 것 처럼 비추어지고 있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특정국가란 물론 중국이다. 중국 사람들은 인류 문명의 발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4대 발명품인 종이 제조술, 항해를 위한 나침판, 화약, 대량 인쇄술이 자신들 한테 나온 것을 큰 자랑으로 삼고 있으며 심지어는 이태리의 피자도 자신들의 부침개가 실크로드로 전파된 것이라고 믿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런 중요한 4대 발명품이 중국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 발명품들은 실크로드를 타고 유럽으로 건너가서 유럽인들이 이들을 실용화 하여 16세기 이후에는 그들이 점차 전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런 발명품들이 중국인들의 자랑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부끄러움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피자도 일부 중국 사람들이 믿는 것 처럼 마르코 폴로(AD 1254-1324)가 중국에서 살다가 이태리로 돌아가서 퍼뜨린 것이 아니라 원래 고대 그리스에 있던 비슷한 음식이 변화하여 마르코 폴로가 출생하기 약 250년 전 부터 현재의 이름과 형태를 가지고 이태리에서 퍼지지 시작한 것이다.
중국인들은 지역에서 많은 인구를 가지고 현재 중국 영토의 동부지역인 기름진 땅에 살면서 오랜 세월 동안 동양의 맹주 노릇을 해 온 탓인지 실크로드 마저도 자신들의 전유물인 것 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서안에서 출발하여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였던 시리아의 다마스커스 까지 이어지는 실크로드 전 구간 6400 킬로 중 절반 가량이 현재의 중국 영토 안에 있다.
실크로드 교역에서도 중국 상인들이 중국 밖으로 물건을 팔러 다닌 것이 아니라 외부 상인들이 중국으로 들어 와 가져온 물건을 팔고 중국 물건을 사서 중국 영토 밖으로 여행을 하였으므로 마치 실크로드가 자기들을 위하여 존재하는 양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런 이유에 더해서 그런 교역로가 중국의 상품을 상징하는 비단길로 이름이 붙여졌으니 모든 것을 아전인수 격으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런 역사적 바탕과 독선적 인식 위에 중국이 근래에 들어 신실크로드(New Silk Road)라는 개념을 세우고 지금껏 앉아서 손님을 맞이하던 태도를 바꾸어 실크로드를 타고 밖으로 진출하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워놓고 이를 실행에 옮기고 있는 중이다. 중국은 2013년 9월에 실크로드 경제지대(The Silk Road Economic Belt: SREB)라는 개념을 시진핑 주석이 카자흐스탄을 방문했을 때 처음으로 공표하였다.
그 다음 달에는 인도네시아에서 아세안(ASEAN) 국가들과의 관계 강화를 위해 21세기 해상 실크로드(The 21st Century Maritime Silk Road: MSR)를 통한 협력을 강조한 다음 실크로드 국가들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대한 협력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실행 수단으로 아시아 인프라투자 은행(Asian Infrastructure Investment Bank: AIIB)의 설립을 제안하였다. 이로서 중국은 육상과 해상의 실크로드를 “One Belt, One Road(一帶一路)”라는 개념으로 정리하고 우리나라를 포함한 50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AIIB를 설립하기 위한 헌장 서명식을 지난 6월 29일에 가진 바 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실크로드가 부활하게 된 계기는 중국의 역할과는 전혀 관계 없는 것이었다.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실크로드는 지난 세기의 동서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사실상 완전히 소멸되었던 것인데 동서 냉전이 차츰 완화되어 가던 1980년대 부터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가 인류의 긴 역사 속에서 실크로드가 수행한 역할의 중요성을 새로이 인식하고 문화와 문명의 통로로서의 실크로드를 재조명 해보려는 계획은 세웠다. 이에 따라 유네스코는 1987년 부터 10년간 역사 속에서의 실크로드를 탐사할 계획을 세우고 실크로드 해당 국가들은 물론 전세계의 전문가들을 모아 탐험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그 탐험은 2년이 더 연장되어 1999년에 끝났는데 그동안 관련 전문가들이 많은 갈래의 실크로드를 탐사하면서 자료를 모으고 전문가 회의를 거듭하면서 실크로드가 인류의 역사에 끼친 영향과 업적을 재평가하였다. 실크로드 탐사를 계속하던 중에 유네스코와 관련 국가들은 향후 실크로드를 지속적으로 연구할 전문기관이 필요함을 절실히 인식하고 국제연구소를 실크로드의 가장 요충인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드에 세워 놓고 지금껏 꾸준히 다양한 연구활동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중국은 실크로드 탐사 이후 실크로드의 연구나 관련 활동에 특별하게 기여한 바 없이 지금껏 세월만 보내다가 근래에 들어 자신들의 경제규모가 커지자 미국과 유럽 중심의 국제정치 및 국제경제 질서에 돌연 반기를 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고전적 실크로드라는 개념을 확대해석하여 신실크로드라고 이름짓고 이를 활용하여 정치 경제 문화적 세력확장에 시동을 걸고 있는 중이다.
중국은 실크로드라는 단어가 던져 주는 오묘한 뉘앙스, 그리고 실크로드 주요 간선 노선의 종점이 중국 서안이라는 점, 지정학적으로 실크로드 관련 국가들 대부분이 미국과 서유럽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고 있는 개발도상국이라는 점 등을 이용하여 그들을 향후의 중국의 영향력 아래 둘 계획을 세우고 전세계 사람들을 상대로는 실크로드가 마치 중국의 고유 브랜드인 것 처럼 여기도록 교묘하게 착시현상을 만들어 내고 있는 중이다.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박필호의 실크로드 속으로] (8) 서역인들의 실크로드 ①실크로드의 주역들
발행일 : 2015.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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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오늘날 서역인이라는 말을 쓴다면 상당히 애매한 개념이 될 것이다. 이 말은 역사적으로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영토 밖 서쪽에 살고 있는 한족 이외의 사람들을 지칭하여 좁게는 서쪽 지방에 사는 위그르인 등을 이르며 넓게는 중앙아시아와 더 멀리는 인도, 페르시아 및 아랍사람들 까지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어 왔다.
우리는 현재 중앙아시아 사람들, 페르시아계통 사람들, 터어키계통 사람들, 인도계통 사람들, 아랍계통, 코카사스 계통 등 중국 서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서 적절히 표현할 방법이 없으므로 편의상 그들을 서역인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실크로드 역사를 살펴보면 중국인들이 아니라 서역인들이야말로 진정한 실크로드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중국인들이 실크로드의 주역이 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로는 중국인들은 실크로드를 타고 국경 밖으로 나간 일이 아주 드물었으므로 이용빈도가 아주 낮았음을 들 수 있다. 따라서 그 길을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길을 건설하고 유지하고 관리하는데에도 관여하지 않았다. 그들이 국경 밖으로 실크로드를 타고 나간 역사적 기록은 사실 몇개 되지 않는다.
한나라 때에 장건(張騫: BC 200 – 114)이 한무제의 명을 받아 일행 99명을 거느리고 중앙아시아를 향해 떠났다가 도중에 흉노에게 잡혀 10년간 억류생활을 하던 중 흉노 처자식과 안내인 하나를 데리고 탈출하여 천산산맥을 넘어 현재의 키르기즈스탄에 들어 간 후 중앙아시아 여러나라를 다닌 것이 중국 최초의 중국인의 실크로드 공식적 탐험기록이다.
그 이후 700여년이 지난 후에 당태종 시절의 현장법사가 황제의 칙명인 출국금지령을 어기고 몰래 국경을 빠져나와 인도를 가기 위해 천산산맥을 넘어 키르기즈스탄 지역으로 들어간 후 현재의 중앙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 지역을 돌아보고 17년 만에 귀국하였다. 현장법사가 실크로드를 타고 서쪽을 다녀 온 100여 년이 지난 후에는 현재의 신강성(新疆省) 위그르 자치지구에서 안서도호부 부절도사로 있던 고구려 유민의 아들인 고선지가 힌두쿠쉬 고원의 험준한 길을 타고 현재의 파키스탄 북부에 위치한 소발률국(小勃律國: Gilghit)을 정벌한 것이 그 다음의 역사적 기록이다.
그 후 고선지는 당나라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파미르 산맥을 넘어 중앙아시아 일대를 정벌하다가 아랍과 페르시아 지역을 차지한 압바스 왕조 세력과 일전을 벌인 후 패배하고 당나라로 귀환하였다. 신라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활동했던 승려 혜초도 그 비슷한 시기에 바닷길로 인도에 간 후 인도 지역과 중앙아시아 일대를 돌아보고 파미르 산맥을 넘어 귀환한 후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남겼다.
그 이외에 명나라 초기에 환관 정화(鄭和)가 일곱 차례에 걸친 해상 여행을 하는 동안에 동남아시아와 인도양 인근은 물론 아프리카의 케냐 지역까지 다녀 와 그를 해상 실크로드의 개척자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 외에 역대 중국 왕조들이 인근 국가들에 사신을 몇차례 보내고 국경에 시장을 간혹 개설하거나 조공무역을 통해 교역을 한 기록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한나라 시절에 잠시 현재의 신강성 지역을 점령한 적이 있었고 당나라 시절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하여 위그르인이 사는 지역을 부분적으로 다스린 사실이 있었을 뿐이다. 그랬던 중국인들이 한족의 입장에서 몹시 멸시하던 여진족의 청나라가 현재의 중국 영토와 같은 크기의 광대한 영토를 모두 장악한 후 결과적으로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에 물려주기 전 까지는 중국인들이 실크로드가 자기들의 소유라고 주장할 만한 근거는 사실상 없었던 것이다.
반면 중앙아시아 지역부터 지중해 연안에 이르는 실크로드 구간은 그 지역을 다스렸던 나라들이 끊임없이 관리해왔고 그들 나라들이 카라반세라이 같은 교역 편의시설을 셀 수 없이 많이 세워 수천년의 세월 동안 실크로드를 통한 대상 무역의 증진에 크나큰 기여를 하였다. 그 중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알리쉬르 나바이(Ali-Shir Nava’i: AD 1441 - 1501)이다.
나바이는 돌궐-몽골계통 왕조로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북부, 이란의 동북부, 우즈베키스탄의 남부 지역을 지배하던 호라산 회교왕국 (Khorasan Khanate)의 재상으로 수십년간 일하는 동안에 실크로드에 설치된 카라반세라이 수백개를 세우고 보수하여 실크로드를 오고가는 대상들에게 편의를 제공하였으며 그외 모스크, 각종 교육기관(madrasa), 도서관, 병원 등도 수백개를 세워 대상들은 물론 자국민들의 복리증진에도 힘을 쓴 인물이다. 그는 역사에 길이 남을 훌륭한 건축물도 세웠으며 유럽의 르네상스에 버금가는 문예부흥을 이루었다는 찬사를 역사가들로부터 받았다.
사실 그는 시인으로서 더 많이 알려져 있는데 페르시안어나 아랍어로도 시를 썼지만 주로 몽고계통의 차가타이 언어를 사용하여 시집 30여편을 남겼다. 그의 시는 모두 수천편으로 수십만 운율에 달하며 시 이외에도 법률, 철학, 문학, 종교, 구전문학, 사회문화 등등 여러 분야에 대한 저술도 많이 남겼다. 그의 사상, 철학, 종교, 문학은 중앙아시아 지역을 말할 것도 없고 동으로는 인도의 무굴제국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고 서로는 오토만 제국에, 북으로는 러시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나바이는 젊은 시절 동문수학했던 그의 친구가 권력다툼 끝에 왕이 되자 재상으로 부름을 받고 32년간 근무하였는데 평생 결혼을 한 적도 없을 뿐더러 어느 여자도 가까이하지 않고 오로지 정사를 돌보면서 동시에 저술을 하는 등 실크로드 문화에 큰 업적을 남기고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소수민족의 종교나 문학 등을 말살시켜려는 경향이 있던 소비에트 러시아에도 1942년 그의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는 우표를 발행했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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