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대한의 전쟁이야기 - 한국전쟁과 후방의 전쟁 경험[ -後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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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5.29. 23:13조회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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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후방의 전쟁 경험
[ -後方- ]
1) 한국전쟁 전개 과정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하여,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으로 군사적으로 정전(停戰) 상태가 되었다.
북한은 소련의 군사적 원조 하에, 중국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 및 중국 전선에서 전투 경험이 있는 조선의용군의 북한 입국이라는 국제적 분위기에 이끌려, 남침하면 남한의 좌익들이 북한군에 동조하여 대대적으로 일어날 것이라는 정보 하에, 그리고 미국에서도 한반도의 전쟁에 간섭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판단 하에, 1950년 6월 25일 대대적인 남침을 시작하였다.
초전에는 사전 계획 및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북한군이 우세하였다. 북한은 6월 27일에 이미 서울을 점령하였고, 7월 3일에는 한강을 넘어 남하하였다.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24보병사단이 한국으로 이동하였으나 전세를 만회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부산을 거점으로 한 낙동강 방어선을 확보하여 반격의 기회를 노릴 뿐이었다.
전세의 역전을 가져온 것은 1950년 9월의 인천상륙작전이었다. 낙동강 전선에서의 총반격과 더불어, 미 제1해병사단과 제7사단으로 이루어진 제10군단 및 5,000명에 달하는 한국해병대가 9월 15일 새벽에 인천에 상륙하였던 것이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북한군은 남북으로 단절되었고, 대오도 갖추지 못한 채 북으로 패주할 수밖에 없었다. 인천에 상륙한 유엔군은 9월 26일에 서울에 진입하였다. 동해안의 한국 제1군단은 10월 10일에 원산을 점령하였고, 서부전선의 미 제8군은 10월 20일에 평양을 점령하였다. 이런 진격의 추세는 10월말까지 계속되어, 서부전선에서는 초산과 혜산, 동부전선에서는 장진호와 부전호까지 진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항미원조(抗美援朝)를 내세운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어, 12월에는 한국군과 유엔군이 북한에서 총퇴각을 하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1월 4일에는 서울을 다시 뺏기는 ‘1 · 4후퇴’를 맞게 되었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다 대략 1951년 2월에, 현재의 휴전선 부근에서 전선이 고착화되었다.
휴전회담(休戰會談)은 1951년 7월 10일부터 개성에서 시작되었다. 그 쟁점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휴전선을 어디로 할 것인가라는 문제, 다른 하나는 포로 송환의 원칙에 관한 문제였다. 중공 및 북한은 원래의 38도선의 원상회복과 및 포로의 강제송환을 주장하였고, 유엔군은 현 접촉선을 분계선으로 하자는 주장하는 한편, 포로의 자유송환을 주장하였다. 결국, ‘반공포로 석방’ 등의 우여곡절 끝에, 분계선은 접촉선으로 하기로 하고, 인도(印度)를 중심으로 하는 중립국 감시위원단이 송환을 원하지 않는 포로의 귀국 문제를 처리하는 것으로 협정은 일단락되었고, 이에 중공, 미국, 북한 사이에 휴전협정이 성립하게 되었다.
2) 후방(後方) · 여성의 전쟁 경험
한국전쟁은 인적 · 물적 손실도 막대하였을 뿐 아니라, 각 국민에게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게다가 전쟁 경험은 단순히 전선에 있던 군인들의 전투 경험을 넘어, 평소에는 숨겨질 수 있었던 국가-국민의 관계의 본질을 모든 국민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기도 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낙관적으로 전황을 보도하였는데, 6월 27일 새벽에는 국회가 수도 사수를 결의하기도 하였다. 급기야 정부와 이승만 대통령은 피난을 가면서도 계속해서 ‘수도 서울 사수’를 방송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지 않은 6월 28일 새벽에 결국 한강다리를 폭파하고 말았는데, 이로 인해 피난하지 못한 대부분의 국민은 적 치하에 남겨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방에 배치되었던 군인의 2/3도 한강을 건너지 못하게 되었다.
‘수도 사수’라는 국민 기만과 한강다리 폭파라는 배신에 더해, 더 기막힌 일이 서울 수복 이후에 이루어졌다. 즉, 잔류파(殘留派)에 대한 도강파(渡江派)의 ‘부역자처벌’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정보를 미리 알고 한강을 건넜던 경찰 및 대한청년단 간부, 면서기 등의 도강파에 의해 북한군에 부역했다는 혐의로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무작의적인 ‘빨갱이’ 처단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라는 소설에는 ‘빨갱이로 몰린 젊은 여자’가 이 시기를 어떻게 경험했는지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들어있다.
“서울에 남아있던 사람에겐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일단은 부역의 혐의를 걸 수 있는 여지가 있게 마련이었다. 비록 그들이야말로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정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은 순수한 양민이었고 해도 말이다. 정상은 참작되지 않았다. 부역에 있어서 한 점 부끄러움도 없이 결백하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한강다리를 건너 피난을 갔다 왔다는 게 제일이었다. 그래서 자랑스러운 반공주의자 내에서도 도강파(渡江派)라는 특권계급이 생겨났다. 시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고 꾀어놓고 떠난 사람들 같지 않게 안하무인이었다. 어쩌면 자기잘못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에 선수를 치느라고 그렇게 위세를 부리는지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친일파의 정상은 그렇게도 잘 참작해주던, 그야말로 성은이 하해와 같던 정부가 부역에는 그다지도 지엄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 그들은 나를 빨갱이년이라고 불렀다. 빨갱이고 빨갱이년이고 그 물만 들었다하면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영장이고 나발이고 인권을 주장할 수도 없었다. 빨갱이를 색출하고 혼내줄 수 있는 기관은 수도 없이 난립돼 있었고, 이웃이 우리를 계속 수상쩍게 여기는 한 나는 그들의 밥이었다. 그들은 나를 함부로 욕하고 위협하고 비웃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에 비하면 그 정도는 인권침해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나를 마치 짐승이나 벌레처럼 바라보았다. 나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돼 주었다. 벌레처럼 기었다. 그들에겐 징그러운 벌레를 가지고도 오락거리를 삼을 수 있는 어린애 같은 단순성이 있었다. 다행히 그들은 빨갱이를 너무도 혐오했기 때문에 빨갱이의 몸을 가지고 희롱할 생각은 안했다.”
(박완서, 1992,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웅진출판사, 271~273쪽)
북한의 남한 점령정책은 주민의 동의를 전혀 받지 못했다. 그들은 점령과 동시에 노동당을 건설하고 인민위원회를 복구하는 등 정권기관을 수립하고, 이른바 무상몰수 무상분배에 따른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등 이른바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을 한다고 했지만, 위로부터 조급하게 하향식으로 지시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더구나 의용군(義勇軍) 모집 등에서는 그 ‘의용’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할당과 선전에 대한 피로감만 누적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박완서의 시선 역시 이에 대한 혐오로 가득 차 있다.
“학교의 주인은 민청이었다. 민주학생동맹다운 민주적인 학습방법은 소련공산당사나 신문의 전면을 차지한 김일성 수령의 교시를 돌아가며 읽고 예찬하고 열광하는 일이었다. 우러나오지 않는 예찬과 열광처럼 사람을 지치게 하는 일도 없었다. 몸에서 서서히 생기가 증발해 가고 있다는 걸 현저하게 느꼈다. 같은 교시를 읽고 또 읽으면서 처음과 다름없는 고조된 열광을 유지해야 했고 새로 나오는 교시 또한 그 소리가 그 소린데도 열광에다 새로운 불을 지펴야 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가능했다면 그건 틀림없이 가짜였을 것이다. 가짜를 좋아하는 수령은 얼마나 멍텅구리일까. 이런 생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할 짓이 못되었다.”
(박완서, 1992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266쪽)
전쟁을 겪고 나서 남과 북은 각각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간 듯했지만, 이미 국가의 본질을 경험한 국민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대책이 필요하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전쟁과 후방의 전쟁 경험 [-後方-]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컬렉션 : 한국의 시대별 전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