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잡지』 1949년 10월호 제43권 제10호(150〜152쪽)
최도마 신부 전기(七)
2. 귀국도상에(속)
一八四六년 十二월 「메스뜨르」신부와 최부제는 변문을 찾아 동지사(冬至使)들 틈에 한몫끼어 국경을 넘는 한국교우를 만났다. 이때에 비로소 국내에 박해가 재발되어 김안드레아신부님과 그 외에 팔인의 순교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2)
최도마는 팔 한쪽을 잃은셈이다.
환경이 허락한다면 입국을 결심하고 변문을 찾은 최도마일행은 박해시라 배전 국경지대에 경계가 심하므로 입국을 단념하고 창연히 발길을 돌이키며 생각하였다. 육노로 입국을 계획한다면 부지하세월이리라「페레올」주교와「다불류」신부와같이해로를 취하여보면 어떠할까? 매스뜨르신부와 최도마는 홍공(香港)에로 출발하였다. 그때 정치문제로인하여 「마까오」에 있던 교회경리부가 임시 홍공에로 옮겼기 때문이다.
一八四七년가을 최도마일행이 홍공에 도착하고보니, 천재일우의 호기는 우리일행을 기다리고 있지 않던가!(3) 이야기는 잠시 몇해전에로 올러간다.
一八三九년, 블란서선교사 세분을 한국정부에서 사학죄인으로 취급하여 무참히 치명시켰다. 이사실을 늦게나마 알게된 동양블란서함대장 「세실」씨는 책임상 묵과할수없이 一八四六년 八월 九일 충남외연도(外烟島)에 나타나 한국정부에 항의서를 제출하고 일년후에 회답을 찾으러 올 것을 언명한후 돌아갔다. 그 항의서의 내용인즉 다음과같다.
웨 무고한 블란서인들을 죽였는가? 설혹 귀국에 불법입국하였다치더래도 국제법에의하여 본국에 돌려보낼것이어늘 한국임의로 타국인을 처벌하였는고 끝으로 강국으로서 약소국에대하여 위협을 부언하였다. 한국측에서는 이미 타국인을 죽이고 후환을 염여하지않었단다도 아니다. 그러나 여러해가 지나도 아무런 일이 없으매 적이 안심하고 있던차에 돌연 섬같은 타국배가 나타나 항의를 제출하매 정부는 어찌할바를 모르고 일시 아연히 있었다.
그러나 「세실」씨는 수일을 지나 아무런 군사행동도없이 귀항하고 말매, 한국은 안심을 지나처 대담한 태도를 취하고 외국에서 온 항의에 대하여 냉소로 일축하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페레올」주교께서 「세실」대장의 내방이 김안드레아신부의 치명원인이 아니라면, 적어도 시간을 촉진시켰다고 탄식하신 것이다.(4)
「세실」씨는 전년에 약속한바를 잊지않었다.(5) 그리하여 자기권하에 있는 군함 두척을 한국에 보내어 자기항의서에대한 회답을 요구하게 하였다. 이에 「라글로리」호와 「라 빅또리의시」호가 출범하려할때에 「메스뜨르」신부와 최도마는 홍공에 도착한 것이다.
최도마 일행은 문제없이 군하ᇢ에 올렀다. 함장들은 적당한 통역얻은 것을 기뻐하였다. 오래동안 무수한 고초와 싸우며 입국을 도모하였으나 성공치못하고 있었더니, 이번만은 이미 성공한 듯 무한히 기뻣을 것이다.
그렇나 천주의 안배는 아직 인간의 뜻과 다르지않은가!
블란서군함 두척이 一八四七년 七월 二十八일에 출범하여 八월 十일 충청남도 고군도(古群島)근처에 도달하였을때이다. 영구인들이 작성한 지도를 보면 수심이 七十八척되는곳이라 안심하고 두배는 항노를 계속하였다. 그렇나 천만뜻밖에 모새펄에 배가들다 드려밖혀 파선을당한다.
설상가상으로 풍낭은 심하다. 배는 점점 깊이 가러앉고 또 깨저서 배안에 물이 가득히 든다. 하는 도리가 없어 승무원들이 종선을 타고 근처에있는 섬예로 하륙하였다. 군인중 하나를 잃어버린 것은 애석하다하겠다. 급히 상해로 통지하여 구원을 청하고 군인아울러 六백여명이 천막방에서 회소식을 기다렸다.
한국측관리들이 찾아왔다. 물론 통역은 최도마였다. 그렇자 국어대신 한문을 사용하여 의사를 통하였다. 이는 자기를 알리지 않기 위함이었다. 오래간만에 고국의땅을 밟었다. 보고듣는 것이 확실히 입국한 기분을 준다. 그러나 입국하였다고 안심할수없으니 안타까운일이다.
도마는 한국관리들과 대화중에 한번 기회를 보아 교회에관한 질문을 던저보았다. 한국에도 천주교인이 있으며 지금도 금지하는가? 그러하외다. 그 악한 도를 소멸시키기위하여 그 교인을 만나는대로 죽이는중이외다. 최도마의 마음은 오직 답답할따름이다. 난파선의 급보를 접하고 근방에있던 영국배가 왔다. 불란서 군인들은 하루바삐 떠나려한다. 그렇나 이렇게 여러해동안 입국을 목표로 노력한 끝에 여기까지 왔다가 한국교우들과 일차상통도 못하여보고 그대로 떠나기는 너무나 섭섭한일이다. 그러므로 매스뜨르신부와 최도마는 불란서군인들의 출발을 지연시키며 초조히 기다리는바가 있다.
여기에 관한 도마부제의 편지를 보면 아래와 같다.(6)
「나는 교우배가 우리를 찾어오든가 하여 매일밤 사방을 살폈나이다. 나는 기구중에 초조히 기다렸나이다. 어느날 근처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밤에 한국인 몇몇과함께 배를 타고 돌아오게되었는데, 내가 한문으로 손바닥에 써서 보히며 천주교말을 하였더니, 그들중에 하나가 내게 무러보더이다.
당신이 예수, 마리아를 아십니까?
예, 당신들도 알어 공경합니까?
이내말에 긍정하는 말한마디를 던지고 옆에 외교인들이 있음을 끄려 대화를 중단하더이다. 조금있다가 틈을 타서 그의 손을 붓잡고 물었나이다.
당신집안이 다 교우입니까? 교우들은 어이 살고 있읍니까?
또 우리를 영접하고저 배를 가지고 오지못하겠읍니까?
이 고군도에서 十리 가량되는 대공소에 사오며, 식구가 다 교우입니다. 이틀후에배를 가지고 오겠읍니다.
나는 더 대화를 계속하고자 하였으나, 그는 내손을 뿌리치고 더 대답을 하고저아니하더이다.
나는 희망과 근심에 차여 약속한 날을 기다렸나이다. 그렇나 교우의 배는 보이지않었나이다. 그는 관원들의 경계를 피하여 올수없었던모양으로 짐작하옵나이다. 사실 낮에는 감불생의요 밤에도 불란서군인들이 주둔하고있는 근방에 경비선들이 불을 밝히고 외국인과의 상통을 엄금하고 있었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