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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 찬양대의 귀한 찬양 감사합니다.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다른 것은 생각을 하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생각을 하되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중요합니다. 존 템플던 경은 말하기를 마음속에서 일어난 생각은 결국 밖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우리의 행동이 생각의 결과라는 뜻입니다. 학자들도 약 20%의 생각이 80%의 삶을 좌우한다.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이와 같이 중요합니다.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우리가 생각해야 될 대상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생각할 것인가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예수님을 생각하고, 또 그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하라는 말의 헬라어 뜻은 어떤 대상에 대해서 마음을 고정시킨다는 것입니다. 어떤 대상에 내 마음을 갖다 붙이고 못으로 박아서 떨어지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상태 그것이 바로 깊이 생각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고정시키고 그분을 밤낮으로 묵상하며 살아갈 때 우리의 영적 생활은 더 견고해지고 더 풍성해지고, 우리 삶에는 하늘로부터 오는 은혜와 축복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을 이렇게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인가 예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이기에 우리의 생각을 거기에 고정시켜야 되는가 첫째는 그분은 존재론적으로 모세보다 뛰어난 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히브리서를 읽고 있는 유대 출신의 크리스천들에게 모세는 매우 위대한 존재였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려고 하나님이 보내신 지도자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서 백성의 사정을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아서 전달했던 중보자였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선지자들에게 꿈과 환상으로 말씀하셨지만 모세에게는 대면하여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12장 6절에서 8절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다서를 읽어보면 천사장 미가엘과 그리고 마귀가 모세의 시신을 서로 소유하기 위해서 다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계에서도 이 물질계뿐만 아니라 영계에서도 모세는 그만큼 중요한 인물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유대인들이나 또 유대교에서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나 매우 중요하고 또 우리가 넘어설 수 없는 신앙의 보물입니다.
그런데 이 히브리서를 읽고 있는 유대교 출신의 크리스천들이 밖으로부터 오는 박해 그리고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서 이제 내면으로부터 오는 매너리즘의 위협을 받으면서 처음에는 그렇게 사랑하고 그렇게 열렬히 사모했던 예수님을 저버리고 다시 그 모세 그리고 모세가 전해준 율법의 세계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해는 됩니다. 왜냐하면 유대 사회에서 유대인들에게 또 모세가 전해준 그 율법과 모세는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었습니까?
그러니까 그 처음에는 예수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다음에 그 뜨거웠던 마음이 조금 식어지자 벌써 흔들리면서 옛날 추억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그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권면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 믿음의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 그분에게 너희들의 마음을 고정시켜라
그렇게 권면했습니다. 오늘 이 본문이 저와 여러분에게 다시 권면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우리의 믿음의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 고정시키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며 그분이 우리에게 전해준 복음 십자가 복음이 얼마나 놀라운 가치였는지를 헤아리고 그분 안에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왜 흔들립니까?
그것은 우리가 그분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는 일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예수님에 대한 생각을 생각이 지금 흩어졌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생각해야 될 가치가 있는 존재이고, 그분이 우리에게 전해준 십자가의 복음은 우리가 밤낮으로 묵상해야 될 대상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와 예수님의 공통점을 먼저 언급합니다. 이 두 분은 모두 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분이에요. 모세도, 그리고 예수님도, 또 이 두 분은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집을 위해서 충성을 다한 분들입니다.
히브리서 3장 2절 이 공동점에도 불구하고 이 두 분은 서로 결코 좁혀질 수 없는 차이가 있어요. 그것이 3절 4절 말씀입니다.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예수님과 모세는 존재 자체가 다르다고 하는 겁니다. 모세는 지음을 받은 피조물입니다. 모세가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는 피조물이에요. 그러나 예수님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입니다. 모세는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지만 예수님은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모세는 장차 이루어질 일을 증언한 사람이라면 예수님은 그 일을 성취하신 분입니다. 존재 자체가 달라요. 모세와 예수님은 비교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와 예수님 사이에서 고민하지 말고 예수님에게 모든 마음을 쏟고 예수님을 붙들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에게는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그냥 모세 정도 아니 그 정도도 아니에요. 조금 마음 상하면 안 믿어 할 정도의 대상인가요? 그건 우리가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예수님은 그런 정도의 가치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분은 하나님이셨고 그분은 창조주시고 그분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을 그분에게 집중해도 모자랄 가치가 있는 분이시라는 겁니다.
두 번째로 오늘 본문은 신분적으로 예수가 모세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5절 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신분적으로 두 분이 다르다는 거예요.
모세는 뭡니까?
종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종은 사실 아들보다 능력이 뛰어나고 더 지혜로울 수가 있어요. 아들이라고 해서 꼭 능력이 뛰어나고 지혜로우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종은 아무리 자기가 뛰어나도 결코 아들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아들의 영광에 참여할 수도 없습니다. 아들이 받아야 될 유업을 종이 받을 수는 없어요. 그는 월급을 받고 고용된 사람입니다.
아들과 종이 하루 종일 들판에서 일을 할 때 종의 아들보다 더 생산성 있게 일할 수 있어요.
그러나 날이 저물고 저녁이 돼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때 이 두 사람의 신분이 확연하게 차이가 납니다. 종이 아무리 뛰어나도 저녁이 되면 종의 처소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아들은 좀 모자라고 그래도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게 돼 있는 거예요. 신분의 차이입니다.
모세는 종으로서 실로 위대한 일을 감당했어요. 200만 명을 40년간 이끌었어요. 200명, 300명도 이끌기 어려운데 40년 동안 200만 명, 그것도 유대인들이 얼마나 개성이 강합니까? 나중에 로마가 이 유럽을 그리고 저 중동까지 다 지배하면서 가장 다스리기 어려웠던 민족이 이스라엘 유대민족이었어요. 그만큼 개성이 강하고 까다롭다 이런 말씀이에요. 그런 사람들을 200만 명을 40년 동안 이끌었습니다.
물론 모세도 고민하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 이 사람들 내가 낳았습니까? 왜 나한테 공을 넘기십니까? 이렇게 기도한 적이 있어요. 어쨌든 탁월한 리더십을 가진 사람 10가지 재앙을 일으켰고, 홍해를 갈랐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했습니다. 그가 남긴 업적은 위대합니다.
반면에 예수님 그분의 사역을 보면 죽은 자를 살려내시고 무리를 거른 초자연적 이적을 행하셨지만 사역의 규모나 그 기간이나 이런 걸 보면 모세하고 비교해 보면 사실 좀 초라하죠.
예수님은 12명을 부르셨는데 그중에 1명은 예수님을 팔아먹었어. 10명은 예수님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모두 배반했어요. 죽은 자를 살리는 오병이요. 기적은 베푸셨지만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셨어요.
여러분 모세가 죽을 때 모세는 얼마나 신비롭게 죽었습니까?
비스가 산에 올라가서 물론 가나안 땅에는 못 들어가지만 거기를 바라보면서 거기서 자기 생을 마감했고 그 시신이 어디 갔는지 모르는 아주 신비로운 마지막을 보내게 됐습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모세가 여러 가지 면에서 아주 예수님보다 더 뛰어난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아무리 모세가 훌륭하다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종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종이라도 아들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어요. 그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거예요. 그분이 히브리인들이 구세주로 영접한 그들의 주인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셔서 이제는 하늘과 땅과 땅 아래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그들을 그 바랍의 발 아래 굴복시키시는 만왕의 왕으로 복귀하셨습니다. 이분이 예수님인데 이분을 구세주로 주인으로 하나님으로 모시게 됐는데, 지금 히브리서를 읽고 있는 이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흔들려서 예수님에게서 흔들려서 지금 모세에게로 율법으로 돌아가고 있다라는 사실이에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구약 시대처럼 유대인들처럼 모세를 통해서 그리고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 그것도 하나님을 만나는 거예요.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 우리도 그 구약의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 하나님을 모세와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또 우리 크리스천들은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다 이거.
그런데 그 결과가 달라요. 성경을 읽어보면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모세를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 또는 종이 되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모세를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주 하나님이라고 부르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예수님처럼 아바 아버지라고 우리는 부르는 거예요.
로마서 8장 15절에 보면 너희는 무서워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아람으로 아바 아버지입니다.
가정에서 우리가 띠또아예 하듯이 부모, 자식 간에 아주 친근한 의미에서 사용하는 용어가 아바예요. 아바 아빠 아버지,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는 예수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그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된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양자의 영을 부어주신 거예요.
종의 영은 뭐냐?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 자들에게 부어지는 영입니다. 그래서 이 구약 시대의 종의 영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늘 두려움으로 섬겼어요.
종의 영은 두려움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고 종이기는 하지만은 그 자유가 없어요. 그러나 자녀들이 받은 이 양자의 영은 자유하는 영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이 종처럼 두려워하지는 않아요. 우리가 그런 신분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히브리서를 읽는 이 교인들이 그 사실 이 놀라운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여러 가지 이유에서 옛날 상태로 돌아가려고 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도 이거에 대해서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주께서 너희들에게 자유하게 하려고 자유하는 영을 주셨으니 다시는 돌아가서 종의 멍에를 베지 말라. 율법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거예요. 모세가 아무리 위대해도 예수 믿고 크리스천 된 것보다 위대하지는 않다는 거예요. 다시 돌아가는 건 바보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바보들이 지금 이 히브리서를 읽는 사람들 중에 생기고 있었어요.
혹시 우리가 그런 사람이 아닌가 여러분 돌아보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믿는 예수, 우리가 받은 이 복음은 이 세상에 이 세상을 다 우리에게 준다 해도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밭에서 일하다가 뭐가 하나 걸려서 보니까 단지가 있어 그걸 열어보니까 거기에 어마어마한 보물이 있었어. 그걸 덮어놓고 돌아가서 자기의 전 재산을 팔아서 그 밭을 샀다. 보물을 산 겁니다. 예수님의 비유예요.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거 우리가 받은 복음은 그와 같은 보물입니다. 내 모든 것을 다 들여서라도 반드시 지켜야 되는 보물 그것이 여러분 우리가 받은 예수님이고 복음이고 그리고 우리의 신분인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또 요즘 우리 한국교회 유행하는 말 가난한 교인 나는 뭐 예수는 믿기는 믿는데 그래도 천국은 가야 하니까 보험은 들어두는데 교회는 안 나가요. 뭐 이런 목사한테 실망하고 교인들한테 실망하고 상처받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죠. 그래서 그냥 보험 정도로 예수 믿고 그것도 상황이 안 좋으면 그냥 깨서 쓸 만한 그런 정도로 생각하는 크리스천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거 참 안타깝고 한심한 일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크리스천이 된 거 예수 믿는 거 복음을 받은 것은 그 정도의 가치가 아니에요.
목사가 여기서 매 주일마다 예수 잘 믿어야 됩니다. 신앙을 끝까지 지켜야 됩니다. 이렇게 설득할 문제가 아니에요. 제가요. 오늘 여러분들에게 다음 주부터는 교회 오지 마세요. 교회 안 와도 돼요라고 여러분들을 설득하고 위협한다 할지라도 뭔 소리냐고 오늘 성원용 목사가 미쳤나 봐. 뭐 잘못 드셨나 나는 그래도 교회 나갈 거야. 나는 그래도 예수님 믿을 거야. 나는 끝까지 그 복음을 붙들 거야라고 말해야 정상이라 이런 말씀이다.
복음은 그런 가치가 있는 거예요. 뭐 좀 마음 하나 상했다고 인생이 조금 힘들다고 예수 믿어 안 믿어 하고 선택할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가 그런 문제로 흔들리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거나 우리의 생각을 예수님께 고정시키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사역적으로도 모세보다 뛰어난 분이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율법을 전했고 예수님은 복음을 전했어. 율법은 정죄하고 죄를 깨닫게 하는 기능을 갖고 있어요.
로마서 3장 20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율법의 아주 본질적인 기능이 뭐냐? 율법을 잘 지켜서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사도 바울이 깨달은 율법의 기능이에요. 누구든지 율법 앞에 서면 아 내가 죄인이구나 나 큰일 났네. 나를 내가 구원받을 길은 없을까 이 생각을 하도록 하는 기능을 가진 게 율법이에요. 그래서 누구든지 율법 앞에 서면 죽음의 위협을 느끼고 심판의 위협을 느끼고 그리고 마음속에 두려움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주의자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슬람교도 마찬가지고 우리 크리스천 가운데도 율법적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마음의 자유가 없고 그다음에 마음에 두려움이 생겨서 하나님을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저 두려워서 지옥 가는 것이 두려워서 섬기는 상태가 되는 거예요. 그 율법의 그게 기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율법은 늘 우리를 위협합니다.
율법의 기능은 경찰과 같고 마치 사람을 고소하는 검사의 기능과 같아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에는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누구든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법인데 왜 저주 아래 있느냐? 하나님의 법이 저주하는 법이어서가 아니라 그 하나님 앞에 법 앞에 서면 인간의 죄가 드러나면서 마음에 두려움이 생기고 심판이 생기고 그걸 극복하지 못하면 심판을 받는다는 거예요. 그게 율법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잖아요. 길 가다가 기분 좋게 가다가 저 앞에 경찰이 서 있으면 나도 모르게 게임 찍해서 다른 길로 가거나 차 몰고 가다가 또 경찰 차가 딱 따라붙으면 내가 뭘 잘못했나 그래가지고 오늘 딱지 떼는 거 아니야 잘 만나서 차 마시고 얘기하다가 혹시 직업이 뭐예요? 저 검사인데요. 그러면 괜히 꺼림칙해지는 거예요. 혹시 뭐 내가 뭐가 잘못된 게 드러나는 거 아닌가 그게 율법의 기능이다 이런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아무리 모세와 모세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그 율법이 귀하고 하나님의 법이라 할지라도 그 기능은 우리를 정죄하고 우리를 두렵게 하는 법이라는 거예요. 어떻게 하느냐 율법은 그럼 그걸로 끝나 그게 아니고 갈라디아서에 의하면 그렇게 해서 우리를 살려주시는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의 기능까지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뭐냐? 복음은 정죄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법입니다. 간음한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이제는 다시 죄를 짓지 마라. 정죄하지 않는 복음 우리가 주님을 만나면 율법을 만나면 우리의 죄를 싹 다 드러내지만 우리가 주님을 만나면 주님은 우리를 그의 보열로 덮어주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품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하고 살리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하려는 것뿐이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하게 얻게 하려 함이라.
지금 이 히브리서를 읽는 사람들이 만났던 예수님은 어떤 분이냐 율법 아래서 심판과 저주를 두려워하면서 사는 그들에게 자유를 주신 분이에요. 생명을 주신 분이에요. 심판을 넘어가게 해 주신 분이시다. 이거예요. 그리고 살려주신 분입니다. 지금도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면 살아납니다. 18내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 그래서 피가 빠져나갈 때마다 자기 몸에서 생명이 계속 흘러나가던 그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순간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그에게 흘러들어왔어요. 살려주시는 예수님 죽어가던 회당장 야이로의 딸 주님의 말씀 한마디에 그 딸이 살아났습니다. 죽어서 사흘이나 나흘이나 지나서 썩은 냄새가 나든 나사로에게 나사로야 나오너라 했더니 죽은 송장이 그 말씀을 듣고 그 속에 생기가 들어가서 살아나서 걸어나오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이고 이것이 우리가 믿은 예수님이에요.
여러분은 죽이고 정제하고 두려움을 주는 대로 가고 싶습니까? 아니면 만나면 용서하고 살려주시는 회복시켜주시는 분에게 가기를 원합니다.
아무 생각이 없어요. 예수님이잖아요. 그렇잖아요. 분명하잖아요. 자명한 사실이잖아요. 그 예수님을 우리가 구주로 받은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 거예요. 타협의 여지가 없어요.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주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너희는 믿음의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오늘 이 권면을 가슴에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우리의 믿음을 확신하며 이 소망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람에게 오늘 본문은 놀라운 약속을 하고 있는데, 6절에 보면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변하지 않고 받은 처음 그 신앙 예수님에 대한 마음을 꼭 잡고 있으면 우리가 그의 집이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그의 집이라 이게 무슨 말씀이에요? 우리가 하나님이 들어와서 거하시는 집이 된다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하나가 되는 거예요. 우리 존재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된다. 종교개혁자 장칼뱅은 이것을 이렇게 풀었습니다. 우리가 담대하게 구원의 소망을 확신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신앙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마침내 구원을 온전히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최고의 구원은 뭐냐? 죄에서 건짐을 받은 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된 거 다 구원이고 축복입니다.
근데 최고의 구원은 그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성전 삼으시고 내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는 이 상태를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 최고의 구원이고 축복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에 들어갈 때까지 우리는 변질되지 말고 세상 사람들이 다 요즘 시대 정신이야. 무슨 무슨 예수를 그렇게 복잡하게 믿어 그렇게 광신저처럼 믿어 그렇게 모든 사람이 말할지라도 흔들리지 마세요. 변질되지 않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며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달려가야 돼. 끝까지 견디는 자에게 우리 주님께서 예비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씌워주실 줄로 믿습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