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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세상을 환영(幻影)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삶 속에서 보는 것은 삶의 진실이 아니다. 완전히 각성하고 있을 때만이 진실을 볼 수 있다. 진실은 무의식 정도에 비례해서 그 만큼 거짓으로 오염된다. 사물은 잠들어 있는 만큼 왜곡되고 비뚤어져 보인다. 우리에게 보이는 사물은 실체가 아니다. 그래서 잠들어 있는 사람에게 모든 것은 거짓이고, 그것은 환영이라고 지적해 주면, 그는 믿으려 하지 않는다.
- 오쇼 라즈니쉬《궁극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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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새들과 산이 있는 이 세상은 허구(虛構)가 아니다. 그러나 그대의 마음이 만들어낸 세상은 허구이다. 붓다와 같은 사람들이 세상의 허구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때, 그들의 말을 오해하지 말라. 그들의 말은 이 나무, 이 사람들이 허구라는 뜻이 아니다. 그대가 실재의 세계에 갖다 붙이는 모든 생각이 허구라는 말이다. 일단 마음이 떨어져 나가면 모든 것이 실재이다. 그때에 그대는 진여(眞如) 안에 산다.
- 오쇼 라즈니쉬《금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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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의 세계는 절망적이지 않다. 실재의 세계는 언제나 만족스러운 상태이다. 그런데 우리가 실재하는 세계에 환상(마음)을 덮어씌우기 때문에 절망이 따르는 것이다. 붓다는 그것을 마술 공연과 같다고 말한다. 조심하라. 그대의 마음은 마술사이다.
- 오쇼 라즈니쉬《금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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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정당의 일원이 되고, 종교의 신자가 되고, 로터리 클럽이나 라이온스 클럽의 회원이 된다. 그들은 계속해서 내 자신이 누구라는 어떤 생각을 만들어 갖다 붙인다. 그것들은 단지, 그대를 정신적인 미치광이 상태로 유지시켜 주기위한 것에 불과하다. 사람은 완전히 벌거벗은 자신과 대면해야 한다. 그대 자신을 덮고 있는 모든 사회적인 옷을 벗어버려야 한다. 망상(妄想)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본성에서 나온 것이 아닌 삶을 살고 있다. 그것은 주인공의 삶이 아니라 배우의 삶에 가깝다. 그대자신을 한번 지켜보라. 그러면 그대는, 사람들은 망상에 빠져있다는, 중요한 말에 담긴 깊은 통찰력을 알 것이다. 바로 그것 때문에, 사람들의 행위가 항상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사람들의 삶이, 불행과 고통과 번뇌와 고민으로 가득 차게 되는 이유이다.
- 오쇼 라즈니쉬《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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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대부분은 카르마와 부정적인 감정 때문에, 우리 자신과 실재의 고유한 본성을 바라볼 능력을 잃어버리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행복과 고통이 실재(實在)하는 것으로 여기고 꽉 붙들어, 미숙하고 무지한 행위를 일삼아 다음 생의 씨앗을 계속 뿌린다. 우리는 이런 행위를 통해 세상의 한없는 순환(循環)에, 삶과 죽음의 끝없는 반복에 얽매이게 된다.
-《티벳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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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본성은 움직임에 있다. 완전한 휴식은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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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질(本質)은 우주의 본질과 하나이며, 따라서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자신의 본성을 배울 수 있다. 현대 서구 사회의 기술과 물질에 기초한 생활은, 인간이 시도한 것 중에서 가장 자연스럽지 못한 생활방식이다. 문명인들의 삶은 자연이 아닌 것에 너무 길들여져 있다. 나무와 새로부터, 곤충과 동물로부터, 변화하는 날씨로부터 아득히 멀어져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의 참된 본성으로부터도 멀어져 있다. 그 결과, 자연스러운 것들과 마주치면 낯설어 하고 어색해한다.
-《구르는 천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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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 만물의 이치는 다 정(靜)에서 나와 정(靜)으로 돌아간다. 인심의 이치도 정에서 나와 정으로 돌아간다. 무엇이나 제멋대로 하는 사람이라도, 새벽녘에는 양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조용한 정에 기초를 두기 때문이다. 과실을 저지르면 누구라도 후회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신음어(呻吟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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存心而自持.
본심을 잃지 않고 스스로를 지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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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莫鑑於流水 而鑑於止水. 唯止能止衆止.
사람은 흘러가는 물에는 비춰 볼 수가 없고, 고요한 물에나 비춰 보아야한다. 오직 고요한 것만이 고요하기를 바라는 모든 것을 고요하게 할 수 있다.
-《장자(莊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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靜中靜 非眞靜, 動處靜得來 纔(재)是性天之眞境. 樂處樂 非眞樂, 苦中樂得來 纔見心体之眞機.
고요한 속에서 고요함은 참다운 고요함이 아니니, 소란스러운 곳에서 고요함을 얻을 수 있어야만, 비로소 본성의 참경지에 이른 것이다. 즐거움 속에서 즐거움을 얻는 것은 참다운 즐거움이 아니니, 괴로움 속에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어야만, 비로소 마음의 참 기틀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채근담(菜根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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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기억 속에 저장된 장미꽃은 실재가 아니다. 그대가 꿈꾸는 장미꽃 또한 실재가 아니다. 오로지 지금 이 순간 그대 앞에 있는 장미만이 실체이다. 이것을 명심하라. 바로 지금 여기!
- 오쇼 라즈니쉬《십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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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는 바다로부터 생겨나 자신이 독립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파도는 이름과 모양, 움직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다는 이것에 개의치 않으며 모든 파도들이 뛰놀다가 가라앉아서 다시 바다가 된다는 것을 안다. 일어나지도 않고 가라앉지도 않는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물이다. 물은 바다나 파도들의 다양한 모양들을 취할 수 있지만, 물은 항상 물이다. 물은 모든 것이 일어나고 가라앉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며, 심지어 바다조차도 지켜보고 있다.
- 슈리푼자《그저 고요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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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실재(實在)입니까?
항상 존재하는 것이 실재이다. 형태도 없고 이름도 없지만, 모든 형태와 이름의 토대가 되는 것이 실재이다. 그것은 제한되어있는 것들의 뿌리이지만, 스스로는 제한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의 배후에 스스로 있다. 실재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 자체다. 그것은 언어를 초월해 있다. ‘존재’니 ‘비존재’니 하는 등의 표현조차도 실재를 설명하는 말로는 적합하지 않다. 실재란 주객이 분리된 상태로 대상을 인식하는 행위와 무지가 소멸된 뒤에 남아있는 순수의식이며, 그것이 참자아(아트만)이다.
-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있는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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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흐만을 ‘시트 치트 아난다(실재- 의식- 지복)’라고 하는데,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유일한 실재(사트)를 브라흐만 이라고 한다. 의식(치트)은 유일한 실재인 브라흐만의 빛이며, 지복(아난다)은 브라흐만의 본질이다. 의식과 지복은 실재의 다른 형태이며, 이 셋을 합쳐 ‘사트치트아난다’라고 한다.
-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있는 그대로》-
상카라차리아가 쓴 ❮베탄타❯를 보면 초보자들을 위해서는 세계가 창조되었다는 원리를 설명하고 있지만, 성숙한 사람을 위해서는 창조는 없다는 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선생님의 견해는 어떠하신지요?
상카라의 스승의 스승인 고다파다의 주석서 2장에 이런 말이 나온다, “창조도 없고 소멸도 없다. 구속되어 있는 사람도 없고 구속에서 벗어나고자 수행하는 사람도 없다.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도 없으며, 자유로워진 사람도 없다. 이것은 절대 진리다.” 참 자아 안에 뿌리내린 사람은 실재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고다파다가 말하는 것이 사실임을 안다.
-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있는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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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저희가 보고 있는 이 세상의 원인이 참자아인가요?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난 이 현상계는 참 자아 자체의 나타남이지만, 참자아가 원인이 되어 이 현상계가 창조되고 유지되고 파괴되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이 참자아의 나타남이라는 진리를 모르는 무지는 왜 생기는 것이냐고 묻지 마라. 그 대신 ‘이 무지가 누구에게서 일어나고 있는가?’를 탐구하라. 그러면 참 자아에는 이런 무지가 생긴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있는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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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서는 아드바이타 베탄타의 무인론을 지지 하시는 군요.
나는 무인론만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여러 가지 견해를 다 인정한다. 똑같은 진리라도 듣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현 할 수 있다. 무인론은 이렇게 말한다. ‘존재하는 것은 유일한 실재뿐이다.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으며, 신의 계획도 없고 그 계획에 따라 나타난 세계도 없다. 구속도 없고, 구도자도 없고, 자유도 없다. 오직 하나의 실재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이 확실한 세계를 어떻게 무시할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반문하는 사람들에게는 꿈속에서 보는 현상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면서 ‘그대들이 보고 있는 것은 모두 보는 자와 관련되어있다. 보는 자가 없으면 보이는 것도 없다.’고 말해준다. 이것을 동시론 이라고 하는데, 마음이 먼저 생기고 그 다음에 마음자체가 스스로 만들어낸 현상을 본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이것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이렇게 따지고 든다. ‘꿈에 보이는 세계는 꿈 꿀 때만 존재하지만, 이 세상은 늘 존재합니다. 또 꿈에 보이는 세계는 꿈을 꾸는 사람에게만 보이지만 이 현상계는 다른 사람에게도 보입니다. 이런 현상계를 어떻게 실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나는 점진론적인 설명을 해 준다. 이를 테면 ‘신이 맨 처음에 이러이러한 것을 만들었다. 거기에서 이러이러한 것이 창조되어 나왔고, 이런 원인과 결과의 사슬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러면 그들은 만족스러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만족하지 않고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하늘과 땅과 별과 나무들이 어떻게 모두 실재가 아닐 수 있는가? 이것들을 지배하는 법칙과 이에 대한 지식이 어찌 몽땅 거짓일 수 있는가?’ 이런 사람들에게는 ‘맞다, 신이 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 그래서 지금 그대가 그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해주는 것이 최선이다.
-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있는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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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 가지가 다 진리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가운데 어느 것 하나만이 진리가 아닐까요?
듣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서로 다르게 설명하는 것이지만, 진리는 오직 하나이다. ❮베탄타❯에서는 우주가 보는 자와 동시에 나타나며, 창조 과정 같은 것은 없다고 가르친다. 이것을 즉각적인 창조라고 하는데, 이는 마치 꿈을 꿀 때 어떤 원인도 없이 즉각적으로 현상이 나타났다가 꿈에서 깸과 동시에 현상도 사라지는 것과 같다. 그런데 객관적인 지식에 너무 깊이 뿌리를 내린 나머지 이런 설명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현상계가 어떻게 순간적으로 창조될 수 있는가 의아해 하며, 현상이 나타나려면 어떤 힘이 원인으로 작용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입장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보고 있는 이 세상이 존재하게 된 원인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이다. 여러 경전에서 이 세상이 점진적으로 창조되었다는 점진적 창조론을 다루고 있는 이유가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이다. 하지만 진정한 구도자라면 즉각적인 창조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있는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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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흐만은 실재이다. 세상은 환영이다.’라는 말은 스리 상카라차리아의 유명한 말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실재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 맞는 말입니까?
둘 다 맞다. 서로 다른 관점에서 다른 상태에 대해 말한 것이다.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은 먼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차원에서 출발하여, 이 세상은 늘 변하기 때문에 고정 불변의 실재가 아니라는 단계를 거쳐, 마지막에는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되는 참 자아에 도달한다. 거기에 이르면 실재가 아니라고 부정했던 세상도 유일한 실재인 참 자아에 통합된다. 모든 것이 하나의 실재로 융합되면 세상도 실재가 된다.
-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있는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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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서는 가끔 실재와 환영이 같은 것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사람들은 상카라의 견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비판했다. 상카라는 이렇게 말했다.
1. 브라흐만은 실재이다.
2. 우주는 실재가 아니다.
3. 우주는 브라흐만이다.
그는 우주가 실재가 아니라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왜냐하면 세 번째가 앞의 두 가지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상카라의 말은 우주가 참 자아로 인식되면 실재이지만, 참 자아와 분리된 객체로서 인식되면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환영과 실재는 하나이며 똑같은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 스리 라마나 마하리쉬《있는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