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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의 능원묘 원문보기 글쓴이: 광나루
한무제 무릉 배장묘(곽거병 묘/위청 묘/김일제 묘)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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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릉박물관 입장권에 보이는 3개의 봉우리 중에서 좌측이 위청 묘, 중앙이 곽거병 묘, 우측이 김일제 묘입니다. |
허우범의 실크로드 7000㎞ 대장정 ③ 조선일보 2013.11.17 한무제의 인기를 능가한 청년 장수 곽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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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거병 묘역을 중앙에 두고 담장을 둘렀으며, 내부 전각 및 외부에 유물을 전시하고 무릉박물관이라고 합니다. 매표 후 입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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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릉박물관 초입 주변 모습 |
한나라와 흉노의 숙명 같은 전쟁
무릉에서 동쪽으로 약 1㎞ 떨어진 곳에 위청과 곽거병의 묘가 있다. 무제가 신임한 최고의 장수인 두 사람의 묘는 무릉의 배장묘(陪葬墓) 역할을 하고 있는데, 곽거병묘가 오히려 무릉보다 정비와 보존이 잘되어 있다. ‘현대의 루쉰’으로 불리는 중국의 문화사학자 여추우(余秋雨)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중국인들은 황제보다 황제의 명을 받아 흉노를 물리친 장군을 더욱 흠모하는 것 같다.
한나라의 흉노와의 전쟁은 고조 유방 때부터 치욕으로 일관됐다. 이때 흉노의 군주는 최전성기를 이끈 묵돌선우(冒頓單于)다. 그의 유인책에 걸린 고조의 군대는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대동(大同) 부근의 평성(平城)에서 포위된다. 이 포위는 눈 내리는 한 겨울 일주일간이나 지속되었는데, 고조는 선우의 부인에게 갖은 보화를 뇌물로 바치고 포위가 느슨한 틈을 타서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다. 이를 일러 ‘평성의 치욕’이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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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릉박물관 안내도 |
묵돌선우가 여태후에게 보낸 희롱 편지
고조 유방이 죽고 여태후(呂太后)가 정사를 돌보자 묵돌선우는 치욕스러운 편지를 보낸다. “한족의 황후여, 내가 사는 곳은 매우 쓸쓸하고 외로운 곳입니다. 해서 내 한 번 그대 나라로 놀러가고 싶습니다. 전하는 얘기로는 그대도 과부이시니 아주 외롭다지요? 둘 다 불쌍한 처지인데 서로 가진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좋지 않겠습니까?”
“저는 기력이 쇠하여 이도, 머리카락도 모두 빠지고 걸음걷기도 힘든 늙은이일 뿐입니다. 선우께서는 어디서 그런 소문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으나 신분을 낮추시면서까지 저를 찾아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의 나라는 아무 잘못도 없으니 선우께서 관용을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어가 두 대와 준마 두 필을 바치오니 평소 필요하실 때 사용하시기 바라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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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구에서 한참을 걸어 들어가면 철문이 나오고 정면에 무릉박물관 입구 건물이 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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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릉박물관 입구 직전 좌우측 건물 모습. 입장권 사진을 보면 우측 건물 앞에서 분수가 뿜어져 보이는데 당시는 잠잠... |
흉노에 대한 회유책은 제4대 황제인 경제(敬帝) 때까지 계속된다. 명주옷, 비단외투, 허리금속장식, 갖가지 옷감 및 곡물 등을 매년 흉노에게 바쳤다. 황족의 딸도 흉노에게 시집보냈다. 한나라로서는 굴욕적인 평화를 유지한 것이다. 무제는 오랫동안 계속된 이러한 굴욕을 설욕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라고 생각했다.
무제가 재위에 오른 지 7년(B.C135년). 두태후가 사망하자, 스물두 살 젊은 황제의 친정(親政)이 시작된다. 중앙집권을 강화한 무제는 그로 인해 든든한 경제력을 구축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준비한 흉노와의 전쟁을 시작한다. 하지만 첫 번째 흉노공략은 실패한다. 지금의 산서성 대동 부근의 마읍(馬邑)으로 흉노를 유인하여 공격할 참이었는데, 이를 간파한 흉노가 군대를 철수시켰기 때문이다. ‘평성의 치욕’을 씻기 위한 공략이 ‘마읍의 수치’를 보탠 꼴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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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릉박물관 입구를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연못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뒤에 위치한 봉우리가 곽거병 묘입니다. |
흉노설욕의 명장 곽거병
본격적인 흉노설욕전은 그로부터 5년 후인 원광 6년(B.C.129)에 이뤄진다. 이 전투에서 일등공신은 위황후의 동생 위청이다. 그는 한나라가 건국한 이래로 만리장성을 넘어 북방으로 진격하여 승전보를 올린 최초의 주인공이다. 위청은 10여 년간(B.C129-119) 모두 7번을 출병하여 흉노를 무찔렀는데 5만여 명을 참수하거나 포로로 잡았다고 한다. 무제는 위청의 혁혁한 전과를 치하하여 그때마다 식읍을 내렸고, 세 명의 어린 자식을 제후에 봉했다. 위청의 무용이 식어갈 무렵, 곽거병이라는 또 한 명의 용장(勇壯)이 나타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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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못은 둥글게 만들었으며, 좌우측에 전각이 있는데 내부에는 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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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못 우측 전시실만 들어가 봅니다. |
곽거병은 위황후의 조카였으니 위청은 숙부가 된다. 위청의 성격이 진실되고 중후했다면 곽거병은 과묵하면서 재기가 넘치고 민첩했다. 곽거병은 숙부인 대장군 위청을 따라 두 차례 종군했는데, 위험한 적진을 마다않고 뛰어들어 공을 세웠다. 그의 용맹은 천하를 진동시켜 나이 18세에 벌써 제후로 봉해질 정도였다.
“용감한 것도 좋지만 병법도 공부를 해보는 게 좋지 않겠는가?” “어떤 전략을 쓸 것인가는 상황에 따라 변하기 마련입니다. 새삼스레 낡은 병법을 배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대를 위하여 저택을 마련했노라.” “흉노가 아직 멸망하지 않았는데 집을 꾸미고 살 필요가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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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릉박물관 전시실 내부 전경 |
곽거병을 너무도 사랑한 무제
무제는 곽거병을 아주 사랑했다. 글도 모르고 우직하기만한 위청보다 재기발랄한 곽거병이 무제의 마음에 들었다. 무제의 특기인 인재발탁은 또다시 성공을 거둔다. 표기장군(票騎將軍)에 오른 스무 살의 곽거병은 기병 1만 명을 이끌고 흉노의 거점인 기련산(祁連山)까지 진격하여 흉노군을 격파하자 패전의 문책이 두려웠던 혼야왕(渾邪王)은 수 만여 명의 군사와 함께 투항한다. 36세의 황제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곽거병에게 대장군 위청과 동등하게 대사마(大司馬)에 임명한다. 대장군 위청의 시대가 가고 표기장군 곽거병의 시대가 온 것이다.
곽거병의 흉노정벌로 감숙성의 하서지역은 한나라 영토로 편입되고 흉노는 막북(漠北), 즉 고비사막 이북으로 달아나 더 이상 한나라를 넘보지 못했다. 흉노는 천지가 뒤집히고 억장이 끊어질 일이지만 어쩌겠는가. 이 또한 한나라가 언제까지나 발아래 있을 것이라는 오만과 나태에서 비롯된 것임을. 중요한 요충지이자 삶의 터전을 빼앗긴 흉노는 노래로서 슬픈 마음을 표현할 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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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실 입구에서 글과 그림을 현장에서 직접 그려서 판매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내부 전시실을 둘러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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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릉박물관 전시 유물 모습 |
우리 이제 기련산을 빼앗겨 가축들을 먹일 곳이 없네.
흉노정벌이 완성되어 서역으로 통하는 교통로인 감숙성을 얻게 되자, 최고 공로자인 곽거병이 24살로 요절한다. 곽거병의 죽음은 서역정벌을 구상한 무제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무제는 엄숙하고 성대하게 장사를 지내도록 명했다. 철갑군을 동원하여 장안에서 자신의 능으로 조성하던 무릉(武陵)까지 행렬하도록 했다. 이처럼 곽거병에 대한 무제의 사랑은 죽어서도 같이 있고 싶었을 정도였다. 무제는 곽거병에게 경환후(景桓侯)라는 시호를 내렸는데 ‘무용을 드높여 영토를 확장했다’는 뜻이다. 분묘도 그가 흉노와의 전장에서 승리를 거둔 기련산의 모양을 본뜨게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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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못을 지나면 정면에 곽거병 묘 안내 비석이 있으며, 뒷편으로 곽거병 묘역 정상에 정자가 보입니다. |
곽거병묘 정상에 올라야 위청의 묘가 보이고
무릉박물관 입구에 들어서자 정면에 기련산 모양을 한 곽거병 묘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통로 좌우에는 이곳에서 발굴된 4100여 점의 유물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이 있다. 곽거병 묘 앞에는 거대한 동물 석상들이 많은데 이중 특히 눈에 띄는 것이 흉노를 밟고 있는 말을 조각한 ‘마답흉노(馬踏匈奴)’상이다. 흉노를 물리치는데 혁혁한 전과를 세운 공적을 알리려는 뜻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진시황 이후 한고조 유방의 치욕을 설욕하고자했던 무제가 흉노에 대한 원한을 두고두고 갚아주려고 표현한 것이기도 하리라.
무제의 이러한 행동의 이면에는 ‘땅에는 사방의 경계가 없고, 백성에게는 다른 나라가 없다’는 중국적 논리가 숨어 있다. 즉, 중원 땅은 물론 오랑캐의 영토까지도 황제의 지배하에 두려는 야심의 반영이기도 하다. 총명한 무제가 유교를 국교로 정한 까닭도 군신관계에 있어서 군주의 절대적인 권한과 신하의 지극한 충성만이 용납되는 통치방식이 유교의 기본정신임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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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4년 장개석 부인 송미령이 무릉을 다녀 갔다고... |
▲ 우리나라로 보면 문화재 입구에 사적 몇호 같은 표석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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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거병 묘역 봉우리 하단에 곽거병 묘비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
위청의 묘는 곽거병의 묘 왼쪽에 있는데 입구에서는 보이지 않고 곽거병의 묘 정상에 올라야만 보인다. 이곳을 찾아오는 관람객들에게 곽거병을 더 사랑한 무제의 마음을 알려주려고 관람객의 동선(動線)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걸까? 하지만 위청의 묘는 곽거병의 묘 정상에서도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 곽거병의 묘가 있는 무릉박물관을 나와 옆길로 들어서야만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대장군 위청은 항상 진중한 자세로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였다. 곽거병이 쉽게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숙부인 위청의 용맹이 흉노에게 너무나 강하게 각인되어 있어서 함부로 하지 못한 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의 묘가 조카의 묘에 비해 초라해 보인다. 하지만 무덤의 크고 작음이 무슨 대단한 일이던가. 후세의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고 기억되는 것이면 그것으로 족한 일이 아니겠는가. 대장군 위청의 진중하고 과묵한 얼굴이 햇살에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 한 가닥이 청량한 바람을 타고 곽거병묘 너머로 흘러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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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거병 묘비 전경 |
허우범의 실크로드 7000㎞ 대장정 ③ 조선일보 2014.02.21 신라 김씨 조상은 흉노 휴도왕 태자 김일제였다한 무제의 철썩 같은 ‘김일제’ 신임
기원전 121년 여름. 곽거병 장군이 이끄는 한나라 군대는 기련산 일대를 공략하여 혼야왕과 휴도왕에게 엄청난 타격을 입힌다. 3만2000명을 사살하고 흉노 왕족을 포함한 2500여 명을 포로로 잡은 것이다. 흉노의 선우가 책임을 묻자 혼야왕과 휴도왕은 한나라에 투항하기로 한다. 하지만 투항하기 전에 휴도왕이 이에 동조하지 않자, 혼야왕이 휴도왕의 진영을 급습하여 휴도왕을 살해하고 4만여명의 흉노족을 이끌고 곽거병에게 투항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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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거병 묘비 직전 좌우로 전각이 있는데 중앙에는 동물 석상을 전시해 놓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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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 전각에는 말이 흉노족을 누르고 있는 석상이 있는데 ‘마답흉노(馬踏匈奴)’상이라고 하네요... 국보 지정. |
이때 휴도왕의 태자인 일제(日磾)와 동생 윤(倫)이 어머니와 함께 한나라로 끌려간다. 포로가 된 두 왕자는 궁정의 말을 돌보는 일을 맡았는데, 어느 날 무제가 연회를 베풀며 궁정의 말들을 사열하는 과정에서 일제를 발탁한다. 그리고 그가 흉노 출신으로 제천금인(祭天金人⋅금가면을 쓰고 하늘에 제사지내는 사람)을 하였기에 김씨 성을 하사한다. 이때부터 휴도왕의 아들 일제는 김일제(金日磾)로 불리게 된다.
김일제에 대한 무제의 신임은 두터웠다. 그리하여 부마도위(駙馬都尉),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제수하고, 자신의 경호까지 맡겼다. 많은 신하들이 오랑캐 출신을 신임하는 것에 대하여 불만을 터뜨렸으나 무제는 괘념치 않았다. 그러던 중, 시중인 망하라(莽何羅)가 무제의 침실에 침입하여 무제를 살해하려는 것을 김일제가 격투 끝에 체포한다. 이 일로 무제의 신임은 더욱 커졌고 신하들도 그를 폄하하지 못하였다. 무제는 김일제를 자신의 딸과 혼인까지 시키려고 했으나 김일제는 겸손히 사양한다. 임종을 앞둔 무제는 곽거병의 동생 곽광과 김일제를 부른다. “내가 죽거든 막내아들을 세우고 그대는 주공(周公)의 일을 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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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측 전각에는 말이 그냥 앉아 있는 것인지 무언가를 깔아 뭉개고 있는 것인지 애매모호하게 보입니다. 국보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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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단을 통해서 곽거병 묘역 정상에 위치한 정자까지 올라가 봅니다. 관람객을 위해서 묘역 위에 정자를 지었다는 것은 좀... |
김일제, 무릉의 배장묘에 안치된 유일한 외국인
무제는 곽광을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 김일제를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임명하고, 어린 황제(소제)를 보필하라는 유조(遺詔)를 남긴다. 아울러 김일제를 제후국의 왕인 투후(秺侯)에 봉한다. 투후가 다스린 지역은 지금의 산동, 섬서, 화북성 일대로 매우 넓다. 무제로부터 대단한 신임을 얻은 김일제이기에 그가 죽은 후에도 위청과 곽거병처럼 무제의 묘인 무릉(茂陵)에 배장(陪葬)되었다.
그러나 무릉의 배장묘인 김일제묘는 그야말로 초라하다.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화려한 곽거병묘, 그 옆에 우뚝한 위청묘와는 완전 딴판이다. 묘는 가꾸지 않아서 풀만 울창하다. 묘비석이 없으면 이곳이 김일제의 묘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다. 묘비석 앞으로는 자그마한 밭이 있으니 누군가 관리부실을 틈타서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이리라. 다 같은 무릉의 배장묘인데 왜 김일제묘만 천대를 받는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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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여튼 묘역 정상의 정자에 오르니 입구까지 잘 내려다 보입니다만... |
그것은 중국인의 입장에서 볼 때면 흉노출신의 외국인일 뿐, 아무런 의미 없는 묘이기 때문이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묘 앞에서 상념에 빠진다. 새 한 마리가 묘비석 위에 앉는다. 역사란 현재 살고 있는 자들과 관련되지 않으면 언제나 쓸쓸한 폐허뿐인 것임을 알려주고 날아간다.
김일제 후손들은 대대로 투후를 계승한다. 그러던 중, 서한 말 왕망(王莽)이 신(新)을 건설하면서 전성기를 맞는다. 왕망은 서한의 마지막 황제인 원제의 황후인 왕황후 동생의 아들로 김일제의 증손자인 당(當)의 이모부였다. 그러므로 왕망이 신을 건국할 때 투후인 김씨 일가가 많은 공헌을 한다. 신은 건국하자마자 많은 개혁을 단행한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조치로 호족들의 반발에 부딪혀 개국한 지 15년 만에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에게 패망하고 유수는 한나라를 부활시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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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자에서 좌측 멀리 동산이 보이는데 한무제의 무릉입니다. |
▲ 바로 좌측에 위치한 동산은 위청 묘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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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측으로 내려다 보면 작은 숲이 보이는데 이 곳이 김일제 묘입니다. |
김일제 후손들의 한반도 이동
왕망이 패배하자 김일제의 후손들은 엄청난 회오리에 말려든다. 대대로 세습되던 투후가 끊어짐은 물론 가문의 멸문지화를 면하기 위해서도 멀리 피신해야만 했다. 대부분은 그들의 옛 터전으로 도주하여 성을 왕(王)씨로 바꾸어 살았다. 그런데 한 갈래는 한반도로 들어와 신라와 가야국을 건설하였다고 한다. 김일제의 5대손인 성한왕(星漢王)이 신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되고, 김일제의 동생 윤의 5대손인 탕(湯)이 가야김씨의 시조인 김수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김일제에서 비롯된 신라김씨의 내력은 ‘문무대왕릉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신라 30대 문무왕(文武王․661∼681)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왕이다. 강대국 신라를 완성한 문무왕은 자신의 위대한 치적과 함께 신라에 대한 찬미, 신라김씨의 내력, 부친인 태종무열왕의 치적 등을 적었다. 그중 주목되는 것이 신라김씨의 내력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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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거병 묘역 하단 좌우측으로 회랑을 만들어서 석수들을 전시해 놓았으며, 국보로 지정된 유물이 여럿 있습니다. |
‘신라 선조들의 신령스러운 근원은 먼 곳으로부터 계승되어 온 화관지후(火官之后:순임금의 관직명)니, 그 바탕을 창성하게 하여 높은 짜임이 융성하였다. (뿌리와) 가지의 이어짐이 비로소 생겨 영이한 투후는 하늘에 제사지낼 아들로 태어났다. 7대를 전하니 (거기서 출자)한 바다.’ 我新羅之先君靈源自 繼昌基於火官之后, 峻構方降, 由是克(紹宗)枝載生, 英異秺侯祭天之胤, 傳七葉而(所自出)焉.
이 비문은 조선시대 정조 20년(1796년), 경주에서 밭을 갈던 농부가 발견하였다. 당시 경주부윤이던 홍양호(洪良浩)가 탁본하여 지식인들에게 공개함으로써 알려졌다. 비문 발견 당시, 글자의 반 이상이 마모되어 읽을 수 없었으나 전체적인 윤곽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비문을 눈여겨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문무왕의 후손으로 금석문의 대가인 추사 김정희도 언급하지 않았다.
정조 때 북학파(北學派) 학자로 ‘발해고’를 지어 남북국시대론을 주창한 유득공(柳得恭)이 김일제가 계림(鷄林)의 김씨인가라는 의문에 전문(全文)을 보지 못하여 증명하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그 후 이 비석은 돌멩이 신세가 되어 일제강점기 때 동네 아낙들의 빨래대로 사용되다가 일본인들에 의해 두 동강이 나는 수모를 겪었다. 현재 이 비석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글자가 새겨진 위쪽은 뭉개져버리고, 글자가 없는 아래쪽만 있다. 그나마 탁본이 남아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경주부윤 홍양호께 오직 감사드릴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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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 회랑에서 위청 묘역이 올려다 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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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과 호랑이 석상. 두 놈 다 중국 국보로 지정 |
신라김씨의 족보를 찾아서
학계의 반대 논리도 만만치 않아 김일제의 신라김씨설은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지만, 역사기행을 하는 나로서는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비문의 내용이 어느 정도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학계의 의견이 분분한 까닭은 무엇일까? 문제는 ‘7대’의 해석에 있는 것 같다. 김일제의 5대 후손인 성한왕이 신라김씨의 시조라면서 그 후 7대의 연결고리가 설명되어 있지 않으니 김일제의 신라김씨 시조설이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비문에는 문무왕 선대의 기록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깨어져나간 비문에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을 터이지만, 지금으로서는 남아 있는 단어를 가지고 추론할 수밖에 없다. 그중 첫 번째가 ‘화관지후(火官之后)’다. 그리고 진백(秦伯), 파 경진씨(派鯨津氏), 투후(秺侯), 가 주몽(駕朱蒙), 성한왕(星漢王) 등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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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꺼비와 석어. 두꺼비만 국보로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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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어와 인여웅(人与熊). 사람과 곰이 어우러진 모습? 이것도 국보네요... |
화관지후는 기원전 2300년의 순임금을 의미한다. 마지막은 문무왕 자신의 대(代)인 680년이다. 이렇게 볼 때, ‘7대’는 김일제로부터의 7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7대의 해석은 자연스러워진다. 화관지후로부터 문무왕까지 약 3,000년 동안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었던 시기를 일컫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금문학의 권위자인 재야사학자 소남자 김재섭(金載燮)은 ‘금문속의 고조선’에서 다음과 같이 구분하였다.
1) 화관지후(火官之后) : 기원전 2300년 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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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쪽 회랑에 전시된 석수 모습 |
소남자에 따르면 ‘진백’은 진시황제의 20대 선조이자 시황제가 천하통일의 대업을 달성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닦은 진나라 목공(穆公)이다. 춘추시대 진(秦)나라의 9대 군주인 목공은 춘추 5패(五覇)의 한 사람이다. 동으로는 하서(河西)에서 서쪽으로는 서융(西戎)을 공략하여 사방 1,000리의 땅을 제패하여 진나라의 기반을 닦은 인물이다.
'파 경진씨’는 진나라가 망하자 그 일족이 한반도의 경주나 밀양으로 파견한 휴도왕의 세력으로 해석하고 있다. ‘투후’는 이미 살펴본 김일제다. ‘가 주몽’은 휴도왕의 망명세력 중 일부가 고구려를 통해 신라로 들어가 미리 자리를 잡는 과정이라 해석하고 있다. ‘성한왕’은 김일제의 5대손으로 신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이다.
참으로 기막힌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민족의 기원이 드넓은 대륙을 차지한 기마민족이었음을 확신하는 필자에게는 논리적으로도 어느 정도 타당성이 보인다. 특히 장례형식인 적석목곽분, 황금과 말을 숭배하는 금관과 천마도 등은 모두 기마 유목민족들의 고고학적 특징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지역에서 많이 출토된 오수전(五銖錢)은 왕망의 신나라 때 만들어진 화폐인데, 이로 미루어 보아도 김씨 일가들이 도피할 때 가져온 것임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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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소와 꼬끼리. 하단 사진까지 4점 모두 국보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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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저(野猪)라고 하는데 멧돼지 같지 않네요... |
▲ 괴수취양(怪兽吃羊). 괴수가 양을 먹고 있는 모습? |
중국의 金文, 동이족의 비밀을 푸는 열쇠
소남자의 이러한 해석은 중국의 금문학자 낙빈기(駱賓基)의 ‘금문신고(金文新攷)’를 기초로 한 것이다. 낙빈기는 평생의 연구결과로 이 책을 썼는데,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의 저서로 인해 한국의 상고사가 보다 명쾌하게 해석되고 있다. 중국이 그토록 자랑하는 황제도 동이족의 시조인 신농씨의 사위였다는 부분에 이르면, 중국인은 물론 우리도 깜짝 놀라게 된다.
중국인은 자신들의 시조를 욕되게 했다는 점에서 그럴 터이지만 우리는 어째서 놀랄까? 우리가 어릴 때부터 배워온 역사와 상반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중국과 일제에 의해 철저하게 왜곡된 우리의 상고사를 그대로 전수하고 전수받는 사이에 사상과 논지가 고착된 결과이다. 우리 상고사에 대한 의문을 품고 이를 파헤쳐 보려는 노력 없이 오히려 이에 안주하여 온 것이니 어찌 우리의 역사가 바로설 수 있으며, 역사관 또한 올곧을 수 있겠는가.
무위시는 휴도왕의 본거지답게 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시 중심인 남성문(南城門) 광장에는 무위시의 역사와 출신인물들을 소개해 놓았는데 이곳에 김일제의 내력이 적혀 있다. 인민공원에는 김일제의 석상도 있다. 흉노의 태자로서 한무제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은 점을 널리 알려 이곳에 거주하는 소수민족들을 통치하는 데 활용하는 게 아닐까? 김일제의 내력과 말을 돌보는 모습의 석상을 둘러보는데, 어린 아이 두 녀석이 마치 자신들의 형 인양 석상 앞에서 장난을 친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보고 있노라니 김일제 석상도 살아서 아이들의 재롱을 한껏 받아주고 있는 것만 같다. |
무릉박물관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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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어스에서 바라 본 위청 묘, 곽거병 묘, 김일제 묘. 하단이 무릉박물관 입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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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좌측에 이부인 묘, 중앙에 한무제 무릉, 지도 우측에 무릉박물관/곽거병 묘/위청 묘/ 김일제 묘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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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섬서성 유적지 중에서 지도 중앙에 한무제 무릉이 위치. 우측의 진시황릉 등 다른 유적지들과 거리를 가늠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