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시경부터 창밖이 뿌옇다. 커튼을 열었다.
부나비군무처럼 허공을 유영하는 눈발이 통유리에 미끄러진다.
하늘을 향한 삼라만상은 일제히 하얀 면사포를 쓰고 있다. 마음이 벌써 눈밭을 설레발친다.
고양이세수를 하는 척하고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었다.
아내가 눈치 채고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린다. 소리 없이 문을 열고 주방을 향한다.
응접실엔 큰애 네가 한밤중이다.
십여 일 전부터 응접실과 작은방은 큰애 네가 차지하고 울`부부는 안방생활이다.
늦게 잠든 그들은 9시쯤에 기상하는 탓에 울`부부는 그때까지 묵언수행(?)한다.
손님이 된 자식`손자들은 상전이 된다.
바나나 두 개와 귤 세 개를 들고 와 침대모서리에 걸터앉아 도둑고양이 흉내를 낸다.
아내의 못마땅한 표정을 못 본채 외면하면서 과일을 목구멍에 넘긴다.
방한 자켓을 걸치고 나와 현관에서 우산을 챙겨 도어 밖으로 탈출했다.
엘리베이터 속에서 긴장이 풀려 심호흡을 했다. 도둑놈은 얼마나 간덩이가 클까?
부나비는 함박눈이 됐다. 아파트안길과 이면도로 눈은 치웠나 싶은데 다시 수북이 쌓였다.
다행이 강추위는 아니어서 눈길은 질퍽댔다. 장갑을 깜박한 걸 깨달은 건 지하철 속이었다.
창덕궁 돈화문 앞에 섰다. 세상은 온통 하얗다. 화이트서울이다.
창경궁은 어디 뭐랄 것 없이 은빛으로 빛난다.
신비스러울 만치 순수한 설국의 고궁 탐방객들이 은빛 속에서 보물찾기에 나선 골룸처럼 아장대고.
하얀 누리는 무겁게 침묵한다. 창경궁 성종태실 앞 목화송이 뒤집어쓴 소나무 숲에 서면
정적은 눈송이들 속삭임만을 허락한다.
고요는 정적마저 끊긴 곳에 자생한다는 사실에 경외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서울설국의 적설량은 20cm에 이르고,
이 순무한 눈 세상을 창조하느라 무려 42년이 걸렸단다.
40여년을 내공쌓아 창조한 설국서울을,
목하 신비한 화이트제국을 빚고 있는 고궁에서 소요한다는 기쁨과 행운은
내 생애에 다시 올랑가? 싶잖다. 아내에게, 큰애에게 전화를 넣었다.
설국의 창덕궁으로 후딱 달려오라고. 나만 열락(悅樂)하기엔 넘넘 아까워서였지만 시큰둥했다.
기쁨과 행복은 각자 나름의 안목과 취향이 추구하는 미로가 있을 테다.
해도 일생에 몇 번일 희열은 나 혼자 충만하긴 못내 아쉽다.
가장 소중한 사람, 곁에 가까이 있는 사람과 공유하고 싶어진다.
인생에서 이 귀중한 순간은 지금이고, 더구나 노년의 삶에선 더 절실함이다.
나에게 주어진 인생을 사랑하고 그 삶에 최선을 다하여 사랑하는 사람과 공감하는 게 행복일 것이다.
함박눈 쏟아지는 설무(雪舞)의 향연에 흠뻑 취해 재야를 맞으면서
새해에 서설(瑞雪)로 이어지길 기원해본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 같은 은빛 순수의 세상에 안주하면서
오늘도 이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께 호랑이해의 서기(瑞氣)를 배달하련다. 2023. 12. 30
출처: https://pepuppy.tistory.com/1342 [깡 쌤의 내려놓고 가는 길: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