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63
6월21일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연중 제12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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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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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6YwyGUsxyew (장긍선 예로니모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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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보다 인간다운 삶, 보다 차원 높은 삶, 영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누가 따로 부탁한 것도 아닌데 저희 수도원 출입구 앞마당에서 철통같은 경계를 서는 기특한 두 마리의 강아지가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락날락하며, 자연스럽게 녀석들의 행동거지를 살펴보게 됩니다.
어제는 작은 친구 겨울 침구를 걷어내고 시원한 여름 담요를 깔아줬더니 고맙다고 꼬리를 칩니다. 강아지들과 지내면서 그들이 선호하는 게 무엇인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그들이 젤 좋아하는 건 자신들의 넘버원, 넘버투, 넘버쓰리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같이 산책을 한다든지, 놀이를 한다든지, 옆에 앉아 쓰다듬어 줄 때 표정이 제일 행복해 보입니다. 가끔 특별보너스로 해변에라도 내려갈 양이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에 못지않게 좋아하는 것이 특식, 간식, 그리고 주식인 사료 등 먹는 것입니다. 요즘같이 더운 날엔 시원한 그늘 아래, 세상 편안하게 널브러져 낮잠 자는 것도 좋아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런데 한번은 십만원 짜리 수표가 생겨, 녀석들 눈앞에 펼쳐 보이며 제가 그랬습니다. “애들아, 너희들 이게 뭔지 아니? 이거 어마어마한 거다. 십만 원짜리 수표야! 너희들 매일 먹는 사료 두 달 치나 살 수 있는 거금이라구!”
그러나 녀석들의 반응은 시큰둥했습니다. 녀석들은 수표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폐지나 수표나 그게 그것인 것입니다.
이런 맥락을 잘 파악하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오늘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이 참으로 크게 다가옵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오 복음 7장 6절)
주변을 살펴보면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대상의 가치와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그 놀라운 가치, 하느님이 얼마나 위대하시고,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모릅니다
신앙이 우리에게 건네는 역동적인 힘과 에너지를 전혀 모르기에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영약인 성체성사의 의미를 모르니, 앉아있으면 짜증만 납니다.
사랑의 심오한 의미와 가치, 영혼이나 영원한 생명의 소중함, 진리나 성경의 위력을 조금도 파악하지 못하니, 그저 강아지처럼 돼지처럼 그렇게 살아갑니다.
이 얼마나 슬프고 안타까운 일입니까? 하느님의 모상이요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인 인간이 진정한 인간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짐승처럼 살아간다는 것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든 보다 소중하고 가치있는 대상들의 중요성을 인식해야겠습니다. 그래서 보다 인간다운 삶, 보다 차원 높은 삶, 영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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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 be/RIkpAbDuj_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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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풀면서도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라고 하십니다.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내가 해주라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다 아는 ‘황금률’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다 해주려다가 호구가 되는 일도 없지 않습니다. 애덤 그랜트는 사람을 ‘기버-테이커-매처’의 세 부류로 구분하였습니다. 기버는 내어주는 사람이고 테이커는 빼앗는 사람이며 매처는 받으면 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공하는 사람을 보았더니 가장 높은 위치에 기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낮은 위치에도 기버가 있었습니다.
왜 어떤 내어주는 사람은 성공하고 어떤 내어주는 사람은 호구가 되는 것일까요? ‘금쪽같은 내 새끼’에 모든 것을 내어주면서도 아이에게 폭력까지 당하는 이지현 씨가 나왔습니다. 아이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아이의 호구가 됩니다. 이것 하나만 조심하면 됩니다.
⟪개는 훌륭하다⟫ 10편에 토르라는 강아지에게 온 가족이 당하는 내용이 나왔습니다. 특별히 아버지는 개를 더 무서워하고 있었습니다. 토르라는 강아지는 아무 때는 끼어들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물어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애꿎은 것을 물기는 하지만 화를 잘 냅니다. 가족은 평화를 위해 토르가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마음씨 좋은 가족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잘해주는 것은 가족에게도 토르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토르는 가족들이 잘해주는 게 자신보다 서열이 낮아서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잘해주는 것이 오히려 토르의 교만을 부추깁니다.
강형욱 훈련사는 토르가 가족을 ‘몰이’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괜히 끼어들어서 마음에 안 들면 으르렁대고 무언가를 주어도 왜 미리 잘하지 않았느냐고 엄포를 놓습니다. 생존본능 중의 하나인 교만을 가족들이 키워준 것입니다.
이런 식의 베풂은 호구가 되기 딱 맞습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래서 먼저 이런 말도 하셨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좋은 것을 주는데, 그것들이 그 좋은 것을 받고 오히려 나를 밟고 물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주면서 호구가 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주면서도 호구가 되기 있는지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바로 내 감정을 살피면 됩니다.
토르가 아버지만을 특별히 공격하는 이유는 아버지의 ‘두려움의 냄새’를 맡기 때문입니다. 생존 욕구가 높은 개들은 두려움의 냄새에 매우 민감하다고 합니다. 자신을 두려워하는 이를 이용해야 자기가 살 수 있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가 상대가 두려워서 잘해준다면 그 잘해주는 것은 다 상대를 더 교만하게 만들고 나는 호구가 되게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몰이하며 최강자임을 자처하려는 토르를 강 훈련사는 되려 몰아붙입니다. 그 와중에 개에게 물려 피까지 흘립니다. 하지만 순종할 때까지 몰아붙입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다시는 개에게 지나친 관심을 주지 말라고 합니다. 관심을 주어야 할 대상은 절대 나를 두렵게 만드는 이어서는 안 됩니다.
왜 사람이 두려워질까요? 내 위에 올라서려는 사람만이 아니라 내가 무언가를 상대에게서 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를 내 부족한 것을 충족하는 도구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토르에게 저렇게 대하는 가족들도 분명 토르의 귀여움을 원하고 있습니다. 화내지 않을 때 가끔 부려주는 애교에 녹아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무언가 얻으려 하는 것을 아는 개는 그것을 이용해 상대를 두렵게 만들고 지배하려 합니다.
따라서 무언가를 베풀 때는 상대에게 원하는 게 없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잘해주면서도 가스라이팅 당하기에 십상입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두려워집니다.
유튜브에 보면 ‘EBS 부모’에서 방영되었던 ‘불안한 엄마, 무법자가 된 딸’ 이야기가 나옵니다. 5살 소라는 부모의 지나친 사랑에 무서운 것이 없는 아이로 자랐습니다. 아이는 생떼 부리면 다 됩니다. 엄마와 아빠는 아이의 그런 마음을 부모가 다 이해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 눈에는 아이가 절제 없이 자라는 모습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엄마는 아이가 기가 죽어있는데,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아이는 절대 기죽는 아이가 아닙니다.
엄마는 어렸을 때 자신의 엄마에게 칭찬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야단만 맞다 보니까 자기는 자녀를 키울 때 모든 것을 이해해 주고 칭찬해주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아이가 자신처럼 이해받지 못하고 존중받지 못한 아이로 자라는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미안해서, 그래서 두려워서 무언가를 해 줄 때 나도 망치고 상대도 망칩니다. 두려워서 무언가를 줄 때는 호구가 됩니다. 결국 상대에게 지배당합니다. 사랑은 상대에게서 무엇을 보상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하셨기에 당연히 하는 행동이어야 합니다. 두려워하면 아이는 그 마음을 이용하게 됩니다. 미안함도 두려움입니다.
그냥 지금 해 주어야 하는 일을 하십시오. 이것이 ‘좁은 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목자입니다. 목자의 양은 그 좁은 문 뒤에 계시는 주님의 것입니다. 양 떼를 이용해서도 안 되고 그래서 두려워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 때문에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어차피 자녀도,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도 나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 것입니다.
그러니 겁내지 마십시오. 망가져도 주님 것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냥 맡겨졌으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 미안한 것도 없고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랑, 그 좁은 문 뒤에 내가 데리고 가는 사랑해야 할 대상의 주인이 계십니다.
다만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것 하나가 있다면 내가 모든 것의 주인이신 그분 때문에 사랑하려고 하지 않은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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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6절) 여기서 거룩한 것과 진주는 소중히 여겨야 하는 모든 영적인 것들이다. 거룩한 것이나 진주는 감추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조개 안에 담겨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드러낼 때, 신중해야 한다. 사람들이 명백하게 중요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오로지 미워하고 하찮게 여기는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개로 배를 불리고 어떤 이들은 돼지로 배를 불린다. 나는 어떠한 것으로 풍요를 노력하고 있는가?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12절) 예수님께서는 이 한 마디로 우리가 해야 할 모든 것을 요약하신다. 즉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바란다면,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동료가 너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도 네 이웃에게 해주라고 하셨다. 이보다 짐스럽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보다 공평한 것이 있겠는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다. 몰랐다고 핑계 대며 피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그렇게도 평범한 것을 실천하면서 사는 모습은 아니다. 복음을 아는 우리의 모습은 여기에서 한 단계 더 올라가야 한다. 그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그 사랑의 행위를 통하여 자신이 그만큼 성숙하는 것이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13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하셨고 산상설교에서 겸손하고 온유한 이들에 대해 말씀하시지만, 이 편안한 멍에와 이 가벼운 짐을 마다하는 사람이 많아서, 생명으로 이끄는 길은 힘들고 문은 좁게 느껴지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 우리는 하느님께서 남이 우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주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그 짐은 은총이기 때문에 가볍고 기분 좋은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
그런데 어떻게 좁고 비좁은 길을 편하다고 하는 것이냐? 그것은 그것이 문이면서 길이기 때문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6)라고 하셨다. 그 길이 좁아 보이는 것은 주님의 멍에 곧 계명이 무거워서가 아니라, 기꺼이 주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이가 적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안에, 곧 성령 안에 머물 수 있을 때만이, 그 계명을 따를 때만이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으며,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다. 주님의 뜻을 오늘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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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마라. >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거룩한 것, 진주’는 하느님의 말씀, 예수님의 복음, 성사 등입니다. ‘개들, 돼지들’은 우상숭배자들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라는 말씀은, 어떤 ‘가나안 여자의 이야기’에 바로 연결됩니다.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마태 15,25-26) 예수님께서 ‘개들’을 ‘강아지들’로 바꿔서 말씀하시긴 했지만, 이 말씀은 “하느님의 은총을 우상숭배자에게 줄 수 없다.”는 거절입니다. 그 여자는 ‘이교도’, 즉 우상숭배자였고(마르 7,26), 우상숭배를 버리지 않은 상태에서 마치 우상에게 소원을 비는 것처럼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의 요청을 거절하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를 원하면, 먼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라.”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사실 우상숭배자들도 ‘구원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하고,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무턱대고 할 일은 아니고, 그들 쪽에서도 우상숭배를 버리고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기 전에 먼저, 우상숭배와 미신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라는 말씀은, ‘박해’를 뜻하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과 예수님이 모독당하는 것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도 없고, 성체성사도 안 믿는 사람에게 성체를 주지 않는 것은, ‘성체모독’을 예방하기 위해서입니다. 안 믿는 사람에게 성체를 주었다가 성체가 모독당하는 일이 생긴다면, 성체를 준 사제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체성사뿐만 아니라 모든 성사와 성경과 성물들에도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모든 신앙인의 본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너희는 개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 덕분에 거룩하게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우상숭배나 미신에 빠진다면, 그것은 십계명 제1계명을 어기는 대죄를 짓는 일이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거룩함을 개들에게 주는 일이 되고, 자기 스스로 개가 되는 일입니다. 그것은 아직 예수님을 몰라서 미신을 믿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이 말씀은,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요약한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여기서 ‘남’은 하느님과 이웃을 모두 가리킵니다. 이 말씀을 하느님과의 관계에 적용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구원해 주시기를 바란다면, 구원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여라. 또 하느님께서 사랑을 주시기를 바란다면 이웃을 사랑하여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먼저’ 주어라.”라는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 <‘받은 다음에 주겠다.’, 또는 ‘받을 가능성이 있으면 주겠다.’라는 태도를 버리고, 받기 전이라도, 또 받을 가능성이 없더라도 주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이 좋은 모범입니다. 그가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준 것은 보상받을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에 한 일도 아니고, 전에 무엇인가 받은 것이 있어서 한 일도 아닙니다.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니까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고 그냥 도와준 것입니다. >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14)
이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하느님 나라의 문은 좁은 문이다.”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고, ‘모든 사람’을 하느님 나라로 데리고 들어가려고 오신 분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의 문은 ‘모든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문, ‘모든 사람’이 들어갈 수 있도록 활짝 열려 있는 넓은 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 있는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2)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왜 ‘좁은 문’이라고 표현하셨을까? ‘인간의 눈’으로 볼 때 그렇게 보인다는 뜻에서 좁은 문이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어떤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와서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때(마태 8,19)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8,20) 그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따랐는지, 포기하고 떠났는지는 모릅니다. 사도들은 그 삶을 알면서도 ‘기꺼이’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입니다. ‘몸의 편안함’만 찾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문은 ‘좁은 문’이지만, ‘영혼의 기쁨과 행복’을 찾는 사람에게는 ‘넓고 편안한 문’입니다. 신앙생활은 힘들어도 억지로 참는 생활이 아니라, 좋아서, 또 기뻐서 하는 생활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신앙생활에서 기쁨과 평화와 안식을 얻어 누리고 있는 신앙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멸망으로 이끄는 문’이 넓다는 말씀도 ‘인간의 눈’으로 볼 때 그렇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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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산보 길에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집 앞에서 아버지가 학교에 가는 딸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의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어린 딸은 해맑은 모습으로 웃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흐뭇한 모습으로 웃고 있었습니다. 아빠의 축복을 받은 아이는 든든한 마음으로 학교로 갔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힘들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축복을 믿고 시련과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받은 축복을 아들 이사악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야곱은 그 축복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형을 대신해서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에게도 이렇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네가 그것을 청하였으니, 곧 자신을 위해 장수를 청하지도 않고, 자신을 위해 부를 청하지도 않고, 네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그 대신 이처럼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자, 내가 네 말대로 해 주겠다.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 너 같은 사람은 네 앞에도 없었고, 너 같은 사람은 네 뒤에도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다. 또한 나는 네가 청하지 않은 것, 곧 부와 명예도 너에게 준다. 네 일생 동안 임금들 가운데 너 같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걸었듯이 내 길을 걸으며, 내 규정과 내 계명을 지키면 네 수명도 늘려 주겠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축복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축복을 받고 예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전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였고, 마귀를 쫓아냈고, 아픈 사람을 고쳐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도 축복하셨습니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예수님의 축복을 받은 제자들은 세상 끝까지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부친께서도 제가 먼 길을 갈 때면 항상 축복의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갈 때는 뒤를 돌아보지 말고 주님만을 믿고 따르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군대에 갈 때는 건강하게 잘 다녀오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새 사제가 되어 첫 본당으로 갈 때는 무엇보다 겸손하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멀리 외국으로 연수 갈 때에는 행동을 신중하게 하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축복은 제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매일 새벽미사에 참례하셨고, 성무일도를 빠지지 않고 바쳤습니다. 제가 31년 사제생활을 큰 탈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의 축복과 기도가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보편교회는 ‘시노드’의 닻을 올렸습니다. 경청, 친교, 소통, 동행으로 교회에 산적한 문제를 풀어나가려고 합니다. 교황님의 지향에 따라서 지역교회도 ‘시노달리타스’를 시작하였습니다. 시노달리타스는 ‘함께하는 여정’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셨듯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축복하셨듯이 각 가정에서 축복의 전승이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축복을 통해서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전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축복은 가정을 넘어 이웃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생명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축복의 진정한 의미를 말씀하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그리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좁은 문은 산상설교를 통해서 가르쳐 주신 ‘진복팔단’의 문입니다. 겸손과 희생이 좁은 문입니다. 자비와 사랑이 좁은 문입니다. 오늘 하루 가족과 이웃을 축복해 주면 좋겠습니다. 저 또한 오늘 제가 만나는 이들이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듬뿍 받도록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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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여기서 ‘거룩한 것’은 하느님께 바쳐진 제물을 떠올리게 하며, 이 구절을 산상설교(마태 5―7장 참조)에 견주어 보면 ‘거룩한 것’과 ‘진주’는 예수님의 가르침, 곧 하늘 나라의 복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사실 예수님 시대에 유다인들은 이방인을 ‘개’에 빗대기도 하였지만, 문맥상 여기서 ‘개와 돼지’는 예수님께서 전해 주신 복음의 진리를 완강히 거부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더욱이 이어지는 구절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겪었던 모진 박해와 시련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황금률’이라 불리는, 율법과 예언서, 다시 말해서 구약 성경의 정신을 일깨워 주십니다. 이는 가장 큰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사랑의 이중 계명(마태 22,34-40 참조)과 더불어 예수님 가르침의 요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의 끝자락에 이처럼 ‘황금률’을 당신 가르침의 결론으로 강조하십니다.
한편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히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문이 바로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는 문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하늘나라의 가르침을 실현하고 예수님을 따라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이는, 오늘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이 가르침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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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기정만 에제키엘 신부님]
<먼저 나를 하느님께 봉헌하고, 만나는 가족과 이웃을>
우리 성당 안에는 ‘사랑마을’이란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노인복지를 위해서 지어진 것인데, 매일 어르신들이 오셔서 점심을 함께하십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 봉사합니다.
이곳에 가면 ‘사랑마을’이란 이름처럼 따스함을 느끼게 됩니다. 많은 봉사자가 기쁘게 봉사하고, 어르신들이 둘러앉아 담소도 나누며 기쁜 시간을 보냅니다. 이 ‘사랑마을’에서는 비교나 질투 그리고 투정이나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그 자리에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마을’을 이루어 가는 모든 이들이 자신이 하는 일을 마음으로 행하기에 그렇습니다. 웃으며 찾아오는 어르신들, 반갑게 맞이하는 봉사자들, 기쁨으로 음식과 재료를 내어놓는 이들로 이루어졌기에 이곳엔 늘 평화가 있습니다.
이 모습대로라면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어리석음을 자처하는 판단은 불가능합니다. 판단하기 이전에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께 내어드린다면 판단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으로 채우지 못하고, 하느님께 봉헌하지 못할 때 우리 삶에 여러 부정적인 아픔과 상처를 만드는 판단이 자리하게 됩니다.
먼저 나를 하느님께 봉헌하고, 만나는 가족과 이웃을 하느님께 봉헌한다면 판단으로 인한 시기·질투·미움과 분노가 아니라 이해와 받아들임을 통한 사랑과 평화가 우리 삶의 자리에 가득 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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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경규봉 가브리엘 신부님]
<헤어짐의 아픔을 통해 더 큰 축복을 받은 아브람>
아브람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차고 넘치도록 받아 큰 부자가 되었으며, 더불어 롯도 많은 재산을 가지게 되었다.
그 지방은 두 사람이 소유한 많은 가축을 방목할만한 목초지와 물이 부족했다. 더구나 그 지방에는 이미 원주민이 살고 있었기에 두 사람의 목자들은 목초지와 샘의 부족으로 인하여 자주 다투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브람은 롯에게 서로 갈라지자고 제안하였다. 이에 롯은 세속적인 조건이 좋게 보이는 요르단 분지를 선택하여 그리로 옮겨가 소돔에서 살게 되었고,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서 살았다.
하느님께서는 조카 롯을 떠나보내고 고독과 상심 가운데 있는 아브람을 위로하시며, 믿음과 희망의 눈으로 당신께서 주시기로 약속하신 그 땅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는 그와 그 후손에게 그 땅을 주실 것이며, 그의 후손을 셀 수 없이 많게 해주시리라고 약속하신다.
아브람은 오랫동안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롯과 헤어지게 되었다. 그 까닭은 아브람과 롯의 재산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아졌기 때문이다.
서로가 자신의 많은 재산을 돌보기에 급급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유지했던 화목한 깨어지게 되었다. 재물로 인하여 우정과 가정이 파괴되고, 많은 재물이 도리어 재앙을 가져오는 수가 많다.(1티모 6,9-10) 그러므로 세상 모든 재물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1역대 29,12; 마태 6,25-32)임을 깨달아 지나치게 재물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마태 6,33; 루카 12,15-21)
아브람은 롯과 계속하여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롯에게 원하는 땅을 선택하라고 제안한다. 이 제안은 아브람의 깊은 믿음(필립 2,3-4)과 겸손하고 너그러운 인격을 보여준다.
그뿐만 아니라 이 제안은 둘 사이의 불화를 틈타 원주민들이 기습적으로 공격할 가능성을 막았으며, 롯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흐리지 않게 하였다. 나아가 아브람으로 하여금 더욱더 하느님께 의지하도록 함으로써 믿음의 조상으로의 덕망을 쌓게 하였다.
한 공동체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며, 그 희생은 결국 모두를 살리는 길이다.
아브람의 제안을 받은 롯은 세속적인 여러 조건을 따져 땅을 선택했다. 조카 롯은 하란을 떠난 이후 줄곧 아브람의 영향아래 성장하였기 때문에 보호자이자 후견인인 아브람에게 아들과 같았다. 따라서 아들의 의무를 이행해야 마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브람에게 전혀 양보하지 않았고, 세속적 이해관계에만 눈이 어두워 이기적인 선택을 하였다. 그는 여전히 세속적이고 물질중심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이기적인 선택은 미구에 불행을 자초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분리는 양가 사이의 불화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아브람을 향한 하느님의 계획과 섭리가 작용하고 있었다.
일찍이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을 불러 고향과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명하셨다. 따라서 아브람이 롯과 함께 있는 동안은 여전히 아비 집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가진 상태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서 롯을 분리시킨 것이다. 그럼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으로 하여금 하느님과 더욱더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오직 하느님을 믿으며, 그럼으로써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는 더 큰 축복을 주셨다.
헤어짐은 곧 상실이며, 상실의 아픔은 상당히 크다. 그러나 하느님께 나아가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상실의 아픔을 겪어야만 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으로 하여금 고향과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도록 명령하셨고, 롯과도 헤어지도록 하셨다.
하느님께서 더 큰 것을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의 것과 헤어지도록 하신 것이다. 결국, 인간은 이 세상의 것과 헤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부모, 형제자매, 부부, 친구 모두 헤어져야만 하며, 자신이 소유한 재물, 지식, 능력 등과도 헤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헤어짐은 하느님께서 안배하시는 또 하나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헤어짐으로 인하여 커다란 상실의 아픔을 겪을 때, 주님의 안배하심을 믿자. 주님께서 새로운 것을 주심을 믿자.
주님께서 주실 약속의 땅, 곧 천상의 땅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자. 헤어짐과 상실의 아픔을 통해 더 큰 축복을 주시는 하느님이심을 굳게 믿는 신앙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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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강종석 베드로 신부님]
<행복으로 들어가는 좁은 문>
오늘 주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그러나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이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멸망으로 이끄는 문이 넓은 것은 우리들이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지 않고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에 누구나 이 대열에 가담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생명으로 이끄는 문이 좁은 것은 이러한 세상의 부귀영화와 세상의 것을 탐하는 자신의 무한한 욕망을 억제하고 길들여야 하는 어려운 일을 하려는 이가 적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한 사람의 대열에 드는 사람들은 그 수가 적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말씀하시는 복된 자는 이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욕망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볼 때는 참으로 허무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충분이 이해됩니다. 우리도 과거에는 그랬습니다.
우리도 한때 그러한 욕망으로 앞이 가린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과거에는 그들을 바라볼 때 그러한 사람들은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며 아무런 재미도 흥미도 느낄 수 없고 부러워할 권력도 힘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행복의 관점과 주님이 제시하는 행복의 관점이 서로 다른 것은 우리 안의 욕망이 고집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자기의 것만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영혼의 진정한 바람과 추구와 행복을 거짓된 환상으로 둘러싸고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행복추구의 욕망들이 우리 영혼의 바람들과 본모습을 억누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가장 쉬운 행복의 길을 추구하지만 그것은 허상입니다. 거짓된 행복입니다. 우리 영혼의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차원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정신없이 달려가는 지극히 표피적인 목적이지 진정한 영혼의 행복과는 거리가 먼 거짓된 행복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자기 욕망의 고삐를 꽉 틀어잡고 깨어있는 사람들은 우리 심층의 영혼을 가리고 있는 욕망의 실체를 잘 압니다.
우리를 헛된 것에 도취하여 갈 길을 잊게 만드는 우리 가엾은 욕망의 실체를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에 휘둘리지 않도록 자신은 언제나 대낮처럼 깨어있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의 영혼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들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 영혼은 주님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힘들지만 기꺼이 주님을 따르는 것을 원합니다.
주님의 가난과 약함을 따르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의를 완전히 이루기를 열망하며 이웃을 자비롭게 대하기를 원합니다. 악을 행치 않고 순진한 사람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세상의 평화를 위해 일하기를 바랍니다. 주님으로 인한 박해를 달게 받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착함을 닮기를 바라며 하느님의 법을 최우선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위선자로 살지 않기를 바라고 이웃에게 죄를 짓지 않기를 바라며 육신의 욕망을 극복하는 것을 원합니다.
거짓을 행하지 않고 복수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자선을 베풀고 이를 감추기를 원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나에게 잘못한 사람까지도 용서하기를 원합니다. 하늘에 보화를 쌓기를 원하고 하느님만이 나의 주인임을 알고 섬기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깊이 신뢰하기를 원하며 하느님 나라와 의로움을 원합니다. 남을 심판하기를 원하지 않으며 나 역시 심판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기를 원합니다.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이것들이 우리 영혼이 원하는 것이며 진정으로 흐느끼며 외치는 우리의 영혼의 간절한 바람들입니다. 맞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영혼을 가로막는 거짓된 욕망들의 방해를 용감히 물리치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진정한 자세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좁은 문은 우리 영혼의 참 행복으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진복자가 되길 바랍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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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어울리시게나>
마태오 7,6.12-14 (거룩한 것을 욕되게 하지 마라, 황금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어울리시게나>
그대
착한 사람아
그대의 착함을
간직하고 싶다면
착한 사람들과
어울리시게나
그대
고운 사람아
그대의 고움을
간직하고 싶다면
고운 사람들과
어울리시게나
그대
따뜻한 사람아
그대의 따뜻함을
간직하고 싶다면
따뜻한 사람들과
어울리시게나
그대
깨끗한 사람아
그대의 깨끗함을
간직하고 싶다면
깨끗한 사람들과
어울리시게나
그대
의로운 사람아
그대의 의로움을
간직하고 싶다면
의로운 사람들과
어울리시게나
그대
자비로운 사람아
그대의 자비로움을
간직하고 싶다면
자비로운 사람들과
어울리시게나
그대
거룩한 사람아
그대의 거룩함을
간직하고 싶다면
거룩한 사람들과
어울리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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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바라는 그대로 해주어라>
사람은 살아가면서 기대와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바라는 바가 있고, 자식이 부모에게 바라는 바가 있습니다. 부부간에는 물론 이웃간에도 친구에게도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와 바람에 만족하고 기쁨을 갖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기대에 못 미친다고 느낄 때가 훨씬 많습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면 너는 이 정도는 따라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지극히 주관적으로, 자기는 잘하고 있는데 상대는 그에 못 미친다고 생각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상처를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대접받기를 원한다면 남을 똑같이 대접해 주어야 합니다. 사실 내가 받는 고통이나 기쁨은 내가 남에게 어떻게 해줘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한정된 사람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 한정된 테두리를 극복하도록 촉구하십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루가6,32).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온갖 유혹을 거슬러 살려면 문이 좁고 길이 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소명입니다. 밑지고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옳은 길과 옳은 문을 찾는 수고는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나의 기대와 바람만큼 걸맞은 수고와 땀을 소홀히 하지 않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좋은 길이라 해도 그 길이 목적지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서둘러 그 방향을 바꿔야 할 것입니다. 험하고 힘든 고된 길이라 하더라도 그 길이 천상과 연결되어 있다면 군소리 없이 걸어야 합니다. 신앙인의 삶은 매 순간이 세상을 감당하는 도전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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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7,13)
오늘은 '청소년의 수호성인이신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분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알로이시오 곤자가 성인은 열일곱 살의 나이로 예수회 수도회에 입회해서, 스물셋의 젊은 나이에 신학생 신분으로 선종하신 분입니다. 성인께서는 1591년 로마 전역에 흑사병이 퍼졌을 때 환자들을 정성껏 돌보다가 흑사병에 감염되어 선종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세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거룩한 것을 욕되게 하지 마라.'라는 단락이고, 또 하나는 '황금률'을 전하는 단락이고, 세 번째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단락입니다.
세 번째 단락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좁고 비좁아서 그곳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적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어느 문을 선택했고, 어느 문으로 들어갔는가?
생명의 문인가? 멸망의 문인가? 잘못 들어갔으면 마음을 다잡고 되돌아와서 다시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내게 주어지는 거룩한 것을 어떻게 받고 있는가?
거룩한 성체를 어떻게 받아 모시고 있고, 거룩한 말씀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황금률!'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7,12)
너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하고, 너로부터 물질적인 것을 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받고 싶어하는 바로 그 마음으로 너에게 해 주라고 하십니다.
모든 것을 내어 주신 사랑 깊은 펠리칸이신 예수님!
주님께서 주시는 거룩한 것들을 합당한 자세로 기쁘게 받아들이고, 나도 예수님처럼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생명의 문인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이들의 모습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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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평생 구두 수선을 해왔던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주 작고 허름한 구둣방을 운영하면서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계셨지요. 그런데 이 할아버지의 간절한 소원은 예수님을 단 한 번이라도 만나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만나기를 간절하게 바라니, 너의 구둣방을 오늘 방문하겠다.”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하니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구둣방에 먼지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청소했고, 구둣방에서 드실 수 있는 맛있는 음식과 음료도 준비했습니다. 또 구둣방이 추워서 따뜻한 담요로 예수님 자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는 것입니다. ‘개꿈이었나?’ 싶기도 했지만, 너무 생생한 꿈이었기에 기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에 아주 허름한 옷차림의 거지가 들어왔습니다. 너무 춥다고 하면서 이불이 있으면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위해 준비한 담요를 주었습니다. 잠시 뒤에 한 학생이 들어왔습니다. 배가 고파서 그러니 음식이 좀 있으면 달라고 합니다. 너무 배고파하는 것 같아서 예수님을 위해서 준비한 음식을 나눠주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청소부가 와서는 너무 목이 마르니 물 좀 달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도 예수님을 위해 준비한 음료를 주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꿈에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왜 약속을 지키지 않으셨냐면서 따졌지요. 그러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너의 구둣방에 세 번이나 갔었다. 그리고 세 번 다 대접을 잘 받았다. 이웃이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것이 내게 해 주는 것이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를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기원후 3세기의 로마 황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이 문장을 금으로 써서 자기 거실 벽에 붙인 데에서 유래했다고 하지요. 사실, 이와 비슷한 구절을 동서양의 여러 현인이 말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 시대에서도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점에서 이 황금률을 새롭게 표현하십니다.
첫째, 보답을 바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을 아예 생각하지 말고 솔선하여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이 교훈을 성경 전체의 정신을 종합한 말씀으로 제시하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는 것이 결국 주님께 해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좁은 문이지만,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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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지혜로운 성인의 삶>
-분별력, 황금률, 좁은문-
깨끗한 욕심, 거룩한 욕심은 언제든 좋습니다. 누구에게나 무해한 아니 오히려 유익한 욕심입니다. 누게에게나 마음 깊이에는 이런 욕심이 있습니다. 바로 성인이 되고 싶은 욕심, 청정욕淸淨慾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고 싶은 욕심입니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고 싶은 욕심입니다. 땅에서도 하늘에 보물을 쌓으며 살고 싶은 욕심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살 수 있도록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삶입니다. 사실 이렇게 살라고 주어진 선물 인생입니다. 하늘에는 여전히 빛나는 별들일텐데 요즘은 하늘에 별들 보기가 참 힘든 세상입니다. 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천주교 하늘에 무수히 빛나는 별같은 성인들입니다.
천주교의 자랑이 이런 별같은 무수한 성인들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회개의 표징, 구원의 표징, 희망의 표징이 되는, 삶의 좌표가 되는 성인들입니다. 우리 천주교가 참으로 부요한 것은 이런 별같은 보물같은 무수한 성인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써놨던, 가끔 인용했던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진리는 바로 앞에 있네
뒤뜰 마당
가득 피어난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민들레 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네”-2001.4.16
지금도 이 때의 장면이 생생합니다. 자비의 집 본관이 있기전 옛 토굴같은 방밖 창문을 열었을 때 뒤뜰 가득 눈부시게 피어난 샛노란 민들레꽃들을 보며 써놓고 큰 위로를 받았던 시입니다. 바로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았던 우리 천주교의 성인들입니다.
오늘은 예수회 출신 성 알로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입니다. 그 어느 성인도 죽지 않은 성인은 없습니다. 어떤 성인도 때가 되면 죽습니다. 천상탄일에 이은 새로운 천상의 삶이 펼쳐집니다. 제가 성인 축일을 지낼 때 마다 본능적으로 하는 일이 생몰生沒연대를 헤아리며 산 햇수를 보는 것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1591년 빼기 1568년 해보니 고작 만 23년 살았습니다. 참으로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성인입니다. “얼마나” 많이 살았느냐가 아닌 “어떻게” 참으로 살았느냐가 성인의 판별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성 알로시오의 성덕의 얼마나 출중했던지는 그가 신학공부 4년째 페스트병에 걸린 이들을 돌보다 전염되어 중병을 앓다 선종하기 얼마 전 어머니에게 보낸 구구절절 감동의 편지에서 잘 드러납니다.
“어머니, 우리의 이별은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나 우리 구원이신 주님과 결합하여 불사불멸의 끝없는 기쁨을 누리고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찬미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할 것입니다.
존경하올 어머니, 어머니와 우리 온가족이 제 죽음을 하느님의 기쁜 선물로 생각해 주십사고 간절히 희망하면서 이 모든 말씀을 드립니다.
제 희망의 성취인 그 항구를 향해 바다를 건너가는 동안 어머니께서 저를 친히 축복하시어 보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들로서 어머니께 바쳐야 하는 존경과 사랑을 더 확실히 보여 드릴 방도가 없기에, 어머니께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역시 성인의 배경에는 성녀같은 어머니가 배경에 자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예수회 총장이던 콜벤바흐는 다음과 같이 성인을 칭송합니다.
“성 알로시오는 어떤 환경에서도 용기를 가지고 참 왕이며 참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충실한 벗으로 생활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졌던 모든 것을 내려 놓았을뿐 아니라 주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오히려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과 생활을 함께 하였습니다.”
그의 시성 절차는 빠르게 진행되어 1605년 10월19일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해 시복되고, 1726년 12월31일 교황 베네딕도 13세에 의해 시성됩니다. 그후 그는 모든 신학생들의 수호성인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성인이 될 수 있을까요?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이지만, 이에 우리의 분투 노력의 응답도 필수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첫째, 분별력의 지혜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한결같이 사랑할 때 주어지는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우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십시오.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밝고 돌아서서 우리를 물어뜯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편애나 무시의 차별差別이 아니라 분별分別의 지혜입니다. 각자에 맞게 대응하라는 것입니다. 내 읽은 책이 좋다하여 누구에게나 좋은 책은 아닐 것이며, 내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누구의 식성에 맞는 음식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참 어리석게도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고, 진주를 돼지들에게 던져 주는 일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들에게 짐만 될 것이며 곧장 쓰레기 통에 버려질 것입니다.
둘째, 황금률을 명심하여 늘 지키는 것입니다.
황금처럼 귀하다 해서 황금률이며 어느 문화권에서나 볼 수 있는 삶의 지혜입니다. 예수님 이전 힐렐 율사 역시 “네가 싫어하는 일을 이웃에게 하지 마라. 이것이 율법 전부요 나머지는 풀이이다.”라고 황금률을 말했습니다. 부정적이도 소극적인 황금률이라 이러면 아무 일도 않게 됩니다. 이보다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오늘 복음의 황금률이 더 좋고 바람직합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이런 황금률의 사랑의 실천은 끝이 없습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하라는 경구와 일맥상통합니다. 좌우간 황금률은 사랑의 이중계명과 함께 가장 포괄적인 계율입니다. 이대로의 사랑 실천 노력에 항구하면 누구나 성인입니다.
셋째, 좁은문을 선택하여 통과하는 것입니다.
문이라 하여 다 똑같은 문이 아닙니다. 구원에 이르는 생명의 문도 있지만 멸망으로 인도하는 화려한 죽음의 문도 무수히 많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문인 좁은문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행복은 선택이듯 구원의 좁은문도 선택입니다. 주님께서도 좁은문을 선택할 것을 명하십니다.
“너희는 좁은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우리 수도자들처럼 자발적 기쁨으로 좁은문을 선택하여 사는 이들이 바로 성인입니다. 수도원뿐 아니라 세상 곳곳에서 자발적 기쁨으로 세상에 거슬러 좁은문을 통과하며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사는 성인들이 많습니다. 이런 이들 덕분에 유지되는 세상입니다. 예전 초등학교 교사시절 선배교사와 주고 받은 말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이 선생, 왜 그리 힘들게 살아. 좀 편히 살아.”
“저는 이렇게 사는 게 편한데요.”
그렇습니다. 밖에서 볼 때는, 남이 볼 때는 좁은문이지만 안에서 내가 볼 때는 넓은 문일 수 있습니다. 사실 주님을 좋아서 사랑해서 기쁘게 택한 길이라면 살아갈수록 내적으로 점차 넓은 문으로 변해갑니다. 성인들만이 아는 비밀입니다.
성인들의 특징은 늘 고통이 따랐다는 것, 휴식이 없었다는 것이며 그러나 이런 좁은문의 통과 와중에도 늘 기쁨과 평화, 찬미와 감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밖에서 좁은문이지 내적으로 감미로운 사랑의 넓은 문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분도 성인도 그의 규칙에서 이를 언급합니다.
“좁게 시작하기 마련인 구원의 길에서 도피하지 마라. 그러면 수도생활에 나아감에 따라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써 하느님의 계명들의 길을 달리게 될 것이다.”
밖에서는 좁은문이지만 갈수록 내적으로 넓어지는 감미로운 사랑의 문, 생명의 문, 구원의 문, 넓은 문입니다. 바로 이런 영적 현실을 사는 이들이 성인입니다. 무엇보다 구원의 좁은문 통과에 결정적인 것이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히즈키야 임금이 풍전등화 위기 상황의 좁은문을 통과할 수 있었음도 이런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 덕분이었습니다.
“당신 홀로 하느님이십니다. 당신께서는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주님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십시오. 주님 눈을 뜨고 보아 주십시오. 주 저희 하느님, 부디 저희를 저자의 손에서 구원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세상의 모든 왕국이, 주님, 홀로 하느님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이사야 예언자가 히즈키야의 기도를 하느님이 들으셨음을 알려줍니다. 그날밤 주님의 천사가 아시리아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쳤고,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은 그곳을 떠나 되돌아가서 니네베에 머무니, 히즈키야는 좁은문을 무사히 통과해 구원받았습니다.
바로 내 삶의 자리가 좁은문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좁은문이고 계속되는 좁은문의 연속이요 작금의 생존경쟁 치열한 자본주의 세상은 좁은문의 절정입니다. 그래서 유독 자살자들이 많습니다. 기후변화로 유럽에서는 40도 이상의 폭염이, 아시아에서는 폭우로 홍수가 빈번하니 지구 역시 좁은문의 위기 상황을 겪고 있습니다.
참으로 오늘 하루도 우리 모두 좁은문을 잘 통과하여 지혜로운 성인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자비를 청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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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tNf7YzIpIO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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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 7, 13)
닫힌 문이
아니라
열려있는
문이다.
단지
들어가는 문이
좁을 뿐이다.
좁은 문의
기준또한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여전히
문(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문은 우리 가운데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좁은 문은
넓은 문으로
이어진다.
좁은 문의
시작은
낮아지고
작아지는
여정의
시작이다.
낮아지고
작아지면
다투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다.
좁은 문으로
하느님과
우리는
더욱 가까워진다.
좁은 문은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이다.
좁은 문을
체험한 사람이
모든 문에
감사할 수 있다.
좁은 문을
받아들인 사람이
넓은 문을
받아들일 수 있다.
좁은 문과
넓은 문은
하느님 안에서
결국 하나이다.
좁은 문의
십자가와
넓은 문의
부활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좁은 문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사람만이
새로운 변화를
체험한다.
내려놓고
떠나보내는
좁은 문이
좋은 문이다.
좋은 문은
열려 있다.
관계의
중심에는
우리를 제대로
보게하는
좁은 문이 있다.
자기중심적인
삶의 방식을
내려놓게 하는
좁은 문의
소통이다.
내려놓아야
구원이며
작아져야
자유롭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반성하며
기도하는
시간이다.
좁은 문의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걸어가는
모든 여정이
구원을 향한
여정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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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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