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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바 여행4 - 단테광장에서 콜럼버스 생가를 보며 신대륙 항해를 생각하다!
우리 일행 4명은 5월 15일 밀라노 에서 기차로 제노바 에 도착해 왕궁을 거쳐서 페라라
광장 에서 바로크풍 카를로 페라스 오페라 극장이며 분수 그리고 통일영웅 가리발디
기마상을 보면서..... 르네상스 시대에 해운국 제노바 와 이탈리아 통일 을 생각합니다!
주세페 가리발디 는 청년 이탈리아당의 혁명운동에 가담하했가 1834년 프랑스로 피신후
1848년 해방전쟁 이 일어나자 귀국해 의용군 을 조직하여 참가하였으나 패배하고는
로마의 혁명 공화정부 에 참가하여 나폴레옹 3세의 무력간섭 에 대한 방어전을 지휘합니다.
그후 가리발디 는 공화주의자 로 부터 사르데냐왕국에 의한 이탈리아 통일주의 로
전향해 1859년의 해방전쟁에서는 알프스 의용대를 지휘하여 오스트리아군 과
싸웠으며 이듬해 5월에는“붉은 셔츠대”를 조직하여 시칠리아와 나폴리등
남이탈리아 왕국 을 점령해 사르데냐왕 에게 바침으로써 이탈리아 통일 에 기여합니다.
그러고 보니 몇년전에 바그너와 베르디 탄생 200주년 인 모양이네요? 소국으로 분열되어
프랑스, 스페인, 독일과 오스트리아등 이웃나라에 휘둘리던 이탈리아 출신 인
베르디 는 춘희, 아이다, 오셀로 외에 민족주의 열풍을 자극하는 곡 도 많이 썼으니!!!
그중 "나부코" 에서는 노예들의 합창 에서 "아름답고 잊혀진 나의조국" 이라 불렀던가요?
관객들은 "아름답고 잊혀진 이탈리아" 라고 바꾸어 부르니 이런 열정들이
"주세페" 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가리발디 아래에서 통일전쟁 으로 승화되었던 것이지요?
제노바 Genova 는 12세기 초에 군함 70척 을 보유한 도시 국가에서
십자군 참가와 르네상스 를 거치면서 피사와
아말피 를 물리치고 베네치아와 더불어 2대 해운무역국 으로 성장합니다.
13세기에 제노바 는 피사 를 물리치고 코르시카 섬 을 차지했으며 14세기에는
지중해와 흑해 무역을 두고 베네치아와 전쟁 을 치르니 마르코폴로 가
여기 제노바에 포로로 잡혀왔던 것이지요? 동방무역 으로 번영을
이루어 합자회사와 환어음과 보험 등의 경제 시스템 이 이 도시에서 탄생합니다.
하지만 이 도시 출신인 콜럼버스 가 인솔한 스페인 함대 의 신대륙 항로의
발견으로 쇠퇴하였으니 아이러니라! 이후 17세기에는 프랑스왕
루이 14세의 공격 을 받은 이래 1805년에 나폴레옹 제국 에
편입되기도 했으며 현재 리구리아주의 주도로 이탈리아 제일의 항구도시 입니다.
분수 에 앉아 사진을 찍고는 다시 번화한 거리를 걸어 단테 광장 에 있는
콜럼버스의 생가 를 보러 갑니다. 그런데 시간만 있다면... 그 전에
여기 페라라 광장 바로 옆에 마테오티 광장 Palazzo Matteotti 에
제노바 공화국 시대 총독의 관저였던 두칼레궁전 Palazzo Ducale 이 있습니다.
또 그 앞에 산 마테오 교회 에는 이 도시 제노바 출신인 바다의 왕자 안드레 도리아의
무덤 이 있다고 합니다. 중세시대 1453년에 오스만 터키 가 이스탄불을 함락해
기독교세계의 보루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로도스섬의 성요한 십자군 마저 쫓아내자...
지중해 바다는 모로코에서 리비아 트리폴리 까지 여러도시의 베르베르인 이슬람교도 들이
오스만 터키를 등에 업고 기독교세계를 약탈하던 해적의 시대 니 이슬람 해적
들은 이탈리아와 프랑스 및 스페인 해안에서 기독교도를 잡아 노예 로 팔았는데,
패배하기만 하던 기독교 국가 들은 1571년에 대규모 선단을 구성하니 레판토 해전 입니다!
교황청과 베네치아, 제노바, 에스파냐, 몰타기사단등은 갤리선 203척에 범선 80척의
함대를 구성하니 제노바의 안드레 도리아 는 좌익군 총사령관으로 출전
하는데 이에 비해 이슬람 오스만 투르크가 동원한 북아프리카 해적군단 은
갤리선 270척 으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그리스 항구 레판토 에서 출전하였습니다!
오스만 투르크가 동원한 북아프리카 이슬람 함대 는 바르바리고 가 이끄는 베네치아
와 안드레 도리아 가 지휘한 제노바 수군 의 협공을 받아 대패하니
서지중해 바다는 기독교 유럽인들의 바다 가 되던 것입니다! 산 마테오 교회
에서 안드레 도리아의 무덤을 보고 산 로렌초 대성당 San Lorenzo Cattedrale 을 거쳐...
파사드가 아름다우며 반다이크 와 루벤스의 회화 가 소장된 스피놀라 국립 미술관
Galleria Nizionale di Palazzo Spinola 까지 보려고 했건만... 시간이 없네요?
여기 바닷가를 안티고 포르토 Antigo Porto 라고 한다는 데 유럽에서 제일 큰 수족관
이며 자그만 식물원 도 있다지만 그냥 발길을 돌려서는 다시 번화하며
예쁜 테라스 아래로 거리를 걸어서 콜럼버스의 생가 를 찾아 단테광장 으로 향합니다.
한눈에 보아도 단테 광장 Piazza Dante 인 것은... 구글 어스 에서
이 도시를 검색하면서 여기 광장에
엄청 많은 오토바이 를 보고 놀랐었는 데..... 오늘도 여전하네요?
그런데 여기 이 광장 이름이“단테 광장”인 이유가 있을라나?
단테 그는 1265년에 피렌체 에서 태어나 1302년 로마
방문중에 추방되어 베로나를 거쳐 라벤나 에서 거주하다가 죽었는데?
우리 일행은 1인당 4유로를 내고 콜럼부스 생가 Casa di Colombo 로 들어가니
집은 생각보다 좁은데 항해도구 와 함께 검은 옷을 입은 콜럼버스
마네킹이 보입니다. 좁은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니
벽에 새겨진 산타마리아호 를 배경으로 콜럼버스 마네킹 이 우릴 맞이합니다.
신대륙 항해를 떠나던 배 안에서의 가구며 지도 그리고 항해도구 등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구경하는데, 그런데 우리 일행들은 번듯한 대저택 을 생각했는지.....
의외로 초라하다고 느끼는 모양이지만 난 그게 오히려 사실적이라 더 믿음 이 가네요!
콜럼버스 라는 이름은 영어식으로 이탈리아명은 콜롬보 Colombo 인데 1451년 제노바에서
양모업자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동방 무역선이 들락거리는 모습을 보며 자랐는데...
25세가 되던 1476년에 제노바 무역선 을 탔다가 프랑스와 포르투갈 해적선의 습격 을
받고 바다에 빠져서 떠다니는 노를 잡고 간신히 살아나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 으로 갑니다.
리스본에서 동생 바르톨로메오와 함께 지도 제작 에 종사하며 독학으로 카라벨선 조종술
을 익히던중 1478년 선장의 딸 인 펠리파 모리즈와 결혼해 장인으로 부터 항해지도와
선장일지 를 받은후 아이슬란드를 항해하며 항해술을 익히는 한편 지도 제작에 몰두합니다.
이 무렵 베네치아 출신 으로 전쟁에서 포로가 되어 제노바 감옥 에서 구술해 썼다는
마르코폴로 의 “동방견문록”을 읽으며..... 책에 나오는 향신료의 나라
인도, 비단의 나라 카타이(중국) 와 황금의 나라 지팡구(일본) 를 동경하게 됩니다.
수학자 토스카넬리 와 서신을 교환하면서 "지구가 네모난 것이 아니고 둘글다" 는
것을 확신하게 되는데 당시 가톨릭 세계 에서는 지구는 네모나고.....
바다 멀리 나가면 바닷물이 폭포수처럼 절벽으로 떨어져 지옥에 이른다고 믿었습니다.
유럽은 동양에서 나는 비단과 향료 를 구하기 위해 제노바와 베네치아가 동방
무역에 종사하고 있었으니...... 최고급 향신료 는 인도네시아의
동쪽 뉴기니에 가까운 뮬르카즈 제도에서 나는데 인도 상인 들이
미얀마와 말레이 반도를 돌아 인도네시아 동쪽에서 향료를 인도에 가져오면.....
아랍 상인 들이 다우선을 타고 인도에서 아랍으로 후추와 정향등 향료 를 나르고
그럼 아라비아 대상 들이 낙타에 싣고 레바논등 동지중해 까지 오면....
제노바나 베네치아 상인들이 캬라벨선에 싣고 유럽에까지 가져오는 것인데 오스만
터키가 관세 를 물리고 이탈리아 상인이 이문을 탐하면서 가격이 비싼게 불만 이었습니다.
1325년경에 유럽의 서쪽인 영국의 노섬브리아에서 쓰여진 시에 이런 귀절이 보입니다!
“그곳은 기쁨으로 가득한 과수원이 있으며 스파이스의 온갖 달콤한 향이 가득하다네!“
향신료 Spice 는 클로브(정향)와 시나몬, 나트메그(육두구)며 계피도 있지만 가장
선호하는 것은 후추 Pepper 였는데 유럽 사람들은 인도 에서 난다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미료 외 치료제와 최음제 로도 쓰였던 후추 와 같은 향신료에 대한 갈망 이 콜럽버스
며 바스코다가마, 마젤란등을 저 거친 바다로 내몬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지요?
하여 저 향신료는 16~17세기에 스페인과 포르투갈, 네델란드와 영국 이
아시아를 놓고 식민지 쟁탈 각축전에 나서게 되었던 주요한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콜럼버스 는 지구가 둥글다면 동쪽 대신에 서쪽으로 가도 인도와 중국, 지팡구 에
도착할 것이라 믿었는데.... 하지만 그는 태평양 의 존재를 몰랐으므로
지구를 실제의 5분지1 크기 로 계산하고는 1484년 부터 대항해의
후원자를 물색하면서 포르투갈의 왕 주앙 2세에게 대서양 항해 탐험을 청원하였습니다.
포르트갈은 오스만 터키를 피하기 위해 인도로 가는 육로 대신에 아프리카를
도는 동쪽 희망봉 루트 를 준비하고 있던지라 왕은 거절합니다.
1486년 콜럼버스는 에스파냐로 건너가 카스티야 왕조의 이사벨
여왕을 만나 대담한 항해계획 을 설명하고 지원을 요청하나 역시 거절당합니다.
그후 영국, 포르투갈, 프랑스에 재차 후원을 요청하였다가 번번이 거절만 당하였지만
그의 집요한 노력으로 1492년에 마침내 에스파냐의 후원 을 받아내게 됩니다.
당시 에스파냐 남부 그라나다 에는 700년간 지속된 이슬람 왕국 이 있고 북부에는
카스티야 왕 이사벨과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가 결혼해 에스파냐(스페인) 가 탄생합니다.
이사벨과 페르난도 국왕 부부는 1492년에 그라나다를 함락해 700년 이슬람 통치
를 몰아낸 뒤라.... 해외 진출에 관심을 돌려 이사벨 여왕이 마침내
콜럼버스를 등용 하였던 것인데, 당시 여왕에게 콜럼버스가 제시한 계약 조건은....
“콜럼버스는 발견한 토지의 부왕(副王)으로 임명될 것이며 직책과 특권(산물의 1/10)
은 자손에게 전승한다”라고 하는 것으로..... 산타페 협약 이라고 부릅니다.
이사벨 여왕은 자금의 제공 과 팔로스시(市)로 하여금 핀타호와 니냐호 를 내주게 하고
"과거의 모든 죄를 면죄(免罪)" 하여 준다는 조건으로 승무원 모집에도 협력해 줍니다.
또한 팔로스항에 사는 핀손 이라는 유능한 선장 형제 가 자기 개인
소유 선박인 산타마리아호 와 함께 참가하였으니.....
120명 선원을 태운 3척의 콜럼부스 함대는 1492년 8월 3일에 출항합니다.
몇달을 항해해도 육지가 나타나지 않자 공포에 질려 반항하는 선원들을 달래가며 10월
12일에 바하마 제도 를 발견하고 쿠바 와 아이티 에 도달하여 인도의 일부
라고 생각했다고 하는데..... 콜럼버스는 히스파니올라(아이티) 에 40명을
남겨 식민시킨 후에 1493년 3월에 귀국해 왕으로 부터“신세계의 부왕”으로 임명됩니다.
당시 그가 가져온 금제품 이 전 유럽에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콜럼버스의 달걀”이란
일화 도 생겨났으며 2차 항해는 1493년에 17척에 1,500명의 대선단 으로 출범합니다.
히스파니올라에 남겨둔 식민자는 전멸해 버렸으나 콜럼버스는 식민지 행정관 으로
이사벨라시를 건설 하는 한편 토지를 에스파냐인 경영자에게 분할해 줍니다.
인디언들에게는 공납과 금 채굴 및 경작등 부역을 명령했으나 금의 산출량이
보잘것 없자 스페인 항해자들은 인디언을 학대, 살육 하고 노예 로 본국에 실어옵니다.
이 항해에서 콜럼버스가 에스파냐로 보낸 산물은 "금이 아닌 노예" 였기 때문에
그는 본국으로 돌아오자 문책 을 당하였는데..... 그후 1498년의
3회 항해에서는 트리니다드와 오리노코 하구 를 발견하였으나 히스파니올라
(아이티) 에서 내부 반란 으로 그의 행정적 무능이 문제화하여 본국으로 송환됩니다.
1502년의 제4회 항해 허가는 바스코 다 가마의 성공 에 자극을 받은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 항해에서 그는 온두라스와 파나마 지협 을 발견하였습니다.
1504년에 이사벨 여왕이 죽은 뒤 그의 지위는 더욱 하락하였으며 직책의 세습
까지도 인정되지 않았고 2년후 죽었는데 자기가 발견한 토지를 인도 라 믿고 있었습니다.
서양 사람에 의한 아메리카대륙 최초 발견은 1000년경 노르만인 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들은 모두 현지에서 멸종 되었기 때문에 후세로 연결되지는 못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서인도 항로의 발견 으로 인하여 아메리카대륙이 유럽 사람들의
활동무대가 되었고 또 에스파냐 사람에 의한 신대륙 식민지 경영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훗날 아메리고 베스풋치 가 미국에 이르러서 이 대륙이 인도가 아닌 신대륙 임을
밝혔고 그후 코르테스 가 멕시코 아즈테카 제국을 정복 하고......
피사로 가 페루 잉카제국을 점령해 스페인인이 그토록 목마르게 기다렸던 "황금" 을
유럽으로 실어왔으며 아메리카를 식민지화 하면서 인디오들은 무참히 죽어갔던 것입니다!
단테의 집 뒤 언덕쪽에는 나무들이 많은데 12세기에 세웠다는 포르타 소프라나
Porta Soprana 라는 큰 벽돌 탑인 문 이 서 있는 것을 봅니다.
저건 항구에서 구도시로 들어가는 "문" 으로 아마도 적을 경계하던 그런 탑
같은데 중세 시대에 이슬람 해적 이며 프랑스 침략자 들을 을 경계하던 것일러나?
우린 시간이 없으니... 여기 제노바가 원조 라는 바질 페스토 파스타 도
맛보지 못하고 이제 기차 를 타고 해변 마을인 친꿰테레 로 갑니다.
즐거운 유럽여행! 함께 나누는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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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길잡이★유럽 배낭여행
(http://cafe.daum.net/bpguide)
첫댓글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은근히 볼만한 도시 제노바......
오랜 역사와 옛스런 집들이 구경할만 합니다!
제노바도 한번 가보고싶습니다
미지의 대륙을 향해...... 목숨을 걸고
배를 타고 떠나는 모험심이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