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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柳寬)에 대하여
유관(柳寬)
1346(충목왕 2)∼1433(세종 15).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초명은 관(觀), 자는 몽사(夢思)·경부(敬夫), 호는 하정(夏亭).
고려 명종 때 정당문학(政堂文學) 공권(公權)의 7대손이며, 삼사판관 안택(安澤)의 아들이다.
1371년(공민왕 20) 문과에 급제하여 전리정랑(典理正郎)·전교부령(典校副令)을 거쳐 고려 말기에 봉산군수·성균사예(成均司藝)·사헌중승(司憲中丞) 등을 역임하였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개국원종공신이 되고, 이어 내사사인(內史舍人)으로 왕명에 의하여 《대학연의 大學衍義》를 진강(進講)하였다.
1397년(태조 6)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대사성을 거쳐 다음해 형조전서를 지냈다.
1401년(태종 1) 대사헌으로서 상소하여 불교를 극력 배척하였고, 이어 간관을 탄핵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가 곧 다시 서용되어 계림부윤(鷄林府尹)이 되었으나, 다시 무고를 받아서 문화에 유배되었다.
그뒤 풀려나와 1405년 전라도도관찰사를 지내고, 이듬해 예문관대제학을 거쳐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을 거쳐 형조판서로 병서습독제조(兵書習讀提調)를 겸하였고, 1409년 예문관대제학으로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겸하였으며, 이듬해 《태조실록》 편찬을 주관하였다.
그뒤 참찬·찬성 등을 역임하고 1418년(세종 즉위년) 다시 대제학으로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하고, 이어 판중군도총제부사(判中軍都摠制府事) 등을 거쳐 1421년 다시 대제학으로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1423년 지춘추관사로 《고려사》 개수의 명을 받고, 이듬해 우의정에 승진, 《고려사》를 수교(讎校)하여 올렸다.
1425년 벼슬을 사직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고, 81세가 된 이듬해 우의정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세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났다.
특히, 성품이 매우 청렴검소하고 청빈하였는데, 한번은 장마로 그의 집에 비가 줄줄 새자, 그는 우산을 받쳐들고서 그의 부인에게 “우산이 없는 집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말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문화의 정계서원(程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하정집》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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