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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안 바에즈, 늙은 여자의 아름다움
이 기계는 증오를 휘감아 결국 굴복시킨다.
-피트 시거의 악기 벤조에 새겨진 문구
'아름다운 것들'이라는 노래를 들어보셨는지.
김민기님이 편곡, 작사하고 양희은님이 부른 노래다.
"꽃잎 끝에 달려있는 작은 이슬방울들. 빗줄기 이들을 찾아와 으음 이들을 데려갈까. 엄마 잃고 다리도 없는 가엾은 작은 새는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면 으음 어디로 가야할까..."
나는 이 노래를 초등학교때 처음 알았다. 들었다가 아니라 알게 되었다. 담임선생님이 출산휴가 가시고 임시선생님이 오셨다. 젊고 조그맣고 꽤 못 생긴 여자 선생님이었다. 그분이 교실의 칠판에 저 '아름다운 것들'의 가사를 써서 보여주셨다. 선생님이 써내려가는 글 한 줄 한 줄이 선명한 영상으로 떠올랐다. 내용과 분위기가 신비로웠다. 선생님이 통기타를 들더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따라부르라고 했고 나와 친구들은 따라불렀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노래를 알려주시고 싶었나 보다. 그 선생님이 아름다웠다. 생김새와 아름다움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청년이 되었을 때 나는 친구들에게 노래 '아침이슬'과 '아름다운 것들'은 결국은 같은 이야기를 전하는 거라고 말했다. 한 친구가 물었다.
"전혀 다르구만. 뭐가 같은데?"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정확히 떠오르지 않는다.
"풀잎에 매달린 이슬보다 진주가 더 아름답다고 느끼는 그런 녀석으로 살지는 말자는 거지."
나는 이런 시를 쓰는 김민기님은 노벨 문학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6년, 밥 딜런이 그 상을 받았다. 형 대신 삼촌한테 상이 돌아갔으니 큰 불만은 없었다. 형은 그런 거 탐내는 분도 아닌 걸 내가 안다.
시간이 지나도 강렬한 잔상으로 남은 추억의 노래. '아름다운 것들'의 오리지널이 조안 바에즈의 노래 '매리 해밀턴Mary Hamilton'이다. 이 노래는 이렇게 시작된다.
"소문이 여자들에게도 남자들에게도 퍼져나갔어요. 마침내 여왕에게까지 알려졌죠. 그건 최악이었어요. 매리 해밀턴이 스튜어트 왕가의 아들을 낳았다는 거죠..." 중간에는 이렇게 이어진다. "어젯밤 나는 여왕님의 발을 씻겨드렸죠. 머리엔 금관을 씌워드렸구요. 그런데 그 댓가로 돌아온 건 단두대에서 죽게 되는 거였어요. 내 가운을 벗겨버리세요. 하지만 속치마는 남겨두세요. 그걸로 내 얼굴을 가려주세요. 단두대를 보고 싶지 않아요..."
'아름다운 것들'과 '매리 해밀턴'의 가사는 다르다. 같은 것은 '가엾은 작은 새'와 '여왕님의 발을 씻겨드리는 시녀'다. 둘 다 가엾기 때문이다. 둘 다 가엾게 살다가 죽음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이 노래를 부른 사람들은 왜 가엾은 죽음을 이야기했을까? 조안은 이 노래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전하고 싶었던 걸까?
조안이 어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자리에 스타로서 온 게 아니예요. 나를 소개한다면 첫 째로 나는 한 사람의 인간이구요. 다음으로 저항운동가입니다. 그리고 저는 가수죠."
조안은 1960년대 미국의 흑인 시민권 운동의 상징이었다. 워싱턴 행진을 이끈 주역 중의 한 사람이었다.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자 반전운동의 아이콘이 되었다. 오클랜드에서 베트남으로 향하는 미군 병사들에게 가지 말라고, 당신들은 가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외쳤던 사람이다. 1970년대에는 미얀마에서, 1980년대에는 태국에서, 칠레에서, 1990년대에는 사라예보에서, 분쟁지역의 한 복판에서 난민들의 옆에 있었던 사람이었다.
마틴 루터 킹은 연설할 때 비폭력이란 단어를 자주 사용한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받고 그건 조안이 좋아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조안은 국가가 시민에게 명령할 권리가 없고 국민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주창했다. 그는 비폭력 평화시위자이자 인권운동가였으며 반전주의자였다. 언제나 억압받고 위험에 놓인 약자들의 편에 섰다. 제시 잭슨 목사가 조안을 회고했던 바 그대로.
"흑인은 레스토랑에, 공원에 들어가는 것도 불법이었죠. 백인과 함께 차를 차면 체포되었어요. 그렇게 엄혹하고 위험했던 시기에 조안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었죠."
유튜브 서비스 제공자에게 아무 생각 없이 고마운 게 있다. 조안의 거의 모든 공연 실황을 볼 수 있게 해준 것. 1959년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에서 노래하는 모습에서부터 2020년 케네디 센터 헌정 공연에서 후배들이 노래하는 모습을 보는 광경까지. 갓 스물이 된 처녀시절의 조안과 이제 80세를 넘기는 할머니 조안까지. 한 가수의 일생에 거친 연대기를 불과 수십 분, 수 시간 안에 둘러볼 수 있게 해 준 것. 둘러보다가 놀라게 해준 것. 행복하게 해준 것.
나는 80대 할머니 조안의 아름다움과 20대 조안의 아름다움의 우열을 가릴 수가 없다.
조안이 그 오랜 세월을 거치며 공연할 때마다 특별히 즐겨 부르는 노래들이 있다. 몇 노래를 인용한다면 이렇다. 'Swing Low, Sweet Chariot', 'Diamonds and Rust", 'Amazing Grace''.
첫 곡은 자유를 갈망하는 흑인 노예의 염원을 노래했다. 조안 바에즈가 1969년 우드스탁 페스티발에서 했던 공연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공연을 보고난 후 2009년 체코의 벨벳혁명 20주년 기념 공연을 봤다. 50년의 세월이 지나 같은 곡을 부르는 가수. 소프라노가 허스키한 메조소프라노로 달라졌다. 1969년의 노래가 청아했다면 2009년의 노래는 깊었다.
두 번째 곡은 조안이 자신의 연인이자 배신자이면서 영원한 친구인 밥 딜런을 그리워 하며 작곡한 노래다. 거기에 멋진 가사가 나온다.
"내 기억 속에 당신의 눈동자는 울새의 알보다 더 푸르렀지. 당신은 내 시가 그저 요란하다고 했지. 지금 어디서 전화하는 거야? 중서부 어디쯤 공중 전화 부스인 거야? 10년전 쯤 나는 당신한테 커프스를 사줬지. 당신도 내게 뭔가를 선물했고. 우린 둘 다 우리 기억들이 가져오는 게 뭔지 알고 있어. 그건 바로 다이아몬드와 녹이야..."
여기서 다이아몬드와 녹은 가장 소중한 어떤 것과 녹슬어 쓸모없게 된 그 어떤 것을 은유한다. 밥 딜런은 이 노래에 자기가 등장해 감동했다고 말했다. 그의 대수롭지 않게 읊조리면서도 단호한 목소리가 이렇게 말했다.
"멋진 노래입니다."
세 번째 곡은 숱한 유명 공연에서 조안이 불렀던 노래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은 영상이 있다. 언제 테러가 벌어질지 어디서 폭탄이 떨어질지 모르는 보스니아 내전. 사라예보 현장에 방탄조끼 입고 현장에 도착한 조안이 거리에서 첼로를 켜는 뮤지션과 울면서 포옹하는 장면. 첼리스트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부르던 곡이다. 이 영상이 포착한 것은 인류애였고 인간이 드러낼 수 있는 최대치의 숭고함이었다.
조안은 시녀의 가엾음을, 흑인 노예의 자유를 향한 열망을, 전쟁을 반대하는 시민들의 타는 목마름을 노래했다. 그는 2011년 뉴욕 리버티 파크에 통기타를 들고 '오큐파이 월스트리트 운동'에 동참했다. 여기서 그가 부른 노래가 미국의 민중가요인 피트 시거의 '우리 승리하리라 We Shall Overcome'이었다.
2020년 케네디 센터 공연에서 그가 사랑했던 후배들, 또다른 거장 뮤지션들인 메리 채핀 카펜터와 에밀루 해리스가 조안을 향하여 그들의 한없는 존경과 사랑을 담아 노래했다. 피트 시거가 처음 불러서 포크 음악이 가진 사회성과 저항성의 기치를 올렸고 조안과 밥 딜런이 이어받아 시민권 운동의 행진가가 되었으며 월 스트리트 오큐파이 시위에서 조안이 직접 불렀던 그 노래. 소위 '위대한 아메리카'의 이면에서 차별과 불평등에 의해 고통 받는 사람들과 언제까지고 함께 하는 한 인간, 한 활동가, 한 뮤지션의 멈추지 않는 메시지.
2019년, 은퇴를 발표한 조안에게 기자가 물었다.
"모든 음악활동을 중단하신다는 겁니까?"
조안의 대답은 간명했다.
"나는 가수입니다. 목이 예전 같지 않아 대규모 콘서트는 못 해요. 하지만 동네 빠나 클럽에서는 계속 노래할 겁니다."
살아가는 동안 충분히 사람을 사랑한 사람. 세상살이를 마치는 그날까지 자기가 바라는 대로 살고있는 사람. 그는 또 이렇게 말을 이었다.
"삶은 살만한 가치가 있어요. 사랑했기 때문에요"
조안을 사랑했던 스티브 잡스가 가장 좋아했다는 조안의 노래는 'Love is Just Four Letter Word'였다. 먼저 세상을 떠난 스티브는 이런 말을 남겼다. "죽음은 신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다."
사랑했다면 충분하고, 아름다웠다면 또한 충분한데, 필요한 무엇이 더 있을까?
조안, 당신의 여든 한 번째 생일을 축하합니다.
*
매리 채핀 카펜터와 에밀루 해리스의 헌정 공연(Kennedy Center Honor)
https://youtu.be/ONBw6tPbWIU
첫댓글 풀 잎에 맺힌 이슬이 진주보다 더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나도 아름다운 삶을 사는 걸까요?
사실 진주는 이슬보다 더 귀하죠.
정말 울림이 큰 좋은 글입니다.
여러 많은 사람들과 노래가 등장하지만 제가 자신있게 표상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두명 뿐이네요.
김민기
스티븐 잡스
노래는 "아침 이슬" 뿐입니다.
음악과 예술은 그 특유의 부드러운 영향력으로 그 어떤 최고의 가치라도 넘 볼 수 없는 부동의 가치위력이 있다고 또다시 알려주는 좋은 글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