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에 머무른지도 2주를 넘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좀 불편하던 더위도 이제 어느 정도 적응해서 현지인만큼은 아니더라도 지낼만은 하다. 뭐, 들리는 바에 의하면 지금은 아직 우기이고 건기, 즉 여름이 시작되면 더 건조하고 열기를 내려쬐는 시간이 계속된다고 하는데 그때도 무사할지는 의문이지만.
대사관 관저에서의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어찌되었건 추방된 왕자라도 황제의 자식인 덕분에 대접은 귀빈 대우였다. 음식은 입맛에 맞았고, 목욕과 진기한 풍경을 찾아다니는 관광이 하루하루 즐겁게 흘러갔다. 물론 멜리장드는 대사관에서 빌붙어 시간을 축내지 말고 현재 시국에 대해 좀더 고민을 해보라는 설교를 해대기는 했지만… 본인도 투르크 상인들이 파는 시럽이 잔뜩 들어간 차가운 커피에는 반해버려서, 대학에서 부여받은 현지과제는 내팽겨치고 카페에서 뒹굴뒹굴하며 나와 비슷한 백수짓을 하는데 적당히 동참해주고 있었다. 처음에는 나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외교적인 관점에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간주하고 적대적으로 대해서 날 곤란하게 했지만, 그 녀석도 이제 어느 정도 지내다 보니 늘어지는걸 보면 사람은 사람인가 보다.
에라드의 존재도 나에게는 참 좋은 선물이였다. 에라드는 비번일 때 항상 나를 찾아와 성지라고 해도 예외없이 도시의 밤이 드리워지면 벌어지는 화려하고 재밌는 장소를 돌아다니며 흥겨운 시간을 보내게 해주었다. 종종, 에라드의 친구였던 케두스 왕자도 합류해서 대추야자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상황은 좀 다르지만 입장은 둘다 추방된 왕자인 신분에 동질감을 느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었다. 물론, 늦은 귀가에는 항상 잔뜩 화가 나서 팔짱을 끼고 기다리고 있는 멜리장드와 루치아 시녀장의 눈총과 잔소리를 각오해야 했지만.
좀 아쉽다면 아쉬운건 그날 스치듯 지나간 그 그리스 아가씨는 다시 만날수 없다는 것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무슨 거대한 궁전 같은 비잔틴 제국의 대사관 근처도 별다른 이유없이 서성거려 보았지만 그녀를 다시 만날수는 없었다. 나는 어떤 날은 대사관 외벽의 한켠에서 노래를 부르며 그녀를 기다려보았지만 그날 하룻밤 술한잔할 푼돈은 벌수 있어도 그녀를 다시 만날수는 없었다. 문득, 어디선가 시선을 느껴 올려다 보면 거기에는 굳게 커튼으로 닫힌 창문만이 있을 뿐이었다.
아무튼 순조로운 나의 삶과는 달리 시국은 점차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아이유브 왕조의 거점인 카이로는 사실상 함락 직전에 이르렀고, 그에 대한 맘루크들의 후속 정권에 대한 행보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고 있었다.
"다미에타에서 바라카에게 색출된 곱트교 신자들을 죄다 목을 잘랐다면서?"
"그뿐만이 아니야. 카이로에 물자를 몰래 대려던 유대인 상인들을 체포해 꼬챙이 꿰어서 사막에 매달아 놔뒀다고 하더군."
"무슬림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라더군. 시아파의 이맘들의 일부가 체포되어 어디론가 끌려간 이후 아무도 행적을 모른다고 하더군."
오랜 시간 수니파 아이유브의 병사로 다른 종교의 세력들과의 싸움에 종사해온 맘루크들은 그들의 행보에 걸리는 모든 것들에게 잔혹한 대가를 지불하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의도하지 않게 상당한 난민들이 아직 평화를 유지하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다. 성벽위에서 저 넓은 대지를 가득 채운 난민들의 임시 텐트를 보며 나는 조금 기분이 우울해지는 것을 느꼈다.
맘루크들은 이미 확실해진 승전을 뒤로 조금 늦추고 절망적인 아이유브를 포위하여 더욱더 괴롭히고 있었다. 그것은 현재의 맘루크들에 의해 세워질 정권의 탄탄한 사전 기반 구축을 위한 준비 시간이라고 멜리장드는 분석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반항할 여지가 있는 이교도들에 대해 가혹한 처사로 벌써부터 기를 죽이려 하고 있었고, 그런 그들의 공세에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은 두려움을 느낄수 밖에 없었다. 결국 그 두려움은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오랫동안 종교계 인사들의 갈등으로 무산되어 온 대책회의가 다시 열리게 된것이다.
그날은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어머니는 아침부터 루치아 시녀장의 도움을 받아 소박하지만 품위있는 제국의 여제의 복식을 차려입고 회의에 참석할 준비를 서두르셨다. 제국의 예루살렘 주재 대사인 몽고메리경은 멜리장드와 함께 어머니에게 이런저런 회의에 참석해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제안과 의사표시를 어머니에게 주지하고 있었으나, 어머니는 좀 귀찮은 듯 보였다.
"당부드리건데, 리마솔 해군기지의 색적 정찰 범위는 절대 논하시면 안됩니다. 유대인 선주 연합이 그걸 핑계로 관세 회피를 하려 들텐데, 휘말리시면 안됩니다. 그리고 또… 아! 아나톨리아 전선의 무기대여법도 본 주제가 아니라고 언급하고 논하지 마십시오."
"네에, 네에… 잘 알았으니 이제 그만해요, 예루살렘 대사. 귀에 못이 박히겠어요."
"그럼 말 좀 들으세요. 제가 아무리 사전에 언질을 드려도 또 회의에 들어가시면 통크게 과도한 선심을 쓰시거나, 제국 의회가 발칵 뒤집어질 발의를 하고 오시잖습니까. 오늘도 또 그러시면 저 죽습니다."
"내가 뭘 또 그렇게 사고를 치고 왔다고 그래요."
어머니의 말에 몽고메리 대사를 두둔하며 옆에 서있던 멜리장드가 말했다.
"설마, 이베리아 종교 전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벌써 잊으셨습니까? 교황의 폭탄선언에 이어 앙리 추기경의 95개조 반박문은 그냥 핑계에 불과하고, 신성동맹이 제국에 보낸 조건부 선전포고를 폐하께서 홧김에 외무부에서 검토할 시간도 안주고 사인해버리시고 개전을 선언하신 덕분인거 벌써 잊으셨나요?"
그런 멜리장드의 말에 어머니는 조금 정색하고 말하셨다.
"멜리장드, 분명히 말하건데 이베리아 종교 전쟁의 시작이 내가 그들이 요구한 조건에 대해 거부하고 개전을 선언한 덕분인건 맞단다. 하지만 그건 맹세하건데 홧김에 한건 아니었어."
멜리장드도 어머니의 진지한 말에 조금 움찔하며 진지한 얼굴로 들었다. 어머니의 말이 이어졌다.
"술김에 그랬어. 그 전날 럼주대신 와인을 마셨으면 안그랬을텐데, 망할 마틸다 지지배, 도수 70도짜리 증류주를 가져오니 사람이 정신을 차릴수가 있어야지 원…"
몽고메리 대사의 입이 딱벌어졌다. 왠지 표정이 예수 그리스도가 사실은 요셉의 친아들 맞다 라는 말을 듣고 충격받은 사람의 표정 같았다. 이거 혹시 외교적으로 절대 공개되서는 안되는 대외비적인 사실 들은걸까? 그리고 그는 마찬가지로 망연자실하게 서있던 멜리장드를 바라보았다. 순간 몽고메리 대사의 시선을 받은 멜리장드는 화들짝 놀라며 대사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소리쳤다.
"전, 일단은 왕자님 수하니깐, 대사님이 알아서 하세요."
나는 멜리장드에게 어머니보다는 그래도 좀 나은게 아닌가 싶은 평가를 받은 것에 대해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그리고 그런 우리들을 보며 루치아 시녀장이 말했다.
"제국의 지존이신 폐하께서 사소한 발언을 금기당한다는 것 또한 불합리한 일이겠지요. 소신껏 발언하시고 다만 주님의 뜻에 부끄럽지 않게만 행동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녀의 말에 어머니는 조금 표정이 밝아졌다.
"고마워, 내 마음을 알아주는 건 오로지 시녀장 밖에 없군."
"그 또한 주님이 뜻하신 일입니다."
나는 루치아 시녀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은 시녀장으로 일하고 있지만 이제는 단 한명 살아남은 산타 카탈리나 수녀원의 수녀였던 그녀는… 아직도 그 안에 신앙의 믿음을 흔들림없이 지키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그건 정말 강인한 일이라 생각했다. 나의 생각과 무관하게 어머니의 준비가 끝났다.
"자, 가자꾸나. 오늘은 좀더 좋은 결과가 나오길 기대해보자. 이미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모든 예루살렘의 사람들이 힘을 합쳐야 이곳 성지의 평화가 지켜질수 있다는 것에 이제는 동의하겠지. 그렇지 않으면 이제 앞으로 다가올 것은 비참한 추방행이 기다릴 뿐이니깐."
주변에 사람들은 어머니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며 어머니를 따라 대사관을 나섰다. 나도 오늘만큼은 어머니의 수행원으로서 회의에 참석하게 되어 어머니의 곁을 따르며 살라딘공이 준비한 회의장을 향해 걸어갔다.
회의장은 아침 일찍인데도 북적였다. 수많은 종교의 사제들과 각국의 실력자들, 그리고 시민과 상인과 순례자와 난민들의 대표들로 회의장은 북적였다. 회의장에서 나는 오랜만에 살라딘 공을 만날수 있었다. 그는 어머니를 마중하기 위해 회의장의 앞에서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알라의 축복이 당신에게 함께하시길."
"힘든 시기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항상 제국은 당신의 숭고한 책무를 존중합니다. 오늘 하루 바라던 좋은 결과를 볼수 있기를…"
그리고 그는 뒤를 따르던 나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그 사이에 많이 타셨군요. 구릿빛으로 그을린 피부가 보기 좋으시네요. 이곳의 생활은 편하셨나요?."
"에미르께서 잘 돌봐주신 덕분에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늘 신경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종종 경비대에게 예루살렘에 나타난 유쾌한 음유시인의 소문을 듣습니다. 외교적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언젠가 저도 한번 당신의 노래를 듣고 싶군요. 왕자의 노래를 듣는 그날이 오길 기대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참석하지 못한 에라드경에게 전해주세요. 퀸을 D5로 이동이라고요."
"아, 에라드형이 나올 때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퀸 D5면 나이트 A3이고, 비숍 B2면 폰 C6이라고요. 나이트 A3이라고 분명히 전해드렸습니다."
"하하하… 왠지 이번 판도 쉽진 않겠군요. 다음수를 생각해내면 다시 알려드리겠다고 전해주세요."
살라딘은 왠지 분한 표정이면서도 호승심을 불태우며 다음 수를 생각하는 듯 하였다. 나는 그런 그에게 목례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는 낯익은 얼굴이 한명 더 있었다.
"아비시니아의 천한 망명객이 폐하를 뵙습니다."
어머니의 손등에 키스하는 건장한 흑인 거인, 케두스 왕자였다. 어머니는 웃으며 대답했다.
"오랜만이군요. 케두스 왕자. 테와히도 총대주교만 참석하던 회의에서 곱트교의 대표로 그대를 볼 수 있다는 건 아비시니아 측도 이번 일에 공감하고 있다고 봐도 되는 걸까요?
"물론입니다. 아비시니아는 항상 아름다운 폐하와 제국에 협력할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고마워요. 오늘은 곱트교 총대주교께서 정교회 예루살렘 총대주교와 대립하는 모습을 조금은 덜 볼수 있기를 기대하죠.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우리 아들과 친하게 지내줘서 고마워요."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고 그를 지나쳤고, 그는 어머니의 뒤를 따르던 나와 멜리장드를 보며 그 특유의 검은 피부에 도드라지는 흰 이빨을 보이며 씨익 웃고 인사했다.
"지난주에 뵙고 또 뵙는군요. 왕자님. 그리고 오랜만입니다. 멜리장드 아가씨."
"케두스경, 오랜만이에요."
나는 웃으며 그와 인사했지만 멜리장드는 여전히 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은 사기당할 말 대여 고객이 없었나 보네요."
"하하하… 사실 그렇게 말씀하시니 하는 말이지만 오늘 하루 장사 공치는 날입니다. 요즘들어 시국의 불안정함에 위기를 느낀 상당히 많은 상인과 단기 체류자들이 아크레의 항구로 이동해 귀국을 서두르고 있어서 한몫잡을수 있는 대목이거든요. 오늘도 넉넉한 상인들이 좀 웃돈 얹어주는 운임으로 거래하면 다음주에 에라드경과 술이나 한잔하려고 했는데 오늘 이런 일이 있어서 다음 기회로 미뤄야 할 것 같군요. 왕자님, 전에 그 술집에 스페인 와인들이 대량으로 매입되서 싸게 판다고 해서 같이 한번 모실려고 했는데 아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멜리장드의 표정은 더 덜떠름해졌다.
"시국도 불안정한 상황에 무슨 흥에 그리 겨우신지는 잘 모르겠지만 왕자님 데리고 밤놀이 하는건 그만둬주셨으면 좋겠군요. 왕자님은 이곳 성스러운 예루살렘에 그런 유흥이나 즐기러 오신게 아닙니다. 계속 그렇게 밤중에 왕자님을 위체가의 모질이랑 같이 불러내서 여자들이랑 수작부리는 곳에 데리고 다닌다면 저희도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케두스 왕자는 조금 당황하며 사과했다.
"이런… 딱히 여자들이 나오는 곳에 왕자님을 모신적은 없지만 앞으로는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잘생각하셨군요. 다시는…"
"대신 남자들 나오는 술집으로 모시죠. 그런 취향이신줄은 몰랐습니다만, 원래 그런 전통은 서방쪽보다는 이곳 아랍에서 더 유서깊은…"
케두스 왕자가 말하는 와중에 뭔가 한계에 도달하고 뚝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멜리장드는 완전히 뒤집힌 눈으로 곁에 있던 몽고메리 대사에게 말했다.
"대사님, 오늘 아비시니안과의 국교를 영원히 단절하겠습니다."
"안돼!!! 죽이지마! 정신줄 잡아! 정말 그랬다가는 전쟁이야! 칼 집어넣어! 으악으악! 경비병들 몰려온다고! 아니예요. 우리 회담 파토내러 온거 아닙니다!"
케두스 왕자는 몽고메리 대사에게 붙잡혀 바둥거리며 날뛰는 멜리장드를 보며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말하고 잽싸게 자리를 빠져나갔다.
회담에 대한 내 소감을 말하자면… 정말로 지루하기 짝이 없는 회의였다.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종교와 민족과 국가와 단체를 대표하는 유력자들은 저마다 지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며 회의를 주도하려 하였지만, 그곳에 구체적인 실체는 없었다. 다들 자신이 발담그고 있는 세력의 입장만을 고수하며 한치의 양보도 없는 기싸움만 벌이고 있었고, 되려 과거의 사건이나 교리의 차이, 혹은 외교적 미묘한 분쟁과 상업적인 갈등으로 인해 벌어진 간극이 다시 소생하여 초반에 온건한 분위기는 간곳없고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는 갈등의 자리로 남아있었다.
살라딘은 회의의 주인으로서 사람들을 설득하고 서로간의 의견을 같이 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나 그 노력은 큰 성과를 보지 못했다. 어머니도 일단은 제국의 의견을 대표하는 몽고메리 대사의 뒤에서 그가 하는 발언이 바로 뒤에 있는 황제의 의견임을 확인하여 그 무게감을 주고는 있었지만, 워낙에 복잡하고 난해한 신학적인 공격과 배타적인 입장들에 막혀 큰 성과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회의의 목적은 간단했다. 바이바르스가 집권한 이후 이곳 예루살렘의 평화가 유지되고 기존에 아이유브의 위대한 군주였던 살라딘에 의해 약속된 체계가 무너지지 않고 지속되는 것, 하지만 그것을 위해서 모든 이들이 힘을 합쳐도 이루어질까 말까한 상황에 작금의 상황은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는 갈등만을 더 심화시키고 있었다. 보다못한 살라딘은 일어서서 잠시 휴식을 선언하였고, 사람들은 서로 납득하지 못한 얼굴로 일어서서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나는 물끄러미 곁에 있는 어머니를 살펴보았다. 어머니는 많이 피로해 보이셨다. 그리고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흔드는 몽고메리 대사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어머니가 말했다.
"역시, 쉬운 일은 아니구나.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일은…"
어머니의 말에 나와 멜리장드는 할말을 잃었다. 일생을 사람들의 앞에 서서 모든이들에게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셨던 어머니마저도 이렇게 고충을 토로하실 정도라니… 그런 어머니의 피로는 우리 모두에게 전해져 왔다. 어머니가 말을 이어갔다.
"오늘도 어쩌면 큰 수확이 없을지도 모르겠구나. 이미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성지에 대한 수호와 유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는 것 같구나. 그리고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겠지?"
어머니의 말이 끝나자 몽고메리 대사가 입을 열었다.
"폐하, 이미 제국 의회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어려운 것으로 판단하고 폐하의 지침 이후의 일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이미 리마솔에는 이곳에 거주하고 있는 제국의 순례자들과 외무 관료들을 안전하게 후방으로 후퇴시킬 선단이 출발하였습니다. 이제 현실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폐하께서 이곳에 오신 행보는 모든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력이 수반되지 않은 시위는 결국 진압되기 마련입니다. 맘루크들은 제국과의 전쟁을 원치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폐하가 이곳에 머무르시는 상황을 이용하지 않을 만큼 신사들은 아닙니다.
이제 그만 하셔도 됩니다. 폐하는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 누구도 폐하께서 성지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의 회의 결과를 마지막 결과로 받아들이시고 서둘러 이곳을 떠나 로마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이제 곧 이곳은 위험해집니다."
어머니는 몽고메리 대사의 진지한 충언을 듣고 조용히 말했다.
"그대의 의견을 무시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저는 쉽게 포기할 수가 없어요. 물론 답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는 더 큰 위기의 순간도 견뎌내고 이곳에 왔어요. 아직 포기하기는 이르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조금 힘들다는 건 인정해야 할 것 같군요. 갑자기 그리워지네요. 예전 앙주의 시장시절에는 이럴 때 참사회의 멤버들과 티타임을 가지면 어떤 형태로든 해결방법이 나오곤 했는데, 나의 위치는 더 상승하였지만, 내 주변에는 나의 고민을 해결해줄 각료들은 더 이상 없군요."
"폐하, 소신의 부족함을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폐하의 의지를 수행할 의무와 더불어 폐하의 안전을 확보해야 하는 의무도 이곳의 책임자로서 주어져 있습니다. 전자를 수행하지 못한 부족함으로 인해 후자조차도 외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대를 책망하는 건 아닙니다. 그대의 가문은 오랜 세월 나를 지지해준 충신들, 그대의 외삼촌이 앙주에서 화살로 반란군을 제압하고 나를 구했듯이 그대의 의도 또한 충심으로 인한 것을 의심치 않고 고밉게 생각합니다. 잠시… 머리를 좀 식혀야 할 것 같군요. 살라딘공이 준비해준 휴게실에서 잠시 쉬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나도 따라 일어서며 말했다.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아니야, 죤. 혼자 있고 싶구나. 조용한 방에서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맑은 정신으로 생각하면 조금은 나은 방법이 나올지도 모르지. 너도 알아서 휴식을 취하거라. 많이 지루해 보이는 구나."
"아뇨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런 나를 만류한 것은 멜리장드였다.
"그럼 졸지 마시든지요. 예루살렘 대주교가 늘어놓는 정교회 교리가 지루하단건 저도 인정하지만 침까지 흘리시면 외교적으로 망신거리가 됩니다. 어차피 왕자님은 참관만 하러 오셨으니 잠시 나가서 쉬시다 오시는게 어떠세요."
그렇게 티가 났나? 안들키려고 열심히 눈비벼 가며 버텼는데. 나는 조금 머쓱해져서 머뭇거렸고, 어머니는 나를 보며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셨다. 나는 어쩔수없다는 듯이 내심 지루한 회의장을 빠져나오는 것에 기뻐하며 건물 밖으로 나왔다.
처음에는 그냥 멍하니 회의장 주변을 서성이며 걸었다. 예정이 없이 밖으로 나온 덕에 대사관으로 돌아가 에라드와 체스라도 둘까 고민하던 찰라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오랜만이네, 아이샤. 오늘은 장사 좀 잘돼?"
"아, 왕자님, 오랜만이시네요."
"어? 내 신분 알았나?"
"왕자님이 다녀가신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소문으로 들었어요. 사실 얼마전에 먼발치에서 한번 뵌적도 있었구요."
"아, 그래? 그럼 와서 아는 척 좀 하지 그랬어?"
"아, 그날 왕자님 동료분 두분이랑 주정뱅이들에게 쫓겨서 도망가시고 계시는 와중이셔서 붙잡으면 민폐가 될 것 같아서…"
"요즘은 좀 신통치가 않아요. 성지를 꽃으로 장식하는 건 여자 순례자분들에게 인기있는 상품인데 요즘 시국이 안좋다보니 여성 순례자분들이 많이 줄어들었어요. 그리고 몇안되는 여자 순례자분 들도 다들 저 같은 행상이 아니라 소매치기의 위험이 없는 정식 가게에서 사는 분들이 많아서 장사가 좀 여의치는 않아요."
"흐음… 그런가? 고생이 많았겠구나."
난 그렇게 말하고 아이샤를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보았다. 좀 우스꽝스러운 하레디 복장을 한 그녀는 여전히 팔과 얼굴에 멍과 상처자국이 많았고, 몸은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깡말라 있었다. 나는 저번에 봤을때보다 늘어난 그녀의 상처를 보며 물었다.
"왜 장사가 안되는지 이해가 갈만도 하다. 온몸이 상처투성이구나… 이래서야 어지간한 순례자도 감히 와서 꽃을 사겠니? 상처난 아이를 보면 구해주려 하기 보다는 일단 자리를 피하는 게 요즘 세상에 상식이지. 대체 왜 이렇게 다친거니? 넘어졌다는 어설픈 거짓말은 하지마. 내가 원래 좀 얻어 맞는 거에 경험이 많아서 이 상처가 넘어진건지 얻어맞은건지는 확실히 구별할 수 있어."
그녀는 조금 머뭇거리며 대답하였다.
"저기… 사실은… 노래를 불렀어요."
"노래를? 근데 왜?"
"하레디들은 여자가 노래를 부르는 것도 금지해요. 요즘 들어 워낙에 장사가 안되서 호객을 하려고 외치는 말에 리듬을 담았는데 그걸 노래라고 생각한 오빠가 제게 신앙의 교훈을 주셨어요."
나는 기가 막혔다. 어린 여동생을 생계 전선에 내몬것도 모자라서 얼토당토 하지도 않은 이유로 폭력까지 행사했단 말인가? 나는 기가 막혔지만 뭐라 말할 수도 없었다. 어린 시절 노래를 좋아했기 때문에 꾸지람을 들어야 했던 기억은 내게도 있었다. 이유는 조금 달랐지만 나는 그녀에게서 내 자신을 겹쳐 보았고, 그래서 어설픈 위로나 동정이 그녀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을 뼈저리게 잘알고 있었다. 나는 그래서 애써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이렇게 하자. 내가 노래를 불러서 호객하는 걸 도와줄께."
"안되요, 그러시면."
"내가 왕자라서 그런거야? 걱정하지 마. 어차피 쫓겨난 왕자가 성지에서 무슨 행패를 부리건 아무도 신경 안써. 그냥 어머니는 쓴웃음을 지으시고, 멜리장드가 얼굴을 찌푸리는 정도겠지."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라요, 호객에 도움을 주시려면 왕자님도 공동 판매자로 간주해야 해요. 그러면 제가 혼자서 벌어들인 돈을 가질 수 없어요. 그건 상도덕상 동업자에 대한 배신으로 봐요."
뭐랄까나… 앞니가 빠지고 온몸이 멍투성이가 되서 힘겨운 거리 행상을 하는 이 아이의 이런 원칙은 나로서는 조금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건 그녀 개인의 개성인 것일까? 아니면 유대인 특유의 종교의 광신적인 집안 분위기로 숨길수 없는 특성일까? 하지만,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고 자신의 원칙을 고수하는 그런 모습을 싫지 않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네가 나를 고용해. 그리고 수익의 일부를 나누면 되잖아. 판매 대금의 5%! 그걸로 내가 네 종업원이 되어 줄께. 그러면 되겠어."
나의 말에 그녀는 조금 감격한듯 그제서야 조금 웃으며 말했다.
"왜, 저에게 그렇게 잘해주시는 거죠? 전 왕자님과 아무런 인연도 없는 그냥 지나가다 만난 유대인 행상일 뿐인데요."
"뭐, 굳이 말하자면 너를 보면 내 여동생이 떠올라서 내버려둘 수가 없고, 내가 경험한 조금 답답한 경험을 겪고 있는 것 같아 동질감이 들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난 음유시인이야. 네가 꽃을 파는 일이 네 직업이듯 노래를 부르는게 내 직업이야. 그러니깐, 같이 콜라보레이션으로 한번 작업해보자구. 고용주 아가씨? 콜?"
"콜! 하지만 수수료는 10%. 정당한 대가로 고용하겠습니다. 낮은 수수료라고 태업을 하면 곤란하니깐요."
"5%! 그리고 나머지 5%는 남은 꽃 재고로 가져가겠어."
나는 왕자의 의복을 갈아입고 평소에 들고 다니던 좀 낡은 음유시인의 옷으로 갈아 입고, 마음을 실어 하프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다. 시국이 어수선했지만, 노래는 언제나 사람을 이끈다. 뭔가 젊은 시절의 실연담 같지만 결코 쓰지 않은 내 노래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들려서 그녀의 꽃을 구매해 주었고 생각보다 수완이 좋은 그녀는 몰려온 고객들에게 시국의 위급함을 강조하며 가족과 연인에게 꽃으로 마음을 달래주라는 충고를 하며 순식간에 쌓인 꽃들을 팔아치웠다. 그래서 두시간 정도 지나자 모든 재고가 완판되는 최고의 결과를 낳았다.
"와… 오랜만에 정말 신나게 장사한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왕자님. 여기 수수료."
나는 여전히 아까전의 여운을 담아 하프를 연주하며 한손으로 그녀의 대금을 받고 웃으며 말했다.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네. 그리고 내 노래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더 즐거워.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노래를 연주하는게 내 꿈이었어."
그때였다.
"짝짝짝…"
어디선가 박수소리가 들렸다. 장사를 마무리 한 후 건물뒤로 돌아와 인적이 드문곳에서 정산을 하고 있던터라 누가 올거라고는 생각치 못했던 상황이라 당황했다. 박수소리가 들린 곳에서 한 청년이 나오며 걸어왔다.
"좋은 노래군요. 마음을 움직이는 음색이었습니다. 아직 실력은 좀 미숙하지만 오랜만에 좋은 노래를 들었어요. 괜찮다면 한곡 더 부탁해도 될까요?"
청년은 대략 20대후반 정도로 보이는 프랑크인이었다. 단정하게 빗어내린 금발 곱슬머리에 잘 손질된 기사의 복장을 동작과 행동에 품위가 서려있는 마치 동화속에서 당장 튀어나온 것 같은 멋진 왕자님, 혹은 기사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웃으며 내게 다가왔고, 한동안 할말을 잃고 있던 나를 대신해 아이샤가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손님. 오늘 영업은 끝났습니다."
"나는, 꽃이 아니라 노래를 듣고 싶습니다. 레이디. 꽃이야 재고가 없으면 더 이상 팔 수 없겠지만 노래는 가수가 있다면 언제든 불러줄 수 있으니깐요. 가능하다면 나를 위해 한곡 더 불러줄 수 없을까요?"
나는 조금 얼떨떨하면서도 그의 칭찬이 싫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봐도 상당히 고귀한 신분으로 보이는 그 청년은 정중한 태도로 지금 얼핏봐서는 왕자라기 보다는 음유시인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나에게도 존대를 하고 있었다. 그건 우리 어머니 같은 경우가 아니면 아직 서방측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다. 나는 조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음유시인은 언제나 노래합니다. 손님을 위해서는 어떤 노래를 들려드릴까요? 감미로운 사랑의 이야기? 용맹한 기사들의 무용담? 아니면 성자의 거룩한 고행? 원하시는 노래를 말해주세요."
그는 조금 의미신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흐음…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의 이상을 위해 세상과 싸우며 나아가다 절망하지만 다시 일어서는 왕자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당신이 가장 잘하는 노래를 듣고 싶군요."
"그런가요? 그러면 들려드리겠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를…"
그리고 나는 아이샤에게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구하고 뒷골목에 후미진 틈에서 두사람의 청중을 위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다 끝나고 눈을 감고 음미하던 그가 만족한듯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 말했다.
"훌룡합니다. 좋은 노래였어요. 별을 쫓는 아이들의 이야기로군요."
"만족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아직 조금 미숙해서…"
"네에, 중간에 C#부분을 현을 바꾸는 부분이 버릇처럼 틀리시더군요. 그래서 노래 자체도 살짝 틀린 음에 맞춰서 부르는 것 처럼 들렸구요. 하지만 뭐 어떻습니까. 노래는 가수의 것, 당신이 부르는 노래가 바로 당신의 노래겠지요. 잘 들었습니다. 여기 사례금입니다."
그가 내민 것을 보고 나와 아이샤는 눈이 휘둥그레 졌다. 그가 내민 것은 상당한 두께의 비잔틴 금화였던 것이다. 내가 말했다.
"이런 큰 돈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아뇨, 사례로서는 이 정도가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럴수는 없어요. 손님도 지적하셨지만 미숙함이 남은 노래입니다. 이런 큰돈을 받을 수는 없어요."
그가 조금 진지한 표정으로, 하지만 얼굴에서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말했다.
"당신의 노래는 그 정도의 가치가 있습니다. 왕자의 노래를 그리 쉽게 들을 수 있는건 아니니깐요. 그러니 받아도 됩니다. 죤 왕자님."
순간, 나는 멈칫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에게 물었다.
"당신… 누구죠?"
그러나 내가 당황한 것과는 달리 그는 여전히 온화한 표정이었다. 그는 일어서서 한걸음 나에게 다가오며 대답했다.
"제 이름은 샤를입니다. 당신의…"
그의 말은 끝나지 못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와 나 사이에 뭔가가 번개처럼 지나쳤다.
'휘리릭! 짜악!"
그리고 동시에 누군가 외쳤다.
"물러서! 왕자!"
나는 내 눈앞에 지나친 그 물건이 채찍이라는 것을 지나간 후에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말과 동시에 소리친 목소리가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리고 바람처럼 나타나서 내게 등을 보이고 눈앞에 샤를이라 밝힌 자에게 칼을 뽑아들고 경계하듯 서있는 사람이 얼마전 내가 꽃을 주었던 그 그리스 소녀라는 걸 알게 되었다.
"당… 당신은… 당신이 이곳에 어떻게…"
"물러서라고! 젠장할, 지금 당장 내 뒤로 물러나. 죽고 싶지 않다면."
그녀는 왠지 화가 나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내 뒤에 서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당황하고 있는 아이샤에게 고개를 끄덕여 물러서라고 말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설명을 해줘요. 당신이 왜 갑자기 나타난거죠? 그리고 죽는다뇨? 그게 무슨 소리예요. 설명을 해줘야 알아들을 것 아닙니까."
그녀가 이를 갈듯이 엇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이 한심한 인간아… 지금 네가 누구랑 같이 있는건지 알고는 있는거야? 지금 네 눈앞에 있는 저 자식은 당장 네 놈의 목을 잘라서 길바닥에 내던질, 능력과 이유가 있는 놈이라고."
그녀의 말에 나는 그제서야 샤를을 바라보았다. 그는… 대단히 평온하고 태연하게 서있었다. 그리고 좀 억울하다는 듯이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내가 뭘했나요? 난 그저 성지를 방문한 순례자이고 마음에 드는 노랫소리에 끌려 한곡을 청했을 뿐인데요. 이곳은 모든 종교와 민족에게 평화가 허락된 도시, 내가 보기에는 이곳에서 가장 위험해 보이는 사람은 바로 당신인 것 같은데요. 전 그냥 노래를 듣고 대가를 지불하였을 뿐 그에게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았습니다만."
그리고 나는 그의 말을 살짝 거들었다.
"그건 사실이예요. 그는 아무런 위해도 우리에게 가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녀는 더 분노한듯 소리쳤다.
"입닥쳐! 죤, 이 머저리 왕자야. 넌 아무것도 몰라.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저 녀석이 누군지 알아? 저 녀석은 바로 샤를 카페, 템플기사단장이고, 너희 제국에 멸망 당한 프랑스의 왕자이고, 반 제국, 반 개혁파 교회 진영의 선봉에 서서 너희 모친인 제국의 황제 폐하를 여러 차례 시해하려 했고, 실제로 거의 성공할 뻔 했던 녀석이라고."
그녀의 말이 끝나자 나는 그제서야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닭고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온화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확실히… 내가 샤를 카페인건 맞습니다. 하지만 아가씨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제국이 나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가버려 그 제국과 오랫동안 싸워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칼을 뽑자마자 목을 떨궈버릴 거리에 다가와서 나를 위해 노래를 불러준 왕자를 시해하고 그걸로 대리만족을 할만큼 타락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오늘은 인사 정도로 한번 만나보길 바랬던 것 뿐입니다. 그러니, 내가 달갑지 않다면 이만 먼저 일어서도록 하죠."
그는 여전히 경계를 풀고 있지 않은 그녀를 등지고 골목길을 향해 걸어나갔다. 그리고 문득 생각이 난듯, 멈춰서서 고개를 돌려 나를 돌아보며 금화를 집어던졌다.
"받아, 죤. 난 너의 모친의 철천지 원수이니 존댓말은 그만두도록 하지. 그리고 못믿겠지만, 난 너에게는 아무런 감정이 없어. 정말로 너의 노래는 마음에 들었고, 그녀가 오지 않았다면 난 그 금화를 주고 그대로 내 신분을 밝히지 않고 조용히 떠났을꺼야. 그 돈은 받아도 돼. 왕자의 노래에 적당한 대가야.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둘이서 어느 조용한 퍼브에 앉아 노래와 세상의 일에 대해 얘기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군. 그런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때까지 잘 지내라구."
난 얼떨결에 받아든 금화를 듣고 그의 떠나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떠나고 나서 한참 후에야 내 앞의 그녀는 경계 태세를 풀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멍청하다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정신이 있는건가요? 없는 건가요? 지금 당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어요?"
나는 그녀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다시 만났다는 것에 조금 감격해서 별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 당신이 여기서 죽는다면 그 후의 일이 어떻게 될지 생각을 하고는 있는 건가요? 지금 당연히 예루살렘의 대책회의에 참석해서 폐하와 동석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휴식시간에 빠져나가서 이곳 뒷골목에서 누더기를 걸치고 수십년간 제국을 괴롭힌 만악의 근원에게 푼돈을 받고 노래를 불러줬다고요? 빌어먹을, 개가 웃을 노릇이네. 멍청하면 수치심이나 자기 목숨 위험한 것도 모르나요?"
그녀의 말에는 비수가 실려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그 말에 아무런 대꾸를 할 수가 없었고, 그런 나를 대신해 그녀에게 대답한 것은 아이샤였다.
"위험하지 않았어요."
"뭐?"
"위험하지 않았어요. 제가 똑똑히 봤어요. 그가 차고 있던 칼은 힐트와 패링이 잠금 고리로 잠겨져 있었어요. 그는 기습할 생각이 없었던 거예요. 만약에 그게 풀린 상태로 우리에게 접근했다면 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왕자님을 큰 거리로 피신시켰을 거예요."
"장검만 잠겨있으면 그가 저 멍청이를 못죽일거라 생각하니? 단도를 던질수도 있고, 순식간에 잠금을 풀고 칼을 뽑을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면 달려들어 목을 조를수도 있어."
그런 그녀의 반박에 아이샤는 지지 않고 대답했다.
"그랬다면 제가 막아섰을 거예요. 제가 그를 막고 있는 동안 왕자님은 도망칠 시간을 벌수 있었을꺼예요."
"네가? 네가 뭔데 그를 위해 목숨을 걸고 막아서는데?"
그녀의 말에 아이샤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저는 그의 고용인입니다. 오늘 하루 고용 계약을 맺었고요. 오늘 하루가 지나기 전에 고용인은 영업중에 발생하는 피고용인의 안전을 책임질 의무가 있습니다. 그게 상도덕입니다."
아이샤의 당찬 대꾸에 그녀는 머리가 아픈듯 손으로 머리를 쥐어짜며 대답했다.
"그래, 너 잘났다. 그리고 당신도 참 훌룡하군요. 좋은 고용주를 두셔서 안전 보장을 받아서요. 어디가서 죽을 염려는 없겠네."
나는 여전히 비꼬듯 말하는 그녀에게 말했다.
"근데,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뭐요?"
"당신도 내가 위험하다고 판단해서 그를 막아서려고 뛰어든거 아닌가요? 그러고 보니 감사의 인사를 잊었군요. 고마워요. 어찌되었건 위기에서 나를 구해주려 몸을 던져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그녀의 얼굴이 순간 새빨개졌다. 그녀는 저번 만남과는 달리 오늘은 얼굴에 망사를 드리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그리스인인듯 하지만 아르메니아 느낌의 조금 가무잡잡한 피부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내 개인적인 감상으로 말하자면… 정말 대단한 미인이었다. 토라진 듯 새침해진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그래서 그녀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조금 용기를 내서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고, 그녀는 조금 얼굴을 붉히며 여전히 화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착각하지 말아요. 난 당신이 죽으면 앞으로 우리 비잔틴과 당신 제국과의 동맹 관계에 악영향을 줄까 두려워 행동한 것 뿐이니깐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몸을 돌려 골목길을 먼저 빠져나갔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물었다.
"보답을 하고 싶어요. 이름과 사는 곳을 알려주세요."
그녀가 멈춰섰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당신에게 보답따윈 바라지 않아요. 그러니 당신에게 내 이름과 사는 곳을 알려줄 이유는 없군요."
"그럼 이름만이라도 알려줘요. 은혜를 잊지 않을께요. 이미 당신은 내 이름을 알잖아요. 당신만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는 건 불공평해요."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듯 하다가 대답했다.
"에스더…"
"아, 에스더… 성경에서 따온 이름이군요. 기억하기 쉽겠어요. 고마워요, 에스더. 나중에 다시 만나요."
그러나 그녀는 아무말 없이 그대로 몸을 돌려 떠나갔다. 나는 조금 씁쓸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돌아보지 않는 그녀에게 말없이 손을 흔들었다.
아이샤와 헤어진 후 다시 회의장에 발걸음을 향했을때는 어느덧 저녁무렵이 되어 가고 있었다. 회의장 입구에서 내가 너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자 나를 찾아 헤맨듯 보이는 멜리장드에게 잔소리를 실컷들어야 했다. 그리고 잔소리가 지겨워서 말을 돌리려 물어봤다.
"근데 말이지, 샤를 카페라는 사람이 그렇게 대단한 자인가?"
그리고 나의 질문에 멜리장드의 표정은 뭔가 지옥의 사탄을 묘사하는 듯한 표정으로 돌변했다.
"우리 제국의 태생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숙적이자 치떨리는 적진의 수장입니다.
애초에 폐하께서 세상에 모습을 처음으로 드러내신 제 2차 앙주 공방전도 그의 태생과 연관이 있습니다. 프랑스 왕실은 앙주를 손에 넣은 뒤에 영지가 외국으로 이탈하는 것을 막기 위해 왕실의 근친들에게 분봉과 참사회의 요직을 주는 정책을 고수했는데, 앙주와 베리의 영지를 프랑스의 손에 돌려주는 가장 큰 공을 세운 조슬랭은 왕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권력을 많이 빼앗겼지요.
그 내막에는 왕의 최측근으로 떠오른 샴페인 공작과의 첩보관의 자리를 둔 암투가 있었습니다. 샴페인 공작은 조슬랭의 실권을 빼앗기 위해 조슬랭이 왕의 서자를 다음 후계자로 지지한다는 소문을 퍼트렸는데, 그 소문에 조슬랭의 저의를 의심한 왕은 잉글랜드에 침공당한 앙주를 구원하는데 열성적으로 임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조슬랭은 실의에 빠져 죽고, 그를 대신하여 항복하러 간 폐하께서 세상에 자신의 명성을 떨치기 시작하셨죠. 그때 그 조슬랭이 지지한다고 소문이 난 왕자가 바로 샤를 카페입니다.
결국 그가 없었다면 프랑스는 앙주를 그리 쉽게 포기하지 않았고, 제국의 시작이 되는 폐하의 첫 시련 또한 없었을 거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아무튼 왕의 애첩에게서 낳은 자식이라 후계자로서는 거리가 멀었지만 어렸을때부터 영특해서 우리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후덜덜한 조언을 많이 했다고 하더군요. 3차 앙주공방전에서 상륙지점이 브루타뉴가 아니라 노르망디로 정해서 신속한 공세를 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4차 앙주공방전에서는 물자의 상황을 고려해 프랑스군이 아닌 베드포드의 군세만으로 앙주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하더군요.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이지 우리 제국이 몇번이고 곤경에 처할 행동이었지요. 그런 그의 행보는 이베리아 종교 전쟁에서 더 심각한 위협이 되었습니다. 전쟁전에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교회 보수파의 십자군 운동 재개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서 왕으로부터 템플기사단에 가서 복무하라는 명을 받고 내쳐졌다고 하더군요. 결국 프랑스의 제국을 곤경에 처하게 하려는 교회측의 압박은 실패로 돌아가고 제국과 신성동맹의 이베리아 종교 전쟁이 발발하게 되죠. 그는 프랑스가 제일 먼저 망할걸 알고 템플기사단에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해 프랑스의 전력을 최대한 보존해서 탈출시키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는 과감하게 프랑스를 버리고 거둔 병력들을 템플기사단에 합류시켜 이베리아로 몰고가서 전쟁터에서 신성동맹의 주력으로 활약했습니다. 하지만 제국의 상승세는 그로서도 막기 힘들었고, 에라드경이 이끄는 제국군은 이베리아를 평정하는게 성공하였죠. 하지만, 전쟁의 막바지에 그는 오랫동안 준비해온 듯 아스트리어스의 배반을 이끌어내서 황제폐하의 목숨을 노려, 단번에 전세를 역전시키겠다는 계획, 라만차 전투를 기획하였으나 결국 그것도 실패로 돌아가버렸죠. 하지만 전문가들은 그 당시 라만차에서 대패당한 부대는 대부분 아스트리어스군이고 템플나이트는 전력을 보존하고 되려 카스티야와 레온의 병력들도 합류해 세를 더 키워서 전장을 이탈한 걸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교활하고 잔인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반 제국 진영의 가장 두려운 상대입니다. 그의 부친인 샤를 국왕이 다른 아들들과 같이 사망해 실질적인 프랑스의 유일한 강력한 계승권 보유자이기도 하지요. 어지간하다는 마틸다 위체도 그의 행보에 대해서는 뜬눈으로 밤을 새며 주시한다는 소문이 있는 두려운 자입니다. 근데… 왕자님께서 그에게 관심을 가지시다니 의외시네요. 무슨 계기라도 있으셨나요?"
나는 멜리장드의 말에 정말로 그 상황이 벙상치 않은 상황이었음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에 빠져 지나가듯이 말했고…
"좀전에 잠깐 만났어. 노래 한곡 불러주고 대가로 과도한 대금을 삥뜯었고."
이어진 멜리장드의 눈이 어머어마하게 커지고 소리없는 괴성을 질러대는 모습을 애써 무시해야만 했다. 나는 시선을 돌려 회의장을 바라보았다. 복도에서 보이는 회의장의 모습은 이제는 맥이 빠진 모습이었다. 몇몇 인사들은 중간에 회의장을 빠져나갔는지 공석들이 눈에 띄었고, 사람들의 발언도 이제는 기운이 빠진 것 처럼 보였다. 여전히 힘이 넘치는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쓴 하레디 유대인들의 대표들 뿐이었다. 그들은 오전과 변함없는 태도로 성지는 오로지 자신들의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었고 다른 대표들은 그런 그들의 만행에 넌더리를 내고 있었다. 오늘 회의도 별다른 소득은 없을 듯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이… 이게 무슨 소리지?"
건물 밖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나는 여전히 눈을 휘둥그레 뜨며 상황분석을 못하고 있는 멜리장드에게 물었다. 그러나 멜리장드라고 해서 달리 알수는 없을 듯 했다. 다행히도 내 궁금함은 곧 풀렸다. 그것은 수십명의 무장한 병사들이 말을 달려 회의장에 도착하는 소리였고, 그들은 제제하는 경비병들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사나운 표정으로 회의장의 안에 난입했다. 2층 복도에서 그것을 보고 있던 나는 화급하게 다른 통로를 통해 회의장에 들어갔다.
"이게 무슨 짓이냐!"
살라딘이 일어서서 난입해 들어오는 병사들에게 일갈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회의장 입구에 칼을 들고 위협적인 자세로 통로를 확보했고 이윽고 그들 사이로 한 사나이가 들어왔다. 약간 러시아인 같은 느낌을 주지만 이곳에 오래 살았던듯 구릿빛으로 그을려 현지인과 별차이가 없어 보이는 화려한 맘루크 제식 복장을 입은 그는 오만한 태도로 건들거리며 회의장에 들어와서 소리쳤다.
"다들 여기 모여있었군. 시간 낭비를 줄였어. 이곳에서라면 한번에 해결할수 있겠군.
"네 이놈… 바라카, 이게 무슨 짓이냐?"
살라딘은 바라카라 부른 그 사나이에게 화를 내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살라딘을 보며 말했다.
"오랜만이군요. 살라딘공. 성지의 수호자여. 여전히 그 계집애 같은 얼굴은 여전하시군. 오늘 나는, 이곳 예루살렘에 우리 위대하신 나의 부친, 맘루크의 지도자, 승리를 가져오는 자, 신자들의 지휘자 바이바르스의 명을 전하러 이곳에 왔소이다. 마침 이곳에 이교도와 불신자들과 이단자들이 모두 모여 있으니 여러 번 말할 수고를 덜었군.
아이유브는 이제 끝났소. 이제 앞으로 이 땅의 통치는 위대하신 우리 바이바르스께서 주관하실 것이오. 그래서, 지금까지 나약한 아이유브의 통치자들이 서방의 불신자들과 맺어온 수치스러운 예루살렘, 성지에 대한 약속은 파기될 것이오."
그의 말이 끝나자 수많은 사람이 당황한 듯 웅성서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앞으로 두번더 초승달이 떠오를 때 이곳 예루살렘에 주어진 아이유브의 통치권을 박탈할 것이오. 그리고 그 이후 이곳에서는 오로지 진리를 섬기는 자들만이 거주할것을 허락받을 것이며 그때까지 남아있는 모든 불신자들은 신의 뜻에 따라 결정될 것이오."
이어진 말에는 사람들은 웅성거림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나 역시 숨을 죽이고 그의 말을 들었다. 내 곁에 있는 멜리장드가 그의 말을 해석했다.
"초승달이 두번이면… 앞으로 두달 그 안에 이곳을 인수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신의 뜻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은… 아마도 그들의 지금까지의 방식으로 보건데 그들의 종교가 아닌 자들은 모두 노예로 삼겠다는 뜻인 것 같군요. "
"뭐? 어떻게 그런 무도한 짓을… 여기 무슬림이 아닌 사람이 몇 명인데…"
그리고 나의 항의는 살라딘의 입에서도 비슷하게 터져나왔다.
"너희가 무슨 권리로 위대하신 살라딘의 뜻을 무시하고 이런 무도한 짓을 저지르느냐. 이미 예루살렘을 오랜 시간 그 어느 쪽도 편들지 않고 이 땅에서 중립을 지켜왔고 그 대가로 불간섭을 용인받았다. 너희 마음대로 그것을 저버릴 권리는 누가 주었더냐."
"이런이런… 진정하시죠. 살라딘공. 예쁜 얼굴에 주름 생깁니다. 아직도 모르시겠소? 이제 아이유브의 세상은 끝났소. 앞으로는 우리 맘루크의 시대요. 혈통과 전통은 혁파되고 실력을 가진 자가 힘으로 자신의 것을 되찾을 것이오. 옛 영광을 추억하는 상전의 일족이여. 그대들은 이제 이 땅에서 멸족될 것이오. 이미, 칼리프는 우리 맘루크의 손을 들어주었소. 이제 선조가 만들어준 달콤한 꿈에서 깰 시간이요."
살라딘은 분노하여 이를 갈며 대답했다.
"네까짓 놈들이 감히 이곳의 평화를 지켜온 시간을 달콤한 꿈으로 비하하다니…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는지 감히 너희가 상상할 수 있을성 싶더냐! 뭐든지 때려부수고 가로막는 것은 죽여 없애며 전진한 네놈들에게는 무가치해 보이겠지만 이곳의 평화는 꿈과 이상이 아닌 고통과 현실에서 세워진 것이다. 결코 너희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감히 이곳을 가지겠다고? 그 여파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
그의 말이 끝나자 그를 지원하려는 듯 여태 말없이 있던 어머니가 몽고메리 대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일어섰다.
"제국은 이 부당한 방침에 대해 항의합니다. 그리고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라카, 당신의 부친인 바이바르스는 그것을 감당할 자신이 있다고 하던가요?"
그러나 바라카는 최강대국의 지존의 앞에서도 여전히 유들유들하게 빈정대며 말했다.
"오, 위대한 제국의 여제시여. 라틴족들의 남자들이 모두 거세라도 당했는지 여자를 황제로 모셔 이곳에 보내니 뵙게 되어 영광스럽기 그지 없나이다. 나의 부친께서는 폐하의 의지는 감당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제국 의회와 제국 외무부의 방침은 감당하실 생각이시더군요. 전쟁을 원하신다면 해보시죠. 타국의 내정간섭과 제국 의회의 반대라는 무리수를 무릎쓰고 당신께서 자랑하는 퀸스가드를 이곳에 보내보시죠. 어떤 결과가 나올지 저의 부친이 몹시 궁금해 하시더군요."
어머니는 한방 먹었다는 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바라카는 말을 이어나갔다.
"여기 있는 모든 자들은 이제 똑똑히 들었으리라 생각하고, 물러나겠소. 자, 서두르시오. 우리 맘루크는 관대하여 그대들이 이곳 성지에서 올릴 마지막 의식을 기다려 줄것이오. 그리고 나서 이곳에 남은 더러운 이교의 기운을 몰아내고 우리 신앙의 기둥을 다시 세울 것이오."
그리고 그는 의기양양하게 뒤돌아 회의장을 빠져나갔고 그를 따라 그의 호위병들도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은 망연자실하게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깬 것은 살라딘의 낮은 목소리였다.
"이렇게… 성지의 평화도 끝이 나는군요. 이제 이곳에는 전갈과 채찍을 든 자들이 자신의 믿음만을 진리로 세우고 다른 이들을 핍박하기 시작할겁니다. 어떻습니까? 이제 속이 시원하신가요? 그토록 자신들의 입장만을 주장하며 의견을 모으지 못하고, 결국 성지에 내려진 사형선고를 받을때까지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각자의 소중한 것 들을 잃은 다음에서야… 다른 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생각이 드나요?"
누군가 억울하다는 듯이 살라딘에게 말했다.
"성지의 수호자시여, 이것은 우리로 인해 야기된 일이 아닙니다."
"네, 그렇죠. 여러분의 잘못이 아닙니다. 다 저의 불찰이고 저의 과실입니다. 저의 책임이지만 그 대가는 모두가 함께 지게 되겠죠. 이제 성지는 끝났습니다. 바라카의 말처럼, 앞으로 두달안에 맘루크는 자신들의 정권 수립을 선언하고 이곳을 인수하러 들이닥칠 겁니다. 그리고 새로운 이 땅의 통치자가 저처럼 여러분들을 존중하고 이웃과 빵과 물을 나누길 소망하는 자이길 바라는 건 무리한 희망일 것 같습니다. 돌아가십시오.
이미 각국에서는 대책회의와 무관하게 현지 체류자와 순례자의 탈출 계획을 어느 정도 수립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작별인사는 필요없습니다. 그들이 오기 전에 이곳을 떠나십시오. 이제 이곳에서 순례자의 안전은 보장되지 않습니다. 남아있는 자들은 모두 그들의 포로가 되어, 몸값을 지불할 수 없는 자는 노예로 전락할 것 입니다. 그들에게서 피신하십시오. 서두르세요."
그는 그 말을 남기고 그의 호위병들과 함께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그가 말을 마치자 그곳에 참석한 수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벌집을 쑤신듯 들고 일어나 논쟁을 벌이고 아우성을 쳤다. 그리고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회의장을 빠져나와 성지를 빠져나갈 배편을 알아보기 위해 항구로 향했다. 나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회의장에서 멍하니 앉아 조금 슬픈 눈빛으로 점점 비어가는 공간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다가가 어께에 손을 얹고 말했다.
첫댓글 1등이다! 잘 보고 갑니다.
이제 중동의 평화가 결단났으니 주인공은 발리앙이 되거나 샤티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중간에 개인정보가 공개되고 중복부분도 보이니 수정하는 것이 어떨까요?
우째 스크롤이 좀 긴 기분이 들더니... 수정하였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등!!
살라딘! 당신의 노예가 돌아왔소! 예루살렘을 파멸시키고 말 것이요!(..)
이렇게 된 이상 지하드와 십자군이 동시 발동돼야겠네요ㄷㄷㅜㅜ
카페가의 왕자는 매력 천재 강인함 트레잇 보유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