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5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마태오 18,19ㄴ-22
통일을 원하면 북한에 도움을 청하라
남북통일은 우리 민족의 숙원입니다.
그러나 젊은 세대들은 왜 큰 비용을 들이며 이념도 다른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어버린 이들과 참아가며 살아야 하느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는 결혼과 아기를 낳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왜 그런 고통을 분담하며 결혼해야 하고 아기를 키워야 하는 말과 같습니다.
어떤 누구도 자신에게 더 큰 이익이 오지 않으면
그런 일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통일에 대한 생각도 조금은 달라져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일곱 번에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내용입니다.
저는 이것이 반은 맞는 복음이지만, 동시에 반은 맞지 않는다고 봅니다.
내가 용서해 주는 사람이라면 상대는 용서받는 사람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둘이 화해가 이루어질까요? 화해는 쌍방의 이익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나는 무조건 손해 보고 상대는 무조건 용서받는 식의 화해는 좋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대부분 “통일하면 너희가 얼마나 좋은 줄 알아?”라는 마음으로 다가가려 하는 것 같습니다.
“너희에게는 자유도 없고, 돈도 없고, 종교도 없고, 기술도 없으니 내가 도와줘야 해!”라고 하면 상대는 자존심이 상합니다.
그런데 참 행복은 돈과 명예나 성공이 아니라 자존감입니다.
자존감이 무너지면 자존심만 남습니다.
그 자존심이 우리 통일을 저해하게 할 것입니다.
‘스탠리 밀그램’은 상황의 힘을 이해하기 위해 사람을 죽을 수도 있는 정도까지 전기충격을 가하게 하는 유명한 실험을 한 심리학자입니다.
한 번은 어머니가 지하철에서 자신에게 누구나 자리를 양보해 주지 않는다는 푸념을 듣고는, 무조건 도움을 청하면 사람들은 어느 정도 도와줄 준비가 되어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대학원생들을 시켜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해달라고 무조건 청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예상보다 두 배 정도나 높았습니다.
이 요청을 받은 사람 중의 68%가 자리를 양보해 준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 실험에 참여한 대학원생들이 다시는 그런 실험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밝힌 것입니다.
왜 그런 상처들을 받았는지 궁금해서 밀그램이 직접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청해보았습니다.
물론 70% 정도가 자리를 양보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앉는 순간 기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굶을 수도 있고 죽음까지 받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절대 내가 더 주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상대의 자존심을 깎아내려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것은 ‘가스라이팅’, 곧 심리적인 지배를 통해 상대를 이용하려는 이들이 쓰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이미 초등학교 고학년인데도 밥을 먹여 주고 양치질과 세수를 시켜 주고 학교까지 바래다준다면, 지금이야 엄마가 그렇게 하게 허락하겠지만, 나중에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자신의 탓을 엄마에게 돌릴 것입니다.
일방적인 관계는 부담스럽게 만들어 상대를 떠나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한 번은 적십자에서 일을 하는 유럽 사람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북한과 한국으로 오가며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어느 나라 사람들이 더 행복해 보이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북한 사람들의 표정이 훨씬 맑고 밝고 웃음기가 많았다고 말했습니다.
한국 지하철에서 그는 웃는 사람을 단 한 사람도 못 봤다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통일되면 그들이 우리에게 더 큰 피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더 준다고 생각하고 만나는 관계는 언제나 갑을 관계이지 친구가 되는 관계가 아닙니다.
북한을 찬양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우리는 먼저 통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우리의 처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지금의 우리나라는 저출산율과 경제성장률 둔화 때문에 어쩌면 유일한 돌파구가 통일일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우리가 북한을 더 필요로 하니 북한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는 처지입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을 지독히도 미워하는 정적이 있었습니다.
프랭클린은 그 상대가 자신이 읽고 싶은 귀한 책을 한 권 소유하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에게 그 책을 좀 빌려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는 순순히 책을 빌려주었고 프랭클린은 잘 읽고는 너무 좋은 책이라는 감사와 함께 돌려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죽을 때까지 벤저민 프랭클린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북한과 우리 가족, 그리고 모든 이웃에게 나아가야 하는 자세입니다.
모든 관계의 기본은 겸손입니다.
친구가 되려면 도움을 청하십시오. 많은 친구를 얻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25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마태오 18,19ㄴ-22
북녘 동포들을 좀 더 알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또 다시 오랜 분단의 세월을 돌아보며, 안타깝고 속상한 마음을 애써 달래야 하는 날이 돌아왔습니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특별히 오늘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정해,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위해 좀 더 적극적으로 기도하고 행동하자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같은 피를 물려받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한 동포인 남과 북이 갈라서서, 점점 더 멀어지기 시작한 지 벌써 까마득한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리적으로는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살아가지만, 심리적으로는 지구상 가장 멀리 떨어져 버렸습니다.
이제는 서로가 너무 낯선 존재, 이질감이 커져 버린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강력한 소비에트의 철조망도 제거되었습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베를린 장벽도 허물어졌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지구상 유일하게 남과 북 사이에 세워진 무시무시한 철조망은 끝도 없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너무나 큰 슬픔이자 치욕꺼리이며,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는 것은, 우리 자녀들과 후손들에게는 너무나 큰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 안에서, 서로 크게 상처를 주고받은 누군가와의 관계 회복과 새 출발을 위한다면, 가장 우선적인 일은 일단 만나는 일입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더 자주 만나면 좋습니다.
일단 그를 만나서, 그의 얼굴을 대면하고,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그의 입에서 직접 흘러나오는 말을 듣게 될 때, 좀 더 그를 이해하게 됩니다.
함께 소통하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될 때, 그간 감춰두고 있었던 그의 속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자연스레 그간 쌓였던 오해가 풀립니다.
그런 과정 안에서 화해와 일치는 한결 용이해질 것입니다.
일 년 이년도 아니고 반 백년 이상 계속되어온 첨예하고 복잡한 화두가 평화 통일이기에, 더 오랜 고민과 성찰, 뼈를 깎는 노력과 큰마음이 필요합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야속하게도 상황은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첨예한 대립과 머리싸움을 벌이고 있는 외세는 결코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원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미사여구를 늘어놓지만, 통일 이후 자국에 끼치게 될 경제적 손실과 다양한 측면의 데미지에 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사실 남북 분단은 국제정치패권세력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강대국들의 국익에 따라 강제된 분단이기 때문에, 분단을 반대하고 통일 정부를 외치던 수많은 민족 인사들이 속속 제거되었습니다.
국제정치패권세력인 미국과 소련은 우리 민족에 참으로 못할 짓을 저질렀습니다.
815 해방 이후 유럽 쪽 전범 국가인 독일을 분단시켰다면, 당연히 아시아쪽 전범 국가인 일본을 분단시켰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승전국가들은 엉뚱하게도 우리나라를 분단시키는 중차대한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가로막는 분단 고착화 세력은 바깥에만 있지 않습니다.
더 큰 적은 내부에 있습니다.
분단 고착화는 강대국들에 빌붙어 제 한 목숨, 제 호주머니만 생각하는 독재자들을 거듭 배출시켰으며, 기회주의의 명수인 친일파 세력들에게 면죄부를 부여했으며, 아직도 그들의 잔존 세력들은 독버섯처럼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버젓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어떤 정당 안에서, 여러 매체 안에서 얼토당토않은 논리로 선량한 국민들을 호도시키고 있습니다.
분단 고착화를 자신들의 정치적, 사회적 기반으로 삼고 있습니다.
분단 고착화 세력에 희생되신 백범 선생님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마음 깊이 담고 지내야겠습니다.
“분단된 동포를 하나로 만드는 것은 이 시대 새로운 독립운동입니다.
통일 운동은 곧 제2의 독립운동입니다”(백범 선생)
한반도의 평화 통일은 다른 그 누구의 과제가 아니라, 남북 당사자들 사이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남북을 둘러싼 주변 국가들 겉으로는 반기는 듯하지만 속으로는 지속적인 분단을 원합니다.
한반도의 분단이 곧 그들의 국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정의 내밀한 가정사에 대해 옆집 이웃들이 끼어들어 이래라 저래라 한다면, 얼마나 기분 나쁜 일이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처한 형국이 똑같은 현실입니다.
너무나도 당연히 남북 문제의 주도권을 우리 손으로 가져와야 마땅합니다.
70여년 이상 분단 고착화로 인한 남과 북의 증오와 대립, 불신으로 우리는 북한에 대하여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왜곡, 날조된 정보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이른바 우리는 북맹(北盲) 상태입니다. 북한에 대하여 증오와 불신으로 눈이 멀어 아무것도 아는 것도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북녘 동포들을 좀 더 알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단의 벽을 넘어서는 일은 낭만적이거나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 온몸이 으깨어질 고통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담대한 용기로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평화의 주님께서 우리 한민족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이제는 그만 분단의 세월을 끝내고, 조속한 평화 통일을 선물로 주시라고 열심히 기도해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06.25.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 20)
발상(發想)의 전환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냥
이루어지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가 아닙니다.
포기할 수 없는
기도의 길입니다.
끊임없는
봉헌의 길입니다.
경직된 사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조건없이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상호존중과
이해를
기반으로 하는
화해가 참된
화해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기도의 실천입니다.
실천만이
이 땅의 아픔을
극복할 수 있는
진리의 길입니다.
진리는 어렵고
힘든 실마리를
하나씩 풀어
나가는 것입니다.
비난과 비방이
아닌 힘과 지혜를
기도로 모으는
것입니다.
분단의 벽을
허무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원하십니다.
공동체의 회복은
기도의 회복입니다.
기도는 인격체의
만남입니다.
우리는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만남은
현실을 기반으로
하는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오해와 편견
모든 모순과
왜곡과
배척을
바로잡는 것이
하나되는
여정입니다.
하나됨의 실천은
우리의 간절한
기도로 시작됩니다.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는 것이
상생과 동질성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공동체의
간절한 기도는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습니다.
서로의 얼굴에서
화해와 일치의
하느님을 만나는
마음의 만남이길
기도드립니다.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올려드리는
구체적인
기도입니다.
화해와
일치를 위해
간절히
기도드리는
새 날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