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김제시 모악면 금산리에 117년 역사의 한옥예배당 금산교회가 있다. 우리나라에 둘만 남은 기역(ㄱ)자 예배당이다. 일자 모양 집에 부엌이나 외양간을 직각으로 붙인 옛 고패집을 닮았지만, 마루가 없다. 방문도 없이 모두 벽이다. 대신 기역자 양쪽 마구리에 하나씩 문을 달아 드나든다. 문 위에 ‘대한예수교 장로회 금산교회’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조덕삼 장로이야기』는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을 때 평신도의 한 분이었던 조덕삼 장로의 삶을 이야기한다.
이 마을 지주였던 조덕삼은 미국 남장로회 소속 테이트(L. B. Tate, 한국명 최의덕)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유교 집안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비단장사와 인삼, 마방을 하여 크게 재산을 모은 재력가였다. 워낙 부자이기에 집이 동네 사랑방이 되어 선교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 집에 이자익이라는 머슴이 마부와 일군으로 지내면서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일을 잘해서 크게 신임을 받았다.
이자익은 경상남도 남해 출신으로 여섯 살에 고아가 되었다. 고된 머슴살이 일과를 마치고 나면 딱히 할 일도 없어 사랑방 문밖에 앉아 선교사의 말을 들었다. 처음에는 소일거리로 흥미로 듣다가 그 말씀에 빠져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1906년 6월 금산교회에서 이자익은 주인 조덕삼, 그리고 박화서와 함께 집사로 임명을 받는다. 교인들이 소나무를 베어와 기역자 교회를 지은 이듬해 1907년, 새해 첫 주일에 전주에서 조사를 대동한 테이트 선교사가 예배를 인도한 후에 새해 일꾼을 발표하였다.
“그동안 우리 금산교회도 많이 발전하였으며, 제가 올 수 없는 날도 많아질 것 같으므로 두 명의 영수를 발표하겠습니다.” 영수 직분은 교회의 살림과 행정을 맡고, 목사나 장로를 세울 때까지는 설교까지 맡아서 하는 주요 직분이다. 선교사는 마을지주인 조덕삼 집사와 머슴 이자익 집사를 영수로 임명했다. 머슴을 영수로 임명하다니, 당시 사회상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교인들은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이 일로 점점 교인들이 모여들었다. 세례 교인이 30명이 넘었다. 영수를 세우고 2년 후 장로 투표를 했다. 누구나 조덕삼 영수가 장로가 되리라 예측했는데 이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이자익이 피택된 것이다. 교회가 시험에 들 상황이었다. 이때 조덕삼 영수는 머슴이 자기를 제치고 장로로 피택 되었다는 발표를 듣고 발언권을 얻어 교인들에게 인사했다.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테이트 선교사는 내심 조덕삼 영수가 낙선되니 고민했다. 당시 조선 사회는 천민과 양반과의 계급이 심했기에 ‘만일 조덕삼이 장로 선거에 떨어져 낙심하여 좁은 마을에 따로 교회를 세우면 어떡하나’ 걱정했던 것이다.
조덕삼의 의연한 태도에 선교사는 크게 놀랐다. 테이트 선교사는 레이놀즈(Willian D. Reynolds, 한국명 이늘서) 선교사에게 목회지에서 일어난 놀라운 일을 이렇게 전한다. “선교사님, 제 당회 구역에서 장로를 선출하였는데 지주는 낙방하고 그 집에서 일하는 머슴이 장로로 선출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지주가 나와서 ‘참으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양반과 천민의 차별이 심하던 시대, 조덕삼 영수는 군말 않고 열두 살이나 아래인 머슴을 장로로 섬겼다. 나중에는 이자익이 신학교에 들어가서 목사가 되는 일체의 경비를 도왔다. 목사가 되었을 때 금산교회 당회장으로 청빙하는 일에 앞장을 섰고 끝까지 잘 섬겼다. 이자익은 금산교회와 원평교회를 목회하며 전북노회장, 장로회 총회장을 세 번 지내고 대전신학대학을 설립했으며 장로교 헌법의 기초를 닦은 거목으로 섰다. 주인과 머슴, 장로와 목사간의 우정이 지금도 기역자 예배당에 밴 솔내음같이 향기롭다.
조덕삼 장로는 머슴에게 뒤처지는 굴욕을 겪었지만 갈렙처럼 오직 믿음으로 옳은 길을 걸었다. 하나님이 갈렙에게 자손의 복을 주었듯이, 조덕삼 장로에게도 자손의 복을 주셨다. 아들 조영호 역시 장로로 부친이 세운 민족학교 유광학교의 교장을 지냈다. 학교에서 태극기를 그리게 했고 3.1운동 때 태극기 시위에 함께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곤욕을 치렀고 북간도로 건너가 독립활동을 했다. 그의 아들이 언론인이자 4선 국회의원, 주일대사를 지낸 조세형이다. 조세형 의원 역시 할아버지 아버지를 이어 3대째 장로로 섬기다 별세하였다.
조덕삼 장로는 비록 52세의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열심과 겸손의 미덕이 있는 신자였다. 머슴과의 투표에서 떨어졌지만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교회를 지키며 그 머슴을 장로로, 목사로 존경하며 거의 평생을 함께하던 온전한 삶은 장로 직분의 귀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