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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51~155) 중앙SUNDAY 김명호(57세)교수는...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로 있다. 경상대·건국대 중문과에서도 가르쳤다. 1990년대 10년 동안 중국 전문서점인 싼롄(三聯)서점의 서울점인 ‘서울삼련’의 대표를 지냈다. 70년대부터 홍콩과 대만을 다니며 자료를 수집한 데다 ‘서울삼련’ 대표를 맡으며 중국인을 좀 더 깊이 알게 됐고 희귀 자료도 구했다 <151>량수밍(梁漱溟)과 마오쩌둥(毛澤東) |제152호| 2010년 2월 7일
▲량수밍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건강이 좋아졌다. 1986년 93세 때의 모습. 김명호 제공
중국의학원 설립자 위안훙서우(袁鴻壽)는 101세 생일에 제자들 앞에서 한마디 했다. “쑨원, 장제스, 마오쩌둥은 현대 중국의 운명을 좌우했지만 영향력은 한계가 있다. 동시대 인물로 영원히 중국인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량수밍(梁漱溟) 외에는 없다”는 말을 했다.
량수밍은 1911년 중학 졸업과 동시에 학생 생활을 끝내고 잡지사에 취직했다. 19세 때였다. 의회정치에 관심이 많아 자정원(資政院)에 회의가 있는 날이면 빠지지 않고 방청했다. 위안스카이의 대총통 취임식도 직접 취재했지만 한결같이 꼴불견투성이였다. 불교 경전을 가까이하기 시작했다. 인생과 사회에 관한 고민이 그를 괴롭혔다. 두 차례 자살을 시도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20세 되던 해 정월 시안(西安)에 내려가 소식(素食)을 시작했다. 부친과 형에게 출가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 “저는 전생에 승려였나 봅니다.”
1916년 9월부터 동방잡지에 ‘구원결의론(究元決疑論)’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동서고금의 사상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다.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베이징대학 총장 차이위안페이가 23세의 청년을 교수로 모셔왔다. 중졸이지만 학력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량수밍은 인도철학을 강의하며 철학연구소 내에 공자사상연구소도 개설했다.
당시 베이징대학에는 기라성 같은 학자가 많았다. 일본과 영국에서 10여 년간 유학생활을 한 양화이중(楊懷中·昌濟)도 후난성 창사의 성립사범학교에서 베이징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량수밍은 양의 집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해질 무렵 양의 집 대문을 두드릴 때마다 후난 방언이 심한 삐쩍 마른 청년이 문을 열어줬다. 눈인사는 나눴지만 통성명은 하지 않았다. 지방에서 올라온 친척이겠거니 했다. 이 청년은 대화에도 끼어드는 법이 없었다. 후일 “사범학교 시절의 학생이다. 베이징대학 도서관에서 한 달에 8원씩 받으며 잡일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름은 금세 까먹었다.
양화이중의 딸이 항상 량수밍을 배웅했다. 뭔가 뒷골이 이상해 돌아보면 후난 청년이 표정 없는 얼굴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양화이중은 3학기 만에 세상을 떠났다. 량수밍과 동료 교수들이 출자한 돈으로 장례를 치렀다. 량은 장례기간 동안 분주하게 오가는 후난 청년을 봤지만 얘기는 나누지 않았다. 장례가 끝나자 청년도 베이징에서 자취를 감췄다.
20년이 흘렀다. 그간 량수밍은 유·불(儒·佛) 양가를 오가며 중국 신유학의 기틀을 닦았고 도시에서 성장한 사람답지 않게 전국을 누비며 향촌건설운동을 폈다. 농촌에 계급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1938년 1월 옌안의 량수밍과 마오쩌둥. 두 사람은 동갑이었다. 국공합작이 실현되자 항일론자였던 량수밍은 공산당의 본거지 옌안에 호기심을 느꼈다. 특히 마오쩌둥이라는 인물이 궁금했다. “어떤 사람들이기에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생각을 바꾸지 않을까?” 공산주의 경전들을 섭렵한 적이 있었지만 계급투쟁으로는 중국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확신 때문에 공산주의 학설을 신봉하지 않았지만 리다자오, 장선푸 등 중공의 창시자들과는 가까운 친구였다.
국민참정원 자격으로 옌안을 방문하고 싶다는 의견을 장제스에게 제출해 동의를 받았다. 중공 측에서도 량수밍이 오는 것을 환영했다. 옌안에 도착한 량을 중공 총서기 장원톈(張聞天)이 직접 맞이했다. “주석은 낮에 쉬고 밤에 일한다. 밤에 만남을 주선하겠다”는 말을 듣고서야 마오가 중공혁명군사위원회 주석임을 처음 알았다.
처음 만난 날 마오의 첫마디는 어처구니없었다. “우리는 20년 전에 만난 적이 있습니다. 양화이중 선생의 집을 방문하실 때마다 제가 문을 열어 드렸습니다. 그 후 저는 양 선생의 사위가 됐습니다.”
두 사람은 동굴 속에서 중국사회와 미래에 관한 얘기로 꼬박 밤을 새웠다. 마오는 계속 술을 마시며 량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워낙 개성들이 강하다 보니 일치되는 점이 하나도 없었다.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상대를 설득하는 데는 모두 실패했지만 화들은 내지 않았다. 동이 틀 무렵 상쾌한 기분으로 헤어졌다. 두 번째 만남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여덟 번을 만났지만 결과는 한결같았다. <152>노동자들은 하늘 꼭대기에, 농민은 땅바닥에" |제153호| 2010년 2월 13일
▲1. 1918년 6월 베이징대학 철학과 제2회 졸업생들과 함께한 25세의 량수밍 교수(앞줄 오른쪽 둘째). 교장 차이위안페이(앞줄 오른쪽 넷째), 문과대학장 천두슈(앞줄 오른쪽 셋째)의 모습도 보인다. 『중국철학사』의 저자인 펑여우란(둘째 줄 왼쪽 넷째)도 이날 졸업했다. 2. 1921년 량수밍의 결혼기념 사진. 김명호 제공
1946년 1월 국·공 양당이 정전협정을 체결하자 량수밍은 8년 만에 다시 옌안을 찾았다. 마오쩌둥은 영수급 10여 명을 황급히 모아 량의 말을 경청하게 했다. 량은 내전 반대를 주장하며 입에 침이 마르는 줄도 몰랐다. 이들이 내전에 승리해 새로운 정권을 탄생시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3년 후 신중국이 수립됐다. 량수밍은 “지식인들이 천하대사에 관심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정치는 복잡하기가 이를 데 없다. 열정과 능력은 별개다. 소신이라며 세상일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다가 말실수 하기 딱 좋은 곳이다. 앞으로 나 개인만을 대표하지 어떤 조직도 대표하지 않겠다”며 자신이 정치에 문외한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말은 해도 행동은 하지 않았다.
마오쩌둥의 량수밍에 대한 예우는 극진했다. 첫 번째 소련 방문에서 귀국하자마자 중난하이로 그를 초청해 정부에 참가해 줄 것을 요청했다. 거절당했지만 잠시 불쾌한 표정을 지었을 뿐 밥 때가 되자 “오늘 저녁은 통일전선이다. 소식(素食)을 하자”며 모두에게 외쳤다. 량은 소식가였다.
량수밍은 가고 싶은 곳을 자유롭게 다녔다. 자신이 펼쳤던 향촌건설운동의 근거지들을 둘러보고 동북(東北)과 서남(西南)지역의 토지개혁도 직접 참관했다. 마오는 량이 베이징에 들를 때마다 환대했지만 한번도 구체적인 임무를 준 적이 없었다. 마음 내키는 대로 다니며 조사하고 연구하게 내버려뒀다.
1953년 9월 정협과 중앙인민정부 확대회의가 열렸다. 량은 농촌공작에 관한 의견을 제출했다. “근 30년간 혁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중공은 농민들에 의지해 농촌을 근거지로 삼았다. 공작거점이 도시로 이전하면서 농촌은 황폐해졌다. 도시 노동자들의 생활은 개선되었지만 농민들은 질곡을 헤맨다. 도시로 나오려 하지만 도시는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하늘 꼭대기에 올라가 있지만 농민들은 땅바닥을 기어 다닌다.”
다음 날 마오는 즉석발언을 했다. “우리와 의견이 다른 사람이 있다. 농민들의 생활이 어렵다며 그들을 돌봐야 된다고 한다. 공자나 맹자가 얘기하던 어진 정치(仁政)를 펴라는 의미다. 대인정(大仁政)과 소인정(小仁政)을 모르는 사람이다. 농민을 배려하는 것은 소인정이다. 중공업을 발전시켜 미국을 타도하는 것이 대인정이다. 우리가 수십 년간 농민운동을 펼쳤음에도 농민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니 웃기는 말이다. 노동자와 농민의 근본적인 이익은 일치한다. 분열과 파괴는 용납될 수 없다.” 이름은 거론하지 않았지만 량수밍을 호되게 비판했다.
량수밍은 충분한 발언시간을 요청했다. 참석자들이 벌떼 같이 일어나 반대하자 표결을 제의하는 사람이 있었다. 거의 전원이 량의 발언을 반대했다. 마오는 찬성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이날로 끝이 났다. 13년 후 문혁이 시작됐다. 량수밍의 집에도 홍위병들이 들이닥쳤다. 량의 부인을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두들겨 패면서도 량에게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매달 나오던 돈도 3분의 1로 삭감됐지만 잠시였다.
1972년 12월 26일 마오의 80회 생일에 량수밍은 '중국, 이성의 나라'의 친필 원고를 선물로 보냈다. 마오는 량을 대면이라도 한듯 즐거워했다.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순금이 없는 것처럼 완전한 인간도 없다”며 20여 년 전 량의 행동을 양해했다. 량수밍도 80년대 중반 “당시 나의 태도가 적절하지 못했다. 그를 힘들게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 그동안 적막을 견디기 힘들었다”며 평생 의견이 맞지 않았던 마오를 회상했다. <153> ‘상하이 황제’ 두웨셩(杜月笙)이 평생 사랑한 멍샤오둥(孟小冬) |제154호| 2010년 2월 21일
▲둥황(冬皇) 시절의 멍샤오둥. 김명호 제공
1917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기념일에 맞춰 종합공연장 ‘대세계(大世界)’가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 문을 열었다. 내로라하는 연예인들이 몰려들었지만 제대로 된 경극 배우들은 2년이 지나도 대세계의 무대에 서려고 하지 않았다. 설립자 황추주(黃楚九)는 직접 경극 공연장들을 누비고 다녔다. 11월 말 성황묘(城隍廟)의 소극장에서 12살짜리 여자애를 발견했다. “얼굴을 보는 순간 눈알이 녹아내리는 줄 알았다. 남장은 더 아름다웠다. 목소리와 무예(武藝)도 일품이었다.” 다음 날 어린 소녀를 찾아가 갖은 예의를 다 갖췄다. 멍샤오둥(孟小冬)이라는 이름도 예뻤다. 초겨울에 태어났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라고 했다.
멍샤오둥(孟小冬)에 대한 중국 BTV의 다큐입니다.
동영상을 보시려면 상단 중앙의 배경음악은 잠시 꺼주세요.
[档案] 粉墨春秋 一代名伶 孟小冬的戏曲人生
‘창업의 귀재’였던 황추주의 눈은 정확했다. 대세계의 경극 공연장은 연일 관객들로 미어터졌다. 멍샤오둥은 12월 한 달간 39차례 무대에 올랐다. 13일 밤 평생 잊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공연이 끝나자 낯선 사람이 꽃을 들고 무대 뒤로 찾아왔다. 나이는 30 남짓, 삐쩍 마르고 창백한 얼굴에 두 귀가 유난히 컸다. 단정히 빗은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두 손을 앞으로 움켜쥐더니 더듬거리며 뭐라고 말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공연이 있는 날마다 싱거운 짓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렇게 못 생기고 괴상하게 생긴 사람은 처음이었다. 평소 잘 웃지 않던 멍은 폭소를 터뜨렸다. ‘상하이 황제(皇帝)’ 두웨셩(杜月笙)과 둥황(冬皇) 멍샤오둥의 첫 만남은 이렇게 끝났다.
◀1950년 가을 멍샤오둥(왼쪽)과 두웨셩의 결혼기념사진. 멍은 43세, 두는 63세였다.
멍샤오둥은 2년여를 상하이에 머물렀다. 비밀결사 청방(靑幇)에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두웨셩은 공연이 있을 때마다 제일 좋은 좌석에 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앞에서 설설 기었지만 멍은 두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심부름은 물론이고 뭐든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사람 같았다.
상하이를 떠난 멍샤오둥은 부모와 함께 푸젠(福建)을 거쳐 필리핀의 섬들을 떠돌아 다녔다. 한커우(漢口)에서는 몇 년 후 두웨셩의 네 번째 부인이 되는 야오위란(姚玉蘭)과 함께 무대에 오르며 친자매처럼 지냈다. 가는 곳마다 폭발적인 환영을 받았다. 어린 시절 경극 배우였던 할아버지 멍치(孟七)가 자주 하던 “우리는 천하디 천한 예인들이지만 왕공귀족이나 서민 할 것 없이 우리의 공연을 보지 않고는 못 배긴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1925년 6월 멍샤오둥은 베이징으로 진출했다. 공연장이 있는 첸먼(前門) 일대는 “둥황 만세”를 외쳐대며 몰려든 청년들 때문에 허구한 날 인산인해였다. 멍의 사진을 걸어 놓은 사진관들은 유리창이 성할 날이 없었다.
그해 가을 청방의 두령 중 한 사람인 황진룽(黃金榮)의 부인 루란춘(露蘭春)이 염색집 아들과 눈이 맞아 도망친 사건이 발생했다. 잡히면 물고기 밥이 되거나 팔다리가 잘려나갈 일이었다. 멍샤오둥의 집에 숨어있다는 소문이 나돌자 두웨셩이 해결을 자청했다. 부하들을 몰고 베이징에 올라온 두는 매일 멍의 집 앞을 지켰다. 다른 패거리들이 올라와 루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멍이 다치기라도 했다간 큰일이었다. 눈에 핏발을 세웠다. 멍을 만났지만 추궁 한마디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이미 남의 밥그릇에 담긴 밥”이니 포기하라며 황을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2년 후 멍샤오둥은 경극 배우 메이란팡(梅蘭芳)과 몰래 결혼하며 무대를 떠났다. 4년이 흘렀다. 메이란팡과 헤어지자 두웨셩이 사람을 보냈다. 상하이에서 두의 보살핌을 받으며 무대에 복귀한 멍은 1945년 9월 야오위란이 상하이를 떠나자 두에게 동거를 허락했지만 야오가 나타나자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인민해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기 직전 두웨셩은 멍샤오둥을 상하이로 빼돌렸다. 홍콩에 정착한 후 두는 건강이 악화됐다. 멍은 두에게 결혼 준비를 서두르게 했다. 1950년 가을 결혼식을 올렸다. 처음 만난 지 31년 만이었다. 두웨셩은 5명의 부인이 있었지만 결혼식은 처음이었다. 이듬해 8월 두는 세상을 떠났다. <154> 과일장수로 연명하다 ‘상하이 실세’로 떠올라 두웨셩(杜月笙)과 청방(靑幇) <上> |제155호| 2010년 2월 28일
▲두웨셩(오른쪽)은 20세 되는 해 봄 청방에 가입했다. 청방 최고의 실력자가 된 뒤에도 공개석상에서는 선배들을 깍듯이 대했다. 중간에 나서는 법이 없었다. 장사오린(가운데)도 두와 함께 상하이의 3대 두령 중 한 사람이었지만 세력이나 수준이 두에게는 한참 미치지 못했다. 장비(張飛)라는 별명에 걸맞게 일대일로 붙는 싸움에서는 당할 자가 없었다. 김명호 제공
1949년 신중국이 수립되기 전까지 상하이는 하나의 거대한 극장이었다. 마오쩌둥, 장제스, 장쉐량, 쑨원, 왕징웨이, 장칭 등 희대의 수퍼스타들도 이 도시에서만은 솜씨를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상하이는 청방(靑幇)의 천하였다.
중국의 비밀결사는 연원을 헤아리기 불가능할 정도로 그 뿌리가 깊다. 손가락 수백 개가 있어도 세기 힘들 정도의 비밀결사들이 수천 년 동안 생겨나고 몰락했지만 모두 지하조직이었다. 정부, 언론, 교육, 군대, 금융, 경찰 등 사회의 모든 기관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공인된 비밀결사는 청방이 유일했다.
청(淸)대의 조운(漕運)은 규모가 엄청났다. 1만1254척의 조운선이 세수(稅收)로 거둬들인 양곡을 수도나 지정된 장소로 운반했다. 선원들은 몰락한 농민, 파산한 수공업자와 유랑민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대우를 받았다. 가족 부양은 꿈도 꾸지 못했다.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나교(羅敎)가 선원들을 주목했다. 조운선의 전용 부두마다 암자를 설립하고 숙식을 제공했다. 남북을 오가며 노동과 빈곤에 허덕이던 선원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휴식처였다. 나교와 연합해 비밀결사 청방을 탄생시켰다.
정부는 나교를 방치하지 않았다. 암자를 허물고 간부들을 중형에 처했다. 그 와중에서도 청방은 운하 유역을 중심으로 세를 확장해 나갔다. 마을 전체가 가입한 경우도 허다했다. 운하 연변에는 3만여 개의 크고 작은 촌락형 도시가 있었다.
◀사회에 진출한 두웨셩의 과일장수 시절 친구들. 청방의 주요 간부가 된 이들은 평생 두의 충실한 제자를 자처했다. 상하이 경비사령부 군법처장 루징스(앞줄 오른쪽 둘째)와 상하이총공회 주석 주쉐판(앞줄 가운데).
1825년부터 정부는 조운을 해운(海運)으로 대체했다. 실직한 선원들은 비적이나 무장한 소금 밀매원으로 변신해 염효집단(鹽梟集團)을 형성했다. 구성원 거의가 청방이었다.
19세기 말 혁명 세력들이 청방을 끌어들였다.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상하이를 해방시킨 천치메이(陳其美)는 청방의 두령급 인물이었고, 결사대를 조직해 항저우를 점령한 청년 장제스도 청방이었다. 위안스카이가 몰락하자 장쑤·저장 일대의 염전 지역을 놓고 군벌들 간에 쟁탈전이 벌어졌다. 염효집단은 군벌들의 동네북이었다. 이리 차이고 저리 차였다. 일부는 군벌에 흡수되거나 붕괴 직전까지 내몰렸다. 청방은 살길을 찾아 각지로 흩어졌다.
청방에게 상하이는 별천지였다. 서구 열강의 중국 침략 전초기지였지만 현대 문명이 고스란히 자리 잡은 하나의 독립된 국가였다. 천치메이가 군대를 장악하고 있는 바람에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중국인 거주 지역에서 대형 사고를 쳐도 프랑스 조계로 넘어오면 그만이었다. 호적제도도 없었다. 군벌부대와 염전을 전전하던 청방은 상하이로 향했다. 두령급만 하더라도 장수성(張樹聲), 자오더청(趙德成), 천스창(陳世昌) 등 전설적 인물들과 위안스카이의 차남 위안커딩(袁克定)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순식간에 상하이 인구는 10만 명이 증가했다. 이들의 상하이 집결은 청방 최대의 전성기를 예고했지만 청방을 밝은 세상으로 끌어내고 현대화한 사람은 이 안에 없었다.
두웨셩(杜月笙)은 1888년 음력 7월 15일 상하이 푸둥(浦東)에서 태어났다. 보름달이 어찌나 밝았던지 부모는 ‘웨셩(月生)’이라는 아명(兒名)을 지어 줬다. 그리고 3년 후 세상을 떠났다. 큰누나 집에 얹혀살며 눈칫밥을 먹었다. 사숙을 다녔지만 매형의 반대로 3개월에 그쳤고 결국은 매형에게 쫓겨났다. 처남을 쫓아낸 날 밤 매형은 잠결에 똥바가지 세례를 받았다.
상하이에 나온 두웨셩은 부두와 다리 밑을 전전했다. 낚싯대로 행인들의 모자를 낚아채 팔면 허기를 채울 수 있었다. 청방에도 가입했다. 과일가게 종업원으로 취직했지만 번번이 쫓겨났다. 새벽마다 낡은 부대 자루를 들고 부두에 나가 외지에서 과일을 싣고 온 배들 사이를 분주하게 오갔다. 낮에는 좌판을 벌이고 황혼이 되면 찻집, 오락장, 아편굴, 도박장을 돌아다니며 팔았다. 단골 중에 기녀와 댄서들이 많았다. 과일 깎는 솜씨 하나는 예술에 가까웠지만 후일 상하이의 낮과 밤을 지배할 기미라고는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계속) <155> 杜氏사당 낙성식에 시대의 거물들 총출동 두웨셩(杜月笙)과 청방(靑幇) <下> |제156호| 2010년 3월 7일
▲1934년 전성 시기의 두웨셩(왼쪽 첫째). 왼쪽 셋째부터 왼쪽으로 외교관 장팅, 상하이 시장 우톄청. 상하이 경비사령관 양후. 두의 심복이었던 양은 후일 공산당에 투항했다.
2년 전 아랍에미리트(UAE)에서 대형 중국음식점을 경영하는 노부인이 상하이를 찾았다. 두웨셩의 딸이었다.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부친은 황진룽·장샤오린과 함께 상하이의 3거두 중 한 사람이었다. 황과 장의 후예들과 연락이 되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을 한 사람이 있었다. 노부인은 “우리 아버지를 그들과 함께 거론하지 마라”며 화를 벌컥 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세 사람은 개성이 제각각이었다. 황진룽은 돈을 탐냈다. 쌓아 놓기만 했지 쓰는 법이 없었다. 장샤오린은 나이가 들어서도 직접 싸움판에 뛰어들 때가 많았다. 생색내기를 좋아해서 돈을 써도 빛이 나지 않았다. 두웨셩은 사람 욕심이 많았다. “돈을 많이 쌓아놓고 있는 사람이 부자가 아니다. 많이 쓰는 사람이 부자다”라는 말을 자주했다. 사람에게 돈을 많이 썼다. 나이는 제일 어렸지만 황이나 장에 비해 모든 게 한 수 위였다.
두웨셩은 과일가게 점원 시절 가난에 찌든 애들을 만나면 당장 내일 먹을 것도 없는 주제에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이 돈으로 뭐든 사먹어라. 나중에 돈이 생기면 나를 먹여주기 바란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나를 도와줄 사람은 너밖에 없다”며 씩 웃었다. 초기 수입원은 아편 운반과 도박장 운영이었다. 노사분규에도 개입했다. 당시 상하이에는 약 80만 명의 노동자가 있었다. 파업을 부추기고 원만히 해결한 후 노사 양쪽에서 거액을 뜯어냈다. 두는 벌어들인 돈을 주로 사람들에게 풀었다. 타고난 두목 감이었다.
▲1931년 6월 10일 오전 두씨사당으로 향하는 의장행렬이 상하이 중심가를 통과하는 장면. 맨 앞에 전 총통 우페이푸의 편액이 보인다. 김명호 제공
1931년 6월에 있었던 두씨사당 낙성식은 두웨셩의 폭넓은 인맥과 정치·경제·사회적 지위를 확인시켜준 대사건이었다. “두웨셩의 조상을 모셔놓은 사당이 없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입에 거품을 문 사람은 대학자 장빙린(章炳麟)이었다. 두의 조상이 요순(堯舜)임에 틀림없다고 우겼다. 두웨셩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다들 국학대사 장빙린에게 맞장구 쳤다.
두씨사당 낙성식 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상하이의 명인과 재계의 대표적 인물들이 총동원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상하이 증권교역소 이사장 겸 상공회의소 회장과 청방의 대두목 중 한 사람인 황진룽이 총무주임을 맡았다. 축하 공연 담당인 장샤오린은 메이란팡 등 전국의 일류 경극배우들을 상하이로 집결시켰다. 위생주임은 전국상회연합회 이사장과 전국 적십자회 회장이 담당했다. 기타 무슨 주임, 무슨 주임 모두가 한결같이 전국적인 인물들이었다.
장제스는 상하이 경비사령관 양후(楊虎) 편에 금가루로 쓴 거대한 편액을 국민당 주석과 총사령관 명의의 축사와 함께 보냈다. 당과 정부의 요인들도 빠질 수 없었다. 쑹즈원·쿵샹시·장쉐량 할 것 없이 편액을 보내거나 직접 참석했다. 이쯤 되면 집안 행사가 아니라 국가 행사나 다름없었다.
6월 10일 두웨셩 조상의 위패를 푸둥의 사당까지 운반했다. 1개월 전부터 전국 각지에서 답지해 산처럼 쌓인 편액, 대련, 선물 가운데 중요한 사람들이 보내온 편액을 든 의장대들이 거리를 메웠다. 새벽부터 프랑스 조계에 있는 두웨셩의 집 부근은 인산인해였다. 의장대는 모두 6개 대대였다. 대형의 국민당 기와 ‘두(杜)’자를 크게 새긴 깃발이 1대대를 선도했다. 깃발의 전후좌우를 100대의 자전거가 호위했다. 프랑스와 영국 조계의 경찰국에서 파견 나온 영국· 프랑스·인도·베트남인으로 구성된 기마대가 뒤를 따랐고 두웨셩이 세운 초등학교 학생 전원과 10여 개의 만인산(萬人傘)이 뒤를 이었다. 장제스와 행정원장 허잉친 등의 편액도 행렬 속에 있었다. 나머지 5개 대대는 상하이시 보안국 경찰대대와 육·해·공군 군악대가 선두에 서고 매 대대마다 우페이푸·돤치루이·류치 등 국양군벌 시기의 총통과 남북의 군벌, 신구 관료, 정객들의 편액과 1만 명 이상의 사회 각계 대표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뒤를 따랐다. 위패가 안치될 때 상하이 요새사령부에서는 21발의 예포까지 쏴댔다.
두웨셩은 빛과 그늘을 자유롭게 왕래한 복잡한 사람이었다. 중일전쟁 시절에는 자비로 항일유격대를 조직하고 병원을 설립해 250여만 명의 부상병을 치료하는 등 국가가 하지 못한 일을 했다. 전 반생은 자신만을 위해 살았지만 후 반생은 남만을 생각했다.
인민해방군이 상하이를 점령하기 직전 대륙을 떠날 때 남에게 받을 돈이 많았다. 채권증서를 모두 소각했다. 두웨셩 덕분에 300년 전통을 자랑하는 청방의 마지막은 화려했다.
民国悬疑奇案实录 "流氓大亨" 黄金荣, 杜月笙发迹之谜(一)
上海滩,在近现代中国历史上一直有"东方乐园"的称号,这里是冒险家实现梦想的梦想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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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니, 무슨 조폭 오야붕의 사당 낙성식이 이리 요란한가.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상하이 '청방'의 규모와 영향력이 컸다는 것을 확인했다고나 할까. 그런데 장병린 같은 대학자도 두웨셩의 비위를 맞추려고 그에게 '요순의 후예' 운운했다니 믿기지 않네.// 일찌감치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끝까지 사상가, 학자,사회운동가의 영역에만 머물렀던 량수밍. 정치판에 잘못 발을 들여놓았다가는 정치 발전에 기여는커녕 정치꾼에 휘둘리면서 소신을 굽히고 명예도 실추시키며 종국에는 욕만 바가지로 먹는 것보다는 백번 나은 삶이 아닐까. 동영상도 재미있군.
두웨이셩은....
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는 듯 허이~~~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