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 지역에 신앙의 씨앗이 싹튼 곳
강원도 영동 지역에 천주교가 적극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계기는 고종 3년(1866년)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 李昰應, 호 石坡, 1820~1898)에 의해서 일어난 병인박해라고 할수 있다. 강릉 지방에 천주교 공소가 개설된 시기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에 “구한말 19세기 말경에 구정면 금광리와 내곡동 등지에 천주교인들이 이주하여 옹기 굽는 일이나 농사를 지으면서 은밀하게 전교를 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존하고 있는 금광리 공소 현판에 ‘1887년 창립’이라고 적혀 있는 것과 부합된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하여 보면 교우들이 강릉에 이주한 것은 이보다 훨씬 이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영동 지역의 공소에 새로운 변화가 있게 된 것은 1900년이었다. 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아우구스티노) 주교가 이 지역을 사목 방문하면서 박해 이후 처음으로 견진성사를 베푼 것이다. 그 당시 금광리 공소와 속초시 상도문리의 싸리재 공소(도문 공소)는 단독 공소 건물을 갖추고 신자 수도 1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금광리 공소의 회장으로 오랫동안 봉사하고 있는 김중철 필립보씨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증조부모가 교우들과 함께 경주에서 금광리로 박해를 피해 왔다고 하며, 이영녀씨도 그의 시아버지인 조중서(趙仲署)씨가 소년 시절에 경기도 여주에서 금광리로 피난해 왔다고 한다. 공소 초기에는 원산의 백 신부(Bret, 白類斯, 1858~1908, 알로이시오)가 배를 타고 와서 전교하였다고 하며, 그 후 안변과 원산 본당의 두 신부(Tournier, 杜啓昌, 1879~1944, 빅토르 신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임), 표 신부(Poyaud, 表光東, 1877~1960, 베다스토)도 배를 타고 와서 전교하였다고 한다. 현재 공소는 약 50년 전 본래 있던 공소터에서 길가 쪽으로 이전하였다. 예전에는 금광리 공소였으나 현재 지명은 어단리이기 때문에 어단리 공소라고도 한다.
금광리 공소는 한때 본당으로서 영동 지역의 전교 거점이었다. 실제로 강릉 이남의 공소들은 신자 수도 많았으며, 상도문(양양) 본당과의 거리도 멀어 1921년 가을 판공 때 금광리 신자들은 최문식(崔文植, 1881~1952, 베드로) 양양 본당주임 신부에게 보좌 신부인 이철연(李喆淵, 1892~1980, 프란치스코) 신부를 금광리에 파견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이에 최 신부는 보좌 이철연 신부를 그해 12월에 그곳으로 보내 금광리 본당을 설립하였다. 이로써 영동 지역에는 1921년에 두 개의 본당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발전 가능성이 적어 1923년 11월 23일 금광리를 떠나 주문진으로 이전하였으며, 금광리 공소는 주문진 본당의 전신이 되었다.
1929년 주문진 본당이 화재로 전소되자 다시 금광리로 본당을 이전했고, 강릉 지역의 발전 가능성이 높아지자 1931년에 강릉 임당동에 부지를 매입하고 1934년에 본당을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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