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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뢰아 사람들의 아름다운 신앙 자세
사도행전 17:10~15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개척하여 성도들의 신앙이 뜨겁게 성장하던 중에 그곳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의 격렬한 핍박을 받아서 밤중에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빠져나온 후에 베뢰아 시에 도착하여 그곳 베뢰아의 유대인 회당에서 전도하여 믿는 성도들을 얻는 내용이 나옵니다. 특별히 이곳 베뢰아 회당의 회중들이 사도 바울로부터 예수님에 대하여 듣고 진리를 배우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태도는 후일에 많은 이들에게 귀한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뢰아 사람들이라는 아름다운 호칭을 얻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이단성 있는 교회에서 이 아름다운 호칭을 자기들에게 억지로 붙임으로써 그 순수한 아름다운 이름을 더럽힌 바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베뢰아 성도들이 보여준 아름다운 신앙 자세에 대하여 함께 살펴보면서 우리의 신앙 자세에 대한 좋은 지침들을 얻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본문 말씀을 차례로 읽어가면서 영적 교훈을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받아 믿음을 갖게 된 후에 얼마나 열심을 내었는지 그 믿음의 소문이 온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까지 순식간에 퍼질 정도였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기질상 순수하고 뜨겁고 행동적인 면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핍박하는 유대인들과 그들의 선동에 동조하는 데살로니가의 불량배들 역시 지독한 핍박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 일행을 데살로니가를 어지럽히는 악한 자들로 비난하며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을 도모하는 정치범으로 몰아세워서 시의 최고 재판소에 고발했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사도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가에 다시 들어올 수 없도록 치명적인 제재를 가했습니다. 그래서 체포되면 온갖 폭력과 투옥을 당할 위기를 만났기에, 데살로니가 형제들은 사도 바울 일행을 체포하려는 대적들의 눈을 피해 밤의 어둠을 이용하여 바울과 실라를 은밀하게 시외로 빼내어 멀리 내보냈습니다. 그들이 사도 바울 일행을 빼내어 인도한 곳은 데살로니가 시로부터 서남쪽 방향으로 80킬로미터 떨어진 베뢰아 시였습니다. 베뢰아는 농업과 금속 세공업이 발달한 도시로서 비교적 부유하고 번화한 작은 도시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핍박을 받아 데살로니가에 더 이상 머물 수 없게 되었을 때에 멀리 떨어진 베뢰아 시로 와서 동일한 복음 전도의 일을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 베뢰아 시에도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주의 백성 공동체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0:23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자기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을 시작할 때에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한 가지 분명한 소명이 있으니 그것은 예수님을 전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신앙적인 이유로 박해를 받으면 다른 곳으로 가고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면 됩니다. 그러다가 우리 주님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우리가 주님 뵐 그 날까지 절대 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몸이 아파 병원에 가면 그곳에 간 이유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 같은 병실에 주님이 찾으시는 영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느 곳에 여행을 갈 때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이 주님이 찾으시는 그 잃어버린 영혼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 모든 곳에서 우리는 복음을 전할 기회를 찾아 전도하는 이 일을 계속합시다. 여기서 핍박을 받으면 저 곳으로 옮겨 가서 또 그 일을 다시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때가 되면 주님 만나 뵙게 될 것이요 그 생명의 씨를 뿌린 일로 인하여 주님 앞에 귀하고 복된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베뢰아에 도착한 사도 바울은 실라와 더불어 그곳에 있는 유대인 회당을 또 찾아 들어갔습니다. 그가 그 회당에 들어간 날은 안식일이어서 그곳에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관례에 따라 그곳에 도착한 사도 바울은 성경을 가르치는 랍비로서 말씀을 전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회당의 가르치는 자리에 서서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베뢰아 회당에서도 이전에 데살로니가 회당에서 행했던 바와 같이 구약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그 뜻을 풀어서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이라는 점을 증언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그 그리스도가 바로 얼마 전 팔레스타인에 오셔서 유대인들을 가르치시고 기적을 많이 일으키시고 자기를 그리스도로 증거함으로 인하여 신성 모독자로 낙인찍혀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시라고 증언하였을 것입니다. 베뢰아 회당 사람들은 구약 성경의 내용 중에 고난당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강론을 처음 들은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또한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말에 대하여 대부분은 처음 듣거나 얼마 전부터 풍문으로 들려온 소문으로 들은 사람들도 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사도 바울의 안식일의 회당 설교에 대하여 베뢰아 성도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을까요? 이 11절 말씀이 오늘 우리가 살펴볼 핵심 내용인데, 우리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여기에 보면 첫째로 사도행전 기록자 누가가 베뢰아 사람들을 데살로니가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언급하는 한 가지 특징이 나옵니다. 그것은 그들의 진실한 겸손이었습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웠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개역판에서는 ‘더 신사적이어서’라고 번역한 바 있습니다. 둘 두 신사적이고 너그럽다고 성품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은 ‘마음이 트인 사람들이다’라고 번역하였고, 새번역은 ‘마음이 넓어서’라고 번역하였고, 표준역 번역 성경은 “베뢰아의 유대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 사람들보다 더 고결한 사람들이어서”
라고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칼빈 선생은 이 부분을 “신분적으로 더 지체가 높은 사람들이어서”라고 그의 주석에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번역이 나오는 이유는 그 원문 헬라어 단어인 ‘유게네스테로이’라는 단어가 ‘가문좋은, 훌륭한, 고상한’이라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가 사용된 용례는 세 군데뿐인데, 하나는 누가복음 19:12 말씀에서 ‘귀인’ 곧 ‘귀족’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고, 고린도전서 1:26 말씀에, ‘문벌 좋은 자’라는 말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누가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이 단어를 지체가 높은 귀족들, 문벌이 좋은 사람들, 상류층 사람들을 지칭하고자 사용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사람의 내적인 성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외적인 신분을 가리킨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생각합니다.
그 당시 베뢰아 회당 내에는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에 사도 바울이나 실라나 누가가 그곳에 들어가서 보았을 때에 그들의 옷차림 등이 확연하게 데살로니가 사람들과 다르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후일에 고린도교회는 베뢰아 성도들과 달리 가난한 사람들, 노예 출신 성도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26 말씀에 보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쓰기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베뢰아 교회는 부유하고 지체가 높고 귀족층 성도들이 많이 있었고, 또 데살로니가나 고린도교회는 가난하고 약하고 노예 출신인 성도들이 주류를 이루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리키는가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가난한 자만 있는 것이 아니요 부자만 있는 것도 아니요 가난한 자 부자가 함께 어우러져서 한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베뢰아 교회는 부자들, 권세자들, 귀족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들은 목수 출신의 가난한 나사렛 예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신분으로 보면 존귀하였지만 십자가에 매달려서 벌거벗은 채 손과 발에 못이 박힌 채 사람들로부터 침 뱉음을 당하며 조롱과 저주를 당하며 버림을 당한 나사렛 예수를 자기들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다른 가난한 자들, 노예 성도들과 함께 한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한 자리에서 형제로서 교제하면서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면서 그 앞에 경배하기를 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기록자인 누가가 볼 때 베뢰아 성도들은 참으로 겸손한 마음을 가졌기에 귀하고 아름다운 신앙인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자유인 성도나 노예 성도나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자유인일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리스도의 노예요 세상에서는 노예일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자유인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선생도 그의 서신서 야고보서 1:9 이하에서 가르치기를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야고보서 1:9~11)
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높은 자나 낮은 자나 다 하나요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입니다. 세상적인 지위, 재산, 명성, 신분을 다 내려놓고 그리스도 앞에서는 용서받은 죄인이요 그 피 값으로 지옥불에서 건져내신 동일한 천국 시민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몸된 교회에 나올 때에 세상의 모든 자랑을 다 내려놓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구원받은 빚진 자임을 잊지 않는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직 세상 자랑 다 내려놓고 주님께 용서받고 구원받은 은혜와 감사함으로만 충만하여서 동일한 천국 시민된 모든 성도들과 영원한 형제 자매로서의 가족애를 가지고 서로를 진심으로 귀하게 여기고 뜨겁게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 주님께서도 그러한 성도들을 지극히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하시고 복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 함께가는교회 성도님들은 다 이렇듯 한평생 겸손하여 형제 자매를 존귀하게 여기고 뜨겁게 사랑하는 아름다운 신앙인들인 줄 믿습니다.
그리고 베뢰아 회당 사람들에 대하여 사도행전 기록자 누가가 언급한 또 하나의 신앙적 특징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태도입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귀족들이 많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존귀함을 내세우지 않고 뻐기거나 자랑하지 않고 사도 바울이 증거하는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기를 다 내려놓고 간절한 마음으로 그 말씀을 사모함으로 받았던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외모로 보면 볼품이 없었다고 합니다. 머리는 대머리요 키는 작달만하고 안짱다리를 가진 자요 안질이 심하여 눈도 잘 뜨지 않는 외모를 가졌다고 합니다. 더욱이 말도 더듬거리기도 하여 말이 시원치 않은 면도 있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로부터는 뒷담화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 사도 바울이 강단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전하는데 그 지체 높은 사람들은 훅 들어온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눈이 반짝거렸습니다. 이전에 랍비들에게서는 전혀 느끼지 못한 영적 권위를 느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증거하는 말씀을 들을 때에 단지 해설하는 자가 아니요 그 전하는 말씀이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권위가 있어서 마음을 사로잡는 힘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말씀을 들을 때에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말씀을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마음을 열고 그 말씀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온통 간절한 마음으로, 온통 사모하는 마음으로’ 바울을 통하여 들려지는 말씀을 마음으로 환영하여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우리도 베뢰아 사람들과 같이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간절하고 열렬한 사모함을 가지고 받는 자가 됩시다. 그냥 사람의 말로서, 강연을 듣는 마음으로, 만담을 듣는 가벼운 마음으로 귀로 흘려 듣는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듣지 말고, 마치 먹고 싶었던 맛있는 요리를 보고서 그것을 기쁨으로 입으로 받아 혀로 맛보고 이로 씹어 그 맛을 깊이 음미하여 속으로 삼키듯이, 우리도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그것을 일류 요리사가 만들어 내놓은 최고의 음식을 내가 먹듯이,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내 앞에서 그 손으로 연주하는 소리를 바로 눈앞에서 내 귀로 듣는 것같이, 좋아하는 스포츠의 스타가 그 골을 드리블하여 상대방 수비진을 다 제치면서 골문에 가서 멋진 골을 차서 골인시킬 때 우리 눈이 그렇게 몰두하여 그 장면을 바라보듯이, 우리가 좋아하는 영화를 볼 때 그 극중의 배우가 연기한 모든 표정과 대사와 행동에 완전히 몰입하여 우리의 모든 감정과 생각이 완전히 사로잡혀버리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그러한 열렬한 사모함의 마음을 가지고 말씀을 받아들여 내 것으로 삼읍시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베다니 동네의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가 바로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달콤함에 빠져서 언니 마르다가 시킨 심부름도 까맣게 잊어버린 채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 발치에 앉아 그 말씀에 쏙 빠져 자기를 잊어버렸지 않습니까? 주님은 그렇게 말씀을 온 마음을 다하여 간절히 말씀을 받는 사람들을 기뻐하시고 심히 사랑하십니다. 그렇기에 마리아의 언니 마르다가 자기 동생 마리아가 바쁜 자기를 돕지 아니하니 그를 명하여 언니를 도와주라고 말해주기를 청하였을 때에 예수님은 도리어 마르다에게 이렇게 일러주셨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누가복음 10:41~42)
우리도 다른 많은 것들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지만 베뢰아 성도님들처럼 하나님 말씀을 모든 간절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하여 열렬히 받아들이는 말씀 사랑의 성도가 다 되어서 주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고 사랑을 듬뿍 받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또 하나의 베뢰아 성도들의 신앙적 특징은 그들이 듣는 말씀을 성경에 비추어 과연 그러한가 자세히 검증한다는 것입니다. 11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베뢰아 성도들은 사도 바울이 회당 앞 설교단에서 가르친 바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아들였지만 맹목적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경솔하게 아무나 가르치는 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대신 그 가르친 바가 성경에 합치하는가 여부를 자세히 살펴 보았습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고 할 때에 ‘상고한다’라는 헬라어 ‘아나크리노’라는 단어는 ‘시험하다, 연구하다, 조사하다, 수사하다, 심문한다, 판결한다, 체로 치다, 탐문한다, 분변한다, 질문한다’는 뜻을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쓰인 용례를 보면, 헤롯 아그립바가 베드로가 옥에서 나간 후에 그 옥을 지키는 파숫꾼 군인들을 심문한 후에 죽였다고 하는 사도행전 12:19 말씀에도 나오고, 고린도전서 2:15 말씀에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한다”는 말에서도 나옵니다. 이처럼 깊이 살펴서 확실한 것을 알아내는 조사, 연구, 시험, 판결 등의 의미를 이 단어가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뢰아 회당의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증거한 복음의 말씀을 듣고는 그냥 무작정 받아들이지 않고 성경 곧 구약 성경을 가지고 과연 사도 바울의 증거가 이 기록된 구약 성경의 말씀에 맞는지, 아니면 위배된 것인지를 자세히 미루어 살피고 조사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누가 어떤 사람들이 나타나 무엇인가 가르칠 때에 아무런 비판도 없이 무조건 믿고 받아들이는 자들이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들이나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여 구원받은 후에 그 뒤에 이어서 거짓 교사들이 나타나 예수님을 믿을 뿐 아니라 할례도 해야 하고 율법도 지켜야 된다는 교묘한 말을 전하자 흔들렸습니다. 다른 영,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을 전했는데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분별없이 맹목적으로 가르치는 대로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우리는 그 모든 가르침들을 성경에 비추어 살펴보아야 합니다. 무슨 기적과 표적을 나타내 보인다 해도 성경에 어긋나는 말을 가르치면 잘 살펴서 분별하여 물리쳐야 합니다.
또한 그 반대로 자기들이 가진 기존의 편견과 아집을 따라 아무리 진리의 말씀을 들어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절대로 안 바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진리의 말씀인가 아닌가 성경을 뒤적여서 확인해보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고 내려온 전통을 가지고 판단해버리고 고집을 부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강대상에 신발을 신고 올라가도 안됩니다. 피아노 위치를 조금만 바꾸어도 교회가 난리가 납니다. 성경 말씀과는 전혀 동떨어진 교리를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세워놓은 다음에 그 전통을 성경 말씀보다 더 중시합니다. 연옥을 인정하고 로마 교황의 무오성을 주장하고 죽은 성자의 유물에 손을 대거나 하면 그것으로 죄가 사해진다고 하는 기묘한 비성경적 가르침을 그대로 믿습니다. 이러한 아집과 불신앙 역시 성경적 신앙과는 동떨어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성경에 비추어 살펴보고 검사해보고 잘못된 편견과 아집은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기적과 이적이 나타나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환상을 보고 지옥 천국을 보고 왔다는 체험이 있다 하여도 성경의 가르침을 분명히 어긴다면, 성경의 진리와 성령의 역사하심을 위배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성경을 비추어 의심하고 판단하고 거부할 줄 알아야 합니다.
스웨덴보리라는 스웨덴의 과학자이자 종교인이 있는데, 그는 자주 영계를 왔다 갔다 하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는 그러한 영적 체험을 책으로 많이 썼습니다. 그는 천국을 예수님을 꼭 믿어야만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양심을 지키면 간다고 가르쳤습니다. 분명히 성경과 다른 말입니다. 스웨덴보리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체험을 하고 천사가 하는 말을 들었다면서 성경과 다른 말들을 하곤 합니다. 이런 저런 병도 고치고 귀신도 쫓아내면서 사람들이 추종하자 그들에게 자기가 자기가 유일한 계시 전달자요 보혜사라고 소개하며 자기를 추종하도록 말합니다. 성경 말고 자기의 어록들을 중요한 계시의 책으로 가르치면서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적과 표적과 체험들과 예언과 환상들이 대단하다고 해도 반드시 그들의 모든 일들과 그들의 말들과 가르침들은 항상 성경을 가지고 비추어 보고 검사해보고 판단하는 일을 우리는 반드시 해야 합니다. 그것이 경솔하게 모든 것을 믿어버리는 일도 피하게 하고, 혹은 헛된 것들을 기준으로 삼아 진리 아닌 것들을 굳게 붙들고 아집에 사로잡혀 망하게 하는 일도 막아주는 영적 방파제 역할을 해주는 것입니다.
베뢰아 회당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듣자 그냥 믿지 않고 날마다 사도 바울을 모셔서 가르치도록 하되 항상 성경을 가지고 그것들을 자세히 살펴서 과연 성경의 진리에 맞는가 맞지 않는가를 따져서 확인하곤 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베뢰아 회당의 사람들의 이 신앙적 자세의 결과는 12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12절을 읽겠습니다.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그렇게 자세히 날마다 성경을 놓고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비교하면서 자세히 검토하여 하나님 말씀에 맞는가를 살펴본 결과 그들은 마침내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 성경에 맞는 참된 진리라고 확신하게 되었기에 그들은 마침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받는 자가 많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베뢰아 성도들처럼 성경을 가지고 우리가 들은 바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 하고 자세히 검토하여 그 들은 말씀을 확증하여 차곡차곡 내 믿음의 기초를 다지는 복된 신자들이 됩시다. 성경과 상관없이 무엇이든지 들은 것을 비판없이 경솔히 받아들이는 자가 되지 말고 또 한편 성경 아닌 다른 기준들 종교적 관습이나 혹은 이적과 표적이나 혹은 어떤 영적 권위를 가진 사람을 무조건 믿고 따르는 자도 되지 맙시다. 우리의 신앙의 근거와 기초가 될 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씀하신 바 기록된 말씀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 끝에 하신 말씀을 환기해봅시다. 누가복음 16:27 이하를 읽어드리면,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중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어다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누가복음 16:27~31)
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기적보다 모세와 선지자들 곧 성경의 말씀을 듣는 것이 차라리 사람을 거듭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적과 기적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마음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베뢰아 성도들이 가졌던 성경 중심의 신앙 자세를 귀하게 여기고 그것을 본받아 우리의 신앙 습관으로 삼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성경을 뒤적이면서 과연 하나님 말씀이 그러한가를 살펴보고 그 성경의 진리를 확인하여 그 말씀을 자기 신앙의 기초로 삼는 거룩한 습관을 갖는 자가 됩시다. 만약 성경을 내팽개치고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염두에 두지 않고 자기 생각, 자기 체험, 습관적인 종교적 관습만을 기준으로 삼게 되면, 그것은 결국 모래 위에 지어진 집처럼 비바람이 몰아칠 때 무너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영원불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터 위에 믿음으로 굳게 세워진 신앙의 집을 지읍시다. 그리하여 세상의 시련의 풍파와 죽음의 비바람이 치고 이단과 사이비의 소용돌이 쓰나미가 들이닥친다 해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 확고한 구원의 집을 지읍시다. 베뢰아 성도들이 보인 이 복된 신앙이 우리의 것으로 삼읍시다.
오늘날 마지막 때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 풍조에 흔들리고 이단 사이비에 미혹되고 이런 저런 거짓 예언과 거짓 표적에 흔들리고 뿌리없이 감정적인 신앙으로 깊이 없는 감정적 신앙으로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이럴때에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님 말씀을 받읍시다. 또 날마다 성경을 깊이 살펴서 그 확증된 말씀 위에 굳게 서서 분별력 있는 성숙한 믿음의 소유자가 됩시다. 그리하여 날로 우리 믿음이 더 깊이 더 높이 더 굳건하게 성장해가는 아름다운 베뢰아 성도들과 같은 아름다운 성도들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