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2일 [연중 11주간 토요일]
코린토 2서 12,1-10
마태오 6,24-34
<주님의 기도는 나의 주인을 선택하는 기도다>
이번 20세 이하 월드컵에서 막내 이강인의 활약에 힘입어 우리나라 대표팀이 준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남자 월드컵 사상 최고의 성적을 낸 대회였습니다.
이강인은 대회 골든볼을 수상했습니다.
이강인은 스페인 발렌시아 팀이 지금처럼 자신을 대우해주지 않으면 이적할 것이라는 뜻을 밝혔습니다.
이강인은 17살의 나이에 발렌시아 1군으로 데뷔했지만 발렌시아 감독은 이강인을 경기에 투입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전술과 맞지 않고 너무 나이가 어리다는 것입니다.
가끔 이강인이 투입되었을 때는 놀라운 활약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감독은 이강인을 벤치에만 앉혀 놓았던 것입니다.
선수는 경기를 뛰지 않으면 감각과 자신감을 잃습니다.
이에 이강인 선수가 이번을 계기로 정 그러면 팀을 떠나게 해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이번 월드컵을 시청한 발렌시아 팬들은 이강인을 그렇게 대우하는 것에 뿔이 났습니다.
그리고 구단에 이강인을 놓치면 알아서 하라고 강력한 항의를 하고 있습니다.
다급해진 구단은 급박하게 이강인에게 접촉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강인을 원하는 팀이 많아졌기 때문에 이젠 거의 이강인이 갑의 입장에서 발렌시아 구단과 대화 하고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능력이 있음을 인정받아 뽑아는 놓았지만 정작 그를 뛰게 하지 않으면 이강인의 값어치는 계속 하락할 것입니다.
어린 외국인 선수기용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 몇 년을 경기에 뛰지 못한 이승우와 백승호는 다시 이전 기량을 회복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관심이 없는 팀에 머무는 것보다는 관심을 가져주는 팀으로 가는 것이 더 낫습니다.
레알에서 조금씩 관심을 받지 못하던 호나우두는 돈을 적게 받더라도 자신을 인정해주는 유벤투스로 이적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전성기를 맞고 있습니다.
가치를 알아주지 않으면 떠나는 것이 상책입니다.
신앙에서도 이렇게 가치를 몰라 잃게 되는 보석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의 기도’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주님의 기도의 가치에는 집중하지 않고 마치 벤치에 앉혀놓고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 원인은 주님의 기도를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바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이 나의 주인이 되게 해 달라는 청원이고, 내가 이웃을 사랑하게 해 달라는 청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돈이나 명예 등을 위해 주님의 기도를 바쳐버립니다.
여행을 떠나면서 “이번 여행 아무 사고 없이 잘 다녀올 수 있도록 주모송을 바칩시다.”라고 해놓고, 좋은 여행이 되기만을 생각하며 정작 주님의 기도 내용에는 집중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뛰어난 선수를 벤치에 앉혀놓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주님의 기도에만 집중하면 여행은 알아서 주님께서 잘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기도를 올바로 바치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입니다.
오늘 복음은 엊그제 주님의 기도를 알려준 복음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올바로 바치려면 섬길 주인을 명확히 정하라는 내용이 오늘 복음인 것입니다.
돈을 주인으로 섬기면서 주님의 기도를 바치기 때문에 주님의 기도가 밀려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주님이 아닌 돈을 섬기고 있다는 증거는 무엇일까요?
‘걱정’입니다. 돈을 섬기면 당연히 걱정이 생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라고 하고 미래를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미래를 걱정하는 것 자체가 이미 재물에 지배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동시에 지금 이 순간 당신 뜻만을 찾으라는 하느님을 만날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은 오늘 여기 계신데 나는 내일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에 대한 걱정이 이렇게 나를 하느님과 어긋나게 합니다.
그런 걱정으로 주님의 기도를 바치니 주님의 기도의 힘이 그 사람 안에서 발휘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맡기면 모든 것이 다 잘 됩니다.
하느님은 새들도 먹이고 꽃들도 입히십니다.
사람이야 오죽 잘 챙겨주시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고 하십니다.
그 내용이 들어있는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나라가 오시기를 청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여 의롭게 되기를 청합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입니다.”
덤으로 알아서 주실 것에 집중하고 정작 청해야 하는 것은 생각 없이 넘겨버리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재물을 사랑하면 병드신 아버지의 건강이 어떠신 지는 물어보지도 않으면서 유산은 언제 줄 거냐고 청하는 아들과 같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내가 재물을 주인으로 선택할 것인지, 하느님을 주인으로 선택할 것인지 정하는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온전히 바치려면 먼저 미래에 대한 걱정을 주님께 맡겨 떨쳐버리는 믿음을 가져야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22일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코린토 2서 12,1-10
마태오 6,24-34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인간의 노력보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건설되는 것입니다!>
지나친 낭만주의자, 혹은 대책없는 낙천주의자로 비춰질 가능성이 있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기에, 좀 더 많이 묵상하고, 보다 잘 새겨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마태오 복음 6장 25절)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마태오 복음 6장 34절)
특히 순식간에 월말이 다가와, 내일 당장 세금과 공과금을 납부해야 하고, 엄청난 금액의 자녀들 등록금과 과외비를 납부해야 하는, 어깨가 무거운 가장이 들으면 기가 찰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을 훌훌 털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신 ‘나는 자연인이다.’
출연자들에게는 어느 정도 해당될 말씀 같기도 합니다.
유심히 관찰해보면, 지극히 평화로워보이는 산새들 역시,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지 즉시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저절로 되는 것은 없습니다.
약육강식의 먹이 사슬 틈바구니에서, 갖은 위험을 감수해가며, 겨우겨우 먹이를 구해가며 그렇게 하루하루 생존해갑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분 말씀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파악해야겠습니다.
이 세상 보다 하느님 나라에 더 우선권과 가치를 두고 있는 그리스도 신자라 할지라도, 지상에 머무는 동안에는 생계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길고도 긴 노후 생활을 보다 건강하고 의미있게 보내기 위해 안정적인 경제 기반을 마련해두어야 합니다.
이런 연유로 바오로 사도는 “자기 가정을 보살피지 않는 사람은 이교도보다 더 몹쓸 사람입니다.
일하지 않는자는 먹지도 마십시오.”라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행위가 아니라 마음의 자세입니다.
그분께서 꾸짖으시는 바는 인간의 일만 생각하지 하느님은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는 우리들의 삶인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신뢰심은 조금도 없이, 그저 하루 온종일 갖은 근심과 걱정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그릇된 인생을 질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인간의 근심과 걱정,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 그분의 자비와 사랑으로 건설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공포심이나 불안한 마음과 더불어 찾고 추구해서도 안됩니다.
진심으로 하느님을 찾는 사람의 마음 안에는 이미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시기에, 그는 이미 하느님 나라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육체와 재물 자체를 단죄하거나 의식주의 필요성을 부인하신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분께서 제자들과 오늘 우리 각자를 향해 특별히 경고하시는 바는 목숨과 재물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요 탐욕입니다.
매일의 안정적인 의식주 해결을 위한 경제적 기반은 더없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나침입니다.
미래를 위한 재물의 축척도 어느 정도여야지, 너무 지나칠 때 인간은 재물의 노예가 되고, 언젠가 그 지나친 재물이 오히려 큰 재앙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결국 최종적으로, 진정으로 추구할 보물은 하느님이요, 하느님의 나라요, 그분의 다스림입니다.
내일에 대한 지나친 근심 걱정을 모두 말끔히 내려놓으면 좋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하고 나머지는 한없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두 손에 우리들 인생을 몽땅 맡겨드리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자체해결해 버리고자 기를 쓰면, 그분께서 활동하실 여지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6월22일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복음: 마태 6,24-34 :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주인이라고 하시는데, 그 재물이 주인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사용되는 용도가 사악하여 인류에게 너무나 많은 불행을 가져오게 하는 주체가 된다는 의미이다. 재물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으로 하느님을 떠나게 되어 하느님의 자녀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다는 사실이다.
예수께서는 그래서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24절)라고 하신다. 이 재물은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마력을 발휘하거나 역신(逆臣)으로 둔갑하여 인간을 온통 지배한다. 이 마몬은 인간이 섬겨야 할 상전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부려야 할 종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인간이 재물에게 압도되어 종이 될까봐 제자들에게 포기하라고 하셨고, 그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목숨을 부지하려고 걱정하지 마라.”(25절)고 하신다. 그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손해 때문이다. 우리가 입을 수 있는 해는 재물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그 재물 때문에 그 재물이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리 던져버려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재물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되어 그 재물을 부릴 줄 알아야 한다. 그 재물을 잘 사용하는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새와 들에 핀 나리꽃들과 들풀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30절)고 하신다. 자연 속에 있는 모든 것도 그렇게 보살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에게 영혼을 주셨고, 육신을 지어 주셨고, 우리를 위해 창조계의 모든 것을 만드셨고, 우리를 위해 예언자들을 보내셨으며, 율법을 주셨고, 표현할 수 없이 많은 좋은 것들을 이루어 주셨고, 우리를 위해 당신의 외아들까지 내 주셨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33절)이는 우리의 궁극적인 선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이다. 어떤 일을 하던 이것을 위해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늘 나라에 이르기 위해 싸우고 있으며, 여기에서도 필요한 것이 충족되어야 하므로 곁들여 받게 된다고 하신 것이다. 먼저 그분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는 일을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그 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34절) 우리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선을 행해야 한다. 우리의 선행이 완전한 행위가 될 때에 우리가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알맞은 때에 얻게 된다. 열심히 선행을 행하자.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이 모든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고 하신 것이다.주님께 완전히 신뢰하는 우리가 되도록 하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