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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경북교육삼락회 문화유적 답사 계획
일시 : 2017년 9월 15일(금) - 16일(토)
장소 : 강화도 일원
2017년 9월 15일(금)
반월당(08:00 출발) - (338.9km. 4시간) - 갑곶돈대. 강화역사관. 강화전쟁박물관(12:00 도착. 관람 50시간. 12:50 출발) - (3.3.km. 6분) - 강화읍 식당(12:56 도착. 점심 1시간. 1:56 출발) - (11.4km. 19분) - 강화도 평화전망대(2:15 도착. 관람 40분. 2:55 출발) - (11.2km. 16분) - 강화역사박물관. 지석묘(3:11 도착. 관람 50분. 4:01 출발) - (5.1 km. 7분) - 강화산성 서문(4:08 도착. 관람 15분. 4:23 출발) - (1.1km. 3분) - 고려궁지(4:26 도착. 곤람 15분. 4:41 출발) - (0.9km. 5분) - 김상용순절비. 용흥궁(4:46 도착. 관람 15분. 5:01 출발) - (26.3km. 40분) - 보문사(5:41 도착. 관람 1시간 30분. 7:01 출발) - (28.2km. 45분) - 선창횟집(강화군 화도면. 7:46 도착). 숙소
* 강화도 일몰 시간 6:40 경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석모도 보문사 뒷산인 낙가산 중턱에 있는 마애석불좌상 앞에 서면 서해가 눈앞에 펼쳐지는 절경을 볼 수 있고, 여기에서 보는 일몰은 환상적입니다. 일몰 시간을 맞추어 계획을 잡았습니다. (사진출처 : 보문사의 보문사 풍경)
2017년 9월 16일(토)
선창횟집(강화군 화도면. 8:00 출발) - (12.0km. 20분) - 전등사(8:20 도착. 관람 1시간 30분. 9:50 출발) - (7.1km. 15분) - 광성보(10:05 도착. 관람 1시간. 11:05 출발) - (2.4km. 6분) - 덕진진(11:11 출발. 관람 30분. 11:41 출발) - (2.8km. 4분) - 초지진(11:45 도착. 관람 30분. 12:15 출발) - (2.3km. 6분) - 황산도 관광벨트어시장( 12:21 도착. 점심 및 시장 구경 1시간 30분. 1:51 출발) - (356.4km. 4시간 40분) - 반월당(6:31 도착)
*위의 계획은 현지 사정에 따라 변동 될 수 있습니다.
김상용순절비(金尙容殉節碑.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5호. 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416 )
조선 인조 때의 문신인 김상용 선생의 충의를 추모하고 기리기 위해 세워놓은 비이다.
선원 김상용(1561∼1637) 선생은 선조 23년(1590) 문과에 급제하여 판동녕부사, 병조·예조·이조의 판서, 유도대장, 우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종묘를 모시고 빈궁과 원손을 수행하여 강화도로 피란했으나 성이 함락되자 성의 남문루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른 후 순절하였다. 이러한 그의 충절을 기리고자 비를 세웠으며, 선원면에 자리한 충렬사에 그의 위패를 모시었다.
비각 안에는 2기의 비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데, 하나는 정조 때 공의 7대손인 김매순이 세운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숙종 26년(1700) 선생의 종증손 김창집이 건립한 것으로, 1976년 지금의 자리로 비각을 옮기던 중 발견되었다.
대한성공회 강화성당(大韓聖公會 江華聖堂.사적 제424호.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길 22 (관청리))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은 1900년 11월 15일 건립된 동서길이 10칸, 남북길이 4칸인 한식 중층건물이다.
이 성당은 서양의 바실리카식 교회건축 공간구성을 따르고 있으나 가구 구조는 한식 목구조와 기와지붕으로 되어있는 점이 특징이다. 구조와 외관을 한국전통 건축양식에 적응시킴으로서 외래종교에 대한 거부감을 완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공회 강화성당은 서쪽에 출입문을 배치하여 서구 형태를 취하면서 전체적으로는 배(船)모양을 본 떠 뱃머리인 서쪽에는 외삼문 및 내삼문과 동종을 배치하고, 중앙에는 성당을 두었다. 후미에는 사제관을 배치하여 특이한 양식을 보여주며 우리나라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유적이다.
용흥궁(龍興宮.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 인천 강화군 관청리 440외2)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재위 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으로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강화유수 정기세가 건물을 새로 짓고 용흥궁이라 이름을 붙였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고,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용흥궁은 청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을 따라 지어져 소박하고 순수한 느낌이 든다. 경내에는 철종이 살았던 옛 집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이 있다.
강화 초지진(江華 草芝鎭. 사적 제225호. 인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624)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1656)에 구축한 요새이다.
안산의 초지량에 수군의 만호영이 있었던 것에서 처음 비롯되었는데 1666년에 초지량영을 이곳으로 옮긴 뒤 ‘진’으로 승격되었다. 1870년대에 미국과 일본이 침략하였을 때 이들과 맞서 싸운 곳으로 1871년에 미국 해병이 초지진에 침략해 왔을 때 전력의 열세로 패하여 점령당하였다. 이 때 군기고, 화약창고 등의 군사시설물이 모두 파괴되었다.
일본이 조선을 힘으로 개항시키기 위해서 파견했던 운양호의 침공은 고종 13년(1876)의 강압적인 강화도 수호조약으로 이어져 일본침략의 문호가 개방되었다. 그 뒤 허물어져 돈대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으나 1973년 초지돈을 복원하였다.
민족시련의 역사적 현장이었던 이곳은 호국정신의 교육장이 되도록 성곽을 보수하고 당시의 대포를 진열하였다.
강화 삼랑성(강화 三郞城. 사적 제130호.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41)
정족산성이라고도 하며 단군의 세 아들이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있어 삼랑성이라 부른다.
이 성이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고려가 1259년 삼랑성 안에 궁궐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 전에 이미 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곽이 쌓여져 있는 모습을 보면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경주의 명활산성처럼 삼국시대 성의 구조를 찾을 수 있으므로,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성으로 추측된다.
고려 때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영조 15년(1739)에 성을 다시 쌓으면서 남문에 문루를 만들고 ‘종해루’라고 하였다. 조선 현종 1년(1660) 마니산의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성 안에 있는 정족산사고로 옮기고,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을 함께 지었다. 그러나 지금은 둘 다 없어지고 전등사만 남아있다.
이곳은 고종 3년(1866)의 병인양요 때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을 해오던 160여 명의 프랑스군을 무찌른 곳으로도 유명하다.
양헌수승전비(梁憲洙勝戰碑.천광역시 기념물 제36호)
이 비는 조선 고종 3년(1866) 10월에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프랑스 극동함대 7척이 강화도를 침입하였을 때 (병인양요) 당시 순무 천총이던 양헌수(1816-1888)장군이 정족산성에서 강계포수 500여명을 매복 시켰다가 습격하여 프랑스 군대를 격퇴시킨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고종 10년(1873)에 건립 한 것이다. 양헌수 장군의 자는 경보, 본관은 남원으로 현종 4년(1838)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가 병인양요시 공을 세워 한성부좌윤으로 특진 되었으며 이후 부총관, 금위등 중군을 거처 형조판서, 금위대장등을 역임하였다.
양헌수는 이 싸움으로 종2품의 한성우윤에 임명되었다가 1869년 황해도병마절도사로 부임했다. 1871년에는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신설한 별위사제도의 격려방안으로 매년 도시(都試)를 시행하여 성적에 따라 우대하고 곡식과 면포로 포상하였는데, 이에 치적이 인정되어 특별히 1년을 더 병마절도사로 근무하였다. 1872년에는 황해도 연안에 출몰한 해적을 체포하고, 국방력을 강화하고 효율적인 운영에 많은 공헌을 했다. 그후 양헌수는 포도대장과 어영대장·금위대장 등 요직을 거치기도 했는데, 1876년 강화도조약 당시에는 김병학(金炳學)·홍순목(洪淳穆)·이용희 등과 함께 개국을 반대하는 척화론을 끝까지 주장했다. 그는 1882년에는 임오군란 이후 대원군이 삼군부를 다시 설치하였는데 이때 조영하(趙寧夏)·김병시(金炳始)·김기석(金箕錫) 등과 함께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에 임명되었다.
승전비는 양헌수와 초관 17명, 경초군 121명, 표하군 38명, 포수 367명이 프랑스 군대를 맞이하여 활약한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전등사(傳燈寺)
단군 왕검의 세 왕자가 쌓았다는 정족산 삼랑성(사적130호)내에 위치한 전등사는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고려 왕실의 원찰로서 眞宗寺(진종사)라 불리워 왔다. 지금의 전등사란 명칭은 고려 충렬왕 8년(1282)에 왕비 정화궁주가 옥등잔을 부처님께 바친 데서 생겨났다고 전해진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조선에 개항을 요구한다는 명목으로 강화도를 점령했다. 이에 맞서 조정에서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양헌수 장군 등을 임명하여 프랑스 함대를 물리치게 했다. 이때 양헌수 장군은 휘하 병력을 이끌고 초지진을 건너 정족산성에서 적을 무찔렀다. 조선군을 얕잡아보던 프랑스 함대는 이 전투가 끝난 뒤 크게 전의를 상실하여 조선에서 물러갔다. 프랑스군은 양헌수 부대와 싸우기 직전만 해도 정족산성을 돌파하고 전등사에서 점심을 먹겠노라 공언한 바 있었다. 이 전투에서는 조선의 관군뿐만 아니라 경기·황해도 일대의 포수들, 전등사 사부대중들까지 가세하여 나라의 위기를 구하는 데 힘을 모았다. 조정에서는 전투의 승전을 기리기 위해 양헌수 장군 승전비와 비각 을 정족산성 동문 내에 세웠다
전등사 대조루(傳燈寺 對潮樓.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 인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 (온수리))
전등사는 아도화상이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에 세운 절로 정족산성 안에 자리잡고 있다. 절 입구에 세운 대조루는 기둥을 세워 지면과 사이를 두고 지은 누각이다. 지은 시기를 알 수 없으나 조선 영조 25년(1749)과 헌종 7년(1841)에 고쳐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 뒤 크고 작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의 익공 양식으로 비교적 간략한 수법이다.
안쪽에는 ‘선원각’, ‘장사각’ 현판과 함께 영조의 친필이라는 ‘취향당’ 현판을 보관하고 있는데 현재 이들을 걸어 두었던 건물은 남아 있지 않다.
강화 전등사 대웅전(江華 傳燈寺 大雄殿. 보물 제178호. 인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 전등사 (온수리) / (지번)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5 전등사 )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 아도화상이 세웠다고 전하지만 고려 중기까지의 역사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조선 선조 38년(1605)과 광해군 6년(1614)에 큰 불이 일어나 절이 모두 타버려, 그 이듬해 다시 짓기 시작하여 광해군 13년(1621)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석가여래삼존불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은 광해군 13년(1621)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네 모서리기둥 윗부분에는 사람 모습을 조각해 놓았는데 이것은 공사를 맡았던 목수의 재물을 가로챈 주모의 모습이라는 전설이 전해져 오는데, 재물을 잃은 목수가 주모의 나쁜 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 하기 위해 발가벗은 모습을 조각하여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3곳의 처마 밑에서는 두 손으로 처마를 받치며 벌을 받고 있는 모양새인데 비해, 한 귀퉁이의 것은 한 손으로만 처마를 받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벌을 받으면서도 꾀를 부리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우리 선조들의 재치와 익살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의 능숙한 조각 솜씨를 엿볼 수 있고, 조선 중기 이후의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강화 전등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江華 傳燈寺 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 보물 제1785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전등사로 37-41 (길상면, 전등사) )
강화 전등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은 17세기 전반에 전북, 충남 등지에서 활동하던 수연(守衍)이 수화승으로 참여하여 1623년에 조성한 불상으로 수연이 수화승(首畵0僧)으로 조성한 작품들 가운데 지금까지 알려진 두 번째 불상이다. 삼불의 구성은 석가불을 본존으로 아미타불과 약사불이 좌우에 협시하는 형식으로서 조선 후기에 전국적으로 유행했던 삼세불의 도상을 보이고 있다. 불상들의 세부를 보면, 본존 석가불상은 단엄한 자세에 자비한 상호(相好)를 보이며, 좌우의 아미타불상과 약사 불상은 이목구비의 표현이나 비례 면에서 본존상 보다는 다소 조형감이 떨어지는 편이다. 본존상은 상호(相好)의 표현이 근엄하고 전체적인 신체비례 면에서도 안정감이 느껴져 시기적으로 앞서는 같은 수연 작의 서천 봉서사 목조 아미타여래삼존좌상(1619년)에 비해 조각적으로 세련된 감각을 보여준다.
삼세불상의 얼굴은 각각 독특한 상호를 보이고 옷주름 표현기법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인다. 이것은 아마도 전등사 삼세불상 조성에 참여한 조각승들 가운데 수화승 수연과 함께 서천 봉서사 극락전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1619년, 보물 제1751호) 조성에 참여했던 성옥(性玉)의 조각적 개성이 표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세 번째 화원으로 참여한 영철(靈哲)은 이후 옥구 보천사 목조지장보살좌상과 시왕상(1634년, 익산 숭림사 봉안)과 남원 풍국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1639년, 예산 수덕사 봉안)의 조성에 수연을 따라 참여했으며 성옥에 비해 연배가 아래인 조각승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등사 대웅보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은 조성원문을 통하여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조각적으로 우수하며, 조각승들과 나타난 발원시주자들의 명단이 잘 전하여 불상(佛像), 면금(面金), 체목금, 체목, 오금(烏金), 좌대(座臺), 보단(甫團), 채안(彩安), 복장(腹藏) 등 세부적인 시주 항목이 기록된 점 등에서 조선시대 불교조각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전등사 대웅보전 수미단(傳燈寺 大雄寶殿 須彌壇.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8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전등사로 37-41 (길상면, 전등사))
수미단은 불상을 안치한 일종의 대좌와 같은 형식으로 대웅전 내의 천개와 더불어 장엄한 불교세계를 아름답게 묘사한 것이다. 전등사 수미단은 가로 480㎝, 세로 118㎝, 폭 200㎝로 17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맨 하단 받침부 몰딩 사이에 불법(佛法) 수호신격인 도깨비와 같은 문양이 익살스럽게 조각되어 있고, 중간부분 장판에는 꽃·나무·새·당초문·보상화문·상상의 동물 등이 화려하게 투각되어 있는 등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
전등사 업경대(傳燈寺 業鏡臺.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7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전등사로 37-41 (길상면, 전등사))
업경대는 망자의 죄업을 드러내 보인다고 하는 거울로 업경륜이라고도 한다. 전등사 업경대는 황색사자와 청색사자 1쌍으로 목각 사자의 몸체와 등 위에 커다란 화염문 거울이 꽂혀있다. 규모는 높이 107cm, 길이 65cm이다. 좌대 바닥에 ‘천계칠년정묘구월 십삼일 각록목화원밀영 천기 봉생(天啓七年丁卯九月 十三日 刻祿木畵員密英 天琦 奉生)’이라는 묵서 명문이 남아 있어 조선 인조 5년(1627)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등사 업경대는 조선 후기 불교 목공예품의 편년 설정·상호비교 연구의 획기적 자료로 평가된다.
전등사 대웅보전 후불탱(傳燈寺 大雄寶殿 後佛幀.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1호. 인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 (온수리) )
강화 전등사 약사전(江華 傳燈寺 藥師殿. 보물 제179호. 인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 전등사 (온수리) / (지번)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5 전등사 )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 아도화상이 세웠다고 전하지만 고려 중기까지의 역사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조선 선조 38년(1605)과 광해군 6년(1614)에 큰 불이 일어나 절이 모두 타버려, 그 이듬해 다시 짓기 시작하여 광해군 13년(1621)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대웅보전 서쪽에 있는 아담한 약사전은 중생의 병을 고쳐준다는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는 법당이다.『대웅전약사전개와중수기(大雄殿藥師殿改瓦重修記)』에 조선 고종 13년(1876) 대웅보전과 함께 기와를 바꾸었다는 기록이 보일 뿐 언제 지었는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고 건축 수법이 대웅보전과 비슷하여 조선 중기 건물로 짐작하고 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다. 건물 안쪽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이며 주위에는 화려한 연꽃무늬와 덩굴무늬를 그려 놓았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수법이 특이하여 당시의 건축수법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전등사 약사전 석불좌상(傳燈寺 藥師殿 石佛坐像.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7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전등사로 37-41 (길상면, 전등사))
이 석불좌상은 고려 말 조선 초에 제작된 것으로 신체비례로 보아 갸름한 체구에 단아한 얼굴형을 하고 있어 고려 불상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전방을 향한 얼굴에 눈을 약간 아래로 내려 뜬 단아한 얼굴과 목은 정확한 삼도가 있어 길어 보이고, 벌어진 어깨선은 자연스러워 보이며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선정인을 하였다. 그리고 약합을 들고 있어 전형적인 약사여래임을 알 수 있다.
통견의 두꺼운 가사는 길상좌를 취한 무릎 아래까지 자연스럽게 내려졌으며 옷 주름은 훤칠한 자세에 비해 약간은 형식적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부피감이 결여되고 경직된 느낌을 주는데 이는 두꺼운 칠과 금분을 정밀하지 못하게 처리하였기 때문이다.
전등사 약사전 현왕탱(傳燈寺 藥師殿 現王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3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전등사로 37-41 (길상면, 전등사)
전등사 약사전(보물 제179호)에 보존되어 있는 현왕탱인데, 이 그림은 사람이 죽은지 3일 만에 심판하는 현왕과 그 권속을 도상화한 것이다. 조선 고종 21년(1884)에 제작된 그림으로 화면은 원형구도로서 생동감을 주고 있으며 비록 색 배합은 뛰어나지 않지만 꼼꼼한 필력이 구사된 점, 현왕도의 도상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점 등 19세기 불화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전등사 약사전 후불탱(傳燈寺 藥師殿 現王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4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전등사로 37-41 (길상면, 전등사) )
전등사 약사전(보물 제179호)에 보존되어 있는 후불탱인데,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액자나 족자 형태로 만들어지는 불화를 말한다. 조선 고종 21년(1884)에 제작된 그림으로 정사각에 가까운 화폭 중앙에 약사여래좌상과 좌우협시인 일광·월광보살을 배치하고 상하 좌우에는 사천왕을, 약사불 뒤에는 가섭과 아난을 그린 병렬식 구도를 보이고 있으며, 색채는 18세기 후반의 색 배합을 계승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전통적인 도상을 계승하고 안정된 화면 구성, 꼼꼼한 필력을 갖추고 있어 19세기 불화양식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전등사 철종(傳燈寺 鐵鍾. 보물 제393호. 인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 전등사 (온수리) / (지번)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5 전등사 )
일제시대 말기 금속류의 강제수탈 과정에서 중국에서 건너온 철종으로서 광복 후 부평군기창에서 발견하여 전등사로 옮겨 현재까지 보존하고 있다.
형태와 조각수법에서 중국종의 전형적인 특징을 갖춘 높이 1.64m, 입지름 1m의 종으로 한국의 종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종꼭대기에는 두마리의 용이 서로 등지고 웅크려서 종의 고리를 이루고 있고, 소리의 울림을 돕는 음통은 없이 천판(天板) 중앙에 구멍을 뚫었다. 몸통 위 부분에는 8괘를 돌려가며 배치하고, 종의 몸체 중간을 가로지른 3줄의 띠로 종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각각 8개의 정사각형 곽을 돌렸다. 이 정사각형 곽에는 명문을 새겼는데, 명문을 통해 이 종이 중국 하남성 백암산 숭명사의 종이라는 것과 북송 철종 4년, 곧 고려 숙종 2년(1097)에 주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철로 만든 종이지만 종소리가 청아하며 중국 북송 시대에 만들어진 명문을 지니고 있어 중국종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문화재이다.
강화 전등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江華 傳燈寺 木造地藏菩薩三尊像 및 十王像 一括. 보물 제1786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전등사로 37-41 (길상면, 전등사))
강화 전등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은 조성원문을 통하여 숭정(崇禎) 9년(1636)이라는 뚜렷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이 조각승 수연(守衍)에 의해 조성된 지 13년이 지난 뒤에 역시 수연이 수화승이 되어 제작한 상들이다. 지장보살상과 그 좌우에 무독귀왕, 도명존자, 시왕(十王)와 귀왕, 판관, 사자상, 동자상, 인왕상 등 명부전의 권속이 많다보니 조각승도 12명이나 참여하여 수연의 지휘 아래 제작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상들의 조성을 위한 시주에 수많은 신도들이 참여한 것으로 보아 당시 전등사 일대의 대대적인 불사(佛事)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장보살상은 방형의 얼굴에 엄중하면서도 자비로운 상호(相好)를 보이며 양 어깨에 걸쳐진 대의 옷자락은 유연한 주름을 이루며 하체로 연결된다. 양손으로는 지물을 들지 않고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설법인을 결하고 있는데, 전체적인 비례와 조형감이 우수하다. 지장보살상과 매우 유사한 특징을 보이는 도명존자상은 얼굴표현에서 사실성이 돋보이며, 장삼위에 가사를 입은 착의형식이 단정하다. 수연 조각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지장보살상과 도명존자 외에도 시왕상과 기타 권속의 여러 상에서 보이는 인간적이면서도 차분한 분위기는 수연 조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조각기법상의 우수성, 조각가와 조성연대에 대한 분명한 기록, 원래부터 전등사 명부전 봉안을 위해 조성된 상이라는 여러 점에서 볼 때 그 가치가 큰 상들이다.
묘법연화경 목판(보물 제1908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전등사로 37-41 (길상면, 전등사))
전등사에 소장된 ‘『묘법연화경』 목판’은 중종 38년(1543) 마니산(摩尼山) 정수사(淨水寺)에서 성달생(成達生) 서체 계열의 인본을 복각하여 1판 4장의 형태로 조성한 것이다. 전체 105매 가운데 첫 부분인 변상(變相) 및 홍전서(弘傳序)로 구성된 1매가 결실되었고, 일부 목판에서 충해로 인한 훼손이 보이나 대부분의 경판은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이 목판은 조선초기부터 16세기까지 성행되었던 성달생 서체 계열의 『묘법연화경』 가운데 시대가 가장 앞서는 목판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또한 각 권의 말미와 판면 광곽의 변란 밖에는 『중종실록』 등과 같은 관찬사서 등에서 확인되지 않은 수백 명의 시주질․연화질 및 각수 등이 새겨져 있어 16세기 중엽 정수사의 경판 조성과 관련된 역사상, 수록된 승려 등을 통한 불교사적 사실 등 다양한 역사․문화적 실체를 살펴볼 수 있는 학술적 가치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보물로 지정하여 원천자료를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전등사 청동수조(傳燈寺 靑銅水槽.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6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전등사로 37-41 (길상면, 전등사))
전등사 청동수조는 지름 112㎝, 높이 72㎝로 고려 말∼조선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청동으로 제작된 이 수조는 바리(鉢)형태를 띠고 있고, 구연부에는 덧띠를 두르고 있으며 약간의 균열과 파손 흔적이 보이지만 모두 수리하여 양호한 상태이다. 일반적으로 사찰의 수조(水槽)는 삼국시대부터 큰 돌 내부를 파서 물을 담아 쓰기 시작하였으며 우물가에 두고 그릇 등을 씻을 때 사용하였다. 수조(水槽)는 궁궐에서는 드무라 부르는데 솥같이 생긴 그 안에 물을 채워 화재가 날 경우 바로 사용할 수 있고, 공중에 떠다니는 화마(火魔)나 불귀신이 물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벌써 동료가 와 있게 하여 다른 곳으로 가게 하기 위해서 설치한다는 설화가 있다. 현재까지 명문(銘文)이나 청동수조 제작과 관련한 기록이 보이지 않아 정확한 제작 연대를 밝힐 수 없지만 고려 말 내지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등사 강설당 아미타불탱(傳燈寺 講說堂 阿彌陀佛幀.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2호. 인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온수리))
전등사 강설당에 보존되어 있는 아미타불탱인데,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액자나 족자 형태로 만들어지는 불화를 말한다.
1918년에 제작된 그림으로 많은 존상들이 정연하게 늘어서 있어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각 인물들의 얼굴과 자세, 의습선 등에서 정치(精緻)한 필력(筆力)을 엿볼 수 있다. 색 배합은 밝은 홍색과 녹색, 황색 위주이고 간간이 백색과 청색을 섞어 썼다.
강화 정족산사고(江華 鼎足山史庫.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67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전등사로 37-41 (길상면, 전등사))
현재 정족산사고지(鼎足山史庫址)는 정족산성 안 전등사 서쪽 높이 150m에 위치하며, 사고지의 보호철책 안쪽에는 주춧돌들이 놓여져 있다. 또한, 성내에는 수호사찰(守護寺刹)인 전등사가 사고를 보호해왔으므로 1910년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실록과 서적들이 옮겨질 때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사고 건물이 언제 없어졌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931년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 朝鮮古蹟圖譜≫에 정족산사고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때를 전후해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고 건물에 걸려 있었던 ‘장사각(藏史閣)’과 ‘선원보각(璿源寶閣)’이라 쓰인 현판이 전등사에 보존되어 있다.
이 사고에 보관되어오던 정족산사고본 실록들은 많은 변동은 있었지만, 임진왜란 때에 유일본으로 남은 전주사고본이 묘향산사고로 피난했다가 마니산사고로 옮겨졌고, 이 마니산사고본의 잔존실록들을 옮겨서 보관, 관리해 오늘에 전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재 정족산사고본 실록은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보존, 관리하고 있다
보문사(普門寺)
창건 당시 관세음보살이 상주한다는 산의 이름을 따서 낙가산이라고 하고, 관세음보살의 원력이 광대무변함을 상징하여 보문사라 이름 짓고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처럼 산과 절의 이름이 모두 관세음보살을 상징하고 있어 보문사가 관음도량임은 창건의 역사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후 보문사를 창건한지 14년 만인 649년 석가모니 부처님과 미륵보살 등 스물 두 분의 석상을 바다에서 건져 올려 석굴 법당에 모신 나한전 조성 일화는 유명하며 기도의 영험을 많이 보여 신통굴로 불리기도 합니다.
나한전의 역사는 보문사의 역사와 함께 해 왔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습니다.
인천 강화도 서쪽의 석모도에 자리하고는 보문사는 양양 낙산사, 금산 보리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해상 관음기도 도량입니다.
석모도 낙가산 중턱 눈썹바위 아래 마애 관세음보살님은 탁 트인 서해를 바라보며 중생들을 살펴주고 계십니다.
보문사는 나한전에서 24시간 스님들의 기도가 계속 이어지고 있어 누구나 언제든 기도 할 수 있는 나한도량으로 불자들의 발걸음이 끊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보문사석실(普門寺石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7호. 인천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629-1)
보문사에 있는 석굴사원으로, 나한상(羅漢像)을 모시는 나한전의 구실을 한다. 천연동굴을 이용하여 입구에 무지개 모양을 한 3개의 문을 만들고, 그 안에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마련하여 석가모니불을 비롯한 미륵 ·제화갈라보살, 나한상 등을 모셔두었다.
이 석불들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 한 어부가 고기를 잡다가 그물에 걸린 돌덩이를 꿈에 나타난 대로 모셔 두었더니 큰 부자가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데, 불상의 제작연대는 그처럼 오래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나한전 조성 일화 : 신라 진덕왕 3년, 보문사 아랫마을 어부들은 여느 해와 다름없이 봄을 맞아 고기잡이에 나서느라 분주했다.
만선의 꿈에 부풀어 어부들이 바다에 그물을 쳤다가 올려보니 물고기는 보이지 않고 특이한 형상의 돌덩이가 22개나 그물에 걸려 있었다. 어부들이 자세히 들여다보니 돌덩이들은 사람 모습과 꼭 닮아있었다.
어부들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기이한 석상을 보고 놀랍고 두려운 생각이 들어 바다에 던져 넣고 배를 저어 멀리 떨어진 다른 곳에 가서 고기를 잡기 시작했다.
한참만에 그물을 다시 걷어 올리자 아까 멀리 떨어진 곳에 던져버린 석상 22개가 그대로 다시 올라온 것이 아닌가. 어부들은 매우 놀라 허둥지둥 그물과 석상들을 바다에 던져 버리고 서둘러 육지로 돌아와 버렸다.
그날 밤 어부들은 모두 똑같은 꿈을 꾸었는데, 맑은 얼굴에 훌륭한 풍모를 한 노스님이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서천축국(인도)으로부터 왔느니라. 나와 더불어 스물 두 성인이 돌배를 타고 이곳까지 왔는데 우리가 타고 온 돌배를 돌려보내고 물 속에 있다가 그대들의 그물을 따라 올라왔더니 두 번씩이나 우리들을 다시 물속에 넣어 버리더구나.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부처님의 무진법문과 중생의 복락을 성취하는 길을 전하러 온 것이다.
그대들은 우리가 편히 쉴 수 있는 명산으로 안내해 주기 바라노라. 그 인연과 공덕은 후손들까지 길이 누리게 될 것이니라."
어부들은 새벽녘부터 일어나 간밤의 꿈 이야기를 하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바다로 나가 어제 석상을 던져 버린 곳에 그물을 쳤다.
잠시 후 걷어올린 그물에는 어제의 그 석상 스물 두 체(體)가 그대로 따라 올라왔다.
어부들이 석상을 낙가산으로 옮기는데 보문사 석굴 앞에 이르니 석상이 무거워져서 꼼짝도 하지 않아 더 이상 앞으로 갈 수가 없게 되자 이곳이 신령스러운 장소라고 생각했다. 이때 석굴 안에서는 경 읽는 소리가 나고 은은한 향이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더없이 편안한 마음을 느끼면서 굴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가 스물 두 위의 석상을 좌대에 차례로 모셨다.
석가모니부처님과 좌우에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과 열 아홉 분 나한님을 좌대에 모두 모시고 나니 굴 안은 엄숙하고 신비한 영기(靈氣)가 가득 찬 것처럼 느껴졌고, 마을사람들은 일제히 부처님 앞에 엎드려 거듭 절을 하고 예경을 올렸다.
그날 밤 꿈에 노스님이 다시 나타나 "그대들의 수고로 장차 무수한 중생들이 복을 빌어가게 될 것이다. 그대들에게 먼저 복을 줄 것이니 받은 복을 함부로 쓰지 말며 교만하거나 자만심을 버리라. 악하고 삿된 마음을 일으키게 되면 곧 복을 걷어들일 것이니라. 그리고 그대들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복덕을 갖춘 아들을 점지할 것이니라."
노스님은 이렇게 말하고 어부들에게 옥동자를 안겨 주고는 계속 말씀을 이었다.
"사람들은 이 노승을 빈두로존자라고 부른다네. 우리들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두 보살님을 함께 모시고 왔으니 나와 더불어 나머지 열 여덟 분은 모두 부처님의 수제자들이라네.”
어부들뿐만 아니라 보문사의 스님들도 같은 꿈을 꾸었으며 모두 그 신령스러움에 감탄하였다.(출처:보문사)
천인대 나한 : 오백나한상과 33관세음보살 사리탑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2005년에 조성된 사리탑은 목조 형식의 3층 석탑으로 탑신부 각 층에 11분씩 총 서른 세분의 관세음보살님이 각인되어있고 관세음보살님 위로 각각 용머리를 배치하고 옥개받침 부분에 처마도리와 서까래를 이중으로 내는 등 세세한 부분까지 표현하여 장엄하였습니다.
2, 3층에 난간대와 난간지석을 만들어 넣었고, 상륜부에는 앙화와 보륜, 보주 등 한국 석탑의 양식을 상당 부분 표현해낸 수작입니다.
33관음 사리탑의 뒷편을 둘러 감싸 안듯 오백나한이 모셔져 있습니다.
나한이라 함은 아라한과를 증득한 존자를 말하며 열반경에 이르시기를 “아라한과(阿羅漢果)는 저 피안에 이르렀다고 이름하느니라. 아라한과는 무학(無學)의 법신(法身)이니, 계율과 선정과 지혜와 해탈과 해탈의 지견(知見)이니라. 이 다섯가지로 인하여 저 언덕에 이를 수 있으므로 저 언덕에 이른다함이며, 저 언덕에 이르렀으므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태어나는 일이 없고 범행이 구족하고 할 일을 이미 마치었고 다시 생사를 받지 않는다 하느니라.” 라고 아라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보문사의 오백나한 상은 오백분의 모습과 표정이 모두 달라 각각의 개성적인 모습을 자유분방하게 나타내고 있으며, 오백나한 봉안 불사가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출처:보문사)
보문사마애석불좌상(普門寺磨崖石佛坐像.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9호. 인천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산293)
금강산 표훈사의 주지인 이화응과 보문사 주지 배선주가 1928년 낙가산 중턱 일명 눈썹바위 암벽에 조각한 석불좌상으로, 높이 9.2m, 폭 3.3m이다.
머리에는 커다란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네모진 모습이다. 얼굴에 비해 코는 넓고 높으며, 귀는 투박하고 목은 매우 짧게 표현되었다. 옷은 각이 진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가슴에는 큼직한 卍자무늬가 새겨져 있다. 손에는 깨끗한 물을 담은 병을 들고 연꽃무늬 대좌(臺座) 위에 앉아 있으며, 불신 뒤에는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가 있다.
이 불상은 문화재적인 가치보다는 성지(聖地)로서 더 중요시되고 있는데, 이 석불에서 기도를 하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하여 찾는 여인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다고 한다.
보문사가 관음 도량의 성지임을 가장 잘 상징하는 성보 문화재로서,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는 곳입니다. 특히나 눈썹 바위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서해 바다의 경치는 장관입니다. 특히 일몰 경관이 아주 일품이어서 석모도의 일몰은 서해 최고의 낙조(落照)로 꼽히기도 합니다. 수평선 너머로 떨어지는 붉은 해와 노을을 쳐다보노라면 종종 그야말로 무아지경 불심(佛心)의 경지에 들곤 합니다.
마애관세음보살좌상은 극락보전 옆 계단을 따라 10여분을 올라가면 낙가산 중턱의 눈썹바위 아래에 새겨 모셔져 있습니다. 꽤나 가파른 길이라 계단은 지그재그 식으로 놓여 있습니다.
중간쯤 오르다보면 계단 불사를 기념하는 관음성전 계단불사 공덕비'가 중간에 놓여 있습니다.
총 419개에 달하는 계단을 오르다 보면 제법 다리에 힘도 들고 허리가 뻣뻣해지기도 합니다. 이럴 때 ‘관세음보살‘을 마음속으로 나지막이 외우면서 올라가노라면 어느새 관음보살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 입니다.
이 마애관음좌상은 1928년 배선주 주지스님이 보문사가 관음 성지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의 이화응(李華應)스님과 더불어 이곳에 새긴 것으로, 크기는 높이 920cm, 너비 330cm에 달하는 거상(巨像)입니다.
크기를 척수로 환산하면 높이 32척에 너비가 11척이 되는데, 이것은 곧 관음보살의 32응신(應身)과 11면(面)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은 눈썹바위 아래의 바위면에 새겨 모셨는데, 눈썹바위가 마치 지붕처럼 돌출되어 있어 비바람으로부터 관음부처님을 가려 주고 있는 형태입니다.
관음좌상의 모습을 보면, 네모진 얼굴에 커다란 보관을 쓰고 두 손을 모아 정성스레 정병(淨甁)을 받쳐들고 연화대좌 위에 앉아 계십니다. 얼굴에 비해 다소 크게 느껴지는 코, 입, 귀는 투박하기는 하지만 서민적이라 보는 사람의 마음도 푸근해지며 정감이 갑니다. 또 부처님 얼굴에 빠짐없이 있기 마련인 백호(白毫)도 이마 사이에 솟아 있으며, 가슴에는 만(卍)'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불의(佛衣)는 양쪽 어깨를 모두 감싸도록 입는 통견(通肩)이 무릎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연화대좌 왼편에는 조불화응선사(造佛華應禪師)'가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화엄회상필부사왕중(華嚴會上八部四王衆)·나무화엄회상욕색제천중(南無華嚴會上欲色諸天衆)·화엄회상호법선신중(華嚴會上護法善神衆)' 등의 글씨가 세 줄로 새겨져 있다.
마애관세음보살은 비록 오래전에 조성되지는 않았지만 보문사가 관음 성지인 동시에 관음기도 도량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중요한 대·소사가 있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정성으로 기도 올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하여 지금도 신도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보문사 향나무(普門寺 香나무.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7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남로828번길 44(삼산면, 보문사))
향나무는 우리나라 중부 이남을 비롯해 울릉도와 일본 등에 분포하고 있으며, 상나무·노송나무로도 불린다. 이 나무는 강한 향기를 지니고 있어 제사 때 향을 피우는 용도로 쓰이며 정원수·공원수로도 많이 심는다.
보문사의 향나무는 보문사 석실(石室) 앞 큰 바위틈에서 자라고 있다. 나무의 나이는 7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20m, 둘레는 3.2m 정도이다. 높이 1.7m에서 두 줄기로 갈라지는데 동쪽 줄기의 둘레는 1.3m, 서쪽 줄기의 둘레는 1.5m이다. 나무의 형태는 마치 용이 용트림을 하고 있는 듯이 보여 기묘한 느낌을 주고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한국전쟁 중에는 죽은 것 같이 보였으나 3년 후에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보문사 향나무는 보문사 입구에 있는 은행나무와 앞마당에 있는 느티나무와 더불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으며, 오래된 나무로서 생물학적 보존가치가 인정되어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강화 고려궁지(江華 高麗宮址.사적 제133호. 인천 강화군 강화읍 북문길 42 (관청리))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고종 19년(1232)에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1234년에 세운 궁궐과 관아건물이다.
정궁 이외에도 행궁·이궁·가궐을 비롯하여 많은 궁궐이 있었다. 정문은 승평문이었고 양쪽에 삼층루의 문이 두 개가 있었으며 동쪽에 광화문이 있었다. 39년동안 사용되었고 1270년 강화조약이 맺어져 다시 수도를 옮기면서 허물어졌다. 조선시대에도 전쟁이 일어나면 강화도를 피난지로 정했다. 조선 인조 9년에 옛 고려 궁터에 행궁을 지었으나 병자호란 때 청군에게 함락되었다. 그후 다시 강화유수부의 건물을 지었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거의 불타 없어져 지금은 동헌과 이방청만이 남아있다.
이 곳은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저항한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국난 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는 곳이다(문화재청 자료)
유수부(留守府) : 유수부제도는 당·송의 옛 제도를 원용한 것으로, 고려시대에는 옛 도읍지인 서경·동경·남경 등지에 설치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옛 도읍지인 개성, 태조의 어향인 전주 및 강화·광주(廣州)·수원 등지에 설치되었다.
고려시대 유수부조직은 3품 이상의 유수, 4품 이상의 부유수 각 1인을 두었으며, 이밖에 6품 이상의 판관, 7품 이상의 사록(司錄) 혹은 참조사(參早事), 장서기(掌書記) 각 1인이었으나 서경만은 판관·사록이 각각 2인이었다.
여기에 8품 이상의 법조(法曹), 9품 이상의 의사·문사 각 1인을 두었으나 서경에는 없었으며 유수관은 외직으로 처리되었다.
조선 초기에 설치된 개성부에는 종2품의 유수 2인이었으나 1인은 경기도관찰사가 겸하였으며, 종4품의 경력(經歷), 종5품의 도사(都事)가 각 1인씩 있었고, 부민(府民)의 교육과 향촌의 교화를 위하여 교수 1인을 두었으며, 이 밑에 경아전(京衙前)으로 서리(胥吏) 40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수도의 외곽을 방어하기 위하여 강화와 광주, 그리고 수원에도 유수부를 두었으나 이들은 군사적인 행정이 주임무가 되었다.
유수(留守) : 고려 시대, 남경(南京), 광주(廣州), 서경(西京)에 두어 그곳을 다스리게 한 외관직(外官職).
조선 시대, 수도 이외의 중요한 곳을 맡아 다스리던 정이품 외관직. 개성, 강화, 광주, 수원, 춘천 등지에 두었다.
강화유수부 동헌 : 이 건물은 강화 유수부의 동헌으로 오늘날의 군청과 같은 관아 건물이다. 조선 인조 16년(1638)에 유수 김신국이 개수하였으며, 영조 45년(1769) 유수 황경원이 현윤관(顯允觀)이라 명명하였다 한다. 현재는 명위헌(明威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글씨는 당시의 명필이며 학자인 백하 윤순(尹淳)의 글씨라 한다. 이 건물의 규모는 정면 8칸, 측면3칸의 익공계(翼工系)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1971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개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의 규모는 앞면 8칸, 옆면 3칸의 익공계 팔작기와지붕이다. 기단은 2중 장대석으로 조성되었으며, 기단위에는 네모꼴의 주초석을 놓고 네모 기둥을 세웠다. 내부의 바닥 중앙에는 대청마루가 깔려 있고, 동쪽의 한 칸은 바닥을 높인 마루가 있다. 이러한 양식은 일반적으로 정면 6∼7칸, 측면 4칸의 목조 주심포 구조에 팔작지붕의 장중한 체제를 갖춘 조선후기 관아건축의 전형으로 평가되고 있다. 동헌에서는 매월 1일과 15일에 유수 이하 각관이 동서반으로 나뉘어 대청에서 인사를 치루는 망궐례(望闕禮)를 행했으며, 각관이 부임하거나 영장(營長)들이 등청(登廳)할 때 교유서(敎諭書)를 받아들이는 영명(迎命)을 행했다고 한다.
동헌의 왼쪽에는 높은 석축으로 단을 조성한 고려 궁궐터로 전하는 건물지가 있고, 그 앞의 낮은 곳에는 이방청(吏房廳) 건물이 있다. 현재는 명위헌(明威軒)과 이관당(以寬堂)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당호는 당시의 명필이며 학자였던 백하 윤순이 쓴 것이다.
이방청 정문 : 이 건물은 조선 중기에 강화 유수부내 육방(六房)중의 하나인 이방청으로 조선 효종 5년(1654) 유수 정세규가 건립하여 관아로 사용하던 것을 정조 7년(1783)에 유수 김노진이 내부를 개수하고 괘홀당이란 당호를 게시하였다. 1945년 해방이후 지방법원(등기소) 사무실로 임시 사용한 적이 있으며, 1977년 강화 중요 국방 유적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개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이방청은 1915년부터 1972년까지 등기소로 사용되다가 1973년에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95년에는 시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다. 현재의 모습은 1977년 강화 중요국방유적 복원사업때 고려궁지와 함께 정비된 것이다.
강화유수부는 동헌과 이방청 이외에 많은 부속건물들이 있었다고 한다. 정해당(靜海堂)은 1664년(현종 6) 동헌의 남쪽에 있었으며, 삼아(參衙)는 이방청의 동편에 있었는데 도사(都事)가 거처하던 곳으로 화재 때문에 없어졌다고 한다.
해구보장지관(海口保障之館)은 객사로 병자호란때 불타버린 것을 1638년에 다시 세웠고, 1731년(영조 7)에 다시 지었지만 무너진지 오래되었다. 그리고 향청은 향사당(鄕社堂)이라고 불렸는데, 이 건물은 지방인으로 구성된 행정고문격 인사들의 집결처였다.
형옥은 옥터라 부르는데 동헌의 남쪽에 있었다고 한다. 조선후기까지 형방으로 사용하였다가 일제강점기때에는 농산물검사소로 사용하였다. 진무영(鎭撫營)은 1684년(숙종 10)에 세운 건물로 강화유수가 무관병사들을 열병하는 곳으로 열무당(閱武堂)으로도 불렸다. 또한 연무당(鍊武堂)은 진무영이 좁아 1870년(고종 7)에 새로 지었는데 신열무당이라고도 했다. 그후 동소문 밖으로 옮겼는데 동교장(東敎場)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 연무당은 1876년 굴욕적인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된 곳이기도 하다.
관청건물로는 이밖에 조선시대 중영과 중군의 숙소이며, 중대 배하군졸들의 본부였던 만하헌(挽河軒)과 어영청·금위영·훈련도감·어변청(御邊廳)·별효사청(別驍士廳) 등이 있었다. (출처:강화도군청)
강화 갑곶돈(江華 甲串墩.사적 제306호.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곳리 1020외)
돈대는 작은 규모의 보루를 만들고 대포를 배치하여 지키는 곳이다.
갑곶돈은 고려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몽고와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로, 대포 8문이 배치된 포대이다.
삼국시대 강화를 갑비고차(甲比古次)라 부른데서 갑곶이라 이름이 전해오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고려 때 몽고군이 이곳을 건너려고 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며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라 한탄했다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전설도 있다.
조선 1644년 강화의 요충지마다 군대 주둔지를 설치할 때, 제물진에 소속된 돈대로서 1679년에 완성되었다. 고종 3년(1866) 9월 병인양요 때 프랑스의 극동함대가 6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10월에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은 양헌수 장군의 부대에게 패하여 달아났다.
1977년에 옛터에 새로이 옛 모습을 되살려 보수, 복원이 이루어졌다. 지금 돈대 안에 전시된 대포는 조선시대 것으로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왜적의 선박을 포격하던 것이다.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江華 甲串里 탱자나무. 천연기념물 제78호. 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1016)
탱자나무는 주로 영·호남지방에 분포하며 일본·중국에서도 자란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나무는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열매와 껍질은 약재로 사용되며 줄기에 가시가 나 있어 과수원 울타리용으로 적합하다.
강화 갑곶리의 탱자나무는 나이가 약 4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4.2m, 뿌리부분 둘레 2.12m이다.
강화도는 고려 고종(재위 1213∼1259)이 몽고의 침입을 해 있었던 곳이며, 조선 인조(재위 1623∼1649)가 정묘호란(1627) 때 난을 피했던 장소이다. 이 때 외적을 막는 수단으로 강화도에 성을 쌓고, 성 바깥쪽에 탱자나무를 심어서 외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 탱자나무는 그 때 심은 것이 살아남은 것으로 추측된다.
강화도는 탱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쪽 한계선이어서, 탱자나무를 처음 심었을 때 조정에서는 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자세히
보고하게 하였다고 한다.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는 우리 조상들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심은 국토방위의 유물로서 역사성을 지니고 있으며, 탱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가장 북쪽 한계선인 강화도에 자리하고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문화재청 자료)
강화산성(江華山城. 사적 제132호. 인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3번지 일원)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이다.
몽골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수난을 당하자, 당시 실권자인 최우는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왕궁과 성·관아 시설은 1234년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때 개경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어 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지었다.
성은 흙으로 쌓았고,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으며, 외성은 1233년 강화 동쪽해안을 따라 쌓았다. 이 외성은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자, 정부가 39년간 육지로부터 물자를 지원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 원종 11년(1270)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기면서 몽골과 강화조약의 조건으로 성을 모두 헐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 내성이었던 강화성을 축소하여 다시 지었다.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다시 파괴당하였고, 숙종 3년(1677)에 성을 보수하면서 모두 돌로 쌓고 넓혀 지었다.
남문인 안파루·북문인 진송루·서문인 첨화루와 동문인 망한루가 남아있으며, 비밀통로인 암문 4개 그리고 수문이 2개 남아있다. 높은 곳에서 망을 보기 위한 장대와 성위에서 몸을 감추기 위한 여장 등의 방어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나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 현재 성의 동쪽 부분은 없어졌으나, 남북쪽 산자락은 잘 보존되어 있다.
조선 후기 병인양요·신미양요와 일본 침략에 의한 강화조약을 체결한 수많은 외세침략의 역사적인 현장이다.
연무당 옛터 :강화산성 서문 건너편에 있는 연무당 옛터는 1876년 강화도조약이 최종 조인된 장소이다. 이곳에서 체결된 강화도조약에 의해 우리나라는 부산,인천,원산을 일본에게 개항하였다.
강화석수문(江華石水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0호. 인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883)
강화읍의 중심부를 흐르는 동락천 위에 설치하였던 수문이다.
조선 숙종 37년(1711)에 강화산성의 내성을 쌓을 때 연결하여 처음 설치하였으나, 광무 4년(1900)에 갑곶 나루터의 통로로 삼기 위하여 개천 어구에 옮겼다. 그 뒤 1977년에 다시 지금의 위치로 옮겨 복원하였다.
길이는 18.2m이고 높이는 2.7m, 너비는 4.7m이다. 무지개 모양의 수문이 3개이며, 화강암을 다듬어 쌓았다.
강화지석묘(江華支石墓.사적 제137호. 인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317)
강화도는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 유물이 발견된 적이 있어서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강화도 곳곳에 남아 있는 지석묘(支石墓)와 단군이 쌓았다는 참성단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 시대 이후에도 사람들이 계속해서 살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지석묘는 청동기 시대 대표적 묘제의 하나로서, 북방식과 남방식이 있는데 강화도에는 북방식과 남방식 지석묘가 같이 분포되어 있다. 그 중 강화도의 북방식 지석묘는 우리 나라 서북부 지방인 황해도, 평안도 지방과 만주 요동 일대에까지 연결되고 있어 이들과 서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현재 조사된 북방식 지석묘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학술적으로 중요한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강화도에는 현재 120여 기에 이르는 많은 지석묘가 알려져 있는데, 보통 강화 지석묘라고 하면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에 있는 지석묘를 말하고 있다. 이 지석묘는 높이 2.6m, 덮개 돌의 길이 6.5m, 너비 5.2m로서 현재 남한에 있는 북방식 지석묘 가운데 가장 크고 보존 상태도 가장 좋다. 사적 제137호이며, 고창, 화순의 지석묘와 더불어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강화 광성보(江華 廣城堡. 사적 제227호.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
광성보는 덕진진, 초지진, 용해진, 문수산성 등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이다.
고려가 몽고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기면서 1233년부터 1270년까지 강화외성을 쌓았는데, 이 성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성으로 바다길을 따라 길게 만들어졌다. 광해군 때 다시 고쳐 쌓은 후 효종 9년(1658)에 광성보가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숙종 때 일부를 돌로 고쳐서 쌓았으며, 용두돈대, 오두돈대, 화도돈대, 광성돈대 등 소속 돈대가 만들어 졌다.
영조 21년(1745)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었는데 ‘안해루’라 하였다. 이곳은 1871년의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용감히 싸우다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으며 문의 누각과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 파괴되었다.
1976년 다시 복원하였으며, 광성보 경내에는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와 신미순의총 및 전적지를 수리하고 세운 강화전적지, 수리한 것을 기록한 비석 등이 건립되었다.
신미순의총은 신미양요때 광성보 일대에서 미군과 격전하다가 전사한 용사들의 묘이다. 당시 중군
어재연 장군과 아우 어재순을 비롯한 군관과 사졸 53인의 전사자 중에서 어재연 형제의 시신은 고향으로 보내고 이름모를 51명의 시신을 7개의 묘에 합장하여 그 순절을 기리고 있다.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군은 최후의 한명까지도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고 비겁하게 물러서지 않았으며, 외침에 대항하여 나라를 지키려는 우리 민족의 살신호국 정신을 보여준 곳이다.
신미양요 전투가 끝나고 시신을 헤아려 보니 350여분이 전투에 임했는데 50여구의 시체 밖에 없었다. 사상자 중에는 몸에 부상을 당했을 경우 미군의 포로가 되는 것을 수치로 생각해서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하신 분들의 숫자가 상당수에 이르렀다. 그분들의 시신을 화장시켜 한묘에 7-8분씩 함께 합장한 곳이다. 이 비는 소자로 「辛未洋擾戰七將兵侍郞」 대자로「殉節墓壇」이라 쓰여있다.
용두돈대 성곽총구에서 바라본 염하. 염하는 김포와 강화섬 사이를 흐르는 300∼500m의 해협이
다.광성보 용두돈대 앞 염하(鹽河)는 물살이 세다. 꾸르릉! 꾸르릉! 강물이 소용돌이치며 흐른다. 사람들은 이곳을 손돌목이라고 부른다. 강폭도 다른 곳보다 100여 m는 좁다. 강 저쪽은 김포의 덕포진이다. 손돌은 고려 고종임금(재위 1213∼1259)을 배에 태우고 가던 뱃사공 이름이다. 고종은 이곳 급류를 지날 때 배가 심하게 요동치자, 손돌이 자신을 죽이려고 일부러 이곳으로 배를 끌고 간다고 생각했다. 배가 자꾸만 급류 쪽으로 달려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뱃길을 훤히 꿰뚫고 있던 손돌은 “보기에는 그렇지만 좀 더 나아가면 앞이 트일 것이니 크게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아뢰었다. 고종은 더욱 의심이 들어 손돌의 목을 당장 베라고 명령했다. 손돌은 죽어가면서까지 말했다.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반드시 뱃길이 트일 것이다.” 손돌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고종은 ‘아차!’ 했지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올 리 없었다. “고이 장사 지내주라”며 멋쩍어할 뿐이었다. 손돌의 묘는 물 건너 김포 덕포진 북쪽 해안에 있다. 해마다 손돌이 죽은 음력 10월 20일이 되면 이곳 강화해협에는 큰 바람이 분다. 날씨도 매섭다. 이른바 ‘손돌바람’ ‘손돌 추위’다.
강화평화전망대(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 전망대로 797 (양사면))
강화평화전망대는 2006년 말부터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던 양사면 철산리 민통선 북방지역 임야에 지하1층 지상4층 규모로 타 지역에선 전망하기 힘든 이북의 독특한 문화 생태를 아주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고 비교할 수 있도록 준공되어 2008년 9월 5일 개관하였다.
지하층과 4층은 군부대 전용시설이며, 1층에는 강화특산품과 북한의 특산물 등을 판매하는 토산품 판매장과 식당, 관리사무실, 통일염원소,휴게실 등이, 2층에는 고성능 망원경과 전쟁의 참상과 흔적을 볼 수 있는 전시실 이, 3층에는 이북의 온 산하가 한눈에 가까이 볼 수 있는 북한땅 전망시설과 흐린 날씨에도 영상을 통해 북한 전경 등을 볼 수 있도록 스크린 시설이 되어 있다.
2층에 위치한 전시실에는 강화의 국방체험과 북한의 도발, 남·북한의 군사력 비교, 통일정책을 볼 수 있는 끝나지 않는 전쟁과 우리는 한민족, 북한으로의 여행을 경험할 수 있는 통일로 가는 길, 끝으로 한국전쟁 당시의 배경과 국내·외 전쟁 발발과정 및 그 이후 생애 잊지 못할 어려움을 겪고 있는 피해상황 등을 영상시설을 통해 볼 수 있는 시설이 마련되어 있으며, 북한땅 조망실에서는 전방으로 약 2.3㎞ 해안가를 건너 흐르는 예성강, 개성공단,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지역, 김포 애기봉 전망대와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 일산신시가지, 중립지역인 나들섬 예정지, 북한주민의 생활모습과 선전용 위장마을, 개성공단 탑, 송악산, 각종 장애물 등을 조망할 수 있다.
특히 역사 문화의 고장 강화는 곳곳에 산재한 역사· 문화 유적 등과 일일 관광 테마 코스로 연계하여 타 지역 안보 관광지와 차별화된 관광코스로 개발 다시 오고 싶은 관광시설 개발은 물론 관광객 편리를 위해 최상의 서비스로 운영 관리해 나갈 계획을 갖고 있다.
참고 자료 : 문화재청. 보문사. 전등사. 인천광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