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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8 - 크라쿠프에서 바벨성을 보고는 그 남쪽에 유대인 구역 카지미에시에 가다!
5월 10일 바르샤바 에서 기차로 크라쿠프 Krakow Glowny 에 도착하는데, 1040년 부터 1596년
까지 폴란드의 수도 로 구 시가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인데 바르비칸과 플로리안문을 들어
가서 크라쿠프 중앙시장광장을 구경하고는 야기엘론스키 대학을 지나서 프란체스카성당을 봅니다.
그러고는 성당을 나와 언덕에 자리한 바벨 성 wawel castle 에 도착하는데 구시가지의 남쪽
끝, 비스와강에 면한 바벨 언덕 위에 자리하니 바벨 성은 예로 부터 크라쿠프와 폴란드의
중심 이었으니 폴란드 중~근세의 갑옷, 검, 초상화 등을 비롯한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역사학자 임용한 교수는 동아일보 ‘임용한의 전쟁사’ 칼럼에 “히틀러와 스탈린의 악수” 라는
글을 올렸으니.... 제1차 세계대전을 시작하기 전에 독일은 전쟁 준비를 하면서 절대로
러시아를 침공해서는 안 된다는 준칙을 세웠다. 만에 하나 침공한다면 우크라이나로
한정한다. 독일에 필요한 땅은 러시아가 아니라 우크라이나 였다. 다행히 이때는 원칙이 지켜졌다.
1930년대에 히틀러의 구호는 ‘독일의 생존’ 이었다. 독일 민족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더 넓은 영토
가 필요하다는 것. 히틀러는 노골적으로 폴란드, 체코, 루마니아 등 동유럽 국가를 지목
하고 이곳을 얻기 위해 소련과 일전도 불사 하겠다고 떠들었다. 1938년 히틀러가 체코를 병합 했다.
베르사유 체제를 폐기하고 재무장을 선언한 독일은 어느새 유럽 최강 이 되어 있었다. 프랑스 군부
는 솔직히 독일군이 더 강하며 자신들은 방어는 가능하지만 공격은 어렵다고 고백했다.
게다가 영국과 프랑스는 1000만 명의 희생자 를 낸 1차 대전의 악몽 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눈에 들어온게 소련 이었다. 소련은 1차대전때 연합군과 함께 독일과 싸웠다. 히틀러는 체코 다음 목표로
폴란드를 노렸다. 소련은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하면 우크라이나가 위험 했다. 독일은 1차 대전 전 부터
우크라이나에 눈독을 들였고, 히틀러는 입만 열면 마르크스주의의 박멸 이 나치당의 소명이라고 떠들고 있었다.
폴란드도 이를 알고 소련과 상호방위협약 을 맺고 있었다. 영, 프의 사절단이 모스크바로 달려갔다. 3국이
힘을 합쳐 히틀러의 야욕을 꺾자고 했다. 정세상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는데, 스탈린은 시큰둥 했다.
알고 보니 소련은 우크라이나를 보호할 방법이 또 있었다. "폴란드를 독일과 반씩
나누는" 것이다. 그래서 비밀리에 탄생한 조약이 독소불가침 조약이다.
두 나라는 폴란드를 침공해 반분 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힘쓰는 시늉만 하다가 끝냈다.
그 전에 프로이센(독일) 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러시아 는 3차례에 걸쳐 사이좋게 폴란드 를
3분해 나눠먹으니 폴란드는 지도에서 사라 졌는데, 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패하는 바람에 폴란드는 다시 독립 했지만.... 2차 대전에서 다시 사라진 것 입니다?
한국(조선)도 마찬가지로 열강에 의해 분단이 여러차례 논의 됐으니 1592년 임진왜란때 일본의 고니시는
심유경에게 조선 남부 4도를 할양해 달라고 했고, 1597년 정유재란때는 남해안 28개 왜성에서 겨울
을 보내면서 매년 침공해 조선 남부 3도를 얻을려고 했으며,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을 차지
하자... 러시아가 아관파천으로 고종을 손에 넣으니 다급해진 일본은 러시아에 39도선 분할 을 제의합니다.
러시아가 거절하자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고는 미국을 우호국으로 만들어 군비를 강화하자 위협을
느낀 러시아가 전에 거절했던 39도선 분할을 제의 하니, 이번에는 일본이 거절하고 러일전쟁 을
일으켜 모두 차지했으며... 태평양전쟁때 미국은 미군의 피해를 줄이려고 소련에 참전 을 요청하니
소련은 일본과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참전하자 그 댓가로 한국을 38도선에서 분할해 소련에 넘깁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 교착상태로 들어가자 러시아는 러시아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독일
을 협박하기 시작했다. 두 나라는 또 손을 잡을까? 이번에는 그럴 가능성이 낮지만
언제 누가 배신할지 모른다. 아니 국제정치에는 배신이란 단어 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바벨성 안쪽에는 유대인 구역 인 '카지미에시 (Kazimierz 카즈미에르즈)' 가 있는데, 1320년 폴란드 왕국의
혼란이 끝나고 이어 카지미에시 3세 통치 (1333~1370년) 아래서 크라쿠프의 황금기가 시작
되었는데 이때 바벨 성이 증축되었고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모승천 성당이 폴란드 고딕양식으로 재건됩니다.
유럽과 북아프리카를 죽음의 공포로 몰아 넣던 흑사병 (1346~1353까지 유행) 이 크라쿠프에는 큰 피해를
주지 않았는데.... 하지만 흑사병 유행기간 동안 유럽 전역에서 사회 혼란을 조장한다는 의심을 받고
끔찍한 박해를 받던 유대인 들은 카지미에시 대왕이 따뜻하게 맞아주던 폴란드로 대거 이주 했고
크라쿠프에 많은 유대인들이 들어왔으니 왕의 이름을 딴 '카지미에시(Kazimierz)' 란 구역에 정착합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크라쿠프에는 유대인 인구 가 크게 늘었으니, 많은 시나고그 들이 새롭게
지어지고 시오니즘 운동도 활발히 전개되며 도시도 발전했으니, 1910년 15만이었던
인구는 전쟁 직전까지 26만으로 늘었고 그 중 대략 4분의 1인 68,000명이 유대인 이었습니다.
1939년 9월 6일 독일군이 크라쿠프에 입성하기 직전, 크라쿠프 시장 스타니스와프 클리메츠키 (Stanisław
Klimecki) 는 용감한 행동으로 도시 파괴를 막았으니 그는 도시로 진격해오는 독일군 사령부에 찾아
가서 도시는 무방비 상태이므로 자신이 인질 이 될 테니 도시를 파괴하는 행위를 하지 말아 달라고 했습니다.
덕분에 크라쿠프는 나치 침공 중에 폴란드 내에서 이례적으로 파괴를 면한 주요 도시 가 될 수 있었으니
크라쿠프는 11월 4일 폴란드 총독부의 수도 가 되었고 총독부는 독일의 전쟁수행을 위한 공급기지 로
존재했기 때문에 나치는 도시 인프라를 파괴할 이유가 없었으며 총독 한스 프랑크 (Hans Frank)
는 재임 중 전쟁 전에 마련한 계획에 따라..... 크라쿠프를 독일의 전쟁수행을 위한 기지로서 개발합니다.
나치는 도시와 게르만족의 연결성 을 찾아 헤맸고 끊임없이 독일 민족의 도시로 바꾸려 했는데
도시의 파괴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나치는 도시 지식인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었으니,
게슈타포 크라쿠프 지부장 브루노 뮐러(Bruno Müller) 는 폴란드 엘리트 제거 정책으로
11월 6일 '존더악티온 크라카우 (Sonderaktion Krakau, 크라쿠프 특별작전)' 를 실행합니다.
바르샤바 대학과 더불어 폴란드 최고의 대학이던 크라쿠프 야기엘론스키 대학교의 교수들과 학자 와
'전임' 시장 클리메츠키 박사 까지 184명 을 야기엘론스키 대학교 (Uniwersytet Jagielloński)
의 본관인 콜레기움 노붐(Collegium Novum) 에 불러모은 뒤, 총독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학기를 실행했다는 터무니 없는 이유로 이들을 현장에서 체포하고 작센하우젠 집단수용소 로 보냅니다.
스케일이 큰 사건이었기에 세계의 지성계에 이 사실이 널리 알려졌고 바티칸 사람들이 국제적인
항의를 이끈 끝에 체포된 사람중 클리메츠키를 포함해 40세 이상 교수 101명 이 3개월만에
풀려났는데..... 이 기간동안 12명의 나이 많은 교수들이 수용소의 끔찍한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고 게슈타포는 풀려난 이들도 다시 체포해 크라쿠프 근교의 숲에서 살해 합니다.
영웅적인 행동으로 도시를 보존하고, 교육 재건을 위해 노력했던 클리메츠키 역시 1942년
12월 11일 처형 되었고 살아남은 교육자들은 1942년 '지하 대학' 을 설립해 학생
들을 가르치며 나치에 저항했으니, 크라쿠프 지하 대학에서 교육받은 학생 중에 하나가
나중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가 되는 카롤 유제프 보이티와 (Karol Józef Wojtyła) 입니다.
한편 다른 폴란드 내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크라쿠프의 유대인에게도 끔찍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1940년 4월 총독 한스 프랑크는 수도인 크라쿠프가 다른 어떤 도시보다 '인종적
으로 깨끗해야' 한다며 도시의 유대인들을 쫓아낼 계획을 실행 했다. 자발적으로 도시를
떠나는 유대인들은 짐을 챙겨갈수 있게 했고 이에 따라 23,000명의 유대인 들이 도시를 떠납니다.
5월 총독부는 떠나지 않은 유대인들을 노동자 유대인과 그 가족 16,000명만 남기고 강제 추방 했고 1941년
3월에 크라쿠프 관구의 통치자였던 오토 베히터(Otto Wächter) 의 지시에 따라 크라쿠프 게토 가
생겼으니 3,000명의 유대인이 살던 지역에 크라쿠프에 남아있던 16,000명의 유대인들을 몰아 넣었습니다.
방 하나를 다섯명이 넘는 사람들이 써야 했고 하루 식량 배급은 바르샤바 게토와 마찬가지로 187kcal 로 극히
적었기 때문에 이곳에서도 질병과 기아로 인한 사망자 가 속출했는데.... 총독부가 크라쿠프 주변의
유대인들도 지속적으로 이곳 게토로 몰아넣었기 때문에 인구는 곧 2만명이 넘게 되었고 과밀은 심해져 갑니다.
1942년 5월 수용소로의 첫 이송이 시작되어 11,000명의 유대인이 베우제츠 절멸수용소 (Bełżec
extermination camp) 로 보내졌는데 1943년 3월 13일 SS 해골부대 하급돌격대장
아몬 괴트의 지휘하에 끔찍한 게토 '정리' 가 이루어졌으니.... 일할 수 있는 유대인
8,000명을 프와시프 노동수용소로 보냈고 일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2,000명 유대인들을
게토의 거리에서 바로 쏴죽였으며 남은 유대인들은 전부 아우슈비츠 절멸 수용소 로 보내집니다.
아몬 괴트로 부터 1,200명 유대인을 구해낸 오스카 쉰들러 (Oskar Schindler) 이야기가 유명한데 크라쿠프
법랑공장 kazimierz 공장장이던 크라쿠프는 나치에 점령되었을 때 한 밑천을 잡아보고자 찾아온 사업가
였으니, SS 친위대에게서 유대인 노동력을 공급받던 그는 돈을 밝히는 사업가 였지만 크라쿠프 게토가
형성된 이후 그는 의도치 않게 게토에서 굶주리던 1,000명에 달하는 유대인 노동자들의 식량 공급자 가 됩니다.
게토의 참상 을 알게 된후 유대인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해 주기 시작했으니 1943년 게토가 소거
되자 그의 노동자들도 공장에서 2.5km 떨어진 아몬 괴트의 노동수용소로 보내졌고 괴트가
쉰들러의 공장도 자신의 수용소 안으로 넣으려 하자.... 쉰들러는 인맥과 뇌물 로 이를 막아
냈으며, 그후 괴트를 설득해 공장 근방에 소규모 캠프를 세워 노동을 견디기 힘들어하던
여성들을 중심으로 450명의 유대인을 관리 하며 이들이 무작위로 처형당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1944년 말 소련의 진격이 빨라지자 나치는 전선과 가깝던 노동수용소들을 폐쇄하고 제소자
들을 모두 아우슈비츠 절멸수용소 로 보내기 시작했는데.... 프와쇼프 수용소의 제소자
들도 아우슈비츠로 보내질 위기에 처했고 아몬 괴트 는 이 작업에 엄청난 열의를 보였습니다.
그러자 쉰들러는 고향 주데텐란트 내 브륀리츠(Brünnlitz) 에 있는 자신의 공장을 운영하는데 유대인 들이
필요하다며 사재를 모두 털어 아몬 괴트와 베를린의 고관들을 매수 한뒤, 그 유명한 '쉰들러 리스트'
에 따라 1,000명의 노동자 들과 율리우스 마드리치의 직물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 60명을 구해냈습니다.
새 공장으로 이송은 직통으로 이루어지진 않았는데, 쉰들러의 노동자들은 그로스-로젠 수용소 에서
격리되어 각종 위생검사를 받은 뒤 브륀리츠로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수용소측에선 300명의
여성을 아우슈비츠로 보내버렸으니 아우슈비츠에서 검사를 받으라고 보낸 것 이었지만
아우슈비츠는 여성들을 가스실 로 보내려 했고, 쉰들러는 비서를 보내 온갖 암시장 물품과
다이아몬드까지 공여한 끝에 이들을 구해 냈으며 그는 종전까지 남은 재산으로 보호해 주었습니다.
이 행동으로 말미암아 그는 말년을 가난하게 보냈고 1974년 사망했지만, 이스라엘 정부는
그의 유해를 예루살렘의 성스런 시온 언덕 에 묻어주었고 1993년엔 그와 그의 아내를
'열방의 의인 (Righteous Among the Nations)' 으로 선정해 불멸의 명예를 안겨 주었습니다.
카지미에시는 크라쿠프의 유대인 문화 구역 으로 14세기부터 유대인들이 정착해 살았는데, 2차
세계대전기 유대인 대부분이 나치에 희생 됐고 유대인이 사라져버려 한동안 방치 됐습니다.
인민정부 붕괴 후, 폴란드 정부는 이곳의 문화적 가치 에 주목해 이곳에서 유대인 문화 축제 를 열고 유대인
식당을 열게 하는등 '유대인 없는 유대문화' 중심지로 만들자 유럽에 남은 유대인들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정착했으니..... 현재 카지미에시는 중부 유럽에서 가장 유대인 문화가 잘 살아있는 곳이 되었습니다.
카지미에시 KAZIMIERZ(카지미에르즈) 아래를 굽이쳐 흐르는 비스와강을 건너가면 33개의 빈
청동의자가 놓여 있는 게토 영웅광장 (Ghetto Heroes Square) 이 있으니 크라쿠프 게토에서
희생된 유대인들을 기리는 의자로 유대인들은 절멸수용소로 이송되기 전 이 광장 에 모였습니다.
일부 나이 많은 유대인들은 의자를 가지고 나와 앉아서 이송 을 기다렸는데, 죽음의 수용소 로
떠나간후 광장에는 나치가 빼앗은 유대인들의 물품, 빈 의자 들이 쓸쓸하게 남았습니다.
골목을 누비면 구시가와는 다른 느낌을 받게 되는데, 오래된 건물들이 회칠이나 리모델링을 전혀 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어 분위기가 남다르니 남아있는 레마 시나고그 (Remah Synagogue) 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시나고그 중 하나로 소정의 입장료(5 즈워티)를 내야 하지만 충분히 들어가 볼 가치가 있습니다.
오스카 쉰들러 법랑공장은 박물관 이 되었으니 공장에서 일하던 유대인들의 생활상, 게토의 참상,
쉰들러의 영웅담 을 조명하고 있고.... 공장 뒤에는 그가 살던 집도 있어 쉰들러의 유품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쉰들러 법랑공장의 경우, 관광객들이 많이 방문하는데다 시간별로 입장 인원
을 제한하고 있어, 오후 늦게 예약 없이 방문하면 문 닫기 전인데도 티켓 구매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전쟁 기간 중 크라쿠프는 파괴는 면했지만 68,000의 유대인 중 대부분이 사망 했으며 1945년
1월 17일 소련군이 들어오면서 크라쿠프는 나치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한편,
종교적으로는 1978년 크라쿠프 추기경 카롤 보이티와 가 455년만에 비 이탈리아인
으로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가 되었으니 교황은 이후 폴란드의 민주화 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예전에 이스라엘 을 여행하는 중에 예루살렘 에 들러서 고고학박물관에서 옛집터를 둘러보고
시온문을 나와 성모 마리아교회를 둘러보고는 "홀로코스트" 를 찾아가니 나찌에 의한
유대인 학살에 관한 여러 전시물 외에도 두루말이 성경 이 엄청 정교한데 놀란 기억이 납니다.
또 제2의 쉰들러라 불리는 일본인 이 있으니....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의 박해로 부터 도망친 많은
유대인이 목숨을 걸고 시베리아철도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쓰루가 항구에 상륙해 학살을
면했다고 하는데, 이들의 탈출을 도운 1등 공신 은 스기하라 지우네 (杉原 千畝) 이니 와세다대
재학중에 외무성의 관비 유학생으로서 하얼빈에서 러시아어 를 배웠으며 1924년 외교관 이 됩니다.
스기하라 지우네 는 1939년에 리투아니아 카우나스의 일본 영사 로 부임했는데, 1940년
나치 점령의 폴란드에서 탄압을 피해 리투아니아로 도망쳐온 유대인 들은 영사관 및
대사관에서 비자 를 취득하고자 했으나, 소련이 리투아니아를 병합후 폐쇄를 요구 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유일하게도 업무중인 일본 대사관에 통과비자 를 얻기 위해 몰려 듭니다.
스기하라 씨는 1940년 7월말 부터 한달간 일본 외무성의 훈령을 어기고는 폴란드 출신
유대인 6,000여명 에게 일본 경유 비자 를 발급해 국외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왔는데..... 혹은 일본 정부는 스기하라씨에게 업무를 중지하고 떠나라는 등 매우
못마땅해 했지만, 적극적으로 중지시키지 않은 걸로 보아서는 묵인한 것 으로도 봅니다?
1941∼1944년 나치 독일의 지배 하에 있었던 리투아니아 에서는 20만명이 넘는 유대인
이 희생된 것으로 추산되는데, 그전에 스기하라씨의 도움으로 폴란드를 탈출한
유대인들은 시베리아 철도를 통해 블라디보스토크 를 거쳐 일본 쓰루가
(敦賀) 항에 상륙하여, 유대계 러시아인의 공동체가 있었던 고베시 에 다다랐습니다.
그들중 1,000명은 미국과 팔레스타인 으로 떠났고 나머지 5천명은 상하이로 송환 될때
까지 일본에 남아 있었다는데, 상하이에도 유대 난민 공동체 가 있어서 그 곳에서
일본이 항복하는 1945년 까지 지냈으니, 일본 외무성 자료관에는 "용기있는 인도적
행위를 실행한 외교관 스기하라 치우네 씨" 라고 기록 된 표창비 가 세워져 있습니다.
1978년 유네스코는 바벨 성을 포함한 크라쿠프의 구시가지 전체를 그 엄청난 역사성을
인정해 세계 문화유산 으로 지정했고.... 크라쿠프는 냉전이 끝나자 유럽에서 가장
인기있는 여행지 중 하나가 되었으니 현재 크라쿠프는 폴란드의 명실상부한 문화
수도 로 세계 각지에서 매년 1,000만명의 사람들이 도시의 아름다움을 느끼러 찾아옵니다.
크라쿠프는 폴란드 최대의 관광도시 이니 하루를 꼬박 걸어야 다 둘러볼 수 있는 넓은 구시가지를
가지고 있고 도시 남쪽에는 유럽 최대규모의 유대인 문화 구역이 있으며 또한 도시 근교에도
관광지 가 많기 때문에 크라쿠프 여행은 최소 1박 이 필요하고, 볼것 다 보려면 2박도 부족합니다.
크라쿠프에 유명한 극장도 있으니 율리우시 스워바츠키 (Juliusz Słowacki) 극장으로 1893년에 건립된
극장인데... 폴란드의 유명한 시인이자 극작가인 스워바츠키의 이름 을 땄으며 기차역도 멋지게
잘 지었는데 최근엔 바로 옆에 거대한 쇼핑몰을 세우면서 역사 내부 인테리어도 최신식으로 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