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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1월19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수도회] 굶주림을 채우는 사랑의 단식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히브 5,1-10
† 복음 마르 2,18-22
★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히브리서는 구세주를 삶의 고통을
없애 주는 모르핀과 같은 진통제 정도로 여기는 이들에게 ‘고난의 본질’로
진지하게 설득한다(제1독서).
★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내일 고난이 닥쳐올지라도
오늘 주님과 함께 있는 한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율법을 존중하면서도 자유롭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나의 여건은 늘 과분하여 마음으로는 평화롭고 행복하다. 내 생김새는
본디 촌스럽기 때문에 표정은 어쩔 수 없지만 ……. 그래도 감정이 상할
때가 있고 화날 때도 있다. 그때는 되도록 짧은 시간 동안만 속상하고 인상
쓰며 씩씩거린 뒤 곧 평정심을 찾는다. 사람이 기분 좋은 일에 웃고
기뻐함은 당연하다. 슬픈 일에 울고 화났을 때 분노함에 얼굴이 일그러질
수도, 욕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감정은 자연이고 얼굴은 ‘얼이 모인
골짜기’란 말도 있으니 어쩔 수 없다. 그런데 기쁘거나 화나는 시간은
엄밀히 따져 하루 30분도 되지 않는다. 그 나머지 많은 시간은 무감정의
무표정 상태로 하루를 보내게 된다.
문제는 ‘기쁘거나 슬프지도, 기분이 나쁘거나 화나지도 않을 때, 기도
시간이나 명상 시간도 아닌 때의 감정과 얼굴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때 또한 자신의 심기가 얼굴에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얼굴은 어떠할까? 좋은 일이 있는 듯한 얼굴일까? 아니면 무언가
불만에 찬 얼굴일까? 좋을 때만 행복하다면 하루에 단 몇 분 행복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아무 감정도 없는 시간을 감사하고 만족하며 행복하게 느끼는
시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기쁘지도 슬프지도 원망스럽지도 화나지도 않은
순간에는 내가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수행을 하도록 해 보라.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다. 평온한 얼굴이 되는 것이니, 이는 돈 들이지 않고도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는 삶의 비결이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금 무척이나 행복한데 왜 단식을 해야 하는가?
지금 이 순간 기뻐할 자유가 있고 행복할 권리가 있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깨달음의 기적들 -호수위를 걸은 프란치스코 신부-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1월19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뉴튼수도원 70일째),
히브5,1-10 마르2,18-22
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5,1-10
복음
<신랑이 혼인 잔치 손님들과 함께 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8-22
깨달음의 기적들 -호수위를 걸은 프란치스코 신부-
무수한 분들이 제 기적(?)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어제 난생 처음으로
사랑하는 많은 분들께 '호수 위에서 기적!'이란 제 사진을
카톡으로 전송하고 오후 내내 행복한 흥분속에 지냈습니다.
뉴튼수도원의 호수가 저로 인해 구원받았고 유명해졌습니다.
호수 주위를 거닐 때마다 '언제 나도 예수님처럼 호수위를 걸을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마침내 소원이 성취되었습니다.
카톡으로 주고 받은 문답도 흥미진진합니다.
-와! 호수가 완전히 얼었네요. 물속이 투명하게 보여요. 너무 아름답죠?
신부님 오늘은 호수위를 걸으셨네요. 호수 위 산책!-
"예, 말그대로 기적입니다.“
물이나 얼음이나 다 H2O 물인데 결국은 물위를 걸은 기적인 겁니다.
아, 물을 얼려서 물위를 걷게 하신 것도 주님의 기적입니다.
-와 물위에 서 계시네요. 갈릴리호수 기적의 재현이네요!-
-호수 위에서 기적! ㅎㅎ 호수가 얼었나요?-
"그건 비밀입니다.“
-아, 신부님! 기적이시네요-
-호수위를 걸으시는 신부님, 오늘도 기적의 하루를 사시겠네요.-
-물위를 걸으시는거죠? 기적! 의심하지 않으셨나 봐요,-
-예수님 말씀 꼭 따라 하시니 물위를 걸으실 수 있는 초능력을 주셨군요!-
-호수 위에서 기적! 예수님이시네요.-
-기적을 체험하고 계시는 신부님의 행복한 모습에 덩달아 웃음이, 행복이
전해집니다.-
-물위를 걸으시는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의 기적에 동참하신 사랑스런
신부님, 얼음위를 걸으실 생각을 어찌 하셨나이까?
역시 성령으로 가득 찬 존경하올 분이십니다.
"정말, 이런 생각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비치는 물색깔이 파란 하늘색과 맞닿는 느낌이예요. 하늘과 땅이
지평선을 만드네요. 어쩜 파란색이 그토록 아름다울까요! ㅎㅎ천국
같아요.- "미적, 영적감각이 참 탁월하십니다."-
여기 몇몇 수도형제와도 기적(?)의 기쁨을 나눴습니다.
"수사님, 나 오늘 호수 위를 걸었습니다.“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핸드폰의 사진을 보여줬더니 수도형제도 만면에
환한 미소로 응답했습니다. 문득 베드로가 주님을 바라보며 물위를 걷다가
한 눈 파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물속에 빠져드는 장면도 떠올랐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의 위태한 삶은 세상 호수위를 걷는 것과도 흡사합니다.
하여 성무일도 도입 부분이 늘 절실히 마음에 와 닿습니다.
-O God, come to my assistance(하느님, 저를 구하소서).-
"O Lord, make haste to help me(주님, 어서 오사 저를 도우소서)-
성 카시아노가 추천한 이 짧은 기도는 동방에서의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처럼, 서방에서 오랜 동안 사용했던 기도문입니다.
영어로 해도 전달되는 느낌은 그대로입니다. 바로 호수 물속에 빠져들던
베드로의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마태14,30ㄴ) 라는 부르짖음에서
유래된 기도입니다.
믿음의 눈만 열리면 매일이 기적이요 새 하늘 새 땅입니다.
깨달음의 기적들의 연속입니다.
비상한 기적을 바라는 마음은 저절로 없어집니다.
새삼 깨닫는 진리는 넓이와 깊이는 함께 간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기적들을 통해 영적 이해 지평이 끝없이 넓어지면서 영적 깊이도 더해
간다는 것이지요. 외적 좁은 공간에서도 내적 공간의 넓이와 깊이의
내적자유를 살 수 있는 길은 깨달음의 기적들뿐입니다.
어제 저녁기도전 수도형제와의 짧은 대화입니다.
-언제 귀국하십니까?-
"2월4일입니다.“
-얼마 안 남았네요.-
"예, 그래서 하루하루 아껴서 삽니다."-
아, 죽음의 날짜도 이렇게 정해져 있다면 하루하루 절실하게 매일 기적을
체험하며 살 것입니다. 아니 매일매일이 기적일 것입니다.
죽음 앞에 삶이 얼마나 고마운 선물인가 절감하며 말입니다.
얼마전 가난체험도 잊지 못합니다.
식사하는 형제들을 보는 순간 가난이 훤히 보이는 것이 었습니다.
한계와 부족함을 지닌 형제들의 '있는 그대로'의 가난입니다.
사막 같은 수도원에서는 일체의 가식이나 위장이 무용(無用)합니다.
형제들은 물론 자신을 통해 훤히 드러나는 가난 체험에서
마음의 겸손과 순수요, 샘솟는 무한한 연민의 사랑임을 절절히 깨닫습니다.
이 또한 사막 같은 수도원이 주는 참 귀한 깨달음의 기적입니다.
제가 볼 때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나 히브리서 저자는 말그대로
신비가입니다. 매일 하느님의 기적을 살았던 분입니다. 복음의 시비조로
묻는 이들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사셨던 신비가 예수님이십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느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삶의 축제를 맘껏 고맙게 누려할 텐데 뜬금없이 무슨 단식이냐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것은 축제의 삶에 찬미와 감사로 응답하는 것이지
우울한 단식으로 삶의 축제에 재를 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단식 자체가 목적인양 본말전도의 우를 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단식은 언제나 때가 되면 해도 되기 때문입니다.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담아야 된다.“
우리 모두의 사고방식의 전환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매일 새부대의 순수한 마음을 지니면
이 새부대, 새날 안에 가득 담기는 새포도주의 깨달음의 기적들입니다.
'깨달음의 기적!' 바로 여기에 참 행복의 비결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깨달음도 놀랍습니다.
분명 깊은 렉시오디비나의 결과 성령의 선물임이 분명합니다.
복음의 이런 예수님 모습에서 대사제의 깊이 까지 묵상 통찰했기
때문입니다. 대사제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모가 우리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목자이자 사제이신 예수님은 모든 사제들은 물론 믿는 모든 이들의
귀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전생애를 깊이 렉시오디비나한 결과 성령에 의한 깨달음의
은총입니다. 새삼 삶은 순종임을, 우리의 삶은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워가는 학교'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대사제이신 예수님은 당신께
순종하는 우리 모두의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대사제이신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오늘도
깨달음의 기적들로 가득한 새 하늘과 새 땅의 하루를 살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내 주께 이르셨나이다. "멜키체덱과 같이 너는 영원한
사제로다"(시편110,4ㄴㄷ).-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복음 묵상 -
굶주림을 채우는 사랑의 단식
2015년 나해 1월19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마르 2,18-22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마르 2,19)
굶주림을 채우는 사랑의 단식
유다인들은 일 년에 한 번 속죄의 날에 의무적으로 단식했고(레위 16,29),
바리사이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했다(디다케 8,1).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스승의 고행을 본받아 자주 단식했던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
(마태 11,19) 통한 스승의 영향으로 예수님 생전에는 속죄의 날을 제외하고
단식하지 않았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19-20절에서 생전의 예수님의 입을 빌어 왜 초대교회
신자들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다음에 단식을 해야 하는지를 밝히고 있다.
1세기 교회에서는 아마도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금요일마다 단식했을
것이다. 1세기 말에는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하는 풍습이 있었다
(디다케 8,1). 구약에서는 혼인잔치를 종말론적 구원의 상징으로
표현했다(이사 61,10).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시대야말로 구약의 약속이
실현되어 종말론적 구원이 이룩되어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시기라고
하신다. 따라서 단식을 해야 하는 동기는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써 기쁨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헤아릴 수 없는 사랑 때문에 당신의 아들
예수를 이 세상에 사람의 모습으로 보내주셨다. 이렇게 해서 죄와 어둠과
나약함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하느님께서 벌이시는 사랑의 축제에
예수님과 함께 하도록 초대받았다. 또한 하느님의 사람 되심은 인간의
한계와 제약 안으로 기꺼이 들어오신 사랑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에 우리
또한 그렇게 사랑의 존재가 되어야 할 소명을 받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이 사랑의 축제에서 기쁨과 평화를 체험하며
신명나게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은 까닭은 사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함이 곧 기쁜 축제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축제는 어떤 이벤트나 행사가 결코 아니다. 이 축제는
영원으로 이어지는 매순간의 축제여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선과 사랑의 축제를 거부하는 이들의 반대에 부딪쳐 결국 죽음을 맞게
되었다. 예수님의 죽음은 ‘사랑의 부재’, ‘축제의 장례식장화’를 의미한다.
바로 이때야말로 그 빈자리, 결핍, 부재를 다시 하느님으로 채우기 위해
단식을 해야 할 때이다. 우리네 주변을 둘러보자. 사랑 결핍, 선과 정의의
부재, 굶주림과 소외된 이들의 절규가 메아리치는 현장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 단식은 사순절이나 대림절에 의무적으로 하는 형식적인 행위가
아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목마름을 확인하고 공감하고, ‘더불어
행복하기 위한’ 사랑의 축제를 벌이지 못함에 대한 가슴 치는 회개의
몸부림이야말로 참 단식이다. 단식하는 그 빈자리에서 굶주리고 가난한
이들, 사랑을 받지 못한 이들, 관심 밖으로 밀려난 이들, 억울함에 한숨을
멈추지 못하는 이들의 얼굴을 떠올리고 그들에게로 발걸음을 돌리도록
하자. 새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철저하고 새로운 회개의 정신으로
단식하며(2,21-22) 그 빈 골짜기에 다시 부활하신 주님을 모시도록 하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인천] 항상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2015년 나해 1월19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5,1-10
복음
<신랑이 혼인 잔치 손님들과 함께 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8-22
어떤 자매님께서 자신의 본당에 유명한 강사 신부님의 특강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워낙 좋아하고 존경하는 신부님이셨는데, 전에 한
번 들을 기회가 있었지만 어떤 일이 생겨서 들을 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이번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참석해서 듣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드디어
특강 날, 친구들과의 약속도 다 미루고 성당에서 신부님의 특강을 들으며
많음 감명을 받습니다. 특별히 ‘감사’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왜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지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늘 감사하며 살겠다는 약속을
주님께 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진동으로 맞춰 놓았던 휴대전화가 힘차게 울리기 시작합니다. 얼른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으니 남편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왜 전화를 빨리 안 받아! 애 학교에서 전화가 왔는데 글쎄 사고가 나서
우리 애가 응급실로 실려 갔데. 내가 지금 지방이라 조금 늦을 것 같거든.
당신 먼저 가 있어. 나도 얼른 병원으로 갈게.”
전화를 받은 자매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요? 그렇게 듣고 싶어 했던
특강이었으니 끝까지 자리를 지켰을까요? 또한 자녀의 안 좋은 소식을
듣고도 특강 때 가졌던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고 계실까요?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특강에 대한 생각은 완전히 사라졌을 것입니다. 오로지
사랑하는 자녀의 얼굴만 떠올려졌겠지요.
잠깐의 통화이지만 이를 통해 관점이 180도 완전히 바뀔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다짐이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인 것이지요.
상황에 따라 바뀌어 질 수 있으며, 새로운 깨달음에 의해서 바뀔 수 있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그런데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으면서 ‘나는 맞고 너는 틀려!’를 항상 외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를
전지전능하신 주님께 돌리는 경우도 종종 있지요. 왜 불공평하시냐고
하면서, 자기 생각의 기준에 따라 주님의 행동을 판단해 버립니다.
오늘 복음에 사람들은 예수님께 단식을 왜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집니다.
당시 존경과 사랑을 받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자주 단식을
했었거든요. 그에 비해 예수님의 제자들은 전혀 단식을 하지 않고 그저
먹고 마실 뿐이었으니까요. 이는 단식 자체에만 의미를 두기 때문에 했던
행동입니다. 단식의 본뜻인 회개와 참회의 행위가 아니라, 보이는
단식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단식하지 않음이
못마땅해 보였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새 천 조각은 새 옷에 대고 기워 입는 것처럼, 또한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인해 도래한
새로운 시대에 맞게 새로운 생각과 행동을 해야 함을 이야기하십니다.
항상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열린 마음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잘 모실 수 있습니다.
하루에도 여러 번 나는 자신을 돌아본다. 해야 할 일은 충실히
실행하였는지, 또 친구들에게 신의를 잃는 행동을 하지 않았는지. 또 내가
배운 것을 몸소 실행에 옮겼는지 말이다(공자).
가난한 청년(‘좋은 생각’ 중에서)
미국에 사는 제레미는 대학에 합격 했지만 학비를 벌기위해 농장에서
일했습니다. 형편이 어려운 제레미는 농장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도시락을
싸갈 수 없어 점심시간만 되면 수돗물로 고픈 배를 채워야만 했습니다.
어느 날, 어김없이 수돗물로 배를 채우기 위해 수도가로 향하는데 인부
감독의 큰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집사람은 내가 돼진 줄 아나 봐! 도시락을 뭐 이렇게 많이 싼 거야. 누구
내 도시락 나눠 먹을 사람 없어?"
제레미는 남는 도시락을 나눠먹는 것뿐이니,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감독의 도시락을 나눠 먹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런데 다음날도 또
감독의 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무래도 집사람은 나를 뚱뚱보로 만들 생각인 가봐. 뭐 이렇게 또 많이
싼 거야? 나랑 도시락 나눠 먹을 사람 없어?"
제레미는 또 아무 부담 없이 그 도시락을 먹었습니다. 그렇게 한 달,
감독의 도시락을 나눠먹어 농장을 다니는 동안 배고플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어 농장을 그만두게 된 제레미는 감독
내외분께 감사의 인사를 표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농장 안이 넓어 감독
내외분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경리 아가씨에게 감독 내외분께
대신 인사를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경리 아가씨가 말했습니다.
"그 감독께서는 부인이 안 계세요. 몇 해 전에 돌아가셨어요."
상대방이 알아주길 바라는 선행은 그 자체로 선행이 아닙니다. 선행은 그
누구도 모르게 하는 일, 오로지 하느님만 아실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
참된 선행이 아닐까요?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순종이 없는 행위란?
2015년 나해 1월19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 신랑이 혼인 잔치 손님들과 함께 있다. >
복음: 마르코 2,18-22
< 순종이 없는 행위란? >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그런데 만약 그분이 온갖 기적으로
물 위를 걷고 죽은 사람도 살리셨지만 마지막에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다면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그분을 당신 아드님으로 인정해 주셨을까요?
카라바조가 그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이란 그림이 있습니다.
천재화가 카라바조가 그린 마지막 작품이고 그의 모든 작품들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힙니다.
그는 1600년경에 귀족들의 그림을 도맡아 그리던 가장 유명하고 실력도
완벽한 화가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술만 취하면 욕설과 폭행 등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고위 성직자들과 귀족들은 돈을
대어 그를 빼내주고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감옥에 들어간 것이
15번이나 됩니다. 그럼에도 그의 실력을 인정해주는 주교님들과 귀족들은
그가 감옥에서 썩는 것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1606년 5월 사소한 말다툼 끝에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고 사형을
언도받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다시 후원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번엔 모두 등을 돌려버리고 맙니다.
이대로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탈옥에 성공하여 이태리 가장 남쪽의
섬 몰타로 도주하여 거기서 숨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공포가 너무 커서 칼을 차고 신발을 신고 잠을 잘 정도였다고 합니다.
두려움 속에서 사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까닭에 유일한 사면권이
있었던 교황을 설득해보려고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1610년 조금씩 로마로
향하면서 세계 처음으로 조명을 사람에게 직접 비추는 기법을 이용해 어린
다윗이 골리앗의 칼을 들고 골리앗의 잘린 머리를 들어 올리는 그림을
완성해냅니다.
이 그림은 교황을 설득하기 위한 것으로 그림 속의 다윗은 어렸을 때의
순수하고 겸손했던 자신의 모습을 의미하고 목이 잘린 흉측한 골리앗의
머리는 지금의 자신을 상징했습니다. 즉, 지금까지 자신을 돌보아주었던
성직자들의 말에 불순종하여 끊임없이 범죄를 저질러왔던 자기 자신을
죽였음을 의미하는 회개의 증거품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로마로 향하는 배에 오릅니다. 중간에서 경찰들이 카라바조를
연행하는 과정에서 그는 그만 그림을 배에 떨어뜨리고 맙니다. 경찰들은
카라바조를 도둑으로 오인하여 체포했지만 도둑이 아닌 것을 알고
놓아줍니다. 그러나 그림을 가지지 않고서는 교황에게 갈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 배를 쫓아 걷고 또 걷습니다. 그러던 중 말라리아에 걸려
길거리에서 사망하고 맙니다.
카라바조는 교황에게 다시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에 ‘순종’의 의미로
불순종의 상징인 현재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죽인 그림을 그렸습니다.
순종이 아니면 그의 실력도 더 이상 그를 지켜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 자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자녀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지녀야 하는 것이 ‘순종’의 정신입니다. 그리고
이는 그리스도께도 해당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순종하지 못하여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다면 아버지와의 관계가 깨지고 하느님은 더 이상
삼위일체 사랑으로 존재하시지 않게 됐을 것입니다. 순종은 자신을 못
박는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대사제로 뽑히시기 위해서 먼저
순종을 배우셔야만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9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 10 하느님에게서 멜키체덱과 같은 대사제로
임명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멜키체덱의 대를 잇는 대사제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제가 되기
위해 그리스도는 고난을 통해 아버지께 순종하는 법을 배우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말씀 따라 십자가를 지시지 않으셨다면 그것 자체가
아버지와 인간의 중재역할을 하는 사제직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떠한 신분에 해당되는 일을 하지 않으면 껍데기만 그 신분이라고
하더라도 속은 구원받지 못하게 됩니다.
홍해를 건넜다고 바로 가나안 땅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중간에
자신들을 죽여야 하는 광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례만
받았다고 하느님의 자녀로 탄생한 것이 아닙니다. 순종을 배워야만 참으로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있는 그대로 따르고 실천할 수 있어야
나중에 참으로 자녀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순종을 배워 자신의
뜻을 버리고 매 순간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서 그분의 자녀로 선택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순종이 아닌 어떤 행위도 우리를 자녀로 만들어
줄 수 없습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연중 제2주간 월요일
2015년 나해 1월19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5,1-10
복음
<신랑이 혼인 잔치 손님들과 함께 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8-22
제 방에는 두 개의 탁상용 달력이 있습니다. 하나는 작년에 사용했던
달력이고, 다른 하나는 올해에 사용하는 달력입니다. 작년의 달력에는
매월 일정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의 상황과 일들이 빼곡하게
일정표에 적혀있습니다. 올해의 달력에는 작년과 비슷한 일들도 적고
있지만 작년과는 다른 일들도 적고 있습니다. 새로운 한 해에는 또 다른
일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중서울 지역 ME 대표
사제를 맡았기 때문에 ME와 관련된 일정들이 많이 늘었습니다. 작년에는
‘교황 방한 준비 위원회’의 일을 도왔기 때문에 교황 방한과 관련된
모임들이 많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매일 새로운 하루를 선물로 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새로운
하루에 원망과 분노를 채우기도 합니다. 지난날의 아쉬움을 채워 놓기도
합니다. 불평과 불만을 채우기도 합니다. 무엇을 채우든 그것은 본인의
몫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새로운 계획과 희망을 채우기도 합니다.
감사와 겸손 그리고 나눔과 희생을 채우기도 합니다. 인생은 사랑하고
사랑받기에도 짧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채우든 이 또한 본인의
몫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루가 쌓여서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모여서 일
년이 되고, 일 년들이 모여서 나의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신앙인들은 3가지 유형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깃발아래 있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생활태도는 하나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즐거움이 가득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먼 훗날의
일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깃발아래 왔다가, 금세 달콤한 유혹에
빠져서 세상의 것들에 빠져드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께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기준에 맞추어서 와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가난과 겸손이 주는 기쁨을 알고, 세상의
가치보다 훨씬 소중한 주님을 따르는 즐거움을 알기 때문에 언제나 주님의
깃발아래 서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을 따르는 것이
힘들었기에 오늘 우리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구원자가 되신 것은 고난을 겪으신
다음이라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2015년 새해에는 그리스도의 깃발아래 겸손, 가난, 나눔, 봉사의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알맹이가 중요하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1월19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마르 2,18-22)
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5,1-10
복음
<신랑이 혼인 잔치 손님들과 함께 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8-22
알맹이가 중요하다.
그동안 익숙해 있던 생활의 패턴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지켜온 전통과 고정관념이 나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정된 의식의 전환을 통해서 새로움이 주어집니다. 과거에 매여
있으면 열린 미래를 볼 수 없습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했는데.... ‘원래
그래!’ 어떤 못된 습관을 관행이라고 합리화시키는 고집을 피워서는 발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우리 자신이 변화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고(로마12,2) 거기에 나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열어주셨고 이 구원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상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옛
사고방식대로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질 구원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갇혀 있는 만큼 새로운 것을 볼 수 없게 됩니다. 기득권을
내려놓으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할망정
과거에로 회귀해서는 안 됩니다. 근본정신을 망각한 과거에로의 회귀는
퇴보이기 때문입니다.
단식을 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에
대한 답의 결론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2,22).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의식을 전환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단순히
율법의 규정에 따라 단식을 할 때가 아닙니다. 단식을 하는 이유는 죄를
벗는 속죄의 행위나 회개의 표시로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애덕을 실천하는 행위로 하는 것이지 단순히 식사를 절제하거나 육식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몸매 관리나 건강을 위해서 단식을 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금요일 고기를 먹지 않는 금육재를 잘 지킵니다. 그러나 단식을 해서
이웃에게 어떤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는가? 생각해보면 그 단식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마태9,13)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올바른 단식에 대해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6,17-1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단식은 보이기 위한 단식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당하신 주님의 사랑에 동참하는 단식이어야
합니다. 단순히 굶는 것을 단식이라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기를 소망하며 우리를 부르십니다.
당신의 사랑에로, 그리고 이웃사랑에로 초대하십니다. 구체적 이웃사랑
실천이 없는 단식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을 가진 단식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의미 있는 단식, 알맹이 있는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은혜를 간구합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섬기는 까닭이 지옥의 두려움 때문이라면, 지옥에서
불살라 주시고 천국에 대한 소망 때문이라면, 천국에서 쫓아내소서.
그러나 제가 주님을 섬기는 것이 당신 사랑 때문이라면, 주님, 당신의
영원한 아름다움을 제게서 거두지 마소서”(성녀 리비아).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기타]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예수님의 상황참작은 혁명적
2015년 나해 1월19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5,1-10
복음
<신랑이 혼인 잔치 손님들과 함께 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8-22
예수님의 상황참작은 혁명적
가톨릭윤리가 엄하지만 불가항적 가항적 상활을 참작하는 합리적입니다.
그래서 윤리라는 과목을 신학교에서 수업하며 여러 상황을 배웁니다,
특히 죽음에 임박한 경우에 교회법은 윤리적 잘못들이라도 예외를 둡니다.
조당, 냉담상태로 살아도 죽기 전에 회개하면 성사 수령이 가능합니다.
신부됐다가 그만뒀다 해도 막 죽어가는 사람에게 성사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상황참작은 사회와 다르고 구약과 달라 가히 혁명적이지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마르코 2,19)”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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