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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펄젼의 시편 40편 강해
[개 요]
주제
이 시에는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라는 머리말이 붙어 있다. “다윗의 시.” 이는 저자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예언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던 다윗은, 영예롭게도 자신의 범위를 훨씬 넘어선 위대한 내용을 노래하였다. “영장으로 한 노래.” 이토록 귀한 시편을 가장 숙련된 종교 음악가에게 특별히 위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장 훌륭한 음악은 이토록 탁월한 주제를 담은 시편을 위해 바쳐지는 것이 마땅하다. 이러한 헌납은 이 노래가 공적 예배를 위해 지어졌음을 시사한다. 이 시편의 화자가 1인칭 단수형이어서 이를 단지 개인적 찬양으로 간주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여기서는 분명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나온다. 비록 다윗과 그의 주님을 혹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본문 속에서 포착하는 것이 무리한 억지는 아니지만, 그러한 이중적 해석은 애매모호한 측면을 수반한다. 따라서 우리는 설령 별들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태양이 비취게 하는 편을 택할 것이다. 비록 신약성경은 이 점을 그다지 명백하게 밝히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다윗이 6-9절에서 우리 주님을 언급한 것이라고 결론지어야 한다. 한편 히브리서 기자는 10:5-9에서 다른 모든 추측들을 배제하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세상에 오신 분께 그 의미를 국한시킨다.
구성
이 시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1-3절 개인적인 감사이며,
4, 5절 이어서 성도들을 향한 여호와의 선하심을 전반적으
로 선언하는 내용이 나온다.
6-10절 여호와의 뜻에 헌신하고자 하는 공언이며,
11-17절 억압적인 곤경으로부터의 구원과 대적들의 파멸
을 구하는 기도이다.
[강 해]
1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2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3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1절.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끈기 있게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특징적인 면모였다. 그분의 마음속에는 조급함이 전혀 없었으며, 그분의 입술은 더 더욱 그러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뇌와 헤롯과 빌라도 앞에서의 잔인한 조롱, 그리고 십자가상의 수난 등을 통해, 그분은 전능하신 인내로 기다리셨다.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부터는, 진노의 눈흘김이나 불평의 말 혹은 보복 행위 등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분은 기다리고 또 기다리셨다. 그분은 인내하되 온전히 인내하셨으며, 불 속에서까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자들보다 훨씬 더 인내하셨다. 거름 더미 위에 앉았던 욥도 십자가상의 예수님께 비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그리스도께서는 인내하는 자들 가운데서 최고의 면류관을 쓰신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그렇게 기다리셨다면, 우리가 조급해 하거나 반역적인 자세를 취해서야 되겠는가?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머리 되신 예수님이나 그분의 지체들 각자가 여호와를 기다리는 일은 결코 헛되지 않을것이다. 가장 깊은 낙심 상태에서 부르짖는 탄원자의 모습과 그 연약한 신음소리에 귀기울이기 위해 몸을 굽히시는 겸손하신 사랑에 주목해 보라. 우리 주님이 우리처럼 부르짖으셔야 했고, 우리처럼 기다리셔야 했으며, 또한 우리와 똑같이 믿음과 탄원의 과정을 거친 후에 아버지의 도우심을 받으셔야 했다는 것은 그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한 밤중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구주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 구절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윗의 자손께서는 매우 낮아지셨지만 일어나 승리하셨다. 또한 여기서 그분은, 그 영광스러운 승리의 전형을 계승하기 위해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그분과 동일한 마음으로 자신을 무장하자. 그리고 인내로 갑옷을 삼고 기도로 무장하며 믿음으로 띠를 두르고 거룩한 전쟁에 박차를 가하자.
2절.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끌어 올리시고." 우리 주님이 죄로 말미암은 끔찍한 저주를 자신에게 담당시키셨을 때, 그분은 깊고 캄캄하며 무시무시한 지하 감옥 속에 갇힌 죄수와 같은 상황에 내던져지셨다. 그 끔찍한 흑암 속에서는, 급류 소리와 같은 소음이 들리고 머리 위로는 격노한 대적들의 위압적인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고통 중에 처한 우리 주님은, 마치 모든 사람들에게 잊혀진 채 공포와 흑암과 쓸쓸함으로 가득한 비밀 감옥 속에 갇힌 죄수와 같으셨다. 그러나 주 여호와께서 그분을 그 모든 굴욕으로부터 일으켜 세우셨다.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내던져지신 그분의 발길을 그 깊은 고뇌의 지옥으로부터 돌이키셨다. 우리의 보증 되시는 분을 극단적인 상황으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이, 그보다 훨씬 더 가벼운 슬픔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지 않겠는가?
"수렁에서." 괴로움에 처한 그는 발디딜 곳을 찾지 못한 채 미끄러지고 주저앉는 사람과 같았다. 이 표현은 바로 앞의 표현처럼 적극적인 곤경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슬픔을 무마시켜 줄 확고한 위안의 결여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 발디딜 곳이 있는 경우에는 짐이 가벼워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 반면에 짐을 지고서 미끄러운 수렁 속에 빠진 사람은 갑절이나 힘이 든다. 우리 성도들은, 겸손하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애로우신 구속주께 경배드려야 한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온갖 종류의 곤경들로 둘러싸인 가운데 모든 위안을 빼앗기셨다. 그가 힘든 노고와 고난 가운데서도 어떻게 감사하셨는지를 주목하라. 만일 당신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한 적이 있다면, 우리 주님과 더불어 이 노래를 부르자.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구속주의 사역은 완수되었다. 그분은 자신의 용무를 완수함으로써 마련하신 확고한 터전 위에서 쉬고 계시며, 다시는 시련을 당하실 수 없다. 그분은 영원히 영광 중에 다스리신다. 우리 주시요 구주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도모함에 있어 확실한 기초 위에 서 계시다는 사실과 또한 굳건히 붙드시는 하나님의 손길로 말미암아 그분의 사랑의 사역이 언제나 성공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은 큰 위로가 된다. 그분은 자신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언제 어디서나 영원토록 구원하실 수 있으며, 가장 높은 하늘에 항상 계시사 그들을 위해 중재하신다. 예수님은 기가 막힐 웅덩이로부터 만유의 주께로 끌어올려진 진정한 요셉이시다. 만일 우리가 주님처럼 가장 심한 수치와 슬픔의 웅덩이 속으로 내던져진다면 우리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총과 신실하심이라는 확실하고 영원한 반석 위에 굳건히 설 것이라는 사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참으로 귀하고 복된 일이다.
3절.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수난당하기 직전의 유월절에, 우리 주님은 옛적의 위대한 찬양 시편들 중 하나를 부르셨다. 그렇다면, 구속하심을 받은 자들 가운데 계신 그분의 마음속에는 이제 어떤 노래가 울려퍼질까? 그분이 즐거운 마음으로, 택함받은 자들의 합창을 영원토록 이끌어내시는 노래는 어떤 것일까? 미리암의 북 소리나 모세의 승리의 찬송도 새롭고 환희에 찬 이 노래에는 비견될 수 없다. 이 노래 속에서는 공의가 드높여지고 은총이 승리한다. 지옥이 정복되고 하늘이 영화롭게 된다. 죽음이 멸해지고 불사의 터전이 확립된다. 죄가 소멸되고 의가 빛난다. 우리 주님이 하늘에 있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우리와 함께 새포도주를 드실 그날에 부르실 찬송의 주제는 어떤 것일까? 심지어 이 땅에 계실 때에도, 그리고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기 전에도, 그분은 자신 앞에 놓인 기쁨을 예견하셨고 그 소망을 통해 인내하셨다.
"우리 하나님." 예수님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그리고 나와 여러분의 하나님. 우리가 어떻게 그분을 찬양할 수 있을까? 예수께서 우리의 현악기들을 연주하는 수석 연주자가 되실 것이다. 그분은, 자신의 피로 구속하심받은 성도들에게서 나오는 엄숙한 할렐루야 찬양을 하늘로 인도해 올리실 것이다.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슬픔과 승리를 보게 될 것이며, 그분을 버린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 두려워 떨 것이다. 그러고 나서, 은총을 통해 믿음을 받아들이고는 여호와를 의지하게 될 것이다. 우리 주님의 상급이 여기에 있다. 전도자를 담대하게 하며 사역자들을 끝까지 인내하게 하는 확신이 바로 여기에 있다. 당신도 그 "많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가? 구원의 길, 두려움, 혹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일 등에 유의하라. 자신의 영혼 속에 받아들이고 실행으로 옮기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은 구원의 증거이자 본질이다. 참된 신자는 죄와 사탄의 지배로부터 분명히 구속함을 받는다.
4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5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4절. "여호와를 의지하고." 믿음은 약속을 얻게 한다. 한눈 팔지 않고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축복이 확실히 보증된다. 인생은 나사로처럼 가난해지거나 모르드개처럼 증오에 시달리거나 히스기야처럼 병에 걸리거나 혹은 엘리야처럼 고독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믿음의 손으로 하나님을 줄곧 붙들 수만 있다면, 외적으로 어떠한 곤경 가운데 처하더라도 복된 상태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반면에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부유하고 형통하다 해도 저주 아래 있는 셈이다.
"교만한 자와." 교만한 자는 모든 사람들이, 마치 이스라엘에 세워진 금송아지 우상들을 섬기듯이, 자신에게 절하며 존경을 표하기를 바란다. 반면에 믿는 사람들은 너무도 고상하므로 단순한 재물에 집착하지 않으며 허풍으로 위엄을 부리는 자들 앞에서 굽실거리지도 않는다. 의인이 경의를 표하는 것은 우쭐거리며 거드름피우는 태도가 아니라 겸손하고 인자한 태도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의 모범이 되신다. 그분은 왕들이나 대인들에게 아첨하신 적이 전혀 없다. 그분은 영예롭지 못한 자들에게 영예를 부여하신 적이 없다. 거만한 자들은 결코 그분의 칭찬을 받지 못했다.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이단들과 우상숭배들은 거짓이며, 탐욕, 세속성, 그리고 쾌락 추구 등도 거짓된 것들이다. 그러한 거짓을 좇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 우리 주님은 진리이시며 또한 진리를 사랑하신다. 거짓의 아비는 그분과 함께할 수 없다. 우리는 배교자들과 기회주의자들에게, 거짓 교사들에게 결코 경의를 표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 모두는 악한 누룩이며, 우리는 자신에게서 그러한 요소들을 제거하면 할수록 좋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해 자신의 신조나 실천 속에 담긴 모든 그릇된 요소들을 멀리하는 자는 복이 있다. 이 구절에 비추어 판단하건대, 분명 행복한 듯이 보이는 사람들 중에도 사실은 정반대인 자들이 많다. 사람들은 지갑이 두둑하거나 근사한 장신구를 갖추거나 혹은 부유한 자들을 만나면, 그들이 난봉꾼이든 성자이든간에 또는 얼간이든 철학자든간에, 존경하려는 습성이 있다. 분명한 사실은, 지옥의 사탄이 쌍두 마차를 타고 군주처럼 행세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비위를 맞추려 할 것이라는 점이다.
"복이 있도다." 이는 시 1편의 "복있는 사람은······"의 표현과 유사하다. 하나님은 단호한 의지로 축복을 베푸신다:"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내가 앎이니라"(민 22:6).
5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바다에 생명이 가득하듯이, 창조, 섭리, 그리고 구속 등은 놀라움으로 가득하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십자가 주위에 밀집되어 있는, 그리고 거기로부터 광채를 발하는 기이한 일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구속이 완수됨으로써 갖가지 목적들과 수많은 계획들이 실현되었다. 속죄로 말미암은 결과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며, 십자가의 영향은 태양 광선보다 더 멀리까지 미친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놀라운 은총들이 십자가로부터 일어난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으며 또한 놀라운 사랑의 이적들이 나타난다. 여기서 우리 주님이 여호와를 가리켜 "나의 하나님"이라 말하고 있음에 주목하라. 인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과 우리를 위해 여호와와 더불어 언약 관계를 선언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께 관심을 갖는 것을 자신의 특별한 보화로 여겨야 한다.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하나님의 행동은 그분의 생각이 그대로 옮겨진 것이다. 왜냐하면 심사숙고가 배제된 행동은 하나님의 지혜에 따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모든 생각들은 그분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선하며 은혜롭다. 하나님의 사랑의 생각들은 매우 많고, 매우 놀라우며, 또한 매우 실천적이다. 그것들을 곰곰이 묵상해 보라. 그보다 더 소중한 주제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많은 생각을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분을 많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분명 이것은, 기회 있을 때마다 내 혀로 말해야 할 사항이다.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것은 너무도 엄청나기 때문에 분석하거나 헤아릴 수가 없다. 사람으로서는 여호와의 길과 생각을 측량하거나 파악할 수 없다. 이 사실은 언제라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9)고 하셨기 때문이다. 사랑의 미로에 빠져 자신을 잃게 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에 압도당하는 것은 그 얼마나 감미로운 일인가!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그 엄청난 수효는 인간의 산술 범위를 훨씬 넘어선다. 영원성을 내포한 생각들, 나의 타락과 회복과 구속과 회개와 죄사함과 존속과 완전케 됨 그리고 나의 영원한 상급 등에 관한 그분의 생각들, 이들에 대한 목록은 너무도 길어서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며, 그러한 은총들의 가치는 감히 평가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하다. 하지만 설령 우리가 여호와의 모든 사역들을 밝히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이를 침묵의 구실로 삼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최선의 모범이신 주님이 위대하신 아버지의 자비로운 생각들을 가끔 말씀해 주셨기 때문이다.
6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7그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8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9내가 대회 중에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내 입술을 닫지 아니할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10내가 주의 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대회 중에서 은휘치 아니하였나이다
6절. 여기서 우리는 구약성경에 수록된 가장 놀라운 구절들 중 하나를 엿볼 수 있다. 이 구절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희미한 거울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대면하여 보게 한다.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우리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듣고 실행하는 일에 신속했다. 그분의 귀는 마치 자신의 영혼 속에까지 뚫린 것 같았다. 그분의 귀는 블레셋인들에 의해 막혀버린 이삭의 우물들처럼 닫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의 샘에 이르는 통로였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신속한 순종이다. 한편 여기서는, 자기 주인을 사랑한 나머지 희년이 되어도 자유롭게 해방되기를 거부하는 종이 자신의 귀를 뚫는 행위를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다. 지속적인 봉사를 다짐하는 표시로 그 귀를 뚫는 종의 모습은, 하나님 아버지의 일에 충실하시며 그분의 자녀들을 사랑하시는 복되신 우리 주님의 진정한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단호하게 가장 겸비한 종이 되셨다. 사도 바울은 칠십인역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히 10:5)라고 옮겼다. 어떻게 이런 독법이 가능했는지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사도적 권위로써 옮긴 것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실수로 받아들이지 않고 동일한 영감을 통해 다양한 독법이 가능함을 보여 주는 사례로 받아들인다. 어쨌든, 이 구절은 섬기기 위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를 암시한다. 그분은 실제 육체를 입으셨고, 실제로 삶과 죽음을 경험하셨으며, 또한 모세 율법의 모든 그림자들을 제거하셨다.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의식 율법에 따라 바치는 각종 예물들은, 그 자체만으로는 하나님을 전혀 흡족하게 해드리지 못한다. 피흘리는 희생 짐승이나 제단에서 연기를 피워 올리는 고운 가루도 여호와의 마음을 만족시켜 드릴 수 없다. 그분은 황소나 수양의 고기에 관심이 없으시며,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기쁘게 받으시지도 않는다. 이 예물들은 예표적인 측면에서 나름대로 가치가 있었지만, 원형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것들의 가치는 모두 사라졌다. 이는 태양이 떠오를 때 촛불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다른 두 가지 제사들이 여기서 언급된다. 감사와 죄사함을 위해 예표적으로 드려졌던 제사들이 이제 그 효력을 상실했다.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드렸던 제사들이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본체 자체가 현존할 때에는 그것에 대한 상징물은 아무 소용도 없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여호와께서 의식적인 예배보다 마음의 순종을 훨씬 더 가치 있게 여기심을, 그리고 우리의 속죄는 정성들인 의식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구주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여호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심에 따른 결과로서 주어짐을 배우게 된다.
7절. "그때에 내가 말하기를." "그때"는 말하자면, "사람의 곤경이 제사와 예물을 통해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날 때"이다. 주 예수님 자신이 개입되시면, 속죄나 화목을 단순히 상징하는 것들은 아무 소용도 없다. 주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이같이 독특한 생명의 말씀을 듣게 하시며 또한 그것을 양식으로 삼게 하신다.
"내가 왔나이다." 하늘이여, 땅이여, 그리고 너희 땅 아래 있는 곳들이여, 보라! 온 정성을 다하여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그 무엇이 여기 있다. 진지한 마음으로 앉아서 주목하라. 왜냐하면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이 죄악된 육신의 모양으로 오시며, 무한하신 분이 유아로서 동정녀의 품에 안기시기 때문이다! 임마누엘이란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오시는' 것이다. 그분은 자신의 인격을 지닌 상태로 오셨으며, 본질적인 자아를 간직한 채로 상아 궁전들을 떠나 비천한 곳으로 내려오셨다. 그분은 자신을 아낌없이 바치는 분으로서, 정해진 때에 신속하게 오셨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뜻으로 기록되어 있다. 섭리를 통해 점차적으로 밝혀지는 예정에 관한 신비한 기록 속에는, 때가 차면 수많은 황소들과 수양들의 희생으로도 이룰 수 없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이 친히 이 땅에 내려오신다는 약속이 들어 있다. 구주께서는 이를 알고 계셨다. 생명의 책에 우리 이름이 들어 있다면 그것은 그 얼마나 큰 특권이요 영광인가! 그것은 그 책의 맨 앞에 예수님의 성호가 적혀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옛적에 맺으신 언약도 존중하셨으며, 성실하게 약속을 지키라고 당부하신다. 과연 우리에게 그런 약속이 주어져 있으며, 기억의 책에 그렇게 적혀 있는가? 그렇다면 태만하게 언약을 거스리는 자가 되지 말자.
8절.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복되신 우리 주님만이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행하실 수 있었다. 율법은, 우리처럼 가련한 피조물들이 온전히 성취하기에는 너무도 광범위하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을 기뻐하기도 하셨다. 영원 전부터 그분은 자신 앞에 놓인 일을 행하기를 바라셨고, 인간으로서의 삶을 사는 동안에는, 율법을 완성시키기 위해 고뇌의 세례를 받기까지 고통당하셨다. 심지어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선택하셨고, 자신의 뜻은 배제시키셨다. 순종의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다. 우리 주님의 순종(바로 이것이 우리의 의이다)이야말로 완벽하고도 자발적인 헌신이다. 측량할 수 없는 슬픔을 당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은 자신의 일을 기쁘게 감당하셨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히 12:2).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그리스도는 외형적이거나 형식적인 차원에서 헌신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의 사역 속에는 그분의 마음이 깃들어 있었고, 매사를 거룩한 동기로 행하셨으며, 아버지의 뜻이 그분의 음식이었다. 우리들 각자도 주님처럼 행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그분의 제자로서의 증거가 결핍될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마음으로 이행하지 않는다면, 사실상 그것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우리를 위해 자발적이고도 진심어린 자세로 위대한 구원 사역을 감당하신 구주께 찬양을 드리자.
9절. "내가 대회 중에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나이다." 예수님은 가장 순수한 도덕과 가장 높은 거룩성을 전하셨다. 하나님의 의가 그분의 주제였다. 우리 주님의 생애 전체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한 설교였으며,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들었다. 더욱이, 그분은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선언하는 일을 결코 주저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위대하고 의로우신 계획을 분명히 드러내셨다. 그분은 성전에서 공개적으로 가르치셨고, 신실하고 참된 증인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셨다. 그분은 위대한 복음증거자요 탁월한 순회 전도자이셨으며 또한 야외 전도의 대가이기도 하셨다. 여호와의 종들이여, 그대들의 빛을 감추지 말고,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받은 바를 다른 이들에게 드러내라. 특히 그대들의 삶을 통해 거룩성을 증거하며, 말이나 행실로 의를 위한 승리자가 되라.
"여호와여 내가 내 입술을 닫지 아니할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편해지려는 마음에서나 사람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위대하신 선생님의 입술이 닫히는 법은 결코 없었다. 그분은 언제나 즉각적이셨다. 가난한 자들이 그분께 귀를 기울였고, 왕들도 그분께 책망을 들었다. 세리들이 그분을 기뻐했으며, 바리새인들은 그분께 분노를 터뜨렸다. 하지만 그분은 이들 모두에게 하늘로부터 말미암은 진리를 선포하셨다. 신자가 시련에 처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증거하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고 담대히 말하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그분도 우리를 영접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처럼 간구를 드리셔야 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분의 신실한 사역자들에게나 어울리는 논지를 간절한 마음으로 친히 토로하셔야 했다는 사실 등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는 말씀(히 2:17)은 참으로 진실되다.
10절. "내가 주의 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이와는 정반대로, 그분처럼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분은 사람들을 의롭게 만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신령한 계획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쉽게 가르쳐 주셨다. 위대하신 우리 주님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거룩한 말씀을 통해 밝히 드러내셨다. 그분은 이신칭의 교리를 매우 간단하게 설명하셨다. 그분은 율법과 복음 모두를 명료하게 해설하셨다.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주 예수께서는 약속하신 바를 지키시는 여호와의 성실하심과 신자들을 구원하시는 그분의 은총을 누차에 걸쳐 선포하셨다. 여호와의 성실과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복음 속에 잘 혼합되어 있다.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성품에 대해, 율법과 경고들에 대해, 그리고 구원함받을 죄인들에 대해 신실하시다는 사실은 복음 속에서 특별히 계시된 사항이다. 또한 구원받은 이들에게 하나님이 영원토록 신실하시다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이들에게 큰 기쁨이 된다.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대회 중에서 은휘치 아니하였나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엄하신 성품뿐만 아니라 자애로우신 성품도 충분히 드러내셨다. 우리의 신앙고백의 대상인 위대하신 사도께서는 감추는 법이 없으시다. 그분은 결코 비겁하게 물러서지 않으셨고, 아무리 급한 일을 당해도 맥없는 말을 하지 않으셨다. 열두 살의 소년으로서 성전에서 박사들과 더불어 토론을 벌이셨고, 후에는 게네사렛에서 오천 명에게 설교하셨으며, 절기 마지막 날에 예루살렘에 모인 큰 무리들에게 설교하셨던 바로 그분은 여호와의 성호를 선포할 준비를 항상 갖추고 계시며, 불신 가운데 침묵하는 법이 결코 없으시다. 그분은 예언의 요구에 따라 인내하는 마음으로 잠잠하실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이외의 경우에, 그분은 설교를 자신의 음식으로 삼으셨고, 제자들에게 유익한 말씀이 있으면 반드시 언급하셨다. 이 시편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분은 곤경에 처할 때 이 말씀을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청하는 방편으로 이용하셨다. 그분은 자신의 하나님께 신실하셨으며, 이제 여호와께서도 자신에게 신실하시기를 간구하신다. 죄악된 수치심으로 인해 혀가 굳어버린 자들은, 곤경의 날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할 수도 없으리라는 점을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11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 그치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12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13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14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로 다 수치와 낭패를 당케 하시며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로 다 물러가 욕을 당케 하소서
15나를 향하여 하하 하는 자로 자기 수치를 인하여 놀라게 하소서
16무릇 주를 찾는 자는 다 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17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건지시는 자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11절.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 그치지 마시고." 우리 주님이 저주의 십자가에 달리신 동안에는 잠시 여호와의 긍휼이 단절되는 고통을 받으셔야 했지만, 그 큰 고통 가운데서도 그분은 여호와의 온유하신 배려를 간구하신다. 그분을 돕기 위해 천사가 내려온 것은 그러한 간구에 대한 분명한 응답이었다. 이전에도 그분은 광야에서 여호와의 은총을 입은 적이 있거니와, 이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골짜기로 들어서는 입구에서 그분은 하늘로부터 내리는 자비를 사모하는 거룩하고도 애잔한 소원을 피력하신다. 그분은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셨으며, 이제 아버지께 긍휼을 그치지 마실 것을 간구하신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그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담은 내용으로 이해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내용을 부르짖는 간구로 여기든 믿음의 선언으로 여기든간에, 그것은 시련당하시는 주님을 모범으로 삼는 우리에게 교훈이 된다. 또한 그것은, 그분이 얼마나 철저히 자기 형제들처럼 되셨는지를 우리에게 증거해 준다.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그분은 앞에서 주의 인자와 진리를 전파하였거니와, 이제 자신이 그것들을 체험함으로써 곤경의 날에 보호를 받으며 또한 자신의 대적들과 곤경들로부터 구원될 수 있기를 간구한다. 구원의 능력을 지니신 분께 심한 눈물로 부르짖으시는 주님의 간구를 듣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큰 감동과 위로를 주는 것은 없다. 오 주 예수님, 고투를 벌이는 밤이 닥치면 우리는 주님을 기억할 것입니다.
12절.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재앙이 사방으로 그분을 에워쌌다. 우리 죄를 대신 감당하시는 분 주위로 무수한 재난이 둘러쌌다. 우리의 죄악들은 무수하며, 따라서 그분의 슬픔도 무수했다. 우리 스스로는 자신의 불법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으며, 그분 역시 우리에게 임해야 마땅한 재앙들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으셨다. 그 복되신 분께는 아무런 죄악도 없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재앙이 사방에서 그분을 에워쌌다.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그분께는 아무런 죄도 없었지만 죄가 그분에게 전가되었고, 그분은 그 죄악들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감당하셨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구주께 죄가 전가된 것은 실제적인 일이었으며, 그렇게 됨으로써 그분은 감히 하나님의 얼굴도 쳐다보지 못하는 공포를 겪으셔야 했고 견딜 수 없는 고뇌와 재앙으로 말미암아 머리를 숙이셨다. 오 나의 영혼이여, 만일 죄인들의 친구께서 그 모든 죄악을 스스로에게 담당시키고자 내려오지 않으셨다면, 죄로 말미암아 영원토록 네게 가해질 징벌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는 말씀은 그 얼마나 복된 내용인가! 아무런 흠도 없으신 분을 죄인의 자리에 서게 하사 죄의식으로 말미암는 엄청난 공포를 담당하게 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놀랍고도 깊으신 사랑인가!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하나님의 징벌의 고통은 가히 측량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그 고통으로 말미암아 구주의 영혼이 너무도 심하게 짓눌린 상태였던 까닭에, 그분은 심히 놀라셨고 피땀을 흘리기까지 하셨다. 그분의 기력은 사라졌고, 그분의 심경은 철저히 가라앉았으며, 또한 그분은 고뇌에 사로잡히셨다.
마침내 무시무시한 밤이 이르렀다.
보응의 쇠채찍을 내리쳐
무흠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을 상하게 하였다.
보라, 내 영혼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진맥진하시는
네 구주를 보라!
거기서 내 하나님이 나의 모든 죄악을 담당하셨으니,
오직 은총을 통해 이 사실을 믿을 수 있다.
그분이 겪으신 공포는
너무도 심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 비통하고도 캄캄한 겟세마네를
그 누가 통과할 수 있으랴!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항한 죄,
그분의 의로운 율법을 범한 죄,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피를 외면한 죄,
그분의 이름과 동기를 거부한 죄,
바다같이 엄청난 그 죄악들.
오 겟세마네여, 나를 숨겨다오!
13절.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이 얼마나 감동적이며, 겸손하며, 또한 애잔한가! 우리 주님이 이 같은 기도를 하셨다는 사실은 매우 감동적이다. 그분의 간구인즉, 그 잔을 마시지 않고 지나가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 잔을 마시는 동안에도 지켜달라는 것이며, 또한 적절한 순간에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분은 구원과 도움을 호소하신다. 그분은 신속한 도움을 간청하신다. 이는 우리의 간구와 같은 방식이다. 우리 주님이 어떻게 응답을 받으셨는지에 주목해 보라. 주님은 겟세마네에서 간구를 드린 이후에 잠잠히 인내하셨는데, 이는 영광스러운 승리의 싸움을 싸우고 계셨음을 의미한다.
14절.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로 다 수치와 낭패를 당케 하시며." 본문이 기도인가 아니면 예언인가 하는 점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죄와 사망과 지옥의 권세자들이 자신의 악의가 영원히 자신에게 돌아가고 마는 결과를 지켜보면서 수치를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구주를 멸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스스로가 파멸됨으로써 무한한 낭패를 당했다. 비밀 회의 장소에서 음모를 꾸몄던 극악무도한 자들도 그와 같은 수치를 당한다. 왜냐하면 주 예수께서 사사건건 그들의 일에 관여하사 그들의 지혜가 어리석기 짝이 없음을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로 다 물러가 욕을 당케 하소서." 흑암의 무리들은 완전히 패주당하며, 영원토록 비웃음거리로 전락한다. 그들은 여자의 후손을 부숴뜨리려는 생각에 너무도 흡족해 했다. 하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승리하셨으며, 나사렛 예수께서 그들을 비웃으며 경멸하셨고, 또한 숨을 거두시던 인자께서 사망과 지옥의 파괴적인 권세를 멸하셨다. 그분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자.
15절. "나를 향하여 하하 하는 자로 자기 수치를 인하여 놀라게 하소서." 더러운 마귀가 우리 주님을 모욕하였는가? 이제 그가 어떤 수치를 당하게 되는지 보라. 오늘날 사악한 자들이 구속주의 이름을 조롱하는가? 그들은 참담한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피에 의지하여 은총을 간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온유한 어린양이시다. 하지만 그분을 경멸하는 자들은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유다 지파의 사자이시며 누구도 그분을 범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창 49:9). 유대교 지배층은 거드름을 피우며 "하하" 하고 비웃었지만, 예루살렘 길거리가 피의 강으로 변하고 성전이 철저히 소진되었을 때, 그들은 황폐한 곳에 내던져졌고, 마지막 선지자의 피가 그들 자신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들이닥쳤다. 만일 불신자가 이 구절을 읽게 되었다면, 그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을 핍박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을 위해 반드시 보응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하" 하며 조롱하는 자는 응분의 대가를 치루게 될 것이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저항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놀라게 하소서." 예수께서 고통 중에 참담해 하셨듯이, 그분이 대적들을 멸하실 때 그들 역시 절망에 사로잡힌다. 시기와 악의와 분개와 낙심 그리고 절망으로 말미암아 악령들과 악인들에게 엄습하는 참담함은, 여호와께 표출시킨 그들의 잔혹스러움에 대한 적절한 보응이다.
16절. "무릇 주를 찾는 자는 다 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이제 에발산에서 그리심산으로 시선을 돌린다. 여기서 우리 주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축복을 선언하신다. 그분의 간구 대상이 누구인지 주목하라.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각별한 사람들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요 17:9). 그분은 자신께 간구하는 자들을 위해 탄원을 올리신다. 그들은 가장 미천하거나 어린아이일 수도 있지만, 진실한 소원을 지니고 간절한 기도를 드리며 또한 하나님께 간구하려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는 자들이다. 간구하는 영혼들은 본문의 메시지를 듣고서 용기를 갖기 바란다. 예수께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양들을 생각하신다는 사실은 그 얼마나 풍성한 은총을 보여 주는가! 그분은 그들을 위해 무엇을 간구하시는가? 여기서 유사한 단어들이 반복된 데서 드러나듯이, 그분은 그들이 심히 기쁘며 또한 매우 행복해지기를 간구하신다. 예수님은 모든 간구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구하는 바를 찾음으로써 행복을 누리게 하시며 친히 슬픔을 당하심으로써 그들에게 평안을 주고자 하신다. 그분은 자신의 슬픔이 깊었듯이 그들의 기쁨도 그만큼 크게 하신다. 그분이 신음하심으로써 우리가 노래할 수 있으며, 그분이 피땀으로 뒤범벅되심으로써 우리가 즐거움이라는 기름을 듬뿍 바를 수 있다.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구속주의 고난으로 말미암은 또 다른 결과는, 그분의 구원을 기뻐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이 바라시는 바를 자신의 지표로 삼아야 한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그분의 위대한 구원을 사랑해야 하며, 그 가운데서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해야 한다. 그분에 대한 찬양을 멈추지 말라. 마음이 기쁨으로 따뜻해질 때, 혀로는 줄곧 찬양을 드리자. 만일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일을 제대로 진척시킬 수 없다면, 적어도 그 일을 위해 기도하며 소원하도록 하자. 숨을 쉴 때마다, 심장의 고동소리가 들릴 때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고난당하신 구속주는 자신의 백성이 천국을 위한 봉사에 전념하는 것을 자신의 대속 죽음으로 말미암은 위대한 결과로 여기셨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구속주의 노고에 따른 보답이다.
17절.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슬픔 가운데 처한 시편 기자는 자신의 곤경과 궁핍에 근거하여 또 다른 호소를 올림으로써 이 시편을 마감한다.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이 사실은 큰 시련에 처한 자의 거룩한 심령에 감미로운 위안을 제공해 주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신다는 것은 즐거운 묵상 주제이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배려는 항상 인자하고 끊임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을 버렸고 그분의 친구들도 그분을 잊었지만, 여호와께서는 결코 그분을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예수님은 잘 알고 계셨다. 곤경의 때에 그분을 지탱시켜준 것도 바로 이러한 사실이었다.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건지시는 자시라."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자 하는 그분의 확신은 흔들림이 없었다. 모든 신자들도, 심한 곤경에 부딪히며 빛이 가리워질 때, 하나님을 확고하게 의지하셨던, 위대한 사도이자 대제사장이신 주님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위험이 임박하고 심한 궁핍에 직면한 상태에서, 탄원자는 도움의 손길이 지체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사실상 그다지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왜냐하면 천사가 내려와서 힘을 북돋워 주었고, 예수께서는 대적에게 맞서기 위해 담대한 마음으로 일어나셨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 우리가 역경에 처할 때 주님처럼 고귀한 믿음을 지니게 하사 위대한 승리를 거두게 하소서.
[주해와 설명들]
시 40편 전체. "다윗의 시." 다윗의 이름이 다른 곳에서는 대체로 나중에 언급되지만 여기서는 앞에 놓여 있다. 이 머리말을, '다윗에 관한 시'로 바꾸어 볼 수도 있다. 선지서들에서는 '그리스도'를 가리켜 '다윗'이라 부르기도 한다(호 3:5; 렘 30:9; 겔 34:23, 37:24). 히브리서 기자가 가르치듯이(히 10:5, 6), 이 시편은 그리스도와 관련된 내용이다. -헨리 에인즈워스.
시 40편 전체. 6-8절을 히브리서 10:5과 비교해 보건대, 영감받은 시편 기자가 그리스도의 입장을 대변하여 말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1-5절에서는, 그분의 몸된 바 교회를 위해 이루어진 구원을 기념한다. 그분이 무덤으로부터 부활하사 그 구원을 완수하심으로써 그분의 지체들이 죄의 지체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6-8절에서는, 율법적인 희생 제사들만으로는 무익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고자 하는 결의를 보여 준다. 9, 10절은 세상에 의를 선포하고자 하는 결의를 보여 준다. 11-13절에서는, 그분이 시련 가운데서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고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간구하시는 모습을 묘사한다. 14, 15절에서 그분은 대적들의 혼란과 파멸을 예고하시며, 16절에서는 자신의 제자들과 종들이 기뻐하고 감사하게 될 것을 예고하신다. 17절은 이 모든 일들이 신속하게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내용이다. -조지 혼.
1절.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는 종의 기도를 그냥 내버려두사 그 응답을 지체시키시는 듯하며, 또한 그 종의 바람을 처음에는 이루어 주지 않으신다. 하지만 그분은 그 부르짖음을 다 듣고 계신다. 여호와께서 우리 기도의 효력을 지체시킨다 할지라도 그 기도를 다 듣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근거를 통해 알 수 있다. 과연 우리는 기도를 계속하고 있는가? 인내하는 가운데 무엇인가를 시종일관 간구할 힘이 우리에게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이 듣고 계심을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분이 우리 기도를 듣고 계심을 나타내는 확실한 논거이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우리는 조급해 하는 가운데 절망에 빠지기 마련이다. 우리의 조급함은 영적 문제에 있어 특히 심각하게 나타나는 까닭에, 간구를 계속할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가 간구를 계속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 힘이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된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또한 만일 우리가 그러한 힘을 지니고 있다면, 우리는 그분이 우리 기도를 듣고 계심을 알 수 있다. 만일 그분이 기도의 효력을 지체시키고 계실 뿐이라면, 우리의 기도는 계속된다. 이 교훈은 곤경에 처한 자에게 너무도 필수적인 까닭에, 나는 성경에 나오는 교훈들 중 우리의 조급함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가장 적절한 억제 수단이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를 지속적으로 인내하도록 붙드는 가장 적절한 방도이다. 만일 우리가 여호와께서 우리 기도를 모조리 거부하셨다고 생각한다면, 계속 기도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우리 기도를 듣고 계시되 다만 응답을 지체하고 계실 때, 우리는 인내하는 가운데 그분의 선하신 뜻을 따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로버트 브루스(Robert Bruce, 1559-1631).
1절.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문장 첫머리에 위치한 부정형 "카와"(hwq)는 강조의 뜻을 나타낸다. 기다림을 이처럼 강조한 것은 '권고'의 의미를 시사한다. 즉, 그것은 시련에 처한 자들에게 모든 것이 '참고 기다리는 데' 달려 있음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헹스텐버그.
1절.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원문상으로는, '기다림을 기다렸다'는 뜻이다. 이는 열렬한 갈망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다니엘 크레스웰.
1절. "기다리고." 구주께서는, 인내와 두터운 신앙심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기다리는 마음으로 시련을 견디셨다. 그분은 "여호와를 기다리셨다." 그분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는 도움을 기대하셨다. 또한 그분은 그 도움이 임하기까지 줄곧 기다리셨다. -제임스 프레임(James Frame, Christ and his Work:an Exposition of Psalm ⅩL, 1869).
1절.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우리 구주께서는 인내로써뿐만 아니라 두터운 신앙심으로써 시련을 견디셨다. -제임스 프레임.
2절. "기가 막힐 웅덩이." 성경에 웅덩이로 언급된 것들 중 몇몇은 감옥을 가리킨다. 나는 이러한 감옥을 아테네와 로마에서 본 적이 있다. 이런 감옥에는 창문이 전혀 없었고, 천정에 뚫린 조그마한 구멍 하나가 문과 창문의 구실을 했다. 이 웅덩이의 바닥은 더럽고 혐오스러운 상태였으며, 때로는 진흙이 두텁게 깔려 있기도 했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시편 기자의 눈에 비친 이 더러운 감옥들 중의 하나를 가리켜, 이사야 38:17에서는 "멸망의 구덩이" 혹은 '부패하고 더러운 구덩이'라고 표현했다. -존 개즈비.
2절. "기가 막힐 웅덩이." 히브리어 원문상으로는, "요란한 웅덩이"이다. "요란한 웅덩이"라는 표현은, 무시무시한 소음을 발하며 격렬하게 흘러드는 물소리를, 혹은 그 웅덩이 속에서 서로 싸우며 고함치는 모습을 암시한다. 혹은 깊은 웅덩이 속에 던져 넣어진 무엇인가가 큰 소음을 내며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그 웅덩이 속의 "수렁"에 빠지면 빠져나올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혹자는 이를, 그리스도의 고통과 시련이 얼마나 큰지를, 이 둘로부터의 구원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암시하는 내용이라고 보기도 한다. -아서 잭슨.
2절. 본절에는 세 가지 사항이 언급되어 있다. 첫째, 하나님의 사역으로서의 부활이 언급된다:"끌어올리시고." 둘째, 시련당하시는 분의 이름과 역할이 변호된다:"내 발을 반석 위에서 끌어올리시고." 셋째, 그분의 승천이 언급된다:"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자신을 포기하는 은혜로운 순종 가운데 무덤을 향해 걸어가셨던 하나님의 아들이, 이제 마침내 생명의 길로 들어서신다. 그분은 하늘로 올리우셨다(행 1:11). 또한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엡 4:8). -아서 프릿햄(Arthur Pridham, Notes and Reflections on the Psalms, 1869).
3절. "새 노래." 시편 33:3 강해를 참조하라.
3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두려워하여"와 "의지하리로다"는 말은 얼핏 보기에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듯하다. 하지만 다윗은 이들을 서로 부조화스럽게 결합시킨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은총을 소망하거나 의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두려움'이라는 말을 대개 경외심을 가리키는 의미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권능과 공평하심 그리고 그분의 자비 등을 깨달을 때 이러한 경외심이 우리 마음속에 생긴다. -존 칼빈.
3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은 "본다." 그들의 눈이 열린다. 그리고 그들의 열린 눈은,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어디에 있는지를, 또한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지를 보고 파악하게 된다······죄인들이 예수님의 화목 사역에 진정으로 관심을 기울일 때, 여러 가지 윤리적 관계들에 대해 그들의 눈이 열리며, 또한 그들은 그것들을 "볼" 뿐만 아니라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들은 "보고" "두려워한다"······깨달음에 이어 확신이 뒤따른다. 하지만 죄인이 단지 보고 두려워하기만 하는 동안에는, 그는 회심의 시작 단계에 들어서 있을 뿐이며 멸망의 도시로부터 달아날 채비를 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가 순례 여정을 떠났을 수는 있지만, 아직 아버지께 도착하지는 못했고 환영과 용서의 입맞춤을 받지는 못했다. 마지막 완료의 발걸음을 아직 내딛지는 못했다. 사실 그는 보았고 또한 두려워했다. 하지만 아직도 그는 여호와를 의지하여 두려움을 몰아낼 필요가 있다. 이 단계가 바로 위대한 전환에 있어서의 절정에 해당한다. 만일 이러한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다른 경험들은 때 아니게 피어난 꽃처럼 사그라들거나 혹은 꺼지지 않는 불에다 기름을 붓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 -제임스 프레임.
5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하나님의 손으로 행하신 사역에서 드러나는 그 장엄함과 지혜를 보라. 이 거대한 우주를 보더라도,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하다. 얼마나 놀라운 솜씨와 계획이 깃들어 있는가! 그분의 모든 소산물들이나 우리 자신의 몸의 구조 혹은 우리 주변의 사물들을 보면, 그 규칙성과 조화와 균형에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다. 일월성신의 영광스러운 광채는 그것들을 지으신 분의 지혜가 얼마나 존엄하고 놀라운지를 선포하지 않는가! 또한 온 세상에 무수히 널려 있는 이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호기심 많은 우리의 생각을 만물의 위대한 조물주께로 이끌어 올리지 않는가? 또한 그것들을 볼 때, 그 모든 것들과 족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히 밝고 아름다우신 그분께 대한 사랑의 불꽃이 우리 영혼 속에 지펴지지 않겠는가?
눈을 들어 여러 민족들을 두루 살펴보고, 그분이 행하신 위대한 사역들을 생각해 보라. 그분의 섭리 가운데 드러나는 지혜와 권능은 그대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을 것이다. 그분의 탄복할 만한 인내에 주목하라. 완고한 반역자들에게 어떠한 긍휼을 베푸시는지 보라. 피 속까지 더럽혀진 채 파멸을 향해 나아가는 그분의 피조물들을 보실 때 그분은 그들을 얼마나 불쌍히 여기시는가! 얼마나 오래도록 참고 자비를 베푸시는가! 죄인들을 포기하거나 대적들에게 합당한 보응을 실행하시기를 그 얼마나 마지못해 하시는가! 또한 풍족한 구속의 은총으로 죄를 사하실 때, 그분은 얼마나 기뻐하시는가! 이보다 더 그대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어디 있겠으며, 달리 무엇을 이보다 더 고귀하게 여기겠는가? 그대 주위의 모든 대상이 그분을 사랑하게 만드는 논거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대가 권능의 궁창에 계신 하나님을 보든지 아니면 은혜의 성소에 계신 하나님을 보든지간에,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아 5:16)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윌리엄 던롭.
5절.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주의 생각을 일일이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록 사람들이 그것을 깨닫는 듯이 보일 때도 있지만, 그분의 영광은 측량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 있는 까닭에 사람들의 그러한 노력이 모조리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빅토리누스 바이스너(Victorinus Bythner, Lyre of David).
5절. "우리를 향하신." 우리 주님이 여호와를 가리켜 '내 아버지' 혹은 '내 하나님'이라고 칭하시면서도 사람들을 자신의 동료로 간주하신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를 향하신"이라는 표현 속에도 그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그분은 자신을 사람들과 가장 밀접하게 결부된 존재로 여기셨다. -제임스 프레임.
5절.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 자체는 질서정연하지만, 그 순서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그것을 다 헤아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피조된 인생으로서는 그 순서와 관련된 원리를 파악할 수 없지만, 그러한 원리는 분명 존재한다. 또한 우리가 서로 연관된 모든 과정들을 더 많이 연구하면 할수록, 그리스도의 중재 사역을 위한 준비와 그 사역의 실현 단계들 그리고 그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도록 지정된 모든 결과 등이 아무런 착오도 없이 철저한 순서에 따라 진행되었음을 우리는 더욱더 확신하게 될 것이다. 그것들은 정해진 때와 장소에 정확히 맞추어 진행된다. -제임스 프레임.
5절.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한 것이다. 다윗은 인간의 그 어떤 계산법으로도 그분의 생각을 헤아릴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가히 측량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윗으로서는 자신을 향하신 그분의 생각과 그 놀라운 행사들을 감히 헤아릴 수 없었고 그 체계를 파악할 수도 없었다. -사무엘 리(The Triumph of Mercy in the Chariot of Praise, 1652-1691).
5절. 이 시편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는 내용이며, 본절 역시 마찬가지이다. 특히 본절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원 전부터 결심하신 목적 및 계획과 연관된 것이며, 그분의 계획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사 우리를 위해 죽음을 당하게 하시는 일로 이어진다(6, 7절). 그분의 생각과 계획들이 처음에는 단일한 개별적인 사항으로서 그리고 결코 변경되지 않을 사항으로서 언급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확고한 의지를 밝히시는 가운데 같은 사항들을 거듭 반복하심으로써 그것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내 형제들아, 만일 하나님이 당신께 속한 자들에게 은총을 베풀 생각을 영원 전부터 지니고 계셨다면, 지금까지 그러한 생각을 얼마나 많이 해오셨겠는가! 그분은 매순간마다 거듭하여 그렇게 생각해 오셨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이것 역시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시 40편은 그리스도의 시편이며 히브리서 10장에서 그리스도께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인성을 지니신 분으로서 우리 인생들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는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를 위한 은총을 영원 전부터 연구해 오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아침마다 은총을 새롭게 하신다. 이는 곧, 그 은총들이 한결같이 새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동일한 은총이라도 거듭하여 새롭게 생각하신다는 뜻이다. 그분은 당신의 보고로부터 이전부터 간직하신 은총과 새로운 은총을 꺼내시며, 이전 것도 항상 새롭게 만드신다. 그렇다면 그 은총들의 양이 얼마나 엄청나겠는가! -토머스 굿윈(Thomas Goodwin).
6절.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문자적 번역은, "주께서 내 귀를 뚫으셨나이다"로서, '주께서 나를 주의 종으로 받아들이셨나이다'는 뜻으로 해석되어도 무방하다. 이는, 자유롭게 될 수 있는 기회를 거부한 종을 다시 받아들이는 표시로서 주인이 그 종의 귀를 뚫었던 고대의 관습을 암시한다(출 21:6). -다니엘 크레스웰.
6절. 존 칼빈은, "주께서 내 귀를 뚫으셨나이다"라는 해석과 관련하여 이르기를, "이러한 해석 양식은 너무 무리하다는 느낌을 준다"고 했다.
6절.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히브리서 기자가 본문을 다르게 번역했다는 견해가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런 것 같지 않다. 그가 당시 통용되었던 칠십인역에 수록된, 변형된 번역에 기초한 것은 사실이다('귀'를 뜻하는 wjtiva가 '몸'이라는 뜻인 sw'ma로 바뀌었다). 또한 그는, 그 본문을 변형시켜 잘못 인용하면 징벌을 받는다는 생각에서, 칠십인역에 나오는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칠십인역을 그대로 옮겼으며, 그렇게 하면서도 자신의 논거를 충분히 잘 전달할 수 있었다. 칠십인역에 근거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10:9에서 "그 첫 것(율법적인 제사들)을 폐하심은 둘째 것(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을 세우려 하심이니라"고 주장한다. 이는 곧,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인류의 죄를 속하기 위한 희생 제물로 드리심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다는 의미이다. -그린(Green, 버더의 "Scripture Expositor"에서 인용됨).
6절. 히브리서 기자의 독법(히 10:5)은 칠십인역으로부터 인용한 것으로서 히브리어 원문과는 매우 거리가 멀지만, 그 의미를 가장 명쾌하게 해석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몸'은 그분의 '귀'까지 포함하는 말이며, 하나님의 뜻에 완벽하게 순종하신 사실을 강조한다. 그분은 죽기까지 순종하신 신실한 제사장이시다. -헨리 해먼드.
6절.
희생 제사로도 주의 사랑을 얻을 수 없으며,
혐오스러운 인생으로서는 그 어떤 예물로도
죄의 얼룩을 지우지 못할 것이다.
내 귀를 열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를 지으신 주의 손,
곧, 못자국난 주의 손뿐이다.
-제임스 메리크(James Merrick, M.A., 1720-1769).
6절. "제사와 예물······번제와 속죄제." 시편 기자는 여기서 네 가지 용어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히브리서 기자가 언급한 내용과 동일하다. "제사"(jbz, qusia), "예물"(hjnm, prsfora), "번제"(hlw[, olokautwma), 그리고 "속죄제"(hafj, periamartia") 등. 이 모두와 관련하여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와 마찬가지로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히 10:4)고 말할 수 있다. -아담 클라크.
6, 7절. 이 내용은, 영속적인 종이 되고자 하는 자들의 귀를 뚫거나 그 이름을 명부에 올리거나 혹은 언약 문서를 작성했던 유대인들의 관습을 암시한다.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지만 그는 주의 종이 되기로 서원한 까닭에, 주께서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고 주의 책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주시기를 원했다. 이 본문은 사도 바울이 히브리서 10장에서 진술한 내용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편과 히브리서에 각각 수록된 내용들은 그 서두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히브리어 본문에 의하면, 시편 기자는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이라고 언급하였다. 반면에 바울은, 칠십인역을 그대로 옮겼다:"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히 10:5). 이 두 본문은 그 의미에 있어서 어떤 면에서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가? 대부분의 주해가들이 두 본문상의 차이에 중요한 비중을 두기 때문에, 더 많은 어려움을 야기시킨다. 즉,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 구주의 성육신을 증거하기 위해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다"고 굳이 다르게 번역했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에, 히브리어 원문상의 시편 본문("주께서 내 귀를 뚫으셨나이다")은 전혀 적절하지 못한 표현으로 간주되고 만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서로 차이가 나는 단어들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며 또 그럴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은 히브리인들이었고, 애당초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으며, 또한 굳이 칠십인역에서 옮길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히브리서에서의 인용이 히브리어 원문과의 차이점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나는 이 사실을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 인용은 아무런 차이점도 보이지는 않는 단어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그 인용의 초점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적인 예물이나 제사로써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헌신적인 종으로서의 순종을 통해 우리를 성결케 하기 위해 오신 대제사장이시라는 데 있다. 따라서 서로 일치하는 내용에 초점을 맞출 때, 우리는 두 본문을 적절하게 조화시킬 수가 있다. 시편 기자는 "주께서 내 귀를 뚫으셨나이다"라고 말했다. 즉, 주께서 그를 평생 섬기는 종으로 받아들이사, 율법에 따라 그 귀를 뚫으셨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러한 관습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를 고려하여 칠십인역에는 "내 몸을 적절하게 만드셨다"라고 번역되었을 것이다. 즉, 종들에게 걸맞게 그 몸에 행하는 방식을 따라 주의 종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송곳으로 귀를 뚫는 유대적 관습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되 종의 몸에 표시를 하거나 낙인을 찍는 것과 같이 어느 민족에게나 차별 없이 적용될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조셉 메데(Joseph Mede, B.D., 1586-1638).
6-10절.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지침을 찾으며 (그분의 모형인) 다윗에게서 우리의 본보기를 찾을 수 있다. (1) 순종이라고 하는 확고한 목표:귀를 뚫고 마음을 복종시키는 모습 속에서. (2) 흔쾌히 실행으로 옮김:"내가 왔나이다." (3) 기록된 말씀을 주의깊게 지킴:"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7절). (4)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함(8절). (5)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공적으로 선포하고 다른 이들에게 전함(9, 10절). 우리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거하기 위해, 그리고 그분이 행하시는 대로 행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요일 2:6). 마치 사본이 원문과 흡사하듯이, 우리의 삶은 어떤 의미에서 그분의 삶과 흡사해야 한다. 그분은 우리에게 본을 끼쳐 우리로 하여금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다(벧전 2:21). -존 트랩.
7절. "그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그분의 이름이 다른 모든 이름들보다 높듯이, 그분의 오심도 그러하다. 때때로 우리는 자신의 출생을 가리켜 '세상에 왔다'는 식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그분 이외에는 그 누구도 세상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 이유인즉 다음과 같다. (1) 오시기 전부터 존재하셨던 그분께만, '오신다'는 표현을 진정으로 사용할 수 있다. 우리는 그렇지 않다. (2) 엄밀히 말해서, 그분만이 기꺼이 오신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날 때 울면서 몸부림쳤다. "내가 왔나이다"라고 외칠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분이다. (3) 다른 어떤 곳으로부터 오시는 분께만, '오신다'는 표현을 쓸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어떤 곳에서 온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자궁에서 생겨났다. 반면에 그분은 세상에 오시기 전에 다른 곳에 이미 계셨다. -마크 프랭크(Mark Frank).
7절. "그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즉, 속전을 지불하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다. 본문에는 몇 가지 강조적인 표현들이 나온다. (1) 때가 강조됨:"그때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분의 몸을 그런 목적을 위해 예비하셨음을 깨닫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신속하게. 이는 자발성과 신속함을 시사한다. 그분은 그 어떤 기회도 놓치지 않으셨다. (2) 담대한 선언이 강조됨:"내가 말하기를." 그분은 수치스러워하듯 은밀하게 혹은 소심하게 행하신 것이 아니라 앞장 서서 담대히 선언하셨다. (3) 주의를 환기시킨 사실이 강조됨:"보라"(KJV 직역. 한글 개역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표현임-역자 주). 이는 천사들과 사람들을 증인으로 부르는 듯한 느낌을 주는 말이며, 자기 마음의 의도와 성향을 모든 증인들이 알게 되기를 바라시는 듯한 말이다. (4) 그 어떤 강요도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바친다는 사실이 강조됨:"내가 왔나이다." (5) 현재적 결단이 강조됨:"내가 왔나이다"는 원문상 현재 시제이다. 그분은 불명확한 미래 시점으로 연기시킨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순간에 "내가 왔나이다"라고 말씀하셨다. (6) 1인칭 대명사가 두 차례 반복 강조됨:"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그분은 다른 어떤 존재를 대신 보내신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이 친히 오셨다. 이 모두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자 하신 그리스도의 독특한 자발성과 신속성을 보여 주는 충분한 증거가 된다. 그분은 우리 죄로 인해 시련을 당하고 희생 제물이 되면서까지 자발적이고도 신속하게 순종하셨다. -토머스 브룩스.
7절. "내가 왔나이다." 즉, 앞에 나타났다는 뜻이다. 이는 아랫사람이 윗사람 앞으로 혹은 종이 주인 앞으로 나아옴을 나타낼 때 사용된 것으로서(민 22:38; 삼하 19:20),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는 표현과 유사하다. -스튜어트 퍼론.
7절. "내가 왔나이다." 그리스도의 영적 도래는 '즐거운' 도래이다. "내가 왔나이다"는 다음과 같은 기쁨을 표현하고 있다. (1) 현재적 기쁨. (2) 확실한 기쁨:"보라"(KJV 직역-역자 주)는 확실성을 시사한다. 그 일은 확실하고 참되며, 그분의 기쁨도 확실하다. 확실하고 참되며 또한 든든한 기쁨이다. (3) 함께 나누는 기쁨.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서 지니신 기쁨은 충만한 기쁨이며, 자기 백성과 더불어 나누기 위해 마련하신 기쁨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요, 기쁨 위에 기쁨이다. 그리스도 안에는 은혜와 기쁨이 충만하다. (4) 엄숙한 기쁨. 그분은 엄숙하게 임하신다. 영광스러우신 삼위일체의 의논에 따라 "내가 왔나이다." 이제 천상의 목적이 드러나고 때가 참에 따라, 그분은 자신의 엄숙한 임무 수행에 대한 증인으로서 하늘과 땅을 불러 세우신다. 또한 "내가 왔나이다"라고 외침으로써 모든 사람들과 천사들로 하여금 주목하게 하신다. 실제로, 이 엄숙한 순간에 천사들은 기쁜 찬양의 노래를 불렀다. 그분이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천사들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노래했다(눅 2:14). -랠프 어스킨(Ralph Erskine, 1685-1752).
7절. "내가 왔나이다." 자신을 속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 주시기 위해, 세상에(히 10:5), 특히 예루살렘에 오셨다는 뜻이다. -헨리 에인즈워스.
7절. "두루마리 책." 이는 어떤 두루마리 사본을 가리키는가? 시편 기자 당시에 이미 현존하였던 것을 가리킴에 분명하다. 만일 (머리말에서 분명히 밝혀져 있듯이) 이 시편의 기자가 다윗이라면, 당시 현존했던 히브리어 성경은 모세 오경과 여호수아서였을 것이다. 특히 여기서 그가 언급한 "므길라 세페르"(rps hlgm)는 모세 오경을 가리킴에 분명하다······아마도 시편 기자는, 그리스도를 통한 위대한 속죄제의 상징(skiai 또는 parabolai)에 불과한 제사 예법을 규정하고 있는 '모세 율법' 자체가 레위기적 의식들보다 더 차원 높고 나은 그 무엇을 대망하도록 가르쳤다는 사실을 지적하였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메시아를 지향하였다. -모제스 스튜어트(Moses Stuart, M.A., A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Hebrews, 1851).
7절. "두루마리 책." 로마서 5:14을 위시한 신약성경의 다른 몇몇 구절들은 첫째 아담을 둘째 아담의 모형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둘째 아담의 그림자 역할을 했던 그 모형의 신비에 감탄을 토로하며, 에베소서 5:32에서는 "이 비밀이 크도다"라고 외치면서 아담과 하와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적용시킨다. 이런 사실을 고려할 때, 나는 히브리서 10:7을 시편 40:7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에 대해 더욱더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사실, 예전에 나는 이를 난외주 정도로 여겨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히브리서 본문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지니고 "세상에 임하실 때에"(히 10:5), 그분은 "하나님의 책 서두"에 기록된 성경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 그렇게 하셨다고 한다. "엔 케팔리오이 비블리온"(ejn kefalioi Biblion)이라는 헬라어를 KJV는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되어 있다"로 번역했다. 따라서, 히브리서 본문이 인용한 시 40편에 나오는 표현은, 하나님의 책(고대의 책이란, 한 권으로 접을 수 있도록 만든 양피지 두루마리를 의미했다) 어디에나 그리스도께서 언급되고 있다는 의미를 나타낼 뿐이다. 그러나 사도가 칠십인역에서 취한 "케팔리스"(kefali")라는 단어는, 주지하다시피 책의 서두를 의미한다. 또한 우리는 에베소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이 그러한 의미를 강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창세기 서두에 나오는 아담의 이야기를 그리스도에 관한 위대한 비밀을 담은 내용으로 언급하면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이는 성령께서 그러한 표현을 통해 모세 오경 중 첫번째 책 서두에 나오는 아담의 이야기를 상기시키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히브리서 10장 역시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으로 인성을 지니고 오셨던 이유를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그 이유인즉, 하나님이 희생 제물과 번제(이들은 인간의 타락 후에 죄로 말미암아 도입된 것으로서 죄를 없애지는 못한다)를 좋아하지 않으셨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창세기 서두에 나오는 타락 이전의 아담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이미 예고된 바이기 때문이다. -토머스 굿윈.
8절.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성육신과 죽음을 통해 죄인들을 구속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을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기뻐하셨다. 그분이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낙을 누리고 계신 동안에도, 구속 사역을 내다보면서 즐거워하셨다.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었느니라"(잠 8:31). 또한 그분이 세상에 오셔서 수많은 모욕과 조롱을 감내하셨으며, 가장 힘든 고난을 눈앞에 두고서도 "나의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 12:50)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두 가지 사항이 있다.
첫째, 그렇게 하셔야 했던 목적. (1)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수행하신 목적은, 자신의 죽음에 희생 제물로서의 의의와 특성을 부여하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희생 제물을 바치는 자의 의지를 중요시하신다(출 35:5, 21; 레 1:3). (2)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과 일치시키시기 위함이었다. (3)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그 깊고 큰 사랑을 드러내시기 위함이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죽음을 당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것 자체가 가장 중요한 사실이지만, 그분이 우리 영혼을 사랑하사 모든 시련을 기꺼이 담당하셨다는 것은 그 의의를 훨씬 더 높여 준다. (4)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본을 따라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이 위대한 순종의 모범을 늘 명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어떤 의무를 감당하든지 또 그 어떤 시련에 직면하든지간에 불평과 불만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사 가련한 죄인들을 위해 죽음을 당하시는 것을 그토록 기뻐하셨던 이유. (1) 그분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속성들이 밝히 드러날 것이었기 때문이다. (2) 그분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택함받은 모든 성도들이 회복되고 구원을 받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분의 고난은 너무도 쓰라렸지만, 그 고난의 결실은 참으로 감미로운 것이었다. (3) 그 구속의 은총을 입은 자들로부터 영원토록 영광을 받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천국에서 구속주께 영원토록 영광과 찬양과 영예를 돌리는 것을 의무와 낙으로 삼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굴욕과 고통과 고난과 죽음을 당하기를 기뻐하셨는데도, 과연 우리가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또한 그분과 친교를 나누는 등의 소중한 일을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분이 우리를 위해 오사 죽음을 당하시기를 그토록 기뻐하셨는데도, 과연 우리가 그분과의 친교를 누리기 위해 기도하고 성례를 거행하는 일에 무감각해질 수 있겠는가? 그분이 우리를 위해 피흘리기를 기뻐하셨는데도, 과연 우리가 그 피의 공효를 자신에게 적용하여 유익을 얻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겠는가? 더 이상 불평이나 게으른 변명이나 직무 유기나 혹은 무감각하고 부주의한 태도에 사로잡히지 말자. 주님의 본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기꺼이 행하며, 시련도 기꺼이 참아내자.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품을 떠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꺼이 세상에 오사 죽음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비통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분과 비교할 때, 우리가 잃거나 버려야 하는 것들이란 미미하기 그지없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비할 때 우리의 고난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분의 고난 한 방울이 우리의 고난 전부를 합친 것보다 더 쓰라렸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순종의 길을 얼마나 기뻐하며 기꺼이 걸어가느냐 하는 것은 성화의 정도를 가늠하는 잣대가 된다. -존 플라벨의 글에서 인용함.
8절. 그리스도는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라고 말씀하셨다. 잃어버린 죄인들을 찾아 구원하는 일이 그분의 기쁨이요 즐거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배고플 때에 음식을 제공하는 집으로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성전으로 가셨고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가르치는 데 할애하셨다. 그분은 죄인들을 구원하는 일을 너무도 기뻐하셨다. 요한복음 4장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사마리아인들을 회심시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일을 너무도 기뻐하셨고 또 그 일에 너무도 마음을 집중시킨 나머지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셨다. -토머스 브룩스.
8절. "주의 뜻." 성부와 성자의 언약은, 히브리서 10:7 속에 인용된 시편 40:7, 8에서 매우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뜻이 무엇인가? 히브리서 10:10은,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고 전한다. 하나님의 뜻인즉, 예수께서 자신을 드림으로써 우리에게 거룩함과 구원을 베푸시는 것이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이라고 표현된 것으로서,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신(히 10:5) 데 따른 응답이었다. 한편 여기서 '몸'이란 인성을 나타내는 제유법적 표현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나의 뜻은, 네 몸을 드림으로써 택함받은 자녀들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에 대해 아들은 "주의 뜻을 행하기 위해 내가 왔나이다"(즉, "내가 그 조건을 받아들이며, 주의 뜻을 완수하기 위해 나 자신을 버리나이다")라고 대답하신다. -존 오웬.
8절. "행하기를." 그 일을 행하신 분은 예수님이다.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그 일을 완수하신 분은, 또한 그렇게 하여 그것을 하나님 아버지의 발 앞에 향기로운 예물로 올리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 사역이 완수되었다. 우리가 그 일을 행하려고 시도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 일을 행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이루어진 그 일을 행할 수 없다. 설령 그 일이 아직 완수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할 수 없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도 많지만,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드는 일을 하지는 못한다. -제임스 프레임.
8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책 속에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 담아 두어야 하며, 그리하여 그 내용을 올바로 이해하여 그대로 지켜야 한다. -마틴 가이어.
8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그리스도께서 기쁘게 여기신 하나님의 뜻이란 (히브리서 10:5에서도 언급되어 있듯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혼을 속죄 제물로 드리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다른 모든 번제와 속죄제들보다 그것을 더욱 귀하게 여기신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리스도의 "심중에" 있었다. "심중에"("베토크 메아," [m ^wtb)란 '내장 속에'라는 뜻이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등 자연적인 본성에 따라 행동할 때 기쁘듯이, 그분은 주의 법을 기뻐했다. 그분은 그 점을,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고 표현하신다. 우리가 배고플 때 음식을 먹듯이 그분은 우리를 위해 기꺼이 피흘리며 죽음을 당하셨다. 마치 우리가 가장 맛있는 고기를 먹으며 기뻐하듯이, 그분은 모욕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리시기를 기뻐하셨다. -데이비드 클락슨.
8절. "나의 심중에." KJV 난외주에서는 "나의 내장 속에"라고 덧붙인다. 여기서 내장 혹은 창자는 가장 깊은 영적 좌소로 언급된 것이다. -프란츠 델리취.
9절. "내가······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나이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가리켜 설교자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위대한 설교자이셨다. 그분은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위대한 설교자이셨다. (1) '진실한 웅변'에 있어서. 그분은 가장 탁월한 수사법으로 말씀하셨고, 가는 곳곳마다 청중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다. (2) '지식'에 있어서. 언어 구사력이 뛰어나고 탁월한 수사 기교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 중에는, '지식의 결핍'으로 인해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자들이 많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나는 대로 말하거나 아직 정리되지도 않은 생각을 막무가내로 피력함으로써 실수를 범하고 만다. (3) '선하심'에 있어. 선함이란 위대한 것이며, 위대한 설교자를 가늠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4) '직무상의 신분'에 있어. 세속 직무이든 성직이든간에 그것을 주관할 자격을 갖춘 자에게 합당한 신분이 주어지면, 그는 윤리적인 권위와 무게를 갖게 된다. 예수님은 우주에서 가장 높은 직무를 맡으신 분이다. 그분의 권위는 다른 모든 직분자들에게까지 미치며, 그분의 직무는 다른 모든 직무들을 능가한다. 그분은 위로부터 오셨고 '만물 위에' 계셨다. 그분은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이셨다. (5) '본질적 위엄'에 있어. 그분은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이셨다. 그리스도는 바로 이러한 설교자이셨다. 사실 그분은 설교자 그 이상이셨다. 그분은 귀감이요 제사장이요 또한 화해자이셨다. 그분은, 귀감과 제사장과 화해자로서 다른 그 누구와도 비길 수 없다. 또한 이제껏 그분께 필적할 설교자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제임스 프레임의 글에서 요약함.
9절. "대회 중에서." 여기서 "대회"(큰 회중)라는 표현은, 단지 수효가 많았다는 것뿐만 아니라 구성원들 개개인의 궁핍함과 타락 상태가 컸음도 나타낸다. -제임스 프레임.
9, 10절. "내가······전하였나이다······내 입술을 닫지 아니할 줄을······숨기지 아니하고······선포하였으며····ㄱㅐ뵌靈?아니하였나이다." 감사의 뜻을 표하지 않고 견딜 수 없는 불타는 심정을 나타내는 표현들이다. 그 삶 자체가 곧 감사였던 분을 이처럼 잘 묘사한 내용도 없을 것이다. -스튜어트 퍼론.
9, 10절. 이신칭의라는 방식은, 가련한 영혼들을 위해 너무도 소중하고 필수적인 보석이어서 숨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내가 주의 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이 주제를 단 한 편의 설교만으로 표현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워지고 또한 고난받으신 중보자와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간의 언약에 따라 구원을 얻는다는 이 신비는, 자명하게 드러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데이비드 딕슨.
9, 10절. "주의." 매번 이 표현을 덧붙인 것은 강조를 위함이다:내가 전하고자 한 것은 주의 의이며, 내가 선포하려는 것은 주의 성실이며, 내가 공표하고자 한 것은 주의 인자입니다. 주께서는 내가 행한 모든 일들에 대해 나 자신처럼 관심을 기울이셨습니다. 만일 내가 말한 대로 모든 일들이 성취되지 않는다면, 나는 거짓말쟁이로 간주될 것이며, 주께서는 불의하고 잔인한 분으로 여겨지실 것입니다. 나는 주의 규례를 지켰고 주의 영광을 추구했으므로, 주의 권위로 선포한 나의 말을 믿는 탄원자의 간구를 거부하지 마소서. 만일 그것을 거부하신다면 주님 자신과 나에게 불명예가 될 것입니다. -스티븐 차녹.
10절. "숨기지 아니하고."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그것을 숨기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 복음은 큰 다툼과 핍박 가운데 전파되기 때문이다. -매튜 헨리.
10절. "숨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혹은 교회를 위해 행하신 일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되 그것을 마음속에 넣고 잠가버려서는 안 된다. -칼 번하드 몰(Carl Bernhard Moll, Lange's Bibelwerk, 1869).
11절. "주의 긍휼을 내게 그치지 마시고." 주의 긍휼이 내게 가득 임하는 것을 막지 마소서.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혹은, 주께서 나를 보호하시되 주의 인자와 진리로 보호하소서. -조반니 디오다티.
12절.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우리의 죄악 된 삶을 말할 때 우리는 당황을 금치 못한다. 사려깊은 사람이라면 어느 하루 동안 자신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짓는지를, 그리고 자신의 한 가지 행동이 얼마나 많은 죄악들을 수반하는지를 알게 될 때 놀랄 수밖에 없다. 또한 단 한 가지 신앙적 의무만 생각해 보더라도 자신이 얼마나 허물 투성이인지 알 것이다. 당신이 금지된 어떤 일을 행할 때마다, 여러분은 그 시점에서 이행해야 할 의무를 기피한 셈이다. 그리고 당신이 지시된 일을 간과할 때마다, 그 부작위의 죄는 금지된 그 무엇을 행하는 일과 결부된다. 따라서 죄란, 그것이 작위이든 부작위이든간에, 항상 갑절로 범하게 되는 것이다. 야고보서는,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라고 지적한다(약 2:10). 율법적 의미에 비추어 우리 눈에 하나로 보이는 것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열 배로 늘어난다. 한 가지 죄를 직접적으로 범하는 자는 모든 명령을 깨트리는 셈이며, 한 번에 열 차례 죄를 범한 셈이다. 게다가 우리의 모든 행동을 둘러싼 죄악된 환경들은 먼지 많은 방에 떠도는 원자 입자들의 수효만큼이나 많다. 심지어 자신의 신앙적 의무를 가장 잘 이행한 사례를 놓고 보더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엄청난 죄악들을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당신이 하나님께 드린 최선의 기도 속에서도 불경스러움, 미온적인 자세, 불신, 영적 자만, 자아 추구, 위선, 왜곡 등이 깃들어 있는 까닭에, 각성된 시각으로 이 사실을 깨달으면 슬픔과 비통함을 금할 길이 없다. 더욱이 하나님의 순전하신 눈은 그 어떤 인간의 눈으로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죄악까지도 간파하신다. -데이비드 클락슨.
12절.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죄악을 범한 자는 그 죄악에 따른 징벌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제임스 프레임.
13절. 본절 이하는 시 70편과 거의 일치한다.
14절. "다 수치와 낭패를 당케 하시며." 심지어 이 기도 속에도 자비가 깃들어 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는 내용으로서 반역적인 팔을 무력화시키고 반역적인 마음을 위압하는 영광스럽고도 신성한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만일 악인들 각자의 팔이 잠시 동안 무력해지고 각자의 심령이 잠시 동안 낙담에 빠진다면, 그들 내면에서 보다 건전한 성품이 일어나 자신의 사악한 계교를 억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기도 속에 그처럼 자비로운 목적이 담겨 있다면, 우리는 이를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간구와 같은 맥락에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 말씀이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다는 사실과 그분이 반역의 무리에게 "내가 그로라"고 말씀하시자마자 그들이 뒤로 물러나 땅에 엎드러졌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놀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제임스 프레임.
15절. "하하." 시편에 세 차례 등장하는 감탄사이다. 각 경우 모두는 그리스도의 시련을 조롱하는 말을 암시하는 듯하다. 시편 35:21과 70:3을 보라. 이 시편들의 기록 시기는 40편의 기록 시기와 같은 것 같다. -크리스토퍼 워즈워스.
16절. "무릇 주를 찾는 자는 다 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모든 신자들에게 한결같이 임하는 은총들은, 하나님이 어려움에 처한 모든 신자들에게 동일한 은총을 베푸시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증거해 준다. 따라서 신자들 중 어느 한 사람에게 은총이 임한 것을 나머지 신자들이 알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을 드높일 기회를 얻은 셈이다. -데이비드 딕슨.
16절.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구원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나 구주 혹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마틴 가이어.
16절.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혹자는,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사랑하게 하는 것은 자기애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주를 기뻐하는 자는 그 구원이 하나님의 것이기에 그것을 사랑한다. 구원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은 거룩한 성도의 특성에 해당한다. 그는 자기 자신의 구원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그 자체를 사랑한다. -토머스 굿윈.
16절.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우리에게 행복해질 수 있는 역량과 말할 수 있는 역량을 주셨던 예수님은, 행복한 자라면 과연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도 알려 주셨다. 그분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들이 즐겁고 기쁠 때에 "여호와는 광대하시다"라고 찬양하게 되기를 기도하셨다. 그분은 그들이 자신의 거룩한 행복을 말하기를 바라셨고, 그들이 그것을 말할 때 여호와를 찬양하는 표현을 사용하기를 원하셨다. 왜냐하면 행복의 근원이 바로 여호와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그들이 지속적으로 "여호와는 광대하시다"라고 말하기를 원하셨다. -제임스 프레임.
17절. 맬런(Caesar Malan, 1787-1864) 박사의 회고록에는, 그의 아들들 중 한 명이 그 형제 조셀린(Jocelyn)과 관련하여 격렬한 육체적 고난이라는 주제를 다룬 내용이 나온다:"그의 한 가지 특성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뜻을 경외했다는 점이다. 어느 날 어머니가,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건지시는 자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시 40:17)라는 시편 구절을 반복해서 들려 주고 있었다. 그러자 그는 말하기를, '어머니, 그 구절을 사랑하지만 맨 마지막 부분만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 불평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분은 결코 지체하시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The Life, Labours, and Writings of Caesar Malan(그의 아들들 중 한 사람이 지음, 1869).
17절.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성경에는, 아브라함에 대한 아비멜렉의 친절, 야곱에 대한 라반과 에서의 친절, 나오미에 대한 룻의 효성, 룻에 대한 보아스의 배려, 그리고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우정 등이 수록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이 우리에게 친절을 베풀 때, 우리는 다윗을 본받아 "주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그들로 하여금 그런 마음을 갖게 하신다"고 말하자. 이런 자세를 지닐 때, 설령 가까웠던 친구의 마음이 우리에게서 멀어지거나 요나단처럼 신실한 친구가 먼저 하나님의 품으로 떠난다고 해도 우리는 침착해질 수 있을 것이다. 캠브리지 대학의 저명한 교수인 홉슨(Hobson)은, 어느 학생이 이제껏 자신에게 등록금을 대주었던 삼촌의 사망 소식을 받고서 비통하게 울면서 그 슬픔을 토로하는 것을 듣고는, "삼촌을 자네에게 보내셨던 분이 누구신가?" 하고 물었다고 한다. 이 말은 그 학생에게 큰 위안이 되었으며, 향후에도 그는 어려울 때마다 이 말을 상기하며 격려를 받았다. 늘 살아 계신 하나님이 산 믿음을 지닌 자의 재산이 되신다. 그분께는 부족함이 있을 수 없다. 원하시는 대로 왕들의 마음을 돌이키시는 그분은, 세상의 모든 시내를 바싹 마른 땅으로 변하게 하실 수도 있다. -사무엘 리.
17절.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시면 우리에게는 큰 위안과 기쁨이 임한다.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생각을 세 가지 측면에서 고찰해 볼 수 있다.
첫째, 그 생각의 빈번함이다.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생각은 끊임이 없다. 당신이 높이 평가하며 사랑하는 어느 친구가 있다고 하자. 당신은 늘 그의 마음속에 기억되기를 바란다. 헤어질 때나 편지를 쓸 때, 당신은 "나를 생각하라"고 표현한다. 아마 당신은 우정을 되살아나게 할 만한 증표를 그에게 줄 것이다. 셀커크(Selkirk)가 고독한 섬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벗들이여, 그대들은 가끔씩이라도
나를 생각하는가?
비록 볼 수는 없지만,
내게는 아직 친구가 한 분 계시다.
나를 희롱하는 바람이여,
내가 더 이상 밟지 못할 육지로부터,
몇 가지 진실하고 정감어린 소식을
이 적막한 해변으로 실어와 다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도 항상 당신을 생각하지는 못한다. 그가 보내는 시간 중 절반은 아예 당신을 생각하지 않는 상태이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의 시간 동안이라도 과연 그가 당신을 얼마나 깊이 생각하겠는가? 하지만 여호와의 생각은 사그라지는 법이 없다.
둘째, 그 생각의 지혜이다.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가 당신을 멀리 떠나 있다고 하자. 그러면 당신의 마음은 그 자녀에게 가 있다. 하지만 당신은 그의 현재 상황을 알지 못한다. 당신은 예전에 그를 찾아가 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어디에 있을까? 당신은 예전에 그의 상태가 어떤지를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상태는 어떠한가? 당신이 그의 건강을 생각하고 있는 동안, 어쩌면 그는 다리를 다치거나 고통스러운 질병에 걸려 신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그의 신중함을 기특하게 여기고 있는 동안, 어쩌면 그는 목숨이 위태로운 길로 접어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이 당신을 생각하실 때, 그분은 당신의 상황과 위험을 그리고 당신에게 결핍된 것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계신다. 그분은 이 거대한 광야를 헤치고 나아가는 당신의 걸음들을 다 알고 계시며, 필요할 때마다 시기적절한 도움을 제공하실 수 있다.
셋째, 그 생각의 효력이다. 당신은 어떤 사람을 생각하면서, 그를 인도하거나 보호해 주거나 혹은 그를 구원하려는 마음으로 애를 태운다. 하지만 그것이 단지 생각으로만 그친 적이 얼마나 많은가! 걱정한다고 해서 몸의 질병을 고치거나 우울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당신을 생각하시는 분은 멀리 계시지 않고 가까이 곁에 계시는 하나님이다. 모든 일들이 그분의 주관하에 있다. 그분은 모든 은총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만일 그분이 즉각적으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분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은혜 베풀 때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윌리엄 제이.
[설교힌트]
1절. (1) 내가 할 일:기도와 기다림. (2) 하나님이 하실 일:겸비하심과 응답.
2절. (1) 자기 백성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깊이.’ 때로는 무서운 웅덩이와 진흙투성이 수렁에서도 그것을 발견한다. 어떤 거미는 모래 속에 구멍을 파놓고서 그 바닥에 숨어 있다가 그리로 떨어지는 다른 곤충들을 잡는다. 다윗의 대적들도 웅덩이를 파고서 그를 빠트리려 했다. (2) 그 인자하심의 ‘높이.’ 그분은 나를 건져내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신다. 그 반석이란 그리스도시며, 그 반석 위에 선 발이란 믿음과 소망을 가리킨다. (3) 그 선하심의 ‘넓이.’ 그것은 내 걸음을 견고케 하며, 그분의 사랑 안에서 나를 예전의 위치로 회복시킨다. 또한 내가 비천해질 때에도 그분은 여전히 나를 당신의 소유로 삼으신다. 비록 내가 그분에 대해 예전과 같지 않은 느낌을 지닌다고 하더라도, 그분은 내게 한결같이 대하신다. “내 걸음”이란 나의 과거와 미래 모두를 포함한다. (4) 그 인자하심의 ‘권능.’ 그것은 내 걸음을 견고케 하며, 내가 넘어질 때마다 더욱 강건하게 만든다. -조지 로저스.
2, 3절. 죄인의 자연적인 상태, 그리고 은총을 통한 구원.
2, 3절. 여호와께서는 한 가지 같은 일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 대적들을 혼란에 빠트리며 또한 교회를 바로잡으신다. -J. P. Lange’s Commentary.
3절. 새 노래, 새롭게 노래하는 자, 새 교사.
4절 하반절. (1) 거짓에로 돌이키는 자가 누구인지 찾아 보라:무신론자, 가톨릭교도, 자기 의를 추구하는 자, 죄를 사랑하는 자. (2) 하나님과 진리로부터 돌이켜 사망으로 인도하는 거짓에로 향하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라. (3) 진리와 진실한 사람들을 택함으로써,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그 같은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는 법을 제시해 보라.
5절. (1) ‘하나님이 자기 백성 안에서 그리고 그 백성을 위해 행하신 일들이 있다.’ 창조와 섭리와 구속의 사역, 성령을 통해 은혜를 베푸시는 사역, 그리고 성자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그분의 섭리를 통해 그 백성을 돌보시는 사역 등이 있다. (2) ‘이는 놀라운 사역들이다.’ 이 사역들은 다양성에 있어서, 자비로움에 있어서, 그 백성에게 필요한 것들을 온전히 충족시킨다는 점에서, 그리고 외적인 방편들과 합력한다는 차원에서 놀라운 것이다. (3) ‘이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귀하게 여기심에 따른 결과이다.’ 그것들은 우연히 혹은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해 행해지며, 그분의 손은 그분의 뜻에 의해 움직여지며, 또한 그분의 뜻은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는 그분의 생각에서 비롯된다. 모든 은총은, 심지어 가장 작은 것이라 해도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속에 깃든 자비로우신 생각을 반영한다. (4) ‘그 수효는 무수하다.’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들과 우리들 각자를 위해 행하신 놀라운 사역들을 우리가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그것들은 바다의 모래처럼 헤아릴 수 없으며, 이 무수한 은총들은 하나님의 백성 각자에 대한 그분의 생각이 셀 수 없을 정도임을 나타낸다. -조지 로저스.
5절. 하나님의 허다한 생각들과 은혜로운 행사들은 영원부터 시작하여 영원토록 계속된다. 또한 그것들은 이생과 천국과 지옥과 죄와 천사들과 마귀들에게 그리고 사실상 만유에 미친다.
6절. 여기서 다윗은 자신을 넘어 ‘다윗의 자손’의 말씀을 대변한다. (1) ‘필요하지 않은 제사들.’ 율법 아래에서 드려지는 제사와 번제들. ① 언제 필요했는가? 아담으로부터 그리스도까지. ② 언제 필요하지 않게 되었는가? ③ 예전에 필요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구속의 모형을 제시하기 위해서. ④ 이제 필요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위대하신 원형께서 오셨으므로. (2) ‘필요한 제사.’ 갈보리에서 드려진 희생 제사. ①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지혜와 성실하심과 사랑과 영예를 위해 그리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요구되었다. ② 그것은 사람에게 구원을 주기 위해, 그리고 구원의 확신에 이르게 하기 위해 요구되었다. ③ 그것은 온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기리기 위해 요구되었다. (3) ‘이 희생 제사를 드리신 분.’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이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시사한다:① 그 제사를 아실 필요가 있었다. ② 그 목적을 위해 스스로를 종으로 바치셨다. -조지 로저스.
6절.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자발적인 청종, 확고한 목적, 온전한 순종, 그리고 전적 헌신.
6-8절.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들을 귀를 주시고, 그것을 선포할 입을 주시며, 그것을 사랑할 마음을 주시고, 또한 그것을 지킬 힘을 주신다.
7절. (1)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때에 내가 말하기를.” 모형이 소멸될 때, 예언들이 성취될 때, 세상 지혜가 극한에 다다를 때, 세상이 한 제국 아래에서 합쳐질 때, 그리고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가 도래할 때. (2) 그분의 도래에 관한 계획. “두루마리 책에”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 수록되어 있다. ① 그분의 인격. ② 그분의 교훈. ③ 그분의 삶의 방식. ④ 그분의 죽음과 관련된 계획. ⑤ 그분의 부활과 승천. ⑥ 그분이 세우신 왕국. (3) 그 도래의 자발성. 비록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긴 했지만, 그분은 자발적으로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임하셨다.” 다른 그 어떤 사람도 세상에 임하지 않았고, 그들은 단지 세상으로 보내어졌을 뿐이다. “내가 왔나이다”는 표현은 선재성, 예정, 미리 이루어짐 등을 암시한다. -조지 로저스.
8절.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1) 하나님의 뜻은 구원 사건 속에서 드러난다. 구원은 하나님의 뜻을 그 기원으로 한다. (2) 하나님의 뜻은 구원 계획 속에서 드러난다. 모든 일들은 그 계획에 따라 진행되어 왔고, 진행되고 있으며, 또한 진행될 것이다. (3) 하나님의 뜻은 구원의 과정을 통해 드러난다. 즉, 그분 자신의 아들을 중보자와 속죄를 위한 희생 제물과 율법 성취자로 그리고 교회의 머리로 지명하신 데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 것이다. (4) 하나님의 뜻은 구원의 완성을 통해 드러난다.
9절. 우리 주님에 관한 언급이다. 위대하신 설교자, 위대한 주제, 큰 집회, 그리고 사역 수행에 있어 드러난 그분의 위대하신 신실성.
10절 상반절. (1) 하나님이 ‘지니신’ 의. (2)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의. (3)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의. -제임스 프레임.
10절. (1) 설교자는 그분의 메시지를 모두 드러내야 한다. (2) 그는 어떤 부분도 숨기지 말아야 한다. ① 율법의 의이건 복음의 의이건간에 숨기지 말아야 한다. ② 그 인자하신 은총을 숨기지 말아야 한다. ③ 진리의 어떤 부분도 숨기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숨기는 일인가? ① 누락시키는 것. ② 인간의 생각으로 왜곡시키는 것. ③ 화려한 수사법으로 덮어버리는 것. ④ 부분 사항만 강조하는 것. ⑤ 어떤 진리를 잘못 적용하는 것. ⑥ 영의 결여 상태에서 문자만을 제시하는 것. -조지 로저스.
10절. 하나님에 관해 알고 있는 바를 숨기는 대죄.
11절. 부요함과 보존을 간구함. 참된 부요함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으며, 그분의 주권에 따른 선물이요, 그분의 은총의 열매들이며, 또한 그분의 인자하심이라고 하는 특성을 드러낸다. 최선의 보존책은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이다.
12절. 이를 5절과 비교해 보라. 우리 죄악들은 얼마나 많으며, 그분의 사랑의 생각들은 또 얼마나 엄청난가!
12절 중반절. (1) 사로잡힌 영혼:“내게 미치므로.” (2) 당황하는 영혼:“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3) 영혼의 유일한 피난처-기도(13절).
13절. (1) 믿음의 기도:“나를 구원하소서, 나를 도우소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구원과 도움을 간구한다. (2) 진지한 기도:“속히 나를 도우소서.” (3) 복종하는 기도:여호와여, 주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행하소서. (4) 지속적인 기도:“나를 도우소서.” 이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노력을 다하겠다는 뜻을 암시한다.
11-13절. 캐논 워즈워스는 이 구절들에 착안하여 “공적 기도에 응할 의무”라는 주제에 관해 설교한 바 있다.
14절. 악의에 대한 보응.
16절 하반절. 매일 해야 할 말. 누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그 말은 무슨 뜻인가? 왜 그렇게 말해야 하는가? 왜 그 말을 지속적으로 해야 하는가?
17절. ‘나는 보잘것없으나 주님은 위대하시다.’ 이것이 적절한 기도이다.
17절.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우리를 생각하시는 여호와의 겸손하심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그 겸손하심은 어떤 것인가? (1) 약속된 축복이다. (2) 실제적인 축복이다:그분이 우리를 생각하심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우리를 지키고 지시하시며 또한 우리를 성결케 하시기 위함이다. (3) 고귀한 축복이다:자비로우신 생각들, 지속적이며 너무도 선하신 생각들. 그분은 우리를 자신의 피조물로서 긍휼히 여기시며, 자신의 자녀로서 사랑으로 배려하시며, 자신의 친구로서 즐거이 생각하신다. (4) 현재적 축복:약속들, 섭리들, 그리고 은총들.
17절. (1) 우리가 자신을 덜 생각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우리를 더 많이 생각하실 것이다. (2) 우리가 자신을 더 적게 의지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을 더 많이 의지할 수 있다. (3) 우리가 기도와 실제적인 노력을 덜 지체할수록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더욱 속히 임하실 것이다.
<구미새에덴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