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
현순애
붉은 광장이 소란하다
서리꽃 피어도 머리끈 질끈 동여매고
세파에 맞서는 저 푸른 배추
여민 옷깃 야무지다
무더기로 연행되어 생살 파고드는 짠물 고문에
의식은 마디마디 풀려 너덜너덜하지만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
그전부터 내려온 내력이다
각지에서 올라온 성깔 맵고 짠 것들
비록 양념이지만 힘 보태야 한다며 술렁인다
한목소리 내겠다며, 한통속 되겠다며
핏줄 붉게 돋은 고춧가루
최루가스에도 눈물 참고 견뎌온 대파 양파
무며, 당근이며, 갓이며
핍박 심할수록 더욱 뭉쳐지는 단단한 결속
모엽의 포로 되어 깊은 독에 갇히어도
옹기종기 기대앉아 서로를 다독인다
저들로 차려질 연대의 밥상
세상 눈물 나게 깊은 맛 나겠다.
----현순애 시집 {붉은 광장이 소란하다}에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이 만고불변의 법칙은 모든 종들에게 해당되며, 어떤 생명체도 단독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다. 소나무는 소나무끼리 모여 살고, 참나무는 참나무끼리 모여 산다. 사슴은 사슴끼리 모여 살고, 사람은 사람끼리 모여 산다. 콩은 콩끼리 모여 살고, 팥은 팥끼리 모여 산다. 이 사회적 결속력이 종의 번영과 종의 행복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무리로부터, 또는 사회로부터의 이탈은 그 생명체의 죽음을 뜻한다.
현순애 시인의 [김장]은 ‘김장의 사회학’이며, “서리꽃 피어도 머리끈 질끈 동여매고/ 세파에 맞서는 저 푸른 배추”처럼, 백절불굴의 승전가라고 할 수가 있다. “서리꽃 피어도 머리끈 질끈 동여매고/ 세파에 맞서는 저 푸른 배추”는 상승장군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왜냐하면 “무더기로 연행되어 생살 파고드는 짠물 고문에”도 두 눈 하나 끄떡하지 않고 “어머니의 어머니/ 그전부터 내려온” 역사와 전통을 온몸으로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푸른 배추의 살신성인의 진두지휘 아래 “각지에서 올라온 성깔 맵고 짠 것들”, 즉, 고춧가루, 대파, 양파, 당근, 갓 등이 “비록 양념이지만” “한 목소리 내겠다며, 한통속 되겠다며”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고 영양가가 풍부한 김치가 되어주고 있는 것이다. 핏줄 붉게 돋은 고춧가루는 고급장교와도 같고, 최루가스에도 눈물 참고 견뎌온 대파, 양파 등은 백절불굴의 하사관과도 같고, 이밖에도 무며, 당근이며, 갓 등은 결코 자기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 최정예 부대원과도 같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이며, “핍박 심할수록 더욱더 뭉쳐지는 단단한 결속력”을 자랑한다. 대동단결은 백전백승의 필승전략이며, 이들의 전투정신과 연대의식에 의해 “세상 눈물 나게 깊은 맛”을 내는 “연대의 밥상”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김치란 배추를 소금물에 절인 후, 고춧가루와 대파와 양파와 무와 당근과 갓과 마늘과 온갖 양념을 첨가한 한국전통의 발효식품이자 일종의 조리 양식이라고 할 수가 있다. 김장이란 겨울철에는 신선한 채소를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겨우내 먹을 김치를 한목에 담가두는 일을 말하고, 이 김장 덕분에 저장성이 뛰어나고 아주 중요한 비타민의 섭취와 함께, 인간의 모든 장을 튼튼하게 해주는 김치를 두고두고 먹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 한국인들의 요리문화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 있다면 이 김장 김치이며, 이 김장 김치가 있기 때문에 우리 한국인들의 역사와 전통이 발전해왔다고 할 수가 있다. 김장 김치는 단순한 발효식품이 아닌데, 왜냐하면 김장 김치는 우리 한국인들의 정신과 육체이자 생명 자체라고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김장 김치로 하나가 되고, 우리는 김장 김치로 우리 한국인들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나간다.
우리 한국인들의 무한한 에너지의 보고인 김장 김치, 대동단결의 상징이자 역사와 전통의 상징인 김장 김치, 우리 한국인들은 이 김장 김치처럼 하나가 되고, 이 연대의식에 의해서 대한민국의 오천년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올 수가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