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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집 속집 제1권-중용 질의〔中庸質疑〕
〈서(序)〉
인심과 도심[人心道心] - 묻기를 “인심이 도심의 앞에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기(氣)로서 형체를 만들고 이(理)가 또한 부여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까?” 하니, 말하기를 “사람이 일상 생활하는 사이에 인심보다 쉽게 나타나고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어찌 순(舜) 임금이 이기(理氣)의 선후를 나누어 이렇게 말했겠는가. 이기의 선후는 다만 전대의 현인이 미처 발명하지 않은 뜻을 후대의 현인이 발명한 것일 뿐이니, 이것을 가지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
허령과 지각[虛靈知覺] - 허령(虛靈)은 마음의 본체이고 지각(知覺)은 마음의 작용이다. 이(理)가 기(氣)와 합해지기 때문에 허령과 지각의 오묘함이 있게 되는 것이다. 오직 이(理)이기 때문에 텅 비고[虛] 오직 기(氣)이기 때문에 영묘[靈]하니, 허(虛)라는 것은 마음의 고요함이고 영(靈)이라는 것은 마음의 감응이다. 고요하면서 감응할 수 있기 때문에 지각의 오묘함이 있는 것이다. ○묻기를 “지극히 고요하면서 능히 감응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니, 말하기를 “지극히 텅 빈 가운데 지극히 실제적인 이가 있고, 지극히 고요한 가운데 움직일 수 있는 기미가 있기 때문에 능히 감응하는 데에 따라 움직일 뿐이지, 오직 적멸(寂滅)뿐인 노자(老子)나 불가(佛家)와는 다르다.” 하였다. -
형기의 사사로움[形氣之私] - 형(形)은 형질(形質)이고 기(氣)는 세상에서 말하는 기운(氣運)이니, 형질은 음(陰)이고 기운은 양(陽)이다. 이는 드러나는 것을 먼저 말하고 은미한 것을 뒤에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명(命)과 성(性)을 말할 때 성을 먼저 말하고 명을 뒤에 말하며, 형(形)과 기(氣)를 말할 때 형을 먼저 말하고 기를 뒤에 말한 것이다. ○진 서산(眞西山 진덕수(眞德秀))이 말하기를 “사(私)는 ‘나 혼자만[我之所獨]’이라는 말과 같으니, 지금 사친(私親)이니 사은(私恩)이니 하는 말과 같으며, 악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묻기를 “이 ‘나 혼자만’이라는 말은 분명하지 않은 듯합니다. 어떻습니까?” 하니, 말하기를 “사친과 사은의 사사로움이란 말이 어찌 나 혼자만을 가리켜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
성명(性命) - 원집에 보인다. -
지각을 한 것이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所以爲知覺者不同] - 주자는 “다만 하나의 마음이지만 지각이 이목(耳目)을 따라가면 곧 인심(人心)이고, 지각이 의리(義理)를 따라가면 곧 도심(道心)이다.”라고 하였고, 또 “도심은 의리에서 나오는 것이고 인심은 몸뚱이에서 나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이런 설로 미루어 보면, ‘인심’이란 칠정(七情)이고 ‘도심’이란 사단(四端)이다. -
인욕의 사사로움[人欲之私] - 호운봉(胡雲峯 호병문(胡炳文))이 말하기를 “이 사(私) 자가 비로소 좋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인심이 의리에 맞고 절도에 맞아야 좋은 것이다. 이와 어긋나면 좋지 않은 것이다. 정밀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지키면 도심에서 어긋나지 않아 인욕으로 흐르지 않는다. 정자(程子)는 “인심은 인욕이다.”라고 하였는데, 주자는 만년에 그 설에 미진한 점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부득이 지금의 설로 고쳤다. -
사(斯) - 유정유일(惟精惟一)을 가리킨다. -
〈제1장(第一章)〉 - 《중용》에서 제(第)라고 한 것은 단지 장(章)을 나눈 순서일 뿐이고, 《대학》에서 전(傳)이라고 한 것은 경문(經文)을 분별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 하늘이 명한 것을 일러 성(性)이라 하는데 그 성은 체(體)이고 중(中)이고 인(仁)이고 은(隱)이니 바로 《대학》의 밝은 덕[明德]이고,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는데 그 도는 용(用)이고 화(和)이고 지(智)이고 비(費)이니 바로 《대학》의 밝은 덕을 밝히는 것[明明德]이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하는데 그 교는 또한 용(用)이고 또한 화(和)이고 또한 지(智)이며 또한 비(費)이니 바로 《대학》의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新民]이다. 또 말하기를 “성(性)ㆍ도(道)ㆍ교(敎)의 이치가 바로 《대학》의 지선(至善)이고, 스스로 세 가지에 힘쓰는 것이 바로 용(勇)이다.”라고 한다. 지금 살펴보니, 이 몇 가지 설을 요즘 사람들이 모두 삼가 지키고 이설(異說)이 없다. 그러나 성(性)을 일러 체(體)이고 중(中)이고 인(仁)이고 은(隱)이라 하며, 도(道)를 일러 용(用)이고 화(和)이고 비(費)라 하며, 교(敎)를 일러 또한 용(用)이고 또한 화(和)이고 또한 비(費)라 한 것은 그럴 수 있다. 지(智)와 인(仁)과 용(勇)의 경우는 자사(子思)가 칭한 것이 바로 지(知)와 행(行)을 가리켜서 한 말인데 어찌 아울러 끌어다가 여기에 붙일 수가 있겠는가. 성(性)은 그 마음을 검속할 줄 모르고 인(仁)은 수행(修行)에 속하니 인(仁)을 성(性)에 안배한 것은 잘못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솔성(率性)은 사람이 그것을 따른다는 것이 아니다.” 하였고, 또 “이 솔(率) 자는 힘을 쓰는 글자가 아니다.”라고 하였고, 또 “순(循) 자는 도를 행하는 사람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바로 사람과 사물이 각각 자연의 성(性)을 따르는 것을 말한 것이다. 지(智)는 지(知)에 속한 것으로 바로 중용을 가리는 일이다. 그러나 지(智)를 도(道)에 배합하는 것은 역시 그릇된 것이다. 교(敎)를 지(智)라고 한 경우도 남을 이루어주는[成物] 지(智)와 서로 흡사하지만 저것은 자기를 이루는[成己] 인(仁)과 상대해서 한 말이니 이 뜻과는 다르다. 세 가지는 모두 사람이 덕을 닦고 도를 행하는 뜻이 아닌데 또 어찌 그치지 않는 것이 용이 된다[不息爲勇]는 뜻이 있겠는가. 또 이 세 가지를 《대학》의 삼강령(三綱領)에 분배한 것은 더욱 이치에 맞지 않다. 성(性)을 일러 밝은 덕[明德]이라 한 것은 근사하지만 성(性)이란 사람과 사물이 부여받은 공공의 이치이고, 명덕(明德)은 바로 사람이 부여받은 허령불매(虛靈不昧)를 가리키는 이름이니 이치는 본래 같더라도 이름을 얻은 까닭은 조금 차이가 없을 수 없다. 솔성(率性)의 경우는 밝히는[明之] 공효가 있는 것이 아니고, 수도(修道)의 교(敎)도 새롭게 하는[新之]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성(性)과 도(道)와 교(敎)가 이름을 얻은 것은 모두 일반적인 의미이니 ‘지극한 선에 머무는 것[止於至善]’과 ‘지극함을 다하지 않음이 없다[無所不用其極]’라는 것과는 뜻이 역시 다르다. 또 존양(存養)을 인(仁)이라 하고 성찰(省察)을 지(智)라 하고 이 두 가지에 힘쓰는 것을 용(勇)이라 한다는 것은 그럴 듯하다. 다만 자사(子思)가 본래 여기에 뜻을 두었고 삼달덕(三達德)의 의사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체로 의리는 본래 같은 하나의 근원이니, 비슷하거나 가까운 것을 취하여 설을 만들어 합하면 어느 곳인들 일치하지 않겠는가. 다만 말을 한 본뜻과 글 뜻의 취지는 각각 마땅한 바가 있는데 지금 사람들이 기필코 다른 것을 억지로 합하여 같게 하려고 하니, 이 때문에 파고들수록 더욱 어긋나고 뒤섞이고 가려져서 도리어 대의(大義)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또 첫 세 구를 천도(天道)라 하고 계구신독(戒懼愼獨)을 인도(人道)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역시 천도와 인도로 나누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
음양과 오행[陰陽五行] - 원집에 보인다. -
불가수유리(不可須臾離) - 이 도(道) 자는 곧 상문(上文)의 ‘솔성지도(率性之道)’를 가리킨 것이다. ‘떨어질 수 없다[不可離]’는 것은 도를 행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말한 것이 아니다. 만약 ‘이 도를 떠나는 것이 옳지 않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도를 행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경계하는 말이니, 본뜻이 아니다. 만약 본주(本註)와 《혹문》의 ‘만약 잠깐 떨어졌다가 잠깐 합쳤다가 할 수 있다면……[若其可以暫離暫合云云]’을 따른다면 마땅히 “떠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可離則非道也]”라고 해석해야 하며, 만약 《혹문》 아래 소주(小註)에 나오는 남전 여씨(藍田呂氏 여대균(呂大均))가 ‘도가 나에게 있는 것은 마치 음식이나 거처를 떠날 수 없는 것과 같으니, 떠날 수 있는 것은 모두 외물이다.[道之在我 猶飮食居處之不可去 皆外物也]’라는 설을 따른다면 마땅히 ‘떠날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다[可離者非道也]’라고 해석해야 하는데, 두 가지 설을 겸하여 보는 것이 옳다. -
부도불문(不睹不聞) - 원집에 보인다. -
희로애락(喜怒哀樂) - 《어록(語錄)》에 보인다. -
〈제2장(第二章)〉
변화언용(變和言庸) - 유씨(游氏 유작(游酢))의 설에 자세히 말하였다. 대개 성정(性情)으로만 말하고 덕행(德行)을 언급하지 않으면 천하의 사리를 다 꿸 수 없기 때문에 바꾸어 말한 것이다. -
〈제3장(第三章)〉 - 묻기를 “《중용(中庸)》에서는 도(道)로써 말했기 때문에 ‘지위덕야(之爲德也)’ 네 글자가 없는데, 장구(章句)에는 덕(德) 자가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니, 말하기를 “《논어》는 공자의 본문이고, 이것은 자사(子思)가 바로 잡은 곳이다. 《논어》는 중용의 덕을 가진 자가 적다는 것으로 말하였고, 《중용》은 이 도를 알고 행하는 자가 드물다는 것으로 밝힌 것이다. 다만 장구의 덕(德) 자는 성정의 덕과 귀신의 덕을 말하는 것과 같다. 덕은 곧 중용이니, 중용을 행하는 덕을 말한 것이 아니다. 대문(大文)에서 덕을 말하지 않았더라도 덕이 그 가운데 있기 때문에 장구에서 덕으로써 밝힌 것이다.” 하였다. -
〈제10장(第十章)〉
억기기혈(抑其氣血) - 기혈(氣血)은 기질(氣質)과 같다. 기(氣)는 양(陽)이고 혈(血)은 음(陰)인데, 먼저 음을 말하고 나중에 양을 말한 것은 끝없이 순환한다는 뜻이다. 먼저 양을 말하고 나중에 음을 말한 것은 기질 중에 이미 이루어진 것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
〈제12장(第十二章)〉
연비어약(鳶飛魚躍) - 원집에 보인다. -
발발(潑潑) - 묻기를 “발발(潑潑)은 소식(蘇軾)의 주(註)에 ‘달빛이 물에 비추어 번뜩이는 모양’이라고 하였는데, 그렇습니까?” 하니, 말하기를 “본주(本註)를 보지 못하여 그 뜻이 어떠한지 모르겠다. 다만 석씨(釋氏)도 이 말을 썼는데 석씨의 학문은 마음이 있다는 것만 알고 이(理)가 있음은 알지 못하였다. 소식의 이 주는 아마 석씨가 마음을 주로 하는 것의 영향을 받아 낸 것으로 = 석씨는 ‘마음의 빛이 번쩍번쩍 빛난다[心有光爍爍地]’라고 하였다. = 자사(子思)의 본뜻에 조금도 부합되지 않는다. 일찍이 《운회》를 살펴보니, 발(潑)은 물을 버리는 것이라 하였다. 물을 버리면 흩어지고 흩어지면 나뉜다. 이는 이미 거듭 말하였으니 나뉘고 흩어짐이 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모든 이치가 사물에 흩어져 존재하면서 각각 조리와 구별이 있어 위로 하늘과 아래로 연못에 훤히 드러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하였다.
묻기를 “발발(潑潑)에 대해 어떤 사람은 ‘천리가 유행하여 막힘이 없는 오묘함이다.’ 하였는데 그렇습니까?” 하니, 말하기를 “이는 활(活) 자의 뜻이지 발발(潑潑)의 뜻이 아니다.” 하였다.
묻기를 “그러면 ‘활발발지(活潑潑地)’ = 지(地) 자는 어조사이다. = 라는 말이 석씨(釋氏)의 말이 아닙니까?” 하니, 말하기를 “주자가 ‘이것은 세속에서 흔히 쓰는 말인데, 불가에서 일찍이 말하였고 나도 말한 것일 뿐이다. 하물며 내가 말한 것은 저들과 같더라도 형용하고 있는 것은 실제 저들과 다름에랴! 내가 말한 것은, 도의 체(體)와 용(用)이 실로 있지 않은 곳이 없어 솔개가 되어서는 반드시 하늘에서 날고 물고기가 되어서는 반드시 물에서 뛰니 이는 임금은 임금답고[君君] 신하는 신하답고[臣臣] 아비는 아비답고[父父] 자식은 자식다워서[子子] 각각 제자리에 머물러 어지럽힐 수 없는 것이다. 석씨가 말한 대로라면 솔개는 연못에 뛰어 놀 수 있고 물고기는 하늘에 날아오를 수 있는 것이 된다. 이것이 어찌 동등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또 자사(子思)가 부부(夫婦)를 가지고 말한 것은 사람의 일이 매우 가까워 천리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불가에서는 이것을 들어서 끊어버렸으니 또 어찌 동등하게 말하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이 설이 명확하니 마땅히 깊이 음미해 보아야 한다.” 하였다. -
〈제18장(第十八章)〉
제용생자지록(祭用生者之祿) - 녹(祿)이 많으면 제사가 융성하고 녹이 적으면 제사가 줄어든다. 그러므로 ‘제사는 아래에서 줄어든다’고 한다. 천자와 제후는 군주이고 부모 외에는 모두 신하이니, 숙부도 그 군주를 조카로 여기지 못하고 조카도 그 군주를 숙부로 여기지 않는다. 군주 또한 상복(喪服) 입는 것을 가지고 그 친척을 사적으로 대할 수 없으므로 기년(期年)부터 이하는 없애고 상복을 입지 않는다. 그러므로 ‘상례는 위에서 생략한다’고 한다. 여씨가 “기상(期喪)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조부모와 장자(長子)를 위한 것은 정기(正期)이고, 세부모(世父母)와 숙부와 중자(衆子)와 형제를 위한 것은 방기(旁期)라고 한다. 정기는 줄일 수 없고, 방기는 없애고 입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
〈제19장(第十九章)〉
춘추(春秋)……지례(之禮) - 이 두 절은 각각 뜻을 계승하고 일을 전술(傳述)하는 뜻을 겸하였다. 사당을 수리하고 제기를 진열하며 의상을 펴놓고 음식을 올리는 것이 어찌 유독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일로써 그들의 뜻이 아니겠으며, 종묘의 예가 또한 어찌 유독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뜻으로써 그들의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주자가 그 자리를 밟아[踐其位] 장구(章句)에 “이는 윗 글의 두 절을 맺은 것이니, 모두 뜻을 계승하고 일을 준행하는 뜻이다.”라고 하여 애초에 구분해서 말하지 않았다. 세상의 유자(儒者) 중에 혹 요씨(饒氏 요로(饒魯))의 설을 따라 위의 절은 일을 준행하는 것이고 아래 절은 뜻을 계승하는 것이라 하는데 아마도 옳지 않은 듯하다. 요씨는 단지 이 한 절을 나누어 말한 것이지 위의 두 절을 나누어 붙인 것이 아니다. -
자성(子姓) - 성(姓)은 낳는 것이다. 손(孫)은 아들이 낳은 것이다. 그러므로 손(孫)을 일러 자성(子姓)이라 한다. -
〈제20장(第二十章)〉
재명성복(齋明盛服) - 소주(小註)의 ‘절송전(折送錢)’이라고 할 때의 절(折) 자는 보내야 할 돈을 정하는 것이니 그 궁노(弓弩)를 따져서 산정하여 봉급을 주는 것이다. -
전간(箭幹) - 곧 화살의 뼈대이니, 지금의 화살대와 같다. -
절(節) - 그 제도가 부(符)와 같다. 한 자의 베 가운데에 큰 글자를 쓰고 중간을 반으로 잘라 하나는 남겨 두고 하나는 가는 사람에게 주어 보내 신뢰를 보이는 것이다. 한(漢)나라에서 명주[繻]를 쓴 것과 같다. -
〈제21장(第二十一章)〉
자성명(自誠明) - 원집(原集)에 보인다. -
〈제26장(第二十六章)〉
소소지다(昭昭之多) - 소소(昭昭)는 조금 밝은 것이니 한 곳을 말한다. 다(多)는 각처에 조금 밝은 곳이 많은 것이다. -
〈제27장(第二十七章)〉
양양(洋洋)……우천(于天) - 주(註)에 “이는 도가 지극히 큼을 다하여 밖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넉넉히 크도다. 예의가 3백 가지요, 위의가 3천 가지이다.[優優大哉 禮儀三百 威儀三千]”라고 한 주(註)에 “이는 도가 지극히 작은 데 들어가 틈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발육과 준극’이 하나의 태극(太極)을 통괄하기 때문에 큰 것이 아니겠는가. ‘3백 가지와 3천 가지’가 어찌 각각 하나의 태극을 가지고 있어서 작은 것이 아니겠는가. 총괄해서 말하면 3백 가지와 3천 가지보다 큰 것이 없고, 나누어 말하면 3천 가지와 3백 가지보다 작은 것이 없다. ○도가 찬란하게 빛나서 가리켜 쉽게 볼 수 있는 것으로 예(禮)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오직 예(禮)를 가지고 말한 것이다. -
주의 의리[註理義] - 사물에 있는 것이 이(理)이고 사물에 처하는 것이 의(義)이다. -
절문(節文) - 절(節)은 절목(節目)이고, 문(文)은 꾸밈이다. -
거상(居上)……불배(不倍) - 상하와 선후의 차이를 둔 것이 반드시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아랫사람이 되어 배반하지 않음’을 먼저 말하고 ‘윗사람이 되어 교만하지 않음’을 나중에 말하면 그 아래 지성(至聖)과 지성(至誠)과 경륜(經綸)과 배천(配天) 등을 지극히 말한 곳과 서로 이어져 말이 순해진다. 그렇지 않고 중간에 ‘아랫사람이 되어 배반하지 않는다’는 한 단락을 끼워 넣으면 말이 끊어져서 순하지 않다. -
〈제28장(第二十八章)〉
어리석으면서 자기 뜻대로 함[以愚自用] - 원집에 보인다. -
금천하(今天下) - 자사(子思)의 시대는 전국(戰國)이 분열되어 있었으나 수레는 궤도가 같았다고 하였으니, 이는 대강을 들어서 주(周)나라가 천하를 통일했음을 말한 것이 틀림없다. ○옛사람이 기물을 만들 때 모두 표본이 있었는데 수레의 제도는 더욱 신중하게 하였으니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 한 편에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특별히 거론하였다. -
〈제30장(第三十章)〉
주(幬) - 원집에 보인다. -
〈제31장(第三十一章)〉
온유와 발강[溫柔發强] - 뜻을 풀이한 것이 대체로 근사하다. 다만 유(柔)는 순종한다는 뜻이니 마땅히 손순(巽順)이 되어야 하고, 강(强)은 힘이 있다는 뜻이니 마땅히 유용(有勇)이 되어야 한다. -
〈제33장(第三十三章)〉
순순(肫肫) - 원집에 보인다. ○첫 장에서는 먼저 체(體) = 경계하고 두려워 함, 보존하고 수양함, 천리를 보존함= 를 말하고 나중에 용(用) = 혼자 있을 때 신중히 함, 성찰함, 인욕을 막음 = 을 말했고, 마지막 장[末章]에서는 먼저 용(用) = ‘몰래 엎드려 있다[潛蜼伏矣]’는 성찰에 대한 것이다. = 을 말하고 나중에 체(體) = ‘네가 집에 있는 것을 본다[相在爾室]’는 존양에 대한 것이다. = 를 말했다. -
[주-D001] 인심과 도심 :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에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다.[人心惟危, 道心惟微.]”라고 한 데 나오는 말이다.
[주-D002] 허령과 지각 :
〈중용장구서〉에 “마음의 허령과 지각은 하나일 뿐인데, 인심과 도심의 다름이 있다고 한 것은, 혹은 형기의 사사로움에서 나오고, 혹은 성명의 올바른 것에서 근원하여, 지각을 한 것이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心之虛靈知覺, 一而已矣. 而以爲有人心道心之異者, 則以其或生於形氣之私, 或原於性命之正, 而所以爲知覺者不同.]”라고 한 데 나오는 말이다.
[주-D003] 형기의 사사로움 :
〈중용장구서〉에 “마음의 허령과 지각은 하나일 뿐인데, 인심과 도심의 다름이 있다고 한 것은, 혹은 형기의 사사로움에서 나오고, 혹은 성명의 올바른 것에서 근원하여, 지각을 한 것이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心之虛靈知覺, 一而已矣. 而以爲有人心道心之異者, 則以其或生於形氣之私, 或原於性命之正, 而所以爲知覺者不同.]”라고 한 데 나오는 말이다.
[주-D004] 사(私)는 …… 아니다 :
《서산독서기(西山讀書記)》 권3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5] 지각을 …… 때문이다 :
〈중용장구서〉에 “마음의 허령과 지각은 하나일 뿐인데, 인심과 도심의 다름이 있다고 한 것은, 혹은 형기의 사사로움에서 나오고, 혹은 성명의 올바른 것에서 근원하여, 지각을 한 것이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心之虛靈知覺, 一而已矣. 而以爲有人心道心之異者, 則以其或生於形氣之私, 或原於性命之正, 而所以爲知覺者不同.]”라고 한 데 나오는 말이다.
[주-D006] 인욕의 사사로움 :
〈중용장구서〉에 “천리의 공변됨이 끝내 인욕의 사사로움을 이기지 못한다.[天理之公, 卒無以勝夫人欲之私矣.]”라고 한 데 나오는 말이다.
[주-D007] 사(斯) :
〈중용장구서〉에 “정은 인심과 도심의 두 가지 사이를 살펴서 섞이지 않게 하는 것이고, 일은 본심의 바름을 지켜서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이니, 여기에 종사하여 조금이라도 간단함이 없게 해야 한다.[精則察夫二者之間而不雜也. 一則守其本心之正而不離也, 從事於斯, 無少間斷.]”라고 한 데 나오는 말이다.
[주-D008] 지(智)와 …… 것 :
《중용》의 삼덕(三德)은 지(智), 인(仁), 용(勇)을 가리킨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0장에 “천하의 달도가 다섯 가지인데 이를 행하는 것은 세 가지이다. 군신간, 부자간, 부부간, 형제간, 붕우간의 사귐 이 다섯 가지는 천하의 달도요, 지, 인, 용 이 세 가지는 천하의 달덕이니, 이를 행하는 것은 하나이다.[天下之達道五, 所以行之者三, 曰君臣也, 父子也, 夫婦也, 昆弟也, 朋友之敎也. 五者天下之達道也, 智仁勇三者, 天下之達德也. 所以行之者一也.]”라고 하였다.
[주-D009] 지극함을 …… 없다 :
《대학장구》 전2장에 “이런 까닭으로 군자는 그 지극함을 다하지 않음이 없다.[是故, 君子無所不用其極.]”라고 한 데 나오는 말이다.
[주-D010] 변화언용(變和言庸) :
《중용장구》 2장의 주에 “화 자를 바꾸어 용이라고 말한 것은, 유초(游酢)의 말에 ‘성정으로써 말하면 중화라 하고, 덕행으로써 말하면 중용이라 한다.’ 하였다.[變和言庸者, 游氏曰以性情言之, 則曰中和, 以德行言之, 則曰中庸.]”라고 한 데 나오는 말이다.
[주-D011] 중용(中庸)에서는 …… 때문입니까 :
《논어》 〈위정〉 27장에 공자가 “中庸之爲德也, 其至矣乎. 民鮮久矣.”라고 하였는데, 《중용》 3장에는 “之爲德也” 네 자를 빼고 “中庸, 其至矣乎. 民鮮久矣.”라고 하였다. 그런데 장구에 주자가 “中庸之德”이라고 한 것에 대한 질문이다.
[주-D012] 자사(子思)의 본뜻 :
《중용장구》 제12장에서 “솔개가 날아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가 연못에서 뛰논다.[鳶飛戾天, 魚躍于淵.]”라는 《시경》의 시를 인용한 것에 대해, 정호(程顥)가 “자사가 긴요하게 사람을 위한 곳으로 매우 생동감이 있다.[子思喫緊爲人處, 活潑潑地.]”라고 하였다.
[주-D013] 세부모(世父母) :
백부모(伯父母)를 달리 이르는 말로, 여기에서의 세(世)는 대를 잇는다는 뜻으로 쓴 말이다.
[주-D014] 방기(旁期) :
정통이 아닌 방계 친속의 기복(期服) 이하를 말한다. 이 말은 예경(禮經)에는 나오지 않고, 오직 《중용장구(中庸章句)》에 “기년(期年)의 상(喪)은 대부(大夫)까지 이르고 삼년상은 천자까지 이른다.”라는 말을 근거로 《주례(周禮)》 〈춘관종백(春官宗伯) 사복(司服)〉의 “무릇 흉사(凶事)가 있으면 변복(弁服)을 입는다.”의 소(疏)에서 가공언(賈公彦)이 “천자와 제후는 방기는 끊지만 정통(正統)의 기복(期服)은 강복(降服)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 한국국학진흥원 | 김우동 (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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