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 다르고 속 다른 윤석열-기시다 도쿄회담 운명은?
[ 시민언론민들레 | 한승동 에디터 sudohaan@mindlenews.com ] 2023.03.15 11:35
'김대중-오부치 선언 버전 2.0' 말만 번드르르
윤 정부, 대법원 배상판결 무시하며 '도루묵'
과거사 묻어둔 채 미래 청사진 실현 회의적
초점은 미국이 미는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일본 정부의 초청에 따라 오는 16∼17일 1박2일 일정으로 일본을 방문한다고 9일 대통령실이 밝혔다. 윤석열 대통령은 방문 기간 중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질 예정이며 김건희 여사는 기시다 유코 여사와 친교 행사도 진행될 예정이다. 사진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캄보디아 프놈펜 한 호텔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악수하며 기념 촬영을 하는 모습. 2023.3.9 연합뉴스
윤석열 정부와 일본의 기시다 후미오 정부는 오는 16일 도쿄에서 열릴 두 나라 정상회담을 1998년의 김대중-오부치 게이조 회담에서 발표된 ‘한일공동선언’ 정신을 되살리고 갱신하는 ‘김-오부치 버전 2.0’을 부각시키는 기회로 삼고 있으며, 1차적인 초점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에 맞춰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오부치 정부의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사죄’ 표명과 김대중 정부의 일본문화 개방 등을 골자로 한일관계에 새로운 역사를 열었다는 평가를 두 나라 모두에서 받아 온 ‘김-오부치 1.0 버전’은 그러나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가 합법이었다는 일본 보수우익 주류세력의 과거사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방미 일정을 마친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이 9일 오후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을 통해 귀국해 취재진과 질의응답을 하고 있다. 김 실장은 지난 5일(현지시간) 워싱턴 도착 후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등 미 행정부 외교안보 주요인사들을 만나 한미동맹 강화·발전 방안을 논의한 한편,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대통령의 한미정상회담 일정을 오는 4월 26일로 확정했다고 밝혔다. 2023.3.9 연합뉴스
김-오부치 버전 1.0
일본정부를 비롯한 일본 주류세력은 1965년 한일협정으로 두 나라가 국교 정상화에 합의했을 때도 을사늑약이나 한일합방조약 등 일제의 한반도 침략과 식민지배를 정당화한 과거 협정이나 조약들이 당시 국제법적으로 합법이었다며 침략과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역사상 최악의 한일관계라고 했던 최근의 두 나라 관계 악화의 직접적 계기가 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의 갈등도 근본원인은 바로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배의 불법성 여부를 둘러싼 양국 간의 인식차이에 있다.
버전 1.0을 넘어선 대법원 판결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고 한 확정판결은 일제의 침략 및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과거사 인식에서 김대중-오부치 버전 1.0의 한계를 넘어선 판결이었다. 당시 아베 신조 정부와 그 뒤의 스가 요시히데, 기시다 후미오 정부는 그런 한국 대법원의 판결이 국제법 위반이라며 번복할 것을 한국정부에 집요하게 요구해 왔다. 그것이 한일관계 악화의 근본원인이었다. 윤석열 정부는 버전 2.0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은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가 불법임을 관철시키지 못한 버전 1.0의 한계를 그대로 인정한 것이었다.
대법원 판결을 무시하고 다시 1.0으로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은 14일 기자회견에서 이번 윤 대통령의 일본방문이 “한일관계가 정상화 단계로 본격적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알리는 의미가 있다”며 “악순환을 끊고 양국 간에 본격적인 교류가 이뤄질 수 있는 상황을 다시 정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번 윤 대통령의 일본방문이 그런 일본의 왜곡된 과거사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로잡은 토대 위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일본 주류의 과거사 인식을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했다는 점에서 윤석열 정부의 외교 브레인으로 알려진 윤덕민 주일 한국대사가 강조한 ‘김-오부치 버전 2.0’(<아사히> 3월 11일)은 공허하게 들린다.
윤 대통령도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문제와 관련해 일본의 요구를 거의 그대로 수용한 ‘해결책’을 발표한 지 사흘 뒤인 9일 자신의 일본방문이 “12년 간 중단됐던 한일 정상의 교류가 재개되고, 한일관계 개선과 발전의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라며 “한일의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미래로 향하기 위해 안보와 경제, 사회문화 등 다방면에서 협력을 확대하고 양 국민 교류가 한층 더 활성화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 한일 간 합의가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미래로 향하기” 위한 기본 전제, 즉 일본의 과거 침략과 식민지배의 불법성 인정을 일본정부가 완강하게 거부했고, 한국정부가 오히려 그런 일본정부의 뒤집힌 주장을 수용했다는 점에서 정부가 나열하고 있는 화려한 한일 간 미래 청사진들이 실현될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다.
방미 일정을 마친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이 9일 오후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을 통해 귀국해 취재진과 질의응답을 하고 있다. 김 실장은 지난 5일(현지시간) 워싱턴 도착 후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등 미 행정부 외교안보 주요인사들을 만나 한미동맹 강화·발전 방안을 논의한 한편,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대통령의 한미정상회담 일정을 오는 4월 26일로 확정했다고 밝혔다. 2023.3.9 연합뉴스
일본주류 인식 “안중근은 테러리스트” 수준
일본 주류의 그런 뒤틀린 역사인식은 윤 대통령이 이번 도쿄방문 때 만날 예정인 한일의원연맹 차기 회장 내정자 스가 요시히데 전 총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2014년 1월 당시 아베 신조 정권의 관방장관이던 스가는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역에 세워진 안중근 의사 기념관 개관에 대해 “안중근에 대한 일본의 견해는 우리나라(일본)의 초대 총리인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해 사형 판결을 받은 테러리스트라는 것”이라며 “지금까지 한·중 양국에 누차 우리 견해를 전달해왔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매우 유감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한국정부 정통성의 뿌리 중 한 갈래인 안 의사의 의거를 테러로, 안 의사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일본 자민당 정부이며, 그런 기본입장은 이번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문제를 둘러싼 양국 간 논란 과정에서도 거듭 확인됐다.
카셀대 소녀상 기습철거에서도 확인
이는 또한 지난 9일 독일 카셀대 총학생회가 교내에 세운 ‘평화의 소녀상’ 기습 철거가 현지의 일본 총영사 등 일본정부 쪽의 집요한 압박 때문이라는 보도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일본 주류세력이 과거사의 범죄행위를 보편적인 인권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인식이나 자세에 대한 비판을 인권문제가 아니라 일본에 대한 반대, 즉 ‘반일’로 인식하는 편협한 내셔널리즘에 사로잡혀 있음을 카셀대 소녀상 기습철거 사건은 다시 한번 보여 주었다.
13일 타계 소식이 전해진 일본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처럼 과거사에 대한 진심어린 사죄와 속죄를 강조하는 일본인들도 많지만, 주류 지배세력은 그런 자국민들을 오히려 ‘비일본인’으로 몰아가고 있다. 일제의 과거 침략과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진심어린 사죄를 하지 않는 한 김대중-오부치 게이조 버전 1.0의 한계를 뛰어넘는 버전 2.0 언사는 알맹이 없는 허사일 뿐이다. ‘사상최악’ 한일관계를 만든 원인들이 그대로 잠복해 있는 한 또 다른 사상최악 한일관계가 조만간 발화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올 수밖에 없다.
뒤집힌 순서, 한국이 먼저 풀어야 일본은 검토
16일 도쿄에서 열릴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총리 회담에서는 양국을 둘러싼 안보문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정상화’와 일본의 대한 수출규제와 한국의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취하 문제, 반도체 제휴, 유학생 지원, 재계 교류와 협력 강화 등이 논의될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 초점은 GSOMIA라고 아사히는 지적하고 있지만, 이는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서도 핵심 요소 가운데 하나로 바이든 정부의 최우선 관심사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과 관련해 아사히는 “한국 쪽이 WTO 제소를 취하하면 (일본)경제산업성은 2019년에 규제를 강화한 (대한)수출 절차를 원래대로 되돌릴 방침”이라 보도했다. 말하자면 한국이 먼저 대일 대항조치를 풀어야 일본도 푸는 것을 검토하겠다는 자세다. GSOMIA ‘정상화’ 논의도 한국이 먼저 풀어야 일본도 응하겠다는, 묘한 순서상의 역전을 이런 표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도쿄의 한일 정상회담 자체가 윤석열 정부의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문제 ‘해결책’을 먼저 내놓은 뒤에야 일본정부가 이를 수용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과 닮은 꼴이다. 문제를 만든 것은 언제나 일본인데, 한국이 먼저 해법을 제시하고 들어오라는 한일간 역학구도가 광복 70년이 넘도록 바뀌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윤석열 대통령이 다음 달 26일(현지시간) 미국을 국빈방문한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7일 보도했다. 윤 대통령의 국빈 미국 방문이 성사되면 2011년 이명박 전 대통령 이후 12년만이다. 사진은 지난해 11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악수하는 윤 대통령과 바이든 미 대통령. 2023.3.7 연합뉴스
초점은 GSOMIA
이번 정상회담의 초점이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의 ‘정상화’에 진전이 있을지 여부가 될 것이라고 전한 <아사히신문>은 한일 두 나라 정부가 관계개선에 나선 배경에는 안전보장환경의 악화가 자리잡고 있다며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 러시아와 중국 및 북한의 접근을 예로 들고, 특히 최근 잇따라 탄도미사일을 발사하고 있는 북한의 존재를 지목했다.
이에 따라 북한의 미사일 발사 징후를 조기에 파악하기 위해서는 한일, 한미일 간의 정보공유가 필수적이라며, 지난해 11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북한 미사일을 탐지하고 평가하는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미사일 경계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공유하기로 했다는 내용이 공동성명에 들어간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16일 회담에서는 방위(군사)기밀정보를 원활하게 제공할 수 있게 해 줄 ‘군사정보보호협정’의 정상화를 향해 진전이 이뤄질지가 초점”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문은 양국 간 반도체 제휴에도 기대를 나타냈다. 이는 위태로운 중국-대만(양안) 문제로 TSMC 등 반도체 파운드리 첨단제품 주요 생산업체들이 몰려 있는 대만의 안보문제와 중장기적인 반도체 공급문제가 얽혀 있는 사안이다. 일본과 미국이 최근 반도체 등 첨단제품 주요 생산지인 한국에 점점 더 주목하고 있는 배경에는 이런 첨단 제품의 공급망과 관련한 자국 이해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일본은 이런 상황에서 미국에 밀착하면서 새로운 기회를 엿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