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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다리명 백과 - 퐁네프퐁네프(Pont Neuf)는 프랑스 파리의 센(Seine)강에 위치한 시테(Cité)섬의 서쪽 끝을 지나는 다리로, 센강의 다리 중 가장 오래된 다리
hanjy9713
2023.11.18. 09:58조회 9
퐁네프
퐁네프(Pont Neuf)는 프랑스 파리의 센(Seine)강에 위치한 시테(Cité)섬의 서쪽 끝을 지나는 다리로, 센강의 다리 중 가장 오래된 다리다.
퐁네프와 시테섬
퐁데자르(Pont des Arts)에서 바라본 퐁네프와 시테섬
1. 다리의 정의
퐁네프는 프랑스 파리를 가로지르는 센강에 놓인 다리다. ‘새 다리’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현재 파리 센강의 다리 중 가장 오래된 다리다. 센강 가운데에 위치한 시테섬의 서쪽 끝을 지난다. 다리는 두 개의 구간으로 나뉘며 좌안 쪽은 다섯 개의 아치로, 우안 쪽은 일곱 개의 아치로 구성돼 있다.
1578년 앙리 3세가 건설을 시작했으며 1607년 앙리 4세 때 완성됐다. 건설 당시 ‘루브르 다리(Pont du Louvre)’로 불렸던 퐁네프는 길이 232m에 폭이 22m로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이었는데, 당시 파리에 건설된 다리 중 다리 위에 건물이 들어서지 않은 최초의 다리이자 도로가 포장된 최초의 다리였다. 중후한 아치와 교각은 주변의 건축물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시테섬 끝에 자리한 다리의 중앙 부분에는 앙리 4세의 동상이 서 있다. 다리 위의 발코니에서 바라다보이는 주변의 모습은 파리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낭만적인 풍경 중 하나다.
2. 다리의 건설 배경
파리는 도시를 동서로 가르는 센강의 시테섬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시테섬을 지나는 도로가 도시를 남북으로 가르는 형세다. 따라서 시테섬은 지리적으로, 행정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파리의 중심이 된다. 16세기의 시테섬에는 네 개의 주요 다리가 있었다. 퐁노트르담(Pont Notre-Dame), 퐁오상주(Pont au Change), 퐁생미셸(Pont Saint-Michel) 그리고 프티퐁(Petit Pont, ‘작은 다리’)이다.
퐁네프가 건설되기 전 파리의 모습이 담긴 지도를 보면 시테섬에 다섯 개의 다리가 놓여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중 상류 쪽의 노트르담 다리와 프티퐁은 로마시대부터 센강을 건너다니던 곳에 세워진 석조 아치 다리다. 그리고 나머지 세 개는 목교다. 그중에서도 우안 아래쪽에 있는 뫼니에 다리(Pont aux Meuniers)는 물레방아를 위한 다리여서 늘 시민에게 개방됐던 것은 아니다. 도시가 발전하고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이들 다리만으로 통행량을 감당하는 것은 무리였다.
1550년경의 파리 전경 지도
1550년경의 파리. 센강 가운데의 시테섬을 중심으로 원형의 성이 둘러싸고 있다.
1550년 시의 관리들이 앙리 2세에게 루브르궁 근처에 다리의 건설이 필요하다고 요청했다. 늘어나는 통행량을 감당하기에는 시테섬의 오래된 다리들이 낡고 위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시가 재정을 부담하기에는 너무 대규모의 사업이어서 실현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고 도시가 커질수록 다리 건설의 필요성이 높아지자 드디어 1577년 아버지의 뒤를 이은 앙리 3세가 다리 건설을 국가 재정 사업으로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3. 다리의 역사
1) 다리의 건설
1578년 5월 31일, 앙리 3세는 화려한 열병식을 갖고 센강으로 나아갔다. 선왕후 카트린 드메디시스(Catherine de Médicis)와 왕비 루이즈 드로렌보드몽(Louise de Lorraine-Vaudémont) 등을 비롯해 많은 프랑스의 귀족들과 파리의 관리들이 참관하는 가운데 앙리 3세는 경건하게 다리의 첫 돌을 손수 놓았다. 당시 다리의 공식 이름은 ‘루브르 다리’였다.
1578년, 다리 건설의 권한을 위임받은 교량건립위원회는 먼저 짧은 좌안 구간의 기초 공사 입찰을 진행했다. 가장 적은 금액을 제시하는 자에게 공사를 맡기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가장 적은 금액을 제시한 시공자들의 자격이 문제가 되면서 입찰 공고를 두 차례 더 실시한 뒤에야 시공자를 선택할 수 있었다. 기초 건설을 맡은 6명의 시공자 중 기욤 마르샹(Guillaume Marchand)과 프랑수아 프티(François Petit)만이 교량이 완공될 때까지 시공자로 남았다. 1578년 좌안 구간의 네 개의 교각 기초와 하나의 교대(橋臺)가 완성됐다. 교각은 수중 2m 아래의 강바닥에 설치한 목재 플랫폼 위에 석재 기초를 세운 것이었다.
이후 9년에 걸쳐 우안 구간의 교각 기초가 건설됐고 좌안 구간의 아치도 완성됐다. 그러나 종교전쟁으로 사회 분위기가 어수선해져 1588년 다리 공사가 중단된 가운데. 1589년에 앙리 3세가 암살되고 그의 아들인 앙리 4세가 왕위에 올랐다. 마침내 종교전쟁이 끝난 뒤인 1599년이 되어서야 다리 공사가 재개됐다. 이때 좌안의 짧은 구간의 다리가 완성됐고, 세굴로 인해 피해를 입은 우안 구간 교각의 보수 공사도 이 무렵 이루어졌다.
2) 다리의 완공
1601년, 앙리 4세는 시공자들에게 3년 내에 다리 공사를 마칠 것을 주문했다. 1603년 6월, 그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다리를 건너는 모험을 강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2년 후, 그는 말을 타고 다리를 건넌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이때도 물론 다리가 개통되기 전이었으니 앙리 4세가 얼마나 간절히 다리의 완성을 바라고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일화다. 그러나 그의 간절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2년이 지연된 1607년이 되어서야 다리가 개통됐다. 다리 공사가 시작되고 무려 29년이 지난 뒤였다.
1615년 메리앙의 파리 조감도(부분)
다리가 개통되고 8년이 지난 1615년의 파리 조감도. 시테섬의 끝을 걸치고 있는 ‘새 다리’가 보인다. 특이한 점은 좌안 쪽 다리의 아치를 다섯 개가 아니고 네 개만 그려 넣은 것이다.
3) 다리의 보수
퐁네프는 르네상스 시대에 건설한 다른 다리들과 마찬가지로 약한 기초 위에 세워졌다. 18세기 말이 되자 아치들, 특히 우안 구간의 아치들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너무 급하게 건설됐던 것이다. 그래서 이 다리는 끊임없이 보수를 해야만 했다. 1848~1855년 동안 대규모 보수 · 보강 공사가 시행되는데 이때 우안 구간의 아치 일곱 개를 새로이 건설했다. 그리고 원형이던 아치를 조금 편평한 타원형의 아치로 교체하고, 도로의 높이를 낮추고, 교각과 스판드렐의 표면도 보수했다. 그러나 보수 · 보강을 하면서도 원래의 다리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1885년에는 좌안 구간의 두 번째 교각이 부서지면서 양쪽의 두 아치가 파괴되기도 했다. 이때 두 아치를 교체하면서 다른 교각 기초까지 보강했다. 현대에 들어서도 보수 작업은 계속되었는데 1994년에 대대적인 보수를 시작해 2007년에 작업을 끝냈다. 다리가 건설된 지 꼭 400주년이 되는 해다.
4. 다리의 기술 및 공법
1) 다리의 설계 및 디자인
앙리 3세는 다리 건설을 추진하기 위해 교량건립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위원회는 기술자들과 장인들의 도움을 받아 석조 아치교로 건설하되 좌안에 네 개, 우안에 여덟 개의 아치를 두기로 결정했다. 다리 양편에 개선문과 닮은 아치를 세우고, 양안 구간의 중앙에 뾰족한 피라미드 형태의 조형물을 설치하며, 시테섬의 끝에 걸치는 다리의 중앙에 거대한 2층 높이의 건물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리는 이 설계안대로 건설되지 않았다. 앙리 3세가 승인할 당시의 다리 조감도를 보면 실제 완공된 다리보다 훨씬 더 장식적인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건설된 다리의 설계는 ‘왕실 기술자’였던 앙드루에 뒤세르소(Androuet du Cerceau)가 맡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1577년경 다리의 설계안
1577년 앙리 3세가 승인한 다리 설계안 조감도. 다리 위에 건물이 들어서지 않은 파리 최초의 다리다. 1607년이 되어서야 완공된 다리는 원래의 설계보다 훨씬 덜 장식적이다. 파리 카르나발레 박물관 소장
2) 다리의 건설 공법 및 특징
실제로 건설된 다리의 설계는 좌안 구간의 아치 시공자가 결정되기 전인 1579년에 이루어졌으며 다리 위에 건물을 지을 수 있도록 다리의 폭을 넓히는 설계 변경을 하게 된다. 그리고 아치도 좌안 다섯 개, 우안 일곱 개로 변경되었다. 특이한 점은 이때 이미 좌안 구간의 교각 기초가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사가 끝난 좁은 교각 기초 위에 아치를 최대한 넓게 하기 위해 아치의 아랫부분이 교각의 돌출 부분을 향해 살짝 벌어진 형태, 즉 ‘코른-뒤-바슈(Cornes-du-Vache)’ 기술을 도입했다. 우안의 긴 구간은 설계 변경 이후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이 기술이 사용되지 않았다.
좌안 아치의 모습
드다르텡(de Dartein)의 책에 실려 있는 좌안 아치의 모습. 아치의 코른-뒤-바슈를 볼 수 있다.
당시 건설된 대부분의 다리들처럼 퐁네프도 작은 로마식 반원형 아치를 반복하는 석조 아치교다. 아치의 경간은 일정치 않은데 가장 작은 것이 9m이고 큰 것이 16.4m다. 그러나 이 다리는 당초의 설계 변경 의도와 달리 다리 위에 건물을 세우지 않은 파리 최초의 교량이 되었다. 당시 루브르 궁전을 대대적으로 증축한 앙리 4세가 궁전을 가리지 않도록 다리 위에 건물을 짓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퐁네프가 오늘날까지 살아남게 된 것은 아마도 다리 위에 건물이 들어서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3) 다리 관련 시설 및 조형물
다리의 장식
르네상스 시절에 건설된 다른 아치 다리처럼 퐁네프도 여러 가지 장식적인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퐁네프를 동시대의 다른 석조 아치와 구별 짓는 특별한 점은 다리의 외벽을 장식하고 있는, ‘마스카롱(Mascarons)’이라고 불리는 조각품들이다. 다리의 난간 아래에는 무려 381개의, 사람 얼굴과 닮은 조각들이 붙어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이 수많은 얼굴의 표정이 하나도 같지 않다는 점이다. 대부분 기괴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간혹 익살스러운 표정들도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들의 모습은 앙리 4세의 다리 개통 축하연에 참석한 왕의 친구들의 모습이라고도 하고, 파리의 유명한 소매치기나 사기꾼들의 모습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인간의 모습이라기보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숲과 언덕의 정령인 사티로스나 실레누스 등의 모습을 하고 있다.
현재 다리에 붙어 있는 얼굴 조각들은 대부분 19세기의 대대적인 보수 공사 때 복사본으로 교체된 것이다. 파리의 카르나발레(Carnavalet) 박물관은 16세기에 제작된 여섯 개의 얼굴 조각을 떼어내 보존하고 있다. 1993년의 보수 시에도 추가로 세 개의 조각을 떼어내 미술관으로 옮겨놓았다. 에쿠앙(Écouen)에 위치한 국립 르네상스 미술관(Musée National de la Renaissance)에도 열 개의 얼굴 조각이 보존되어 있다.
퐁네프의 코니슈(Corniche) 장식
다리의 코니슈 아래에 있는 얼굴 부조
퐁네프의 마스카롱
다리 난간 아래의 얼굴 조각 마스카롱들. 때론 무섭고 때론 익살스러운 표정의 마스카롱들은 단 하나도 같은 얼굴이 없다.
앙리 4세의 동상
시테섬을 지나는 다리의 중앙 부분의 조그만 광장에는 말을 탄 앙리 4세의 동상이 서 있다. 이 동상은 앙리 4세의 미망인이자 어린 왕을 대신해 왕 대행 역할을 수행한 마리 드메디시스(Marie de Médicis)가 1614년에 조각가 지암볼로냐(Giambologna, 1529~1608)에게 의뢰한 것이다. 지암볼로냐가 죽자 그의 조수였던 피에트로 타카(Pietro Tacca)가 완성했다. 실제로 동상이 설치된 것은 1618년의 일이다. 동상은 1792년 프랑스 혁명 시 파괴되었다가 1818년 부르봉 왕정복고 이후 복구됐다.
모머스의 <퐁네프의 풍경>
1660년대 초반, 캔버스에 유채, 73×98.5cm,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 민족학 미술관 소장
사마리텐 양수장
우안 쪽 두 번째 아치 하류 쪽에 보이는 건물은 1609년에 건설된 파리 최초의 기계식 양수시설이다. 이 양수장 전면에는 성서에 나오는 ‘야곱의 샘’에서 예수에게 물을 길어 준 사마리 탄 여인의 일화가 금박을 입힌 부조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래서 양수장 이름이 그렇게 불리게 된 것이다. 이 양수기는 플레미시 출신의 기술자 린틀레어(Jean Lintlaër) 가 설계했다. 목재 말뚝 사이에 두 개의 물레방아를 설치하고 그 위로 건물을 세운 것이다. 이 양수 시설은 당시 루브르와 튀일리궁에 물을 공급했다.
이 양수기는 1712~1719년 사이에 교체되었다가 1771년에 또 한 차례 개선이 이루어졌다. 1791년에는 루이 16세가 양수 시설을 파리시에 기부했으나, 1813년에 결국 헐리게 되었다. 이 양수장이 있던 자리에서 조그만 판매대를 시작했던 19세기의 상인 코냑(Ernest Cognacq)의 상점이 점점 커져 1869년에 ‘사마리텐 백화점’이 되었다. 한 세기 반가량 다리를 내려다 보며 성업을 이루던 이 백화점은 2001년 명품 기업인 LVMH에게 인수된 뒤 2005년에 문을 닫았다.
1742년의 사마리텐 펌프장
퐁네프에 건설된 파리 최초의 양수 시설. 건물 전면에 성서에 나오는 사마리탄 여인의 일화가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프랑스 국립 도서관 소장
5. 다리의 역할, 상징 및 의미
“다리가 완성되자마자 퐁네프는 [센강] 양안 사이의 주 통행로가 되었다. 좌안과 우안 양쪽에서 파리의 군중이 끊임없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다리에 세워진 원형의 발코니에 서서 다양한 파리 군중이 만들어내는 장관을 구경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얌전하고 질서 있는 군중이 아니었다.”
개통되자마자 이 다리는 파리의 중심이 되었다. 지리적으로 파리의 중심이던 이곳이 파리에서 일어나는 모든 활동의 중심이 된 것이다.
“이 세 가지를 만나지 않고는 퐁네프를 건널 수 없다. 수도승, 여자, 그리고 흰 말이다.”
당시에 회자되던 프랑스 속담이라고 한다. 이 다리에는 온갖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특히 다리 위에는 광대, 마술사, 잡상인, 협잡꾼들이 득실거려 파리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의 정신을 홀딱 빼놓았다.
당시의 인기 시인이었던 베르토(Berthaud)에 의하면 퐁네프는 온갖 ‘더러운 일의 장인들’이 모이는 ‘인생 극장’이었다. 당시 경찰은 다리를 감시하다가 어떤 사람이 3일간 다리에서 보이지 않으면 그 사람은 파리를 떠난 것으로 판단했다고 할 정도였다. 18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그 인기가 시들해졌다.
오늘의 퐁네프
현재까지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퐁네프. 다리 난간 아래에 얼굴 부조들이 보인다.
6. 문화 예술 속의 다리
1) 영화 속의 다리
퐁네프는 파리의 정취와 낭만을 듬뿍 담고 있는 ‘연인의 다리’다. 그래서 프랑스의 천재 감독 카락스(Leos Carax)의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거리에서 불을 뿜는 묘기로 생계를 꾸려가는 알코올 중독 부랑자 알렉스(드니 라방). 남자 친구와 이별한 데다 시력을 잃어 화가의 꿈을 접어야 하는 가출 소녀 미셸(쥘리에트 비노슈). 우연히 만난 이 둘이 보수 작업을 위해 폐쇄된 퐁네프에서 노숙하며 위험한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이야기다. 실제 다리에서 촬영한 부분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프랑스 남부에 건설한 세트에서 촬영했다. 이 영화는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파산까지 겪었으나 결국 1991년에 개봉하게 되고 카락스의 영화로서는 당시까지 흥행에 가장 성공한 작품이 됐다.
2002년, 더그 라이만(Doug Liman)이 감독하고 맷 데이먼(Matt Damon)이 주연한 액션 영화 <본 아이덴티티>에도 퐁네프가 잠시 등장했다. 주인공 제이슨 본이 트레드스톤의 팀장을 다리 위로 불러내고 사마리텐 백화점 건물에서 내려다보는 장면이다.
2) 천에 싸인 퐁네프
1985년, 크리스토(Christo)와 잔느 클로드(Jeanne-Claude)라는 대지미술가 부부는 퐁네프를 천으로 꽁꽁 싸버렸다. ‘환경미술가’라고도 불리는 그들은 계곡이나 해변에 천으로 커튼을 쳐놓기도 하고 숲이나 건물을 천으로 둘러 싸매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들이 만드는 작품은 일단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큰 것이 특징이다. 시각적으로 대단히 인상적이긴 하지만 무모하리만큼 큰 스케일 때문에 종종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작품에는 작품을 보고 즉각적으로 느끼게 되는 시각적이거나 심미적인 충격 이외에 더 이상 심오한 의미가 숨겨져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들은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익숙한 풍경을 다르게 보는 방법을 제공하려는 것이 그런 행위를 하는 의도라고 한다.
그들이 퐁네프를 ‘포장’한 작품은 나름 숭고한 아름다움이 있어 보는 이를 경악하게 만드는 동시에 심미적인 즐거움을 선사했다. 이 다리가 천에 싸여 있던 2주일간 무려 300만 명이 다리를 구경했다고 전해진다. 미술 비평가 부르동(Bourdon)은 이들 부부의 포장 예술을 “감추기를 통한 드러냄”이라고 평했다.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이면서 ‘새 다리’이기도 한 퐁네프는 이렇게 천으로 꽁꽁 싸여 ‘재발견’되면서 또 하나의 전설을 만들어냈다.
3) 회화 속의 퐁네프
파리의 중심에 자리 잡은 아름답고 낭만적인 퐁네프는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따라서 퐁네프를 담아낸 많은 회화 작품들이 있다. 모네를 비롯해 르누아르,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 등 인상파 화가들도 즐겨 이 다리를 화폭에 담았다.
‘인상파의 대부’ 피사로는 죽기 직전까지 퐁네프를 그렸다. 다른 인상파 화가들처럼 그에게도 근대화되어가는 도시의 풍경은 좋은 소재가 되었다. 1900년경 피사로는 시테섬에 방을 얻고 창문을 통해 보이는 분주한 도시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당시 파리는 드레퓌스 간첩 사건으로 유대인에 대한 반감이 높을 때였다. 그래서 유대인이었던 피사로는 바깥출입을 삼가고 대신 건물 창문을 통해 다리를 내려다보며 그림을 그렸다. 밝고 푸근한 피사로의 작품에서 오랜 실험과 세월 끝에 높은 경지에 이른 장인의 예술성을 느낄 수 있다.
피사로의 <퐁네프>
1902년, 캔버스에 유채, 55×46.5cm, 헝가리 부다페스트 미술관 소장
르누아르 <퐁네프, 파리>
1872년, 캔버스에 유채, 75.3×93.7cm, 미국 워싱턴 D.C. 국립 미술관 소장
퐁네프 위치
[네이버 지식백과] 퐁네프 (세계 다리명 백과, 이종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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